종교개혁의 사상가 존 칼빈
종교개혁의 사상가 존 칼빈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09년 프랑스 노용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55년이라고 하는 비교적 짧은 생을 살았지만 철두철미하게 성경과 하나님에 빠져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가 젊은 날에 집필한 [기독교 강요]는 로마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들을 하나 지적하면서 성경적 교리에 충실했던 기독교의 불후의 역작이다. 칼빈은 이 책을 집필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일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풍성하게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진정한 교리 공부가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르게 세우기가 힘들다. 그 다음이 이 책을 읽을 대상은 앞으로 목사가 되어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해야 할 신학생들과 또 목회 현장에서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주의 종들을 위함이었다. 주의 종이 성경에 충실하지 않으면 성경은 제쳐두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성경보다 교회를 우선시하고 교회와 교황의 발언과 결정에 우선을 두는 로마가톨릭의 성직자와 같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를 칼빈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서둘러 출판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다른데 있었다.
국왕 프랑소와를 등에 없고 개신교회를 탄압하는 로마가톨릭교회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소와 왕이 로마가톨릭교회가 민중들에게 잘못 전파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변호하기 원했다. 당시 뉘샤텔 교회의 목사였던 앙뜨완느 마르꾸르가 1534년 10월 17일 밤, 바젤 시(市) 곳곳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남용과 교황주의의 오류와 성만찬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벽보를 붙였다. 로마가톨릭교회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이 벽보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분개하게 하였고, 친(親)로마가톨릭주의자였던 프랑소와 1세를 격분하게 했다. 프랑소와 1세는 벽보가 붙었던 곳곳에 로마가톨릭교회에 행렬 성가와 기도를 명했고, 개신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개신교회는 여러 명의 개혁자들이 체포되었고 화형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때 칼빈은 프랑소와 왕을 설득하고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강요의 출판을 서두르게 되었다. 칼빈은 시편 주석에서 “벽보 사건으로 충성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격노의 불이 맹렬히 타올라 우리의 주장은 가증한 것이 되었다”고 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당시 로마가톨리교회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신앙을 전파하려는 개신교회에 대해 광적인 교회라고 오도하고 핍박하였다. 이것이 칼빈으로 하여금 이 책의 출판을 서두르게 했던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출판함으로 박해받는 개혁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였다. 그들을 위해 변호한다는 것은 생명을 내 건 작업이었다. 정치와 결탁한 가톨릭교회의 개신교회를 향한 박해와 핍박은 칼빈을 향한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칼빈은 소심하고 조용한 내향적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 잡혀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칼빈은 강력한 핍박 앞에 오히려 대항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가 박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스러운 신뢰감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했다. 그것을 해석하고 해석한 것을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증거했다. 그는 그가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린 친 사람이다. 그야말로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말씀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인 성경 중심의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으로는 불행했다. 병약했던 아내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태어난 아이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사상,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을 놓치지 않았던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행동가라고 한다면 칼빈의 종교개혁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kkho1105/1451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09년 프랑스 노용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55년이라고 하는 비교적 짧은 생을 살았지만 철두철미하게 성경과 하나님에 빠져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가 젊은 날에 집필한 [기독교 강요]는 로마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들을 하나 지적하면서 성경적 교리에 충실했던 기독교의 불후의 역작이다. 칼빈은 이 책을 집필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일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풍성하게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진정한 교리 공부가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르게 세우기가 힘들다. 그 다음이 이 책을 읽을 대상은 앞으로 목사가 되어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해야 할 신학생들과 또 목회 현장에서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주의 종들을 위함이었다. 주의 종이 성경에 충실하지 않으면 성경은 제쳐두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성경보다 교회를 우선시하고 교회와 교황의 발언과 결정에 우선을 두는 로마가톨릭의 성직자와 같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를 칼빈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서둘러 출판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다른데 있었다.
국왕 프랑소와를 등에 없고 개신교회를 탄압하는 로마가톨릭교회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소와 왕이 로마가톨릭교회가 민중들에게 잘못 전파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변호하기 원했다. 당시 뉘샤텔 교회의 목사였던 앙뜨완느 마르꾸르가 1534년 10월 17일 밤, 바젤 시(市) 곳곳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남용과 교황주의의 오류와 성만찬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벽보를 붙였다. 로마가톨릭교회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이 벽보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분개하게 하였고, 친(親)로마가톨릭주의자였던 프랑소와 1세를 격분하게 했다. 프랑소와 1세는 벽보가 붙었던 곳곳에 로마가톨릭교회에 행렬 성가와 기도를 명했고, 개신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개신교회는 여러 명의 개혁자들이 체포되었고 화형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때 칼빈은 프랑소와 왕을 설득하고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강요의 출판을 서두르게 되었다. 칼빈은 시편 주석에서 “벽보 사건으로 충성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격노의 불이 맹렬히 타올라 우리의 주장은 가증한 것이 되었다”고 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당시 로마가톨리교회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신앙을 전파하려는 개신교회에 대해 광적인 교회라고 오도하고 핍박하였다. 이것이 칼빈으로 하여금 이 책의 출판을 서두르게 했던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출판함으로 박해받는 개혁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였다. 그들을 위해 변호한다는 것은 생명을 내 건 작업이었다. 정치와 결탁한 가톨릭교회의 개신교회를 향한 박해와 핍박은 칼빈을 향한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칼빈은 소심하고 조용한 내향적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 잡혀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칼빈은 강력한 핍박 앞에 오히려 대항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가 박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스러운 신뢰감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했다. 그것을 해석하고 해석한 것을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증거했다. 그는 그가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린 친 사람이다. 그야말로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말씀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인 성경 중심의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으로는 불행했다. 병약했던 아내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태어난 아이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사상,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을 놓치지 않았던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행동가라고 한다면 칼빈의 종교개혁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kkho1105/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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