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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존 칼빈(John Calvin)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

존 칼빈(John Calvin)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

선배 개혁자 시리즈 - 존 칼빈(John Calvin) -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
 

올바른 교회 개혁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개혁의 방향성과 내용입니다. 교회 개혁은 세상의 개혁운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개혁은 직책에 있는 사람을 바꾸거나, 매장시키거나, 기득권을 대체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 개혁은 다릅니다. 교회 개혁은 사람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변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다시 세우는 운동입니다.
한국기독교 개혁운동<한기운> 은 역사적인, 신학적인 기초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기초 중에 우리는 존 칼빈(John Calvin)의 종교개혁 사상과 실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존 칼빈은 중세의 어두움에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든 루터와 함께 종교 개혁을 이끈 분입니다. 또한 오늘날 상당수의 개신교회들이 존 칼빈의 개혁주의에 신학적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칼빈은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 사회 개혁가, 인문주의자, 학자, 저술가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지금까지 교회 개혁을 바라는 전 세계의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존 칼빈의 개혁 사상과 삶을 다루는 씨리즈의 첫 번째로, 존 칼빈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합니다. 세계의 어떤 개혁자들이 그러하듯이, 존 칼빈 또한 지지자나 반대자 모두로부터 일정 정도의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한 인물에 대한 안개를 걷어내면서 한 시대를 당당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살았던 개혁자 선배의 모습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칼빈: 제네바의 독재자?

오늘날 칼빈에게 덧 씌워진 가장 큰 비판 중의 하나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실행한 독재자 아닌가 하는 비판입니다. 맥그라쓰는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칼빈의 신화'(Calvin's mythology)라고 규정하며, 비판의 대부분이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표명합니다. 이러한 비판의 원인은 대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16세기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오늘날의 관점으로 비판한 경우입니다. 둘째, 오랜 세월 동안 칼빈의 대적자들이 행한 근거 없는 비방을 아무런 조사 연구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비방은 특히 이단들이 많이 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문제가 된 ‘이단과 정통'에도 칼빈에 대한 이런 비방을 행하고 있습니다. 셋째, 현재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의도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20세기의 유럽에서 좌익들이 칼빈에 대한 의도적 왜곡을 행했습니다.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칼빈은 제네바를 자신의 마음대로 지배할 수도 없는 위치였습니다. 따라서 독재자는 고사하고 제네바의 지배자조차 될 수 없었습니다. 1538년 파렐과 칼빈 그리고 쿠로는 3일 내에 제네바를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시 의회로부터 받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몇 년 후 망명에서 돌아 왔을 때, 과연 제네바시 전체에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았던 것일까요? 칼빈이 돌아온 후, 그는 1541년 교회를 위한 최초의 개혁인 제네바 교회법령을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칼빈은 시 행정부의 승인을 얻으려 전전긍긍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1555년 5월 16일까지 칼빈을 따르는 세력들은 의회 내의 소수파, 오늘로 말하면 야당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칼빈의 개혁이 도시 전체의 지지를 얻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1555년 5월 16일 칼빈의 반대파인 의회 다수파는 소수파를 억제하려는 의도에서 무력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이를 봉쇄, 칼빈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이 의회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칼빈은 도시의 독재자가 된 것일까요? 1556년 칼빈은 “나는 이 도시의 이방인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칼빈은 평생 조국 프랑스를 떠난 망명객이었습니다. 칼빈파가 집권하면서 오히려 칼빈은 제네바 교회와 프랑스 및 국제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신학 저서의 집필에 매진했습니다. 독재는커녕 당시 외부 도시에서 제네바를 평한 여러 기록들이 나타납니다. 제네바는 “압제당하는 자들의 고향”, “솔직하고 자유로운 도시”로 불려졌습니다. 중세의 암흑이 지배하던 유럽에서 제네바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칼빈: 엄격한 권위주의자?
칼빈이 제네바의 독재자가 아니었다고 인정하는 그나마 온건한 사람들은 또 다른 공격을 준비합니다. 제네바는 엄격한 권징과 시민 생활의 여러 측면들을 제재하지 않았는가? 칼빈 시대의 제네바에는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의 엄격함이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칼빈이 이러한 엄격함을 주도한 것 아닌가?하는 포화를 퍼붓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시대착오적인 이해에서 기인한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 제네바의 정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의 도착 이전인 1503년부터 그리고 이후에도, 제네바는 전쟁 중인 도시였습니다. 제네바는 사보이 대공인 샤를 3세 및 카톨릭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독립투쟁중인 준전시상태였습니다. 제네바市 자체는 무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시민들은 자신의 방어를 전적으로 이웃 도시인 베른의 군대에 의존하는 상태였습니다. 칼빈 사후 1589년 사보이 공국은 전면전을 개시합니다. 제네바 시민들은 1603년 시 성곽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막아냅니다. 마침내 제네바는 완전한 독립 도시국가가 됩니다. 언제나 외국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도시, 항복하지 않으면,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전 도시를 말살하겠다는 현실적인 협박이 도사리고 있는 도시! 더욱이 방어를 또 다른 동맹 도시에게 의존해야 하는 도시의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손에 남겨진 단 하나의 무기는 무엇일까요? 스스로의 정신 무장!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엄격함 또한 당시로서는 그다지 과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세의 이미지를 그려 봅시다. 마녀 사냥, 무시무시한 카톨릭 종교 재판, 여자가 머리가 짧다고, 바지를 입었다고 화형 당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제네바는 신성모독, 카드나 주사위를 통한 도박행위, 도둑질, 간통 금지, 빵과 포도주를 부당한 가격에 판매하는 일 금지, 무허가 술집 개설 금지 등을 시행했습니다. 21세기라면 이러한 금지들이 가혹하다고 비판받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식으로 더욱이 준전시 상태의 시민들에게 이러한 금지는 필수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이러한 엄격함(?)의 비난을 칼빈이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대다수의 법령은 칼빈이 제네바에 오기 휠씬 전부터 시의회가 도덕률로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칼빈이 오면서 이 법령들이 시행된 것이 아닙니다.
 
 
칼빈: 세베르투스 화형 담당자?
칼빈의 가혹함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레퍼토리는 그 유명한 세베르투스 사건입니다. 세베르투스는 1553년 10월 27일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가공할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제네바 의회에 의해  화형 당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칼빈의 대적들은 잔혹한 화형의 모든 책임을 칼빈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그러나 칼빈에게 전적인 책임을 지우는 것은 역사적인 몰이해일 뿐 아니라 부당한 일입니다.
우선, 세베르투스는 제네바에 당도하기 이전, 이미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에서 신성모독으로 수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성모독에 대한 일반적인 판결은 사형이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바대로, 1553년 의회의 다수는 칼빈의 반대파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베르투스가 제네바행을 타진했을 때 칼빈은 사적으로 제네바에 올 경우 위험에 처하게 될 우려가 있으며 칼빈은 그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세베르투스는 칼빈의 우려를 무시하고 제네바에 도착 그 다음날 시 의회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칼빈은 청문회가 열려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칼빈의 반대파인 리베르틴파가 차지하고 있던 의회는 즉시로 법적 절차를 진행시켰습니다. 제네바 의회는 주변의 여러 도시에 이 사건을 문의했습니다. 모든 도시에서 만장일치로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 최근의 문서를 통해 칼빈이 화형을 통한 집행에 반대했음이 밝혀졌습니다. 
당시는 전쟁의 시기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프랑스에서만도 수십만명의 개신교도들이 카톨릭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적대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신구교 할 것 없이 유럽의 도시는 피로 얼룩진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카톨릭 도시에서는 평균 1,000여 건 이상의 종교적인 처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처형된 이는 세베르투스가 유일합니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한데도 일반적인 정황이 무시되고, 단지 칼빈이 그 도시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제네바가 오욕을 겪어야 하는지요? 
 
칼빈: 창백한 조직신학자?

칼빈이 창백한 얼굴을 가진 회색의 조직신학자라는 비난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습니다. 루터는 탁상담화 등 자신의 신상, 생활 등에 대한 많은 기록이 남겨졌기 때문에 인간적인 개혁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삼갔습니다. 따라서 칼빈의 개인사에 대한 기록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개인에 대한 기록이 미미한 상태에서 기독교 강요만을 중심으로 칼빈을 생각할 때 이런 오해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의 편지, 소논문, 주석, 설교 등의 총체적인 모습 속에서 재구성 해볼 때, 칼빈은 훌륭한 인격을 가진 목회자이자, 신학자이며, 아울러 남편, 스승, 친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 세상의 풀 한포기도 그 색채 하나하나가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감탄을 한 인물입니다.  

또한 칼빈은 인문주의의 대가였습니다. 그의 개혁주의는 단지 신학적인 인식론의 대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의 유럽 학문 세계 전체의 인식론적 고민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르네상스는 새로운 학문을 태동시켰으며, 지식에 대한 관심을 확대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16세기에는 고대의 학자들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종교 개혁은 그 자체로 르네상스가 신학적 영역에 제기한 권위, 지식의 근원, 사고 방법론 등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지성인들의 고민은 단순히 르네상스적이거나 종교개혁적인 것이 아니라, 두 분야 모두가 걸친 인식상의 고민이었습니다. 칼빈의 인식론은 바로 이러한 고민들에 새로운 인식방법을 열어주었습니다. 단지 종교개혁이 신학상의 문제였다면, 어떻게 종교개혁의 유럽의 지도를 바꾸며, 세계를 중세에서 근대로 나가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칼빈은 우리의 그에 대해 아는 지식 이상으로 위대한 인물이며, 우리가 모델로 삼을만한 선배입니다.

1552년 4월, 로잔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다섯 명의 프랑스 청년들이 목회에 헌신, 고국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리옹에서 체포,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다섯 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제네바에 전해지자마자 칼빈은 동정과 격려의 편지를 보냅니다. 학생 중의 한 사람인 베르나 세귄은 이전에 칼빈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의 한 질문이 사후, 우리 몸의 영광스러운 변화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칼빈은 이 편지에서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당시 못 다한 질문의 대답을 합니다. 
 
그는 다시 육체의 형태와 본질을 지닌 채 오실 것이며, 분명 그 육체에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 영혼은 육체의 굴레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자유함 속에서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CO 14, 333)
 
많은 학자들이 이 편지에 대해, “육체의 부활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라고 쉽게 기록해 버립니다. 그러나 사형에 임박한 제자들에게 글을 쓰는, 노 스승을 떠 올려 봅시다. 이제 곧 죽을 제자들, 제자의 질문을 생각하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영광으로 변화되는 새로운 출발임을 알리는 스승. 흔들리는 촛불 빛에 의지하여 편지를 쓰는 이 사람이 과연 울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아마 편지는 눈물방울로 점점이 얼룩지지 않았을까요? 편지를 받아 본 제자들, 스승의 무정함에 슬퍼했을까요? 아니면, 스승의 깊은 동정과 사랑에, 끈질긴 회유와 죽음의 협박에도 순교의 용기를 얻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칼빈의 삶과 사상을 통하여 글로 표현된 이면의 정신과 사랑과 희망을 배우고 싶습니다.
 

- 한성진 목사 (합신대)
http://blog.daum.net/kkho1105/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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