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4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4
2008.04.26 08:58 | ...신학산책 | 로뎀나무 http://kr.blog.yahoo.com/lodemtrees/46083
25. 삼위는 공통적으로 신성을 소유한다. 그러나 저들은 이 문제에 있어 속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 개체의 각자는 본질의 분리된 일부분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 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라는 점에서는 발생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저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이 견해가 삼위일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들은 저들의 머리로 생각해 낸 허구를 거짓되고 무고하게 우리들에게 돌림으로써 우리가 마치 한 본질에서 삼위가 유출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히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위가 본질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아마 저들의 추론에도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일신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위들의 삼위가 아니라 諸神의 삼위일체가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했는가 안했는가를 묻는 그들의 무익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 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저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곳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질의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이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하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그가 성부로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옛날의 전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위에만 적용시켰다. 그것은 본질을 그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 아니라 가장 큰 불 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와 성령의 본질을 변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돈 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이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한다면, 성부는 어떤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이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격하시키는 것이 불과한 결론을 낳게 될 것이다.
26. 성육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예속되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자들은 반대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고 신적인 근원이신 상부에게 한정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물른 이것은 광신자들의 허튼 소리와 같이 본질의 부여와 관련시켜서가 아니고, 순서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하신 말씀,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중보자의 인격으로 말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증간 위치를 취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감소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비었다고는 하지만(빌 2:7) 성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이 이 세상에 대하여 감추어졌을 뿐 전혀 상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는 히브리서 2장에서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 보다 못한 자 였다고 하였으나(히 2:7,9), 동시에 그리스도는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히 1: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인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하에 두셨던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하나님께로 가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참조 16:7, 20:17)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성부를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분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 빛나는 그 광채의 완전함이, 육신을 입은 자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영광에 비하여 훨씬 더 뛰어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고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니라(고잔 15:24, 28)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시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까지도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는데(요 1:1; 요일 5: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2- 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이들 새 神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저들은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도 다른 참되신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도한 移入된 신성이 어떤 신기한 허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에게서 많은 구절들을 수집했다. 이것은 저들의 수치스러운 미지를 들어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 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저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 할 경우, 옛날 종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로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누가, 사실상 성부였다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이 종식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 3권 6장을 일고 보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이 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한다. "성경에는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이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 2권 제 46장에서 밝힌대도,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외에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자와 성부를 다 같이 하나님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제 3권 제 9장).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시며 왕이시오 하나님이시며 심판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 제 3권 제 12장).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 주시며 모세의 손을 통해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분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 였다고 터부니 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 에서부터 오시며(합 3: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제 3권 제 18장, 제23장). 제 4권 제 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잇는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동권 제 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 자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28. 터툴리안을 인용한 것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저들이 터툴리안을 저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의 표현 방법이 거칠고 모호 한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에메하게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사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라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 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만 위를 적응할 때만 이라고 했다. 그는 어디선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는 바로 말씀이 되신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저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가 성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의 일괄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까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런 구별에 대하여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된다고는 한,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도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위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이외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서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9. 교회의 인정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가 삼위 일체의 교리를 인정했다.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 것이다. 순교자 져스틴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불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들을 지지한다. 져스틴과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를 할 것이다. 힐라리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예리하게 역설했다.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 아니 그와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연결이 안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저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들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 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저들의 파렴치함에는 더 참을 수가 없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더욱 명백해 진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희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의 이전 학자들이 자기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는 않았다. 이 악한 자들이 가장 적대시하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 들었던가를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생기면 그 달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에메하거나 모호한 점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異論도 없이 받아 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쳤던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 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라는 저서 제 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도 저들은 어거스틴이 그 때 자신을 망각했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을 해병하며,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온갖 쾌변으로 오늘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는데, 이제까지의 고찰로 인해 사탄의 일체의 쾌변을 물리쳤다고 생각이 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으로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찰한 내용들은 무분별한 사변들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교회의 건덕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별로 유익 되지 않는 일이나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더 있겠는가? 실로 성부의 발생이 계속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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