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믿음의 선진들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2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2
2008.04.26 08:58 | ...신학산책 | 로뎀나무
http://kr.blog.yahoo.com/lodemtrees/46083
6. 모세의 이적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없다. 모세의 이적은 어떤 사람들이 모세를 반박하고 반대하여 군중들을 동원하므로 떠들썩한 분위기와 불유쾌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어떤 가증한 사람들은 모세의 이적은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모략했다.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출 7:11]" 그러나 그들은 모세 앞에 설 수 없었다.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출 9:11]" 모세는 박수나 술객들을 아주 싫어해서 그들을 그들이 있는 곳에서 추방했다.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그런 그가 어떻게 공공연히 많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 것도 아님을 밝히므로서 일체의 비난들을 일축해 버렸다.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출 16:7]" 그리고 어떻게 마술을 가지고 날마다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신선한 음식을 백성들이 먹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 16:19-20]" 백성 중에는 날마다 모세를 괴롭히는 무리들이 있어서 모의를 하고 작당을 해서 모세를 제거 시킬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마술로 미리 알고 막을 수 있었겠는가? 마술로 그 백성을 기만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백성들을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3번씩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7. 예언은 사람의 기대와 다르게 성취되는 일이 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 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라는 예언이 있다. 이 말씀은 야곱에 의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세가 말하기 300년에 말씀된 것을 모세가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엄격한 말씀은 400년 후에도 이루워 지고, 2,400년 되는 지금도 이루워 지고 영원히 이루워지는 말씀이다. 어떤 경우에 유다의 왕권이 유다 지파가 아닌 베냐민 지파에게 이월된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삼상 11:15]" 그러나 사울은 그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아니다. 그 사람은 백성들이 억지로 하나님에게 때를 써서 세운 백성들의 왕이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즉시 이세의 집을 찾아가 유다 왕을 따로 기름 부어 세운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세운 왕이 되는 것이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이렇게 해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엄격히 이루워 진다.
8.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신다. 이와같은 예언은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더욱 확실히 증거된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은 바벨론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므로 바벨론에 대한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 살던 이사야는 그들의 나라와 민족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공공연히 예언한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 39:6-7]" 그들에게는 전혀 들을 필요 없는 사건의 예언이었는데, 그 예언이 사실로 그들에게 닫친다. 이사야는 그들의 멸망만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레스라는 사람을 통해 구원 얻을 것도 예언한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사 45:1-2]"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고레스라는 메데 왕은 이사야 사후 100년에 세상에 나타나 이사야가 말한데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여기서 고레스가 이사야의 글을 읽고 그 글에 쓰인데로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또 예레미아는 그들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 70년이 되면 고향 에 돌아 오게 될 것을 예언하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렘 25:11-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그리고 이 예언들은 모두 사실로 이루워 진다. 이런 사실 앞에서 누가 감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선지자들이 예언 한 것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9]" 선지자들은 600년에 될 일들을 이렇게 예언하고 그 후에 있을 일들도 이렇게 예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9. 율법의 전승 어떤 사악한 자들은 모세나 이사야의 글로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의 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반박한다. 심지어 모세가 실제 인물이었는가를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 만일 우리가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셨다. 어리석고 미련한 왕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 보존을 개을리 하여 한때 하나님의 말씀이 유실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왕 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들어 내셨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 22:8]" "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대하 34:15]" 이렇게 발견된 성경은 대대로 게승되어 내려 왔다. 요시아는 그 성경의 원본을 성전에 보관하고, 그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8-1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자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오늘 우리들에게 까지 허락하셨다.
10. 하나님은 말씀을 기적적으로 보존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의 마카비 일로 로마의 안티오커스가 유대의 모든 책을 다 불태우라 했는데 어떻게 성경이 남아 있겠는가 하면서, 오늘의 성경은 모조품이요 가짜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사본들은 박해가 가라않자 즉시로 사람들에게 전해 졌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개편되지 않은 성경이 경건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믿어 질 수 있겠는가?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지독한 핍박을 당했고 그들이 쓰는 히브리 말은 죽은 언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하 나님의 말씀을 보존하시고 계승 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을 통해 매시아가 곧 오시리라는 말씀의 성경책을 보존 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의 말씀을 죽도록 믿고 사는 유대인들을 통해 해 주셨다. 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필요도 없는 말씀-믿지 않으므로-을 생명을 걸고 지킨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書籍商"이라고 했다.
11.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구약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보존되고 전파되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히 서 있는지를 알게된다. 세 사람의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평범한 문체로 기록했다. 그러나 많은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그 평범한 문체에 경멸과 조소를 보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의 문체만 보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이 구원의 진리를 볼 수만 있다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아주 쉽게 기록하여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할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사람은 눅 1장을 읽은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교만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세 복음서의 저자들이 간단히 기록한 그리스도의 강화는 그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치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을 치듯 강하게 책망하신다. 그들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알고 있는 트집장이들은 모든 사람 앞에 끌어 내어 요한 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고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구경하자.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각성시키시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회개하여 옳바른 사람이 되게하시는 능력의 말씀을 접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런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저작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 속에 있는 천적인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사로잡는다. 원래 마테는 이전에 그의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 배를 몰아 고기를 잡던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었다. 그들이 무식한 사람이라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요 7:15]"했다 그들이 말한 글도 모르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 등등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는 이 변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에 의하여 그가 반대하던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성경이 공포된 후 장구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은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성경을 억압하고, 파괴하며, 인간의 기억에서 성경을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종려나무 자라뜻 점점 더 자나라서 감히 공격할 수도 말살 할 수도 없는 탁월한 위취를 차지하며 자랐다. 사실 탁월한 괴변가나, 웅변가나 사상가들 치고 성경을 공격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평생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같은 사실이 사소한 사건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무장했으나, 그런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들의 보호에만 의존되었다면 어떻게 사방으로부터 오는 그 강력한 공격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이런 일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으로 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성경은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우려 학대하고 말살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 들이고 포용하는데 일치한 것은 한 민족이나 한 국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면에서는 전혀 공통성이 없는 지구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거룩한 일치에 의해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다. 또 근본적으로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을 크게 감동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을 고려할 때 적지않는 중요성이 이에 더해진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새 사람이되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사람을 변회시키는가? 사람을 용감하게, 대담하게, 심지어 큰 정렬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일까지도 불사하게 한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위대한 사명과 열정을 가지고 순교를 했는가? 그들은 이 말씀을 지킬 때 광신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가장 경건하게, 가장이 진실하게, 가장 탁월한 믿음으로, 이 일을 했다. 이렇게 보존되여 내려 온 이 성경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이 다만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존 되여 내려 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더 확실하개 작용을 하고 있었던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을 확실히 보존하도록 사람들을 사로 잡으신 것이다. 그럼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지키고 전해야 할 것이다.
제9장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관심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 돌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오도되었다기 보다는 광란에 사로잡혔다고 해야 한다. 아주 교만해지고 오만해진 사람들이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서 성경 읽은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고, 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다. 그렇게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할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 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 도대체 어떤 영인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을 한다면, 그 확신은 참으로 조소 거리가 될 것이다. 그들도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다고 그들도 생각할 것이다.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더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다. 그는 "내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내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내 입에서와 내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여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다. 곧 성령에 의해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잇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 이끌려 다녀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후 12: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은 것이 착념하라고 권했다(딤전 4:13).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성경에 대한 찬사를 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딤후 3:16-17).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거시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관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성령으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영으로서 예수 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13).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ㅂ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처 주는 데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성경에 의해 인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우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실은 복음의 빛이 나타난 후에는 물러갔다고 생각되었던 예언자들의 교훈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을 베드로가 칭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벧후 1:19).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제쳐 두고 다른 교리를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영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마땅히 허망하고 거짓된 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갈 1:6-9). 그 이유는 "사탄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고후 11:14)하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특징에 의해 그가 식별되지 않는 한 성령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권위를 행사하실 수 있는가?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가장 분명히 우리들에게 지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찾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기 때문에, 스스로 이 가련한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은 예외이다. 더욱이 그들은, 만물이 예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마치 성령은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사에 시종일관하셔서 변함이 없다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투다. 만일 성령이 인간이나 천사, 또는 다른 어떤 무엇의 규범에 따라 판단된다고 하면 틀림없이 성령님은 그 지위에서 격하될 것이다. 즉 노예 상태로 떨어 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자신과 비교되고 자신 안에서 고려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손상을 입었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종의 검토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겋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확림하려고 하시는 검토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임재하신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그러너 사턴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산대로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자자이시다.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거ㅏ 다를 수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존속하실 것이다. 성령이 자신을 퇴화 타락시키는 것이 명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 말은 성령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들은 우리가 죽이는 문자에 의존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성경을 경시 한데 대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바울이 고후 3:16에서 거짓 사도들을 대항해 싸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을 추천하며, 주께서 "그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렘 31:33)하기로 약속하신 계약의 축복들을 사람으로부터 탈취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과는 관계가 끊어져서 다만 귀에만 울릴 뿐, 마음에는 아무런 가동도 주지 못하는 그런 문자는 죽은 글이며(고후 3:6), 따라서 주의 율법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그 문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효과적으로 세겨지며 그리스도를 제시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는"(시 19:7)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빌 2:16). 더욱이 사도는 같은 곳에서 자기의 설교를 "영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 3:8).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말은,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서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잇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 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신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이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눈 성령이 임하시면 즉시 말씀을 패기할 생각으로 일시적인 전시를 위해 말씀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보내셔서 그 권능으로 말씀을 나누워 주신 것은, 그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함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두 제자의 마음을 열어 주셨는데(눅 24:27, 45), 이는 그들이 성경을 거절하고 지혜를 믿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20)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권면할 때에도, 그는 말씀을 떠난 공허한 사색으로 그들을 이끌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언이 멸시를 당해서는 안된다고 즉시 덧붙여 말했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는, 예언이 경시될 때에 성령이 소멸된다는 것을 확실히 암시했다. 이에 대하여 거만한 광신자들은 무엇을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결솔하게 버리며 그 말씀에 걀별을 고하면서도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 나는 몽상들을 확고히 붙잡는 것만이 곧 유일하고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바로 저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이와는 훨신 다른 절제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전적으로 진리의 빛을 잃게된다고 생까하는 사라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께서 자기 영의 조명을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워 주시는 도구로 알고 잇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영은 사도들 안에 거하셨고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씀하시는 성령 이외의 어떤 다른 영이 아니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끊임없이 말씀을 듣도록 부르심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제 10 장 :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을 지정하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교리 우리는 앞서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에서 당신에 대한 계시를 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말씀을 주시어 더욱 생생하고 상세히 계시해 주셨다. 이제 우리는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겠다.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정한 목록과 같은 정도를 마련해 주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인도하는 정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원수로 행하던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맞아들일 때는 그 사람들에게 이미 구속 주로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신 것과 같이----"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 국의 아비가 될지라[창 17:4]" 그러나 이 장에서 우리는 천지의 주제이신 친히 세우신 우주를 어떻게 통치하시는 가를 연구하기로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부성적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이 엄격하신 분임을 기록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징벌을 주시는 가도 기록되어 있다.
2.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을 계시할 때 간결히, 그러나 확실히 묘사하려 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여기서 우리는 그 장엄한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이 선언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성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의 공허한 사색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에서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본 대로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똑같은 완전성이 여기 열거되고 있는바 그것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충분히 나타내고자 할 때는 그 이름을 사용한다. 그 예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2]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 145:3]"에서 볼 수 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이 총체적으로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시 145:5]" 이 시편에는 피조물이 볼 수 없는 것들이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을 정확히 볼 수 있다. 예레미아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4]"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 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1). 인애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 사역이 여기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2). 공평한 심판 : 행악자들은 날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고 영원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3). 정직 또는 의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고 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속성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방법을 터득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 거룩하심, 권세 등을 정확히 말씀하시고 있다. 시인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 하시리로다[시 25:8]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길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고 말씀했다. 실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세겨져 있는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 무결한 생활과 거짓이 없는 생활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3. 이러한 하나님의 유일성이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기 때문에 우상 숭배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리로 올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해 이교도들의 모든 우상을 배격한다. 그것은 거의 모든 시대의 다른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서도 알려 졌으며 존경받은 것은 사실이다. 많은 신들을 섬기는 이교도들도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마치 유일신으로 만족이나 하는 듯 '하나님'의 이름을 단수로 쓴다. 그리고 이를 지혜롭게 일아 차린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유일성이 사람의 마음에 세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터툴리안도 이와 같은 것을 흔히 사용되는 구절로 입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허망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들어 그 지각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다신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핑계를 댈 수 없음에도 어리석게도 다른 여러 신들을 함께 섬기는 스스로를 속이고 사단의 꾀임에 빠지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그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언젠가를 뼈아프게 경험할 것이다.
하박국은 일체의 우상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신" 유일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하신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산 자로 하여금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도 용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 11 장 :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 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1. 하나님은 가시적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떤 노력도 금하신다. (예배에 있어서의 형상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참되신 신임을 증명하시기 위해 우상과 대립하신다. 그것은 어떤 철학자나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서나 인간이 만든 신을 무로 돌린다. 인간은 그들이 신을 만들 때 언제나 물질로 신을 조형화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수한다.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게 되면 그 불 경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다"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라고 하셨다. 그리고 오래 전에 미신이 하나님을 거짓 것으로 바꾸고 있음을 경고하셨다. 페르시아 인들은 태양과 별들을 형상화하여 신으로 섬기고, 애급 사람들은 모든 동물을 신으로 섬기고 희랍인들은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전능한 신이라 했다. 이런 많은 우상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모두 나쁜 것으로 거절하셨다.
2. 하나님은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 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신 4:15]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신 4:16]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신 4:17]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신 4:18]"라고 하였고 이사야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강조해서 말씀을 하셨다."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사 40:18] 우상은 장인이 부어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사 40:19]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사 40:20]: (41:7,29, 45:9, 46:5-7) 바울은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9]"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말씀은 인간이 만든 조상과 화상은 모두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다. 세네카는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나쁘고 천한 물건들을 사용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사람의 형상을, 어떤 사람은 물건에게 짐승의 형상을, 어떤 사람은 야수와 괴물의 형상을 새겼으며, 어떤 것은 남녀의 추잡한 모습을, 어떤 것들은 몇 개의 다른 몸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만일 그런 것들이 생기라도 가져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아무도 그것을 신성시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3. 신적 임재의 직접적인 표징도 형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말씀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인간들을 어떤 목적에 의해 적절히 교훈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엄의 임재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임재를 사람에게 명백히 말해 주는 것들이 있다. 즉 "구름과 연기와 화염"(신 4:11)은 비록 이것들이 천적 영광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굴레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제어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응답 받지 못하고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라는 말씀만 받았다. 신약에서 성령님은 한번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그러나 그 비둘기 모양의 성령님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하나님이 이렇게 임재 하신 것은 성령님이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 받고 다만 성령의 권능과 능력으로 만족할 것이요 어떤 외부적인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심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종종 나타나신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서곡일 뿐이다. 구약의 제단에 속죄소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임재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룹들은 그들의 날개를 펴서 속죄 소를 덮었다. 그리고 그 속죄소는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으며, 그곳은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다 볼 수 없이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출 25:17-21). 그것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속죄소를 가리고 있는 소 형상을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자들이 있으니 한심하다.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사 6:2]"라고 해서 스랍들도 하나님을 볼 수 없이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4. 형상과 화상은 다 같이 성경에 반대된다. 우상은 물질로 만들어 진 것이요 신아 아니며, 그 형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막연히 만들어 숭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열 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 물이라[시 135:15]"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 물이라[시 115:4]" 이와 못지 않게 나쁜 것은 사람들이 이런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갈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사 44:12] 목공은 줄을 느려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게 하며[사 44:13]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사 44:14]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 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사 44:15]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사 44:16]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 도다[사 44:17]" 그리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자들에게 무서운 저주를 퍼부었다.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우상을 만드는 것 뿐 아니라 화상을 그리는 것도 금지되었다. 희랍인들은 화상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
5. 우상에 대한 성경적 판단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다 라는 말은 그레고리우스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우상을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그 자신도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졌다. 예레미아는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렘 10:8]"이라고 했고, 하박국은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합 2:18]"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상을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은 순전한 거짓임을 들어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무식한 자들이 우상을 보고 하나님을 배운다는 억지 주장이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예언자들이 그렇게 꾸준히 우상을 버리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했겠는가? 그러나 교황 주의자들은 확실한 원리로 우상이 책의 역할을 한다고 한 결정은 예언자들에 의해 전적으로 정죄 되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을 대립시키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배한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그리고 그런 형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하게 속고 있는 자들이다. 요컨대 우상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한다는 것은 거짓이요 허위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렇게까지 꾸준히 이를 정죄 하지 않았을 거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며 거짓된 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다시 예언자들이 가르친 그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6 교회의 교리도 우상에 대하여 달리 판단한다. 락탄티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형상으로 보이는것은 모두 可死的이라고 주장했다. 어거스틴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에 예배드리는 것 뿐 아니라 그 형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오래 전에 에빌라 교회 회의에서 제정된 것이 였다. 그 중 36장에서 "교회 안에 화상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예배를 받던가 찬양을 받아야 할 것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된다."라고 기술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바르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이에 찬동하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곧 "신들의 조상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제거하고 그 대신 오류를 가했다"라는 말이다. 한 이방인이 이 말을 한 것으로 끝이 났다면 그 말은 권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은 이 말, 즉 유형적인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감소시키고 오류를 다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를 충분히 부끄럽게 하고 남음이 있다. 이것은 진실과 지혜로 말한 것임을 사실 자체가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말을 바르로에게서 인용했지만 자신의 사상에 따라 진술한 것이다. 그리고 첫째로, 인간이 저지른 하나님께 대한 최초의 오류는 형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요소(형상)가 가해지자 오류가 증가한 것이라고 했다. 둘째로, 형사의 어리석음과 그 둔하고 불합리한 고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쉽게 멸시를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감소되고 심지어는 파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둘째 사실에 대하여서,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지심으로 바란다. 그러므로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이 아닌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 주의자들의 형상물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 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하나님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속임수를 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증거에 의해서 명백히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양보해서 그런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의 우상을 옹호하는데 아무런 유익이 안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와 같은 괴물들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만든 성자의 화상, 혹은 彫像은 가장 음란한 실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아무라도 그들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체형을 받아야 한다. 실로 그들의 교회에서 동정녀의 조상(彫像)이라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형상물보다 오히려 창녀의 복장이 더 정숙하고 순수하게 보인다. 그들은 순교자들에게 좀더 잘 어울리는 복장을 입힐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 주의자, 우상을 일종의 성결의 책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순수하게 보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적당히 징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민일 교회가 의무를 다했다면 무식한 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스러운 곳에서 신자들을 가르칠 분 아니라고 답변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교리를 배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전파와 성례 전을 통하여 한 공통된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생각하여 그 눈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하여 마음과 주의를 성실히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해서 다만 우상 이외에는 배울 것이 없다고 교황 주의자 말하는 그 신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바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의 제자로 인정한 자들이며, 하늘 나라의 철학의 계시로 광명의 옷을 입은 자들이며, 또한 천국의 구원의 신비로 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도 그러한 "책"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그렇게 무식하게 된 것이, 그들은 교육하기에 적합한 교리를 탈취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직무를 우상에게 넘겨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가 없다. 바울은 이 복음을 진지하게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갈 3:13), 자기의 육체를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히 10:10), 자기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며(계 1:5)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해 주셨다는 것을(롬 5:10), 충분히 또는 진실히 배웠다고 한다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을 교회 도처에 세웠겠는가? 이 한가지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개의 십자가상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오히려, 금, 은으로 만든 십자가상에 저들의 마음과 눈을 더욱 더 집착하게 된다.
8. 형상의 기원: 유형적 신격에 대한 인간의 욕구 (교회의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과 예배 부패의 원인이 된다) 우상에 대한 잠언의 말은 거의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고 있다. 곧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들은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인간의 천박한 갈망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악한 우상 숭배의 최초의 원인은 아니다.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말하는 死者像을 신성시하려는 열망이 유행하기 전에, 벌써 우상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로부터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라헬이 그 아비의 우상을 훔쳤다고 말하면서 우상을 사용하는 일을 흔히 있는 죄악이라고 바랬다(창 31:19). 이 사실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工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홍수 이후에 세계는 새롭게 재생되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신들을 만들어 냈다.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무서운 심판으로 정화시킨 땅에 우상이 득실거리는 것을 노아는 고통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증거한 대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데라 와 나홀은 거짓 우상을 섬긴 자들이 였다(수 24:2)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기호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하여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로 완전히 젖어 버리기 때문에 그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 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해 버린다. 이런 악에는 또 다른 악이 함께 하는 법이다. 즉 인간은 내적으로 상상한 하나님을 手工으로 표현하려 애를 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형적으로 나타내지 아니하는 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우상의 기원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는 일들이 증명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애급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했다. 그러나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어떤 유형적인 상징으로 볼 수 없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 에서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故國 行進의 인도자가 바로 하나님이 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인도한다고 인정하려 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육신은 자기들과 비슷한 허구를 얻고 나서는 부분별 하게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상인 것처럼 위안을 얻는데, 이렇게 하기 전에는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그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 물들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9. 형상물의 사용은 마침내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다. 여러 종류의 공상(우상 숭배)에는 즉시 예배가 따르게 마련이다. 인간이 형상에서 하나님을 보냈고 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마음과 눈이 전적으로 우상에게 얽매이게 되고, 점점 무감각해져서 마치 거기에 신적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게 완전히 감탄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하게 되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 들어 가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 주 한다고 상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신들을 형상으로 표현하여,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끓어 엎드릴 때에는,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를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떤 것도 금하신 것이다(출 20:25). 같은 이유에서 제 2 계명에는 예배에 대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 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 마침내 그것에 예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만다. 단순한 우상만을 예배하던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던 지의 차이는 전혀 있을 수 없다.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영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를 받기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참된 종교를 매몰시키고 전복하였다., 그 저주받아 마땅한 우상 숭배를 변호하기 위해 구차한 구실을 찾고 있는 자들은 이 점을 유의하라. 그들은 (케도릭) 형상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 32:4), 하나님[서 친히 그들 손으로 그들을 애급에서 인도해 내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 않았다(레 26:13). 그러나 금송아지가 바로 그들은 애급에서 구원한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동의하여(출 32: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굼송아지에게서 볼 수만 있다면,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금 송아지 형상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하다고 했다. 그들은 마음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냈으나 언제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동일한 신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많은 형상들의 신이 각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하는 것들은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속에 보이지 않게 내 주 하시는 한 실재라고 주장했다. 즉 유형적인 형상물을 통해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대상에 대한 記號를 바라본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영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형상물을 통해 더욱 확실하고 친근한 이해가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왜곡된 우상으로 만들고 나서 끊임없는 새로운 계교에 미혹이 되어, 마침내 하나님이 우상을 통해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제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오 같은 형상으로 예배해도 된다고 확신했다. 한편 이방인들은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했다.
10. 교회에서의 형상물 예배 이런 일이 이전에는 행해지지 않았고,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뻔뻔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어찌해서 우상 앞에 부복하는가? 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귀를 향하는 것처럼 우상을 향해 하는가? 실로 어거스틴은 "우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예배드리는 사람 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루워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형상물 가운데 어떤 것은 무시를 당하고, 어떤 것은 존경을 받는가 하면, 어떤 것은 가장 엄숙한 존영을 받는데, 어찌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상들에게 이처럼 차별을 한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들 집에 우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우상을 보기 위하여 서원(誓願)을 위한 순례의 길을 떠나, 자기 몸을 피곤하게 하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제단과 火床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살육과 유혈을 무름 쓰고 형상물을 위해 싸우면서 우상보다는 오히려 유일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쉽게 떠날 수가 있는가? 그들은 우상 숭배에 대한 자신들의 결백을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하여 주장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들도 우상을 그들의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목석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 2:27; 겔 6:4이하; 사 40:19-20; 함 2:18-19; 신 32:37). 그런데 이런 행위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 행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11. 교황 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러나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구별을 함으로써 회피하려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며 또한 감추어도 안 되지만 이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언굽하기로 한다. 그들은 형상물에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께 아무련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 곧 영광이라는 것이 彫像이나 畵像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련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곳을 찾으려 하나 그것은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모순을 일심고 있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희랍인들 사이에서 "예배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내가 말에서 그들을 책잡으려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련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어두움으로 덮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샘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이라고 해도 그들의 웅변술로는 결코 동일한 것을 가지고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옛날의 우상숭배자들과의 사실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지적해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나 살인자가 자기 범죄에 대하여 디른 별명을 붙인다고 해도 죄책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그들이 응당 정죄를 받아야 할 우상 숭배자들과 실제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이 명칭을 교묘하게 고안해 내어 변명을 일삼으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동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체 악의 근원은 그들의 터부니 없는 경쟁심에 있었다. 그 경쟁심으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투어, 그들의 機智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을 고안해 내고. 손으로는 그것을 날조하였던 것이다.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순수한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것은 정당하게 아름답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익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신 은사가 불합리하게 남용되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 건실한 예술가들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재능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상물 이외에는 무엇이나 만들거나 그려서는 안된다.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을 흉측한 형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가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요, 하나는 역사적인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전자는 교육에 있어 필요하나 후자는 인간의 쾌락을 위한 것 외에 아무 목적도 발견할 수 없다. 케도릭 교회에서 발견되는 형상물들은 후자에 속한 것들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들의 판단력과 분별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경솔한 격정의 산물이다.
13. 건전한 교리를 가진 교회는 형상물을 예배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어떤 형상물을 두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기독교의 아주 순수한 교리가 왕성했던 500년 동안은 교회 안에 어떤 형상물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 형상물이 없어 던 때 보다 형상물을 가질 때 교회는 타락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형상물은 높고 숭고한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이 없는 것이라 해도 생명이 있는 지체와 감각이 있는 생명체와 비슷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고 결국 그것들이 살아 호흡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우상이 수족의 형태를 가지고 있음으로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너무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의 형태도 감각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을 안할 수 없게 만든다." "우상은 눈과 입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는 많은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우상은 말하거나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상을 섬겨서는 안되는 이유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21]"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생각을 했지만, 니케아 회의가 우리의 주의를 끌기 때문에 다소간 이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말하는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했던 저 가장 유명한 회의가 아니라, 이레네 황후(780-802년까지 동방 제국의 여왕. 칼빈은 그 녀를 "Irene"라고 하는 사악한 Proserpine(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여왕)이라고 하였다).의 명령과 그 후원하에 800년 전에 개최된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 안에 형상물을 설치할 뿐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했다. 이 회의는 우리들의 반대자들에게 유리한 빌미를 제공했다. 이런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형상물에 더 큰 애착을 가진 자들의 발광이 어떤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말하는 욕망 만큼 나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는 있다. 오늘 날 형상물 사용을 지지하는 옹호론자들은 형상물 사용을 허용하는 니케아 회의가 그들을 지지한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샤룰마뉴 대제의 이름으로 나온 반박서가 있는데 이 문서는 그 문체로 보아 그 당시에 저술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서다. 여기에 당시에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의 의견과 그들이 사용한 증거들이 기술되여 있다.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창 1: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형상물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그는 "나로 네 얼굴을 보게하라----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라는 이 성구는 우리에게 형상물을 권하는 말씀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형상물을 마땅히 제단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나니"(마 5:15)라는 말씀을 인용하기도 했다. 더욱이 어떤 이들은 형상물을 우러러 보는 일이 우리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시 4:6)라는 말씀은 印證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교 강조하기도 했다. 즉 족장들이 이방인의 제물을 사용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 대신 성자들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 26:8)이라는 말씀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가장 교묘한 것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1)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靜觀함으로써 알게된다는 것이다. 데오도루스 감독도 이와 비슷한 통찰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서 찬양을 받으신다"(불가타역, 시 67:36)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불가타역, 시 16:3)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림없이 형상물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요컨데 그들의 어리석음이야 말로 혐오스러울 정도여서 그것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誤用 우상 숭배자들은 성경을 오용하여 우상 숭배를 옹호한다. 즉 "야곱이 바로 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 47:10]" "야곱이 그 지팡이에 머리를 의지한 것(창 47:31; 히 11:21). 야곱이 세운 돌 비에 기름을 부은 것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창 28:18]"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 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시 99:9]"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12]" 같은 말씀들을 우상 숭배를 뒷받침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미라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물이 마치 하늘에게 내려온 것처럼 신성시하기도 했다.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무서운 주장. 아모리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물 예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파문했다. 그들은 황제의 상에 분향을 하는 사람들은 성자의 상에는 더욱 분향을 해야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고 강요했다.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 감독 콘스탄티누스는 형상물을 경건히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똑 같은 예배와 영예를 그 형상물에 드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나 마르키온파와 동류로 정죄를 했다. 동방 교회의 요한 사절은 "그리스도의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뛰어라"라고 말했다. 그들은 예배라는 말인 "라트리아"와 봉사란 말인 '둘리아'를 동일시하고 있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제 12 장 : 하나님은 우상과 달리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 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강의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수반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이 강의에서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말할 때 하나님의 어떤 속성도 다른 곳에 귀속시켜서는 안된다. 종교라는 헬라어 '유세베이아'는 예배를 뜻하는 말로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외곡된 예배를 피하기 위해 예배에 대한 확실한 법칙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와 우상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셨는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해 합리적인 예배를 제정하셨다. 그리고 율법에 다음 두가지를 첨가하셨다. 첫째는 신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하나님이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유일하신 분으로 역사하시고, 둘째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사람들이 당연히 영광을 돌리도록 규범을 정하신 것이다. 즉 율법을 통해 사람들은 악한 예배에 빠지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신성하시고 고유하신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귀속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간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지고적 위취를 지키면서도 다른 신들은 하나님만 못하지만 섬긴다고 한다. 즉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신이시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2. 차이 점이 없는 구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천사를 섬기는 것이나 아무 구별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성자를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다른 것에게는 봉사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봉사라는 말이 예배라는 말이고 그 말은 어떤 경우에 더 광범위한 섬기는 말로도 쓰이는 말이다.
3. 형상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기까지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를 말했는데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8]"라고 했다. 여기서 '종노릇하다'라는 말은 '둘리아'라는 말로서 우상 숭배자들이 성자 숭배을 할 때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예배 해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라 하신 말씀에서 경배라는 말에 '라트리아'라는 말을 쓰셨는데 이 말씀을 하게 된 것은 사단이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단은 '경배'라는 말을 '둘리아'라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은 천사 앞에 무릅을 끓었다는 이유로 천사의 책망을 받은 일이 있는데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10]"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계 22:8]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 22:9]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라고 했다. 사도 요한 이 천사에게 절을 하려 한 것은 그를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대신으로 '절(프로스쿠네인)'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사람에게 절을 받게된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라기 보다 윤리적인, 세속적인 존경을 의하는 것이지 종교적인 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런 행위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종교가 일단 예배와 결합이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넬료에게서 볼 수 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행 10:25]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행 10:26]" 고넬료의 인격과 신앙은 베드로를 하나님으로 보고 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런 그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있는 것을 본다. 바울과 실라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고쳤을 때 사람들은 바울을 허메라 하고 바나바를 쓰스라 하여 경배하려 했다. 이 때 두 사도는 기겁을 하여 말하기를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행 14:11]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행 14:12]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행 14:14]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행 14:15]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행 14:16]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게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행 14:18]"라고 하여 그들을 만류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기들이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죄가 되는 것인가를 너무 잘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스가랴는 교회의 회복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슥 14:9]"라고 분명히 말씀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드릴 예배를 다른 것에도 드린 다는 것은 하나님도 좋으시고 다른 신들이나 사람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한 적극적인 영광의 훼손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미신은 처음에 하나님에게 드리는 영광을 태양, 별, 우상을 위해 고안했다. 그러나 야심이 뒤따라 하나님으로 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썩어질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큰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최고의 신을 섬기는 원리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저급한 신들, 수호신들, 죽은 영웅들에게 아무련 차별없이 제물을 바치는 일반적인 행위를 하고 결국 하나님도 그런 신들 중의 하나로 취급을 하고 만 것이다. 이런 행위는 유일하신 하나님만 가지신 특별한 은총과 영광을 수 많은 우상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처럼------
제 13장: 성경은 하나님은 한 본체 시나 본체 안에 3위가 존재함을 가르치신다.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일축하시고 교묘하게 꾸민 이론들을 말살하시기 위해서다. 고대의 세네카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하나님일 수 있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신성이 침투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을 염려하시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나타내시지 않았어도 인간이 하나님을 잘못 오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계시를 하셨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실로 우리들을 두렵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한다. 또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상상할 수 없게 만드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하늘 나라에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늘로 끌어 올리셔서 당신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셨다. 마니교 사람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러므로 하나님도 인간의 몸과 같은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한다. (이 마니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 졌으며 이 파의 교주는 주후 372년에 사망한 아우디우스라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도 손, 발, 눈이 있는 사람과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실 때 유모가 어린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손, 발들의 말들이 신인동성동형적인 표현일 뿐인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 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사 5:25]" "여호와께서 그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사 30:30]"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사 40:12]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 40:13]" 이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에게 알리시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의 눈이 있고 팔이 있으되 사람의 그것과 같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2. 하나님 안에는 삼위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상과 구별하시기 위해 아주 독특한 특징을 사람에게 보이셨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그것이다.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 그러나 단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은 세분이시다 라는 다신 적인 사상과,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세 분으로 분활 되었다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먼저 위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은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를 인용 예수 님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시고 밀초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은 파생 체라고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예수 님에게 적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단일하시며 분할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모든 완전을 포함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본체를 예수 님을 통해 세상에 들어내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 님은 하나님의 그림자나 능력을 덧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본체는 예수 님에게 나타나셨으나 예수 님 자신의 본체도 있어서 예수 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성령 님에 대한 것도 결론 지을 수 있다. 성령 님도 본질은 하나님이시나 성령 님의 본체가 있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본질은 하나이시지만 본체로서는 세 분이시다. 이것은 위라고 말한다. 이 본체를 사람들은 더 알아듣기 쉽게 '실재' 또는 '실체'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3.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준다.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실체 하시는 완전한 분이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은 성경 적인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다. 삼위 일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잘된 표현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성경에 없는 말이라고 해서 쓰지 못할 말로 말하는데, 성경 자체의 진리를 잘 표현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외래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