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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1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
2008.04.26 08:58 | ...신학산책 | 로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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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
 
기독교 강요 : 역사, 저작, 목적, 사상적 배경(17쪽)

1534년 칼빈은 파리 대학 취임 연설문이 문제가 되어 방랑 길에 올라 여기 저기를 떠돌다가 1535년 1월에 바젤로 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케도릭으로부터 잔인한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유명한 기독교 강요가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에 불과했다. 그의 저서를 본 많은 학자들이 그를 '복음주의 신앙의 최상 위에 있는 개혁파 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라 하면서 극찬을 했다.
케도릭에서는 이 책에 대해 혹독한 비평을 하고 말살하려 했지만 복음 주의자들은 이 책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진리의 변호라고 했다.
그는 이 책의 첫 출판으로부터 23년 동안 끝임 없이 수정 개정 작업을 했다. 그의 첫 출판은 1536년에 시작이 되고 그의 마지막 출판은 1559년에 마쳣는데, 그 두 사이에 사상적인 변화와 차이가 전혀 없었다. 즉 성경에 관한 지식은 점점 깊어졌으나, 처음의 사상과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니, 그가 처음부터 성경에 대한 정확한 학식을 가졌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성경에 입각하여 추호도 틀림이 없는 상태에서 첫 출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칼빈의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심원한 지식,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저자의 특징이 되는 충실한 해석과 조직화를 위한 세심한 관심" 등을 보게 된다.
만일 이 저서가 없었다면 루터가 죽은 후 신교는 극심한 신학적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말씀 위에 바르게 선 교회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1. 기독교 강요의 역사
초판은 1536년 1월에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Christian Religions Institutio)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초판은 총 6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4장은 율법(십계명 해설), 신앙(사도신경 해설), 주기도, 성례 전으로 되어 있고(루터의 요리 문답 순서에 의해 배열) 5장과 6장은 논쟁적인 기술 법으로 거짓 성례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기록을 했다.
5장에서 그는 이제까지 성례 전이라고 불리는 케도릭의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등이 성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개념을 해설할 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말했다.
1년이 못되어 라틴어로 쓰여져 소수의 사람밖에 볼 수 없었던 초판이 매진되고 1539년 새로운 라틴어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 이 때 그는 책이름을 바꾸어 (Institutio Christian Religions )라고 했고, 6장이던 것이 17장이 되었다.
재판에서 칼빈은 그 서두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그는 삼위일체론을 상당히 확대해서 해석했다.
1541년 재판이 나온지 2년 후에 기독교 강요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이 책을 번역 출판했다. 그리고 이 책은 프랑스의 고전이 되었다.
1543년 그는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를 다시 출판했다. 그리고 1545년에 이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했다. 세 번째 판은 17장에서 21장으로 늘어났다. 그는 이 증보판에서도 서약과 인간의 전통에 관한 것들을 논했다.
프랑스 판이 나온지 5년 후에 즉 1550년에 또 증보된 라틴어판이 나왔으며, 1551년에 프랑스 번역판이 다시 나왔다. 그리고 그 해 다시 재판을 만들었다. 1550년과 1557년 사이에 이 책은 무려 7판을 출판해야 했다.
1550년 판에서 그는 성경과 그 권위, 성자의 형상 예배, 양심에 관한 설명을 했다. 그는 새로운 판을 낼 때마다 새로운 인용문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고대의 저작들을 읽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독교 강요의 결정판은 1559년 라틴어판과, 1560년 프랑스어 판이다. 이 때 칼빈은 四日熱이라는 병에 걸려 죽을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나, 그의 저서를 계속 精査하여 증보하므로 21장에서 배가되는 80장이 되도록 하여 증보판을 냈다.
2. 기독교 강요의 목적.
앞에서도 말했듯이 케도릭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변호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급히 이 책을 출판하게 된 또 다른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1534년 7월 17일 밤에 일어 난 벽보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느카텔(Neuchatel)교회 목사인 '앙트완느 마르코르트'(Antoine Marcourt)에 의해 벌어진 일이 였다. 그는 미사의 남용을 비판하는 벽보를 사방에 부착했는데, 그 내용은 "유일하신 증보 자시오,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라는 것이 였다. 그의 논조는 매우 날카롭고 실랄 했다. 로마 케도릭은 이 일을 빌미로 여러 명의 복음 주의자들을 체포 화형을 시켰고 그 첫 번째 순교자는 '바델르미 밀론'이였다.
이 사실이 유럽 전역에 전해지자 독일 교회는 크게 개탄하고 폭군들의 폭력을 성토했다, 그러자 케도릭에서는 자기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로 가득한 야비하기 그지없는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그 내용은 이런 야비한 폭력이 제세례파에 의해 감행되었으며 그 폭도들은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 야욕을 가지므로 자행된 것이라는 모략이 였다. 독일과의 관계를 중하게 여겼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독일 교회와 국민들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이와 같은 거짓말을 정당화 하는 선언을 1535년 2월 1일에 공포했다. 그는 이 잔인하기 짝이 엇는 살인은 제세례파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했으며,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거짓 말에 대해 칼빈은 크게 분노해서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글'을 이 저서의 첫머리에 기록했다.
여기서 그의 기독교 강요 강요를 기록한 두 가지 목적이 나타나 있다.
첫째는 기독교의 교리를 가능한 한 단순하고 쉽게 기록하고 조직화하므로 써, 그리스도교를 탐구하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쉽게 이해하도록 했으나, 라틴어로만 출판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질 수 없었으며
둘째는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3. 그가 죽기 전 5년까지 줄기차게 저술을 계속했는데, 그의 이런 저술은 그의 독창적인 특징이 있지만, 그가 다른 개혁자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개혁자들은 어거스틴, 루터, 쭈빙글리, 멜란히톤, 부처 등이 였으며 칼빈은 그들의 사상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했다고 해도 잘못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런 신학자들의 저술이나 사상만 의존한 것이 아니다. 그의 제일 되는 신학적 원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경이다. 그는 성경 전체를 면밀하게 연구했고, 구약에 대한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성경에 대해 완전히 깨달아 아는 지식을 가졌으며, 사상적으로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리고 다른 고전들을 많이 인용했다.
칼빈이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사상을 곡해한 잘못된 생각이다. (신복윤)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獻辭)
생략
제 1 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75쪽)
주: 하나님의 존재라는 말을 쓰지 않고 지식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칼빈 신학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계시가 중심이 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제 1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1. 우리 가진 모든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관한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하는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사람이 먼저 자기 자존적인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 (행 17:28)하고 있게 된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바르게 살펴 볼 수가 없으며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은 은사 중 어느 것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 우리들 자신의 존재 자체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이 축복들로 인하여 우리는 그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께서 올라감을 얻게 된다.
실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의 빈곤은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잘 들어낸다. 특히 아담의 타락은 더욱 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들의 영적 굶주림과 결함으로 인한 공포는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을 찾게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알도록 자극을 받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소라도 얻게 된다. 우리들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관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의 죄악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한,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며, 잊어버리고 있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해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즉 우리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죄악에 대한 깨달음 들은) 우리를 일깨워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빈곤, 또는 어리석음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지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명백한 증거가 있다.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이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만은 인간에게 본유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런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위선으로 기우려 져 있으며,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허한 의의 형상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부패해져서 더러워지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신이 인간 부패 내에서만 모든 것을 보게 되면, 우리들의 속과 주위가 마치 깨끗한 것처럼 느껴져,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즐겁게 하지만 사실, 그것은 검은 것밖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에 히끄무례한 것이나, 갈색인 물체를 보았을 때, 완전한 흰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우리들의 영혼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얼마나 과대 망상증에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더욱 명백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대 낮에 땅을 내려다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을 본다면 아마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선을 가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눈을 들어 태양을 처다 보게 되었을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후에 우리가 지구상의 사물을 볼 때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이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사실을 영적 은사를 생각할 때도 적용된다. 우리가 이 지상 넘어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산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半神的적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돌려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의 절대 완전함을 생각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들을 즐겁게 했던 모든 것들이 최대의 불의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것으로 우리를 교묘하게 속이던 것들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능력의 탈을 쓰고 있던 것들은 가장 비참한 무력 자로 증명될 것이다. 우리에게 완전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를 당한다고 성경이 말하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서(인간의 부패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완전하며 확고하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놀라다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이런 놀라운 사실의 사례들을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삿 13:22; 사6:5, 1:28; 삿 6: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함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능함과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이 된다.(욥 38:1 이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창18:27)에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곁 옷으로 가리우지 않고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13) (모세, 이사야, 사도 요한 등에게서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룹들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면, 안되었거늘(사 6:2), 하물며 부패하고(욥 13:28), 버러지에 지내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고----"(사 24:23)
곧 주님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나타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에서 어두워진다는 것이다.(사 2:10,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해도 먼저는 전자에 대하여 논하고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제 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유익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말해서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의 중보자 그리스도를 구속 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아담이 자기의 무죄함을 그대로 보전하였더라면, 우리는 자연의 참된 질서에 따라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 기초적이며, 단순한 지식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성이 현재와 같이 파괴된 상태에서 증보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 시키시지 아니하는 한, 하늘 아버지로 알거나, 구원의 창시자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호의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양육하시며, 각종의 축복으로 우리들에게 체워 주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신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고후 4:6 참조) 자신을 구속 주로 보여 주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중의 인식이 생기는데 우리는 여기서 전자(자신을 창조주 나타내신 하나님)를 먼저 생각하고 후자(자신을 구속 주로 보여 주신 하나님)는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한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성결의 근원이시며, 그 분 밖에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신(믿지 않은 한)하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를 권능으로 유지하시며, 선으로 보존하시며, 특히 인류를 의와 심판으로 지배하시며, 자비로 참으시며, 보호하심으로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지혜, 빛, 의, 권능, 공의, 참된 진리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에게 기대하며, 그에게 찾으며, 또한 이미 받은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돌리기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는 것은 "종교를 낳게하는 경건"을 우리에게 바르게 가리켜 주기 때문이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을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 이런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단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누리는 모든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그리고 그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은 헛된 생각의 장난질이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질문은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그의 본성과 일치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안내자가 되고, 교사가 되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일체의 선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받았음으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함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계획과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받쳐지지 아니하는 한, 그것은 극도로 부패해져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인간 생활의 법칙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분명히 바라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이 그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지 못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경건한 마음은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공상을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믿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혹은 경솔하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의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최대의 열심과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고 믿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음으로, 그를 완전히 신뢰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재난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주요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위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심판자로써 죄를 엄하게 벌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자기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여 행동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이 매우 무서운 것이지만, 그런 사람은 비록 피할 길이 열려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사람을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한 신자에게 여생의 상급을 주시고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 다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죄를 억제하는 것은 다만 형벌에 대한 공포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로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지옥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몸서리쳐 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고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내포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곧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되 아무 끝없이 하고 있으며,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이 허식으로 흐르고 있는 곳마다 마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제 3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 속에 뿌리 박혀 있었다.
본 문 : 롬 1:8-15
1. 이 자연적 은사의 특징
하나님은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지각을 주셨다. 이것은 아무도 무지를 핑개삼아 하나님를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는 이 하나님를 아는 지식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
칼빈은 그의 주석 요 1:5에서 "부패한 인간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두가지 빛의 요소가 있다. 그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종교적인 씨앗이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를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으나 하나님를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를 경배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는 그들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는다. 사람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증거는 많다. 특히 문명인들 보다 원시적인 사람들에게 그 증거가 많이 있다. 짐승과 다를바 없는 생활을 하는 미개인들은 그들 속에 종교적인 씨앗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종교가 없는 곳은 없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좋은 실례다.
사실 우상 숭배도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좋은 증거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하는 종교적 행위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를 아는 인식을 부인하고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타고난 천성적인 버릇을 고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와같은 전재 아래 인간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발견될 것이다.
2. 종교는 임의의 발명품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우매한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들이 만든 하나님를 믿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와같은 종교적 사교 집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를 찾는 본성 속에 씨앗이 새 봄에 굳은 땅을 뚫고 움을 돋듯 하나님를 아는 지식이 없었다면 오늘의 하나님를 믿는 기독교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속여 사교 집단으로 만드는 거짓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기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종교를 부인하고 하나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오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 속에도 하나님를 아는 지식이 있어서 가이우스 칼리쿨라(Gaius Caligula)-로마 황제, AD 37-41까지 로마를 다스린 Tiberius Caesar의 증손-는 방자하게 하나님를 부인하고 기독교도를 핍박한 사람이였지만 천둥만 처도 벌벌 떨면서 침대 밑으로 숨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우수꽝스러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피해 보고자하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하나님를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온 갖 구실을 찾지만 그럴 수록 더 하나님의 두러움이 떨게된다. 그들이 그들의 양심의 두러움에서 잠시 놓임을 받는 것은 술이 취했을 때나 깊은 잠에 빠졌을 때다.그러나 깊은 잠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에 쫒기는 자의 두러움에서 피할 수 없다.
3.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면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의식을 지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신에 대한 인식은 모든 사람이 나면서 부터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념은 인간의 골수와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을 처도 이 하나님의 의식에서 벗어 날 수 없다. 키케로(Cicero))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것들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종교는 점점 개량되고 왕성해 진다. 이 세계를 주장하는 사단은 될 수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지식을 몰아 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예배를 부패하게 하려 온갖 짓을 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더욱 왕성하고, 하나님를 섬기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학교서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모태에서 부터 터득한 하나님를 부인하는 지식이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에 하나님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모든 사람은 살아 가는 목적이 하나님를 인식하고 그 분을 섬기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이런 본연의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면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괴로움을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자연 법칙을 거스려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며, 그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플라톤(Plato)의 말을 아주 잘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악을 피하고 참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라고 했다. 그릴루스(Gryllus)도 역시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낳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끝임없는 불안과 혼란과 불안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를 경배하는 것 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이 인간은 영생을 동경하게 된다.
제 4장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에 의해 질식 부패되었다
1. 迷信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다는 것은 인간 경험이 잘 말해 준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소중한 씨앗을 자리 키우고 있는 사람은 백에 한 사람 정도도 안된다. 더욱이 그것을 무르익게 하여 때 가되면 열매를 거두도록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시 1:3 참조) 게다가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지만, 어떻든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버린 사람들이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 버렸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수고하고 있으며 그 맹목은 항상 거만한 허영으로 완고한 것들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수준 이상의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을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연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발을 내디디던 간에 그들은 필경 파멸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다.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시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악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발언을 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롬 1:22)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곧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여 제 멋대로 어두움을 자초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우준 하고 완고한 교만으로 우둔해졌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로 눈이 어두워 졌다고 부언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허망한 호기심 뿐 아니라, 거짓된 신뢰에 따라 제한된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 보려는 지나친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조금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53:1) 다윗의 이 말은, 다른 곳에서도 곧 찾아 볼 수 있겠지만 먼저 자연의 빛을 끄며,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자들에 대한 말이다. 우리들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生來的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 내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다윗은 그들의 광란이 한층 더 증오스러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시의 본질을 아직 제거하시지 않으셨으나 그 심판과 섭리는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개으름뱅이로 가두어 둠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고 이 역시 운명에 마끼며, 인간의 악한 행위를 묵과함으로 인간이 형벌을 받지 않고 육욕에 빠져 살게 한다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불일치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살시키고 무분별한 욕망에 빠진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눈을 감은 후, 보아도 보지 못하게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인 것이다. (마 13:14-15; 사 6:9-10; 시 17:10 참조) 다윗은 자기의 사상을 가장 잘 해석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1)라고 말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을 도도히 자랑한다고 했다(시 10:11).

그들이 어떤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고 해도, 그들이 인정하는 신의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한다. 바울이 증거 한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딤후 2:13)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잇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그들 자신의 의식을 거슬려 싸우며, 하나님을 그 의식에서 몰아 내고, 천상에서 파멸되기를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 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로도 하나님을 맹렬히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은 무감각으로 인해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 망각은 계속 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미신에 애한 변명과 공허한 변호가 허물어진다. 그것은 그들은 종교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터부니 없는 것이라고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종교는 마땅히 우주 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시하시다 는 것,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亡靈 혹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에도, 그것이 가면을 쓰고 하나님을 얼마나 조롱하려 하고 있다는 명백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미신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만을 붙잡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것들을 공공연히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들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망상을 예배하며 찬양한다. 마일 그들이 처음에 어리석고 강퍅한 그들의 신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모호하고 거짓된 견해를 가진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8)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지낸 자들이며 그때에는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데 있어서 그들은 외인이 였다고 했다(엡 2:12). 적어도 이런 상황 속에서는 유일신을 생각하던, 다신을 생각하던,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다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음이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받은 우상이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라고 말 할 수 없다고 단정해야 한다.

4. 僞善
여기 또 두 번째 죄가 있다. 그것은 적어도 강요를 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지 전까지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는데서 생기는 자발적인 두려움에 감동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신들을 만들어 냈다고 한 스타티우스의 말은 이런 종류의 무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해서만은 잘 부함이 되는 말이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를 심판하기 위한 심판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심판대가 없어지기를 열심히 염원한다. 그런 심정으로 심판하시지 않고는 참으실 수 없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 가해짐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을 멀리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후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그들을 위압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을 부패하는데 열심이며, 악에 악을 더하여 마침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그 모든 의를 파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체 위장하여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않고 자기로 만족하며, 자신의 육체적인 방종에 빠지길 좋아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공허하며 거짓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종교의 그림자라고 부를 가치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런 혼란한 지식과 정교의 기원인 경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경건은 오로지 신자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런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이 멀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전 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재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심이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 아니, 그 뿐인가? 그들은 더욱 방종하여 자신을 불결한데 팽개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속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에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그들 자신을 더 신뢰한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이런 거대한 오류에 그들 자신들을 얽어맴으로써 한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번쩍였던 그 섬광을 우매한 죄악으로 질식시켜 꺼져 버리게 한다. 그러나 그 씨앗을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신성에 대한 어떤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씨앗이 매우 부패해 있기 때문에, 가장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래부터 하는 나의 주장은 더욱 명백해 진다. 이는 遺棄者 자신들도 이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온한 때에는 익살스럽게 하나님을 회롱하며,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일단 절망이 그들 속에 엄습해 오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는데, 형식적이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들이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 아니며 벌써부터 나타났어야 할 것이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억제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제 5 장: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지식은 우주의 창조와 섭리에 빛을 발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본문 : 시 139:15
1. 하나님의 自己 顯現은 명백하여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다.
사람의 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고 요 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서 제외시키시지 않기 위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이 알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모습이 그의 창조물에 너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시 104:2 "주께서 옷을 입은 같이 빛을 입으시며"라는 말씀은 이런 하나님을 잘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우신 모습을 세상의 어떤 것을 통하시던 사람에게 보여 주신다.
시편 기자는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시 104:3]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4]"라고 말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지혜를 더욱 찬란히 나타내시기 때문에 흔히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히브리 기자가 이 세상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상이라고 말씀한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거울로 빛을 발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2]"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시인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2]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시 19:3]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4]"라고 말씀하시므로 온 우주에 하나님의 언어가 통하고 있음을 말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히 밝혔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2. 하나님의 지혜가 온 인류에게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천문학, 의학, 기타의 자연 과학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많고,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도 눈을 똑바로 뜨면 반드시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천문학이나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적 기술에 감탄을 한다. 그리고 무식한 사람들도 우주의 신비한 현상을 알면 감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우주와 만물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갈렌이라는 고대 헬라의 최고의 의학자요 철학자며 해부학의 권위자였던 그는 인체의 각 부분의 기능을 기록한 그의 저서에서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성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3. 사람은 신적 지혜의 최상의 증거다.
옛날의 철학자는 사람을 가르쳐 소우주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사람의 마음을 깜짝 놀라게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행 17:27]"라고 하셨다.
다윗도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 하시고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 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나이다[시 8:2]"라고 하셨다. 다윗의 말은 어린아이들이라도 하나님의 우주에 가득찬 섭리와 은혜를 안다는 말이다.
바울도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탁월하신 재능과 은총을 인간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의 자녀며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이다.
4. 인간은 배은 망덕하여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고로 하여 아름답고 복된 모든 삶의 은총들을 무수히 준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들을 마치 자기들의 것인 양 마구 파괴하고 남용하면서 교만을 떨었다. 만일 사람이 이 우주에 가득찬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탐욕이나 더 가지기 위한 싸움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인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빌미로 오히려 더 하나님을 대적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구실로 하여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 탁월한 기능과 은혜들은 자연의 한 법칙으로 돌리고 하나님을 불신한다.
5.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돈.
어떤 사람은 영혼이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 없는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는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육체를 돕는 기능만 가지고 있지 안다. 우주의 신비를 캐고, 인간의 신비를 캐는데 육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천문학의 경이로운 발견들은 사실 육체적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활동에 있는 것이다. 천체를 관찰하여 별의 신비를 캐며,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알고,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과 斜行의 정도를 아는 것이 어찌 육체의 힘이겠는가? 하늘과 땅을 관찰하고, 과거와 미래를 결합하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즐거운 것을 즐거워하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감탄을 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좋은 것을 분별하고, 훌륭한 판단과 그릇된 판단을 하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어찌 육체에 속한 일인가?사람이 잠자는 시간에도 여기 저기를 배회하고 신기한 일을 행하며, 심지어 좋은 발명품을 만들기도 하는데, 사람이 어찌 육체 밖에 없다 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를 인정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인가? 잠자는 중에도 우리의 신비한 모과 정신은 움직이고 있듯이 하나님은 잠시도 수시지 아니하시고 일하시며 하나님은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계신다.
바젤의 詩
"최초에 한 영이 있어/ 이것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먹인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이 영으로 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빛나는 태양과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한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제해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여 날 때 실날 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민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도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만은 하늘 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
6. 하나님은 자신의 주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며, 자연계를 다스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며, 예배드리게 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무한한 우주를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머리 신호로 만으로도 우주를 놀라게 하시며 격동하게 하셨다가 잠잠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들어내시기 위함이다.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자연의 일반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일도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인류 사회를 다스릴 때 경건한 사람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한 사람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와 은혜다.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보호자요 변호사요, 선한 사람을 벅 주셔서 축복하시고 그들의 생활을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재난에서 피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어떤 경우에 그렇지 않게 보이는 점이 있으나 이런 사실이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한가지 범죄에 대하여 엄격한 심판을 하심은 모든 죄에 대하여 엄격한 다스림을 행사한다는 것이며, 여러 가지 죄를 즉시 다스리지 않으시는 것은 장차 올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생활을 주관하신 다는 증거는 많다. 선지자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갑자기, 기적적으로, 예상 밖의 사건을 통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강조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시 107:4]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시 107:5]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시 107:6] 또 바른 길로 인도 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시 107:7]" 궁핍하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8]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 107:9]" 사로잡힌 자들을 침침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에게 놓아주시고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시 107:10]"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 병으로 죽어 가는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교만한 자들을 그들의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
이런 사건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분명하고 찬란한 섭리에 대하여 깨달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의 편견과 오만과 뻔뻔스러움이 하나님의 이런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걸음 무더기에서 드셔서[시 113:7]"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퀘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 3:19]" "간교한 자로 자기 퀘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며[욥 5:13]"하셨을 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신다.
9.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숙고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다른 어떤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또 다른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명백히 이 온 세상에 들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더 상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상고는 공허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들의 심령과 생활에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지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식은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에 대해 더욱 감동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식이 아닌 다른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한 공상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나 지나친 사색에 의해 하나님을 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써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찾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행 17:27]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라고 했고, 자기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선포하겠다고 했다.(시145:3; 145:5-6).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를 당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해 하나님의 사역을 주시해야 한다"고 했다.
10.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도록 하며, 내세의 소망을 가지게 하며, 삶의 용기를 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이제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가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경건한 사람들이 경건치 않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핍박을 당하는 것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경건히 사는 사람들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알고 주님이 세상을 사신 것처럼 살게 될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그의 선하심과, 의, 자비, 겸손을 보여 주셨는지를 자세히 살펴 그 분의 모범을 따라야 할 것이다.
11. 창조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 있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우둔함과 미련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깨달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인간은 죄와 자신의 육신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빠져서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 특히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는 어리석은 철학자들과 미신에 의해 더욱 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생략)
13. 성령님은 인간이 고안한 일체의 예배 행위를 거절하신다.
따라서 자신의 견해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자는 사실 하나님의 법을 떠나 자기의 종교에 만족한 사람들로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배교적인 행동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는 법을 배우기 전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 2:13]"라 하셨다. 근본적으로 죄를 짖은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 드리는 방법을 계시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잘 몰라서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할 때 비록 무지로 말미암은 죄라 해도 그 죄가 가벼워 사죄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또한 마땅히 섬기고 예배 드려야 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가르치지 않는 자도 죄의 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나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어떤 세상적 전통이나 습관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한 그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14. 이런 점에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매우 미급하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충분히 알려 줄 수는 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행 14:16]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를 섬기는 일을 가르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이 점이 자연 계시의 한계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 뜻대로 살기 위한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이다.
15.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 둔감의 죄가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다. 그리고 실로 우리의 양심이 나태와 배은 망덕을 항상 깨우쳐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무지를 구실로 내 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다음의 변명들, 곧 말 못하는 피조물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해 주는 그 진리를 들을 만한 귀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인간이 변명하는 것과, 눈 없는 피조물이 보여 주는 것을 자기에게는 눈이 없어 볼 수 없다고 변명하는 것들이 용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우리가 방랑자요 방황자로 길을 잃고 헤메이고 있다면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놀라운 구조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심긴 하나님에 대한 지시의 씨앗을 부패시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태만에 그 원인을 돌려 한다. 그러나 한편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찬란하게 보여 주는 그 단순한 증거만으로 우리가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거짓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神知識을 맛보게 되자, 우리는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상을 추겨 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아가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에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일 하시는 역사를 악하게 판단함으로써 그 역사를 희미하게 하거나 뒤집어엎거나, 그 역사 자체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며, 창조주에게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찬양을 박탈하고 있다.
제 6 장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성경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 뿐이다.
온 만물에 널리 알려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은망덕한 죄에 대해 일체의 변명의 여지를 없앤다. 그것은 하나님 실존의 생생한 증거를 피조물의 자연 세계 속에서 너무 명백히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통해 얻은 것보다 훨씬 더 명백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자연이 아닌 또 다른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인 것을 보시고, 유대인들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후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한 울타리 안에 둘러 싸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신 것이다.
성경은 눈이 나뿐 사람이 좋은 안경을 쓰는 것과 같다. 혼란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명백히 보여 주시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신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그 밖의 족장들이 자신들과 불신자들을 구별하게 한 명백한 지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적인 교리로서가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말씀으로 들었다. 즉 하나님을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구속 주로서도 믿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구원적 믿음을 가진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통한 지식이다. 이 구원적인 지식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지식에서부터 오게 된다. 이 지식이 있고 나서 구원적인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구원적인 믿음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2.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모든 지능과 지혜를 초월한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믿음을 인간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대로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도록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시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계획 아래 율법이 공포되고, 이 율법의 해석자로 선지자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 율법의 핵심적 교훈은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만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계시하신 이외에도 거짓된 一群의 神들과, 그들의 명백한 특징들을 말씀하여 참 하나님과 혼돈 되지 않도록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빛을 받아야 건전한 종교적 교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증거를 경건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가능한 것이다.
3. 성경에서 떠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 쉽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에 빠지고 날조된 그릇된 종교에 심취하고, 세속적 욕심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며 인간의 잘못된 감정과 종교적 오류가 얼마나 그릇되고 방자한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한 계시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지 않았고, 자연 계시보다 더 확실한 계시를 해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부패한 판단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수한 구원의 말씀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미혹하는 미신은 추방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영원히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다윗은 말했다.(시 93:1, 96:10, 97:1, 99:1) 그런데 다윗은 이 통치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권능, 또는 전 세계를 통치하시는 권능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1-2]"이라고 말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께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시 19:7]"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 29편에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이 우주의 우뢰, 바람, 소나기 등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시고"라고 말하고 나서"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도다"라고 말씀을 맺고 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도 말하기를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8]"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 하도다[시 93:1]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시 93:2]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시 93:3]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시 93:4]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 93:5]"라고 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도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라고 하셨다.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다 말씀 밖에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공허와 오류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제 7 장 : 성경의 권위는 성령에 의해 확증되며, 교회의 판단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에게 온 것이지 교회에서 생긴 것은 아니다.
성경의 권위와 신성은 교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당신의 신성한 진리를 영원히 신성하게 복종 하시기를 원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어야 말씀의 신성한 권위가 살게 된다.
중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그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큰 잘못을 범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한다면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다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하는 가공할 일이 생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케도릭 교회의 주장을 말한다.
2.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생각들은 바울의 말 한마디로 깨끗이 정리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이 말은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가 있기 전에 사도들이 있었고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은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말씀이 교회를 세운 것이지, 교회가 말씀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조금도 주저없이 성경을 진리로 인정해야 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하신 말씀으로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으로 내 세울 수는 없다. (생략)
4. 성경의 증거는 모든 다른 증거보다 강하다.
성경의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적 증거를 고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복종시키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든 인간을 위한 최고의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에서 보다 언제나 최고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순결한 마음과 건강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들이 마땅히 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논쟁을 해서 성경 말씀을 판단하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좀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도 성경 말씀으로 사람들을 다스린다면 권위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은 이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내적 증거를 가지게하고, 사람이 말씀을 받아 들일 때 능력을 나타내신다.
5. 성경은 자증한다.
참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 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은 이성에 종속되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과 지기를 성경에 예속 시켜야 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의지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생생하게 효과적으로, 절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이사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 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추호의 오류도 없는 진리임을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던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사 54:13]"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들에게(신자)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신 30:12]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신 30:13]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 대중들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유대인들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하면서 그 이유를 "여호와의 팔이 나타난 사람들만 안다"(사 53:1)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라고 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도록 은혜를 주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상고하여 은혜를 받자.

제 8 장 :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
성경에 대한 이런 확신이 없이는 성경을 보호하고, 성경의 권위를 세울 수 없다. 성경은 어떤 다른 외부적인 지원을 받아서 그 권위가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성경이 어떤 다른 것에 의해 권위가 세워진다면 성경의 권위는 늘 다른 것에 의해 흔들릴 것이다. 우리는 성경 자체에서 그 지혜의 배치가 얼마나 훌륭한지. 얼마나 완전한 말씀인지, 그리고 그 위엄을 스스로 지키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아야 한다. 천국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극히 평범한 언어로 기록이 되고 진리의 말씀들이 소박하고 단순한 말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말의 기교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라고 하였고 그의 설교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이라고 했다.
사람의 저서가 아무리 기교면에서 잘 다듬어 진 것이라고 해도 성경만큼 사람을 감동시키지는 못한다. 더욱이 죄인을 회개케 하여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저서가 어디에 있겠는가?
2. 결정적인 것은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다.
어떤 선지자의 글은 그 문자체가 화려하고 명쾌한 어떤 사람의 글에도 손색이 없다. 하나님은 성경을 소박하고 단순하게 기록을 하셨지만, 이런 선지자들을 통해 얼마든지 멋있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음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누구든지 보고 알고, 믿어 구원 얻도록 쉽게 기록을 한 것이다.
사단은 복잡하고 교묘한 언어를 써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고상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나, 그들의 이런 사기극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죄인을 만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글로 자기를 과시한다.
3. 성경의 고전성 (주-:문서설에 대한 반론. 문서설이란 성경이 고대의 어떤 문서에 영향을 맏아 기록되었다는 학설을 말함)
성경의 고전성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애급이나 바벨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급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화를 주장하는 문서들도 사실 모세 이후에 기록된 것들이며, 모세 이전에 있었던 것은 없다.
그러나 (모세가 고대의 문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이전에 있었고, 애급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나라와 문화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다.
모세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하신 것에 그 기초를 둔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만일 모세가 알아 듣지도 못한 것을 그 백성들에게 전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래 동안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 모세의 전한 말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음으며,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자극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 15:13].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에 거주한지 사백삼십년이라[출 12:40].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
즉 모세는 자기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를 다른 여타의 민족들이 주장하는 시간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다른 어떤 문화권의 문서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4. 모세의 예증이 보여 주는 성경의 진실성.
아마 어떤 사람들은 애급의 기원을 창조 이전 6,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믿으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터부니 없는 말을 세속적인 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경이 다른 문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런 사악한 자들 주장을 봉쇄하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신다.
야곱은 모세 보다 300년 사람이다. 야곱은 그가 죽을 때 그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을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창 49:5-6)"
여기서 레위족은 모세의 가문이고, 모세는 성경을 기록할 때 자기 가문과 자기 선조에게 치욕적인 이런 예언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조상들이 잘못한 일을 숨김없이 말하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다. 그는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에 전혀 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을 그대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불쾌한 일들도 낱낱이 기록을 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민 12:1]"
이런 모세의 기록이 어찌 사람의 말이겠는가? 그리고 그는 당시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지 않고 가장 낯은 자리에 머물게 했는가. 이 모든 것이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일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일들이다.
5. 이적은 하나님의 使者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이적과 예언에 대한 반대설을 논박함)
모세는 수많은 이적을 행한다. 그 이적들은 모세가 말한 율법과 공포된 말씀에 대한 확증이다. 모세의 40일간의 하나님과의 교제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출 24: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출 25:1].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6].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출 40:34]. 회중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하라[민 16:24].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 20:10-11].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 17:6].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민 11:9].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있더니[출 16-1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고전 10:3]"
이 모든 이적들은 모세가 진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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