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豫定敎理
칼빈의 豫定敎理
Ⅰ. 칼빈 신학에 있어서 豫定敎理의 자리
칼빈에 있어서 豫定論의 위치가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칼빈은 1559년에 출판된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豫定敎理를 제Ⅲ권(성령론 혹은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의 끝부분과 제Ⅳ권(교회론) 직전에서 취급한다.1) 환언하면 창조주 하나님(제I권), 구속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업(제Ⅱ권)을 다룬 후, 제Ⅲ권, 화해의 실현 내지는 화해의 적용 끝부분에서 취급한다. 따라서 칼빈은 제Ⅲ권에서 이신칭의 내지는 구원론, 회개, 성화, 기도에 관하여 논한 다음에 예정론을 취급한다. 적어도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Ⅱ권에서는 이 예정론을 신학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지 않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내지는 화해 사건에 있어서가 아니라, 이 구속 사업이 성령을 통하여 실현될 때, 예정론이 문제시되고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 칭의, 회개, 성화라고 하는 교회 공동체의 특수 경험이 곧 선택의 증거이다.
어거스틴의 경우, 이 예정 교리는 은총과 자유의 문제를 취급하는 反펠라기우스 작품들 가운데에 나온다. 즉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쪽의 은총을 강조하는 마당에서 이 예정 교리가 등장한다.2) 루터의 경우 역시 칼빈보다는 훨씬 예정론을 덜 강조하지만 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자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공로에 반대하여 오직 은총과 신앙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다가 이 예정 교리를 언급하게 된다.3) 따라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경우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는 데 관련하여 이 예정 교리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구조를 검토해 볼 때, 신학 체계에 있어서 예정론의 위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즉, 롬 1:1-3:20은 인간이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 밑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선포하고, 롬 3:21-6장까지는 은혜와 신앙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서 말하며, 롬 7장은 크리스천의 좌절과 갈등을, 그리고 제8장은 좌절됐던 크리스천의 승리 혹은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을 단절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나서 비로소 제9-11장에 이르러 예정교리를 논한다. 그리고 로마서의 나머지 부분은 기독교 윤리에 해당한다.
그러면 예정론은 단순히 구원 얻은 크리스천의 신앙고백에 불과한가? 이 예정론은 단순히 구원론의 부록에 불과한가? 없어도 되는 신앙 내용 내지는 신학적 주제인데 쓸데없이 추가된 것인가? 물론 예정론을 말하는 사람은 이미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다. 구원의 경험, 혹은 복음 말씀에 대한 신앙의 반응이 전제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예정 내지는 선택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예정이 단순히 구원의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주관적 신앙고백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결단 혹은 하나님의 선택에 기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예정론을 구원의 경험과 성화의 경험에서 분리시켜, 그 자체를 추상화시켜 논리적 대상으로 삼을 때 온갖 문제가 야기될 수밖에 없다.
Ⅱ. 기독교 강요 초판(1536), 1537년 제네바 신앙고백
칼빈은 초판 기독교강요(1536)에서 제 2 장 “신앙에 관하여”4) 에서 교회를 정의하기 위해서만 豫定敎理를 사용한다. 즉 칼빈은 예정론을 하나의 신학적인 주제로서 개별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다음은 1536년판에서 인용한 것이다.
“ 첫째로 우리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 곧 선택된 사람들의 총수를 믿으며······ ”
“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 백성 내지는 그의 교회로 택정하셨기 때문에 만약 우리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통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피택된 자들이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5)
우리는 위의 인용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현재적인 관계 경험이 영원 전에 성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것과 연결되는 것을 본다.
그런데 1537년 제네바 요리문답에서는 이 예정 교리가 목회 경험과 결부되어 있다. 즉 칼빈은 제네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 대하여 올바른 반응을 보였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음을 경험하였다. 환언하면 말씀에 대하여 전혀 기대 밖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닐까라고 의심했음직도 하다.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의 내용 구조는 다음과 같다.
Ⅰ. 하나님과 인간에 관하여
Ⅱ. 주님의 율법에 관하여
Ⅲ. 신앙에 관하여
Ⅳ. 기도에 관하여
Ⅴ. 성례전에 관하여
Ⅵ. 교회와 국가의 질서에 관하여
이 중에 예정 교리는 제Ⅲ장에서 취급하였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 강요 초판의 경우와 다를 바 없으나 다음의 인용은 제네바에서의 처음 목회 경험과 결부된 예정 교리를 말하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주님께서 그의 영원한 택정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늘 나라의 상속자로 확정하신 사람들의 경우는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 다른 한편 동일한 하나님의 택정에 의하여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유기된 사람들에게는 저 하나님의 진리를 아무리 소리 높여 설교하고 아무리 진실되게 선포하여도 다만 죽음의 입김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에서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깊이 생각한다. ”6)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중예정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칼빈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라고 하였다. 즉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고 어떤 사람들은 엄격하게 심판하시는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들 모두에게 감추어진 사실로 남아 있기를 원하셨다······”7)
이미 칼빈은 그 초기부터 이중예정을 주장하였고, 무엇보다 구원의 경험과 성화의 경험에서 동떨어진 추상적 내지는 논리적 예정 교리를 취급하지 않았다. 특히 우리는 칼빈에 있어서 예정론이 교회 정의와 기독교의 핵심적인 특수 경험과 결부된 것을 보았다. 칼 바르트는 칼빈의 예정론을 신론과도 관계가 없고, 창조론과 죄론 다음에 다루어진 예정론들의 부류에 넣으면서 특히 속죄론 내지는 화해론과 교회론에 긴밀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본다.8) 특히 바르트는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경험적으로 사건화하는 장소라고 한다.9)
Ⅲ. 기독교 강요 최종판(1599)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최종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예정 교리에 관하여 보충시켜 나갔다. 그런데 최종판에 그의 예정론의 전무가 들어 잇다. 이미 언급한 1536년 기독교강요의 豫定敎理와 1537년 제네바 요리문답에 나타날 豫定敎理의 내용이 최종판에도 그대로 나오면서 그 이상의 것이 상론되고 있다.
1. 교회론과 말씀의 반응에 결부된 이중 豫定敎理
우리는 1536년 초판 기독교강요에서 豫定敎理가 “교회”를 정의하는데 사용되었음을 보았고, 1537년 제네바 요리 문답에서 말씀 설교에 대한 반응에 적용시킨 것을 알았다. 우리는 1559년 최종판에서도 같은 주장을 발견한다. 칼빈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교회를 믿사오며’에 있어서 교회란 단순히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택자들’로서 이미 세상 떠난 성도들까지 내포한다.”10)고 하였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교회는 ‘보편적’이요 혹은 ‘카톨릭적’이라 ··· 그런데 모든 피택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있으며(엡1:22-23), 따라서 하나의 머리에 의존하면서 각 마디가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나는 한 몸이다(엡 4:16). 이들은 한 신앙과 한 소망과 한 사랑 안에서 함께 살고 동일한 하나님의 영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를 이룬다.”11) 말하자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피택자에 대한 사랑에 의존해 있다. 하지만 칼빈은 피택자와 유기된 자의 구별과 판단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유기된 자와 피택된 자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오직 우리가 확신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호의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돌입함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됐다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의 피택자이기 때문에 이 은혜를 누린다고 하는 사실이다.”12)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결부된 豫定敎理를 검토해 보자. 칼빈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생명의 은혜 언약을 설교 말씀을 통해서 선호할 때, 누구나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오한 결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확실히 이와 같은 차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단을 말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대하여 알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자비의 샘터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지 않고 어떤 이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는 것을 주신다고 하는 대조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밝히 말해 준다.”13)
칼빈은 그의 이중 예정을 다음과 같이 못박았다.
“성경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영원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을 일단 결정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는 계획에 의한 것이다. 다른 한편 멸망 받을 사람들도 확정하셨다.”14)
위에서 본대로 칼빈은 이중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이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구원론적 반응과 연결시켰다.
2. 은혜와 신앙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예정교리
위에서 우리는 예정교리가 교회 정의와 말씀에 대한 반응과 직결된 것을 보았다. 여기에 우리는 구원론과 직결된 예정 교리의 성경적 근거를 더듬어 보자. 칼빈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15)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공로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결부하여 칼빈은 롬 11:5-6도 중요히 여긴다. 즉, “···그 사람들은 자기 공로로 뽑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뽑힌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무슨 공로가 있어서 뽑힌 것이라면 그 은총은 은총이 아닐 것입니다.”16) 칼빈은 이것을 더 명확히 주장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반사시키는 가장 분명한 거울이라고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와 십자가와 부활 등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일어난 것으로 보면,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예수를 그가 어떤 공로를 쌓기 이전에 글 택정하셨다고 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결코 만인 구원론의 방향으로 나가지도 않고, 인간의 자유에 의한 구원론을 펼치지도 않는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라.”17)는 칼빈에게 있어서 믿는 성도들의 피택의 수동성과 특수성을 의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언급한 말씀의 반응 역시 수동적이었다. 하나님의 선택적 결단이 먼저 일어날 때 인간의 수동적 결단이 일어난다. 이 수동적 반응에 있어서 결코 인간에게 이성과 의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칼빈은 무엇보다 롬 9:11에 호소하면서 9:11-13을 인용한다. 즉,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과의 사이에서 한 번에 두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로 보시고 불러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기록된 성경의 말씀대로입니다.”
칼빈은 이와 같은 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이중 예정 교리의 알맹이는 바울에 있어서 이신칭의 내지는 구원론에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칼빈은 이와 같은 사실을 더 강하게 주장하기 위하여 요한복음에서 인용한다. 그 예를 들어보자.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18)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19)
이상에서 칼빈은 분명히 이중 예정론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중 예정론이 말씀의 반응, 무엇보다 구원론과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칼빈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종교 개혁적 구원론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이 구원의 초월적 근거로서 하나님의 원초적 결단을 내세운다. 이 신성의 교리가 초월적 근거를 상실하는 개신교의 구원론에 반하여 칼빈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만큼 말하려는 의도를 구원의 초월적 근거에서도 찾아볼 수 잇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중 예정론이 안고 잇는 위험성도 인정해야 한다. 즉 우리들이 경험에 의해서 선택과 유기를 판단할 때, 잘 믿는 사람 같이 보이는 사람이 언젠가 넘어질 수도 있을 가능성과 불경건한 사람 같이 보이는 사람이 언젠가 넘어질 수도 있을 가능성과 불경건한 사람 같이 보이는 사람이 언젠가 잘 믿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가능성을 헤아릴 수 없다.
3. 예정과 인간의 책임
칼빈은 “모든 아담의 후예는 ··· 한 사람 까닭에 영원한 죽음에 떨어졌다(롬5:12b)”고 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밑에 있는 죄인이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 밑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책 가운데 있다. 인간은 아담과 더불어 범죄하였다.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칼빈이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죄를 범하나 이 범죄는 반드시 인간 자신의 과오임에 틀림없다”20)고 할 때, 소위 원죄나 실제로 짓는 죄를 막론하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가정, 사회, 국가, 학문 활동 등에 있어서 인간은 책임적 존재임을 칼빈은 인정한다.21) 그러면 구원에 관한 인간의 책임은 어떠한가? 칼빈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의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는 결코 구원을 쟁취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구원과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있어서 노예 의지이다.22)
모든 인간은 심판하에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지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시에 자비와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는 저 심판과 죽음에 노예된 인간들 가운데에서 그의 피택자들을 뽑아 내신다.23) 하지만 그가 자비롭고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하는 것은 만인 구원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급한 이중 예정론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예정과 은총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주님은 그가 원하는 자에게 ··· 은혜를 그냥 주신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 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신다.”24)
결국 이 하나님의 선택적 은총이 말씀 설교를 통하여 성령 역사로 일어나는데 이 때 어두워진 이성과 굽혀진 의지는 성령의 조명과 감동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신앙인데, 말씀에 대한 이성과 의지의 수동적 반응이다.25)
여기에서 인간의 책임이란 하나님의 자비로운 택정을 전제한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찾아오실 때 피택자는 책임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유기의 경우도 하나님의 의가 성립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죄의 값으로 죽음과 영원한 형벌 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중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에 앞서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한다. 따라서 유기 역시 하나님의 주권 행사를 전제한다. 예정 신학에서 말하는 “책임”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문제되는 일상적인 책임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왜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그냥 심판과 죽음에 버려 두시는가? 왜 아담은 범죄하였고, 왜 우리가 아담의 죄에 동참하였나? 왜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수용하여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며, 왜 어떤 이들은 그대로 저주와 심판 밑에 있는가? 인간의 책임이 왜 단순히 수동적이요, 소극적이요, 하나님의 적극적인 결단과 행동에 의존하는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은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신비 영역에 속한다. 칼빈은 롬 9:20-21과 롬 11:33을 인용한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 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오! 하나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 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4. 예정과 그 증거들
칼빈은 기독교강요(1559) 제Ⅲ권에서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말하는데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는 저 신비적 연합의 소산이요 또한 이 신비적 연합을 강화시킨다. 그런데 칼빈이 예정론을 이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 다음에 취급하는 것을 볼 때, 이는 곧 피택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에 이른다고 봐야 한다. 예정교리는 결코 경험적인 것(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를 떠나서 논리화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의 경험이 있는 자들이 예정된 자들이요, 예정된 자들이 곧 성도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신칭의 등의 경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부르고,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한 내적 부르심이 함께 일어남으로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의 경험에로 나아간다. 그런데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고 칼빈이 인용할 때, 우리는 “성화”라고 하는 과정을 삽입해도 좋다. 그 이유는 바울의 글 도처에서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대해서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의 경험은 기독교인들의 특수 경험이요, 교회의 특수성을 증거한다.
칼빈은 기독교 신앙이란 결코 주관적 신앙의 소산이 아니라 신앙이 예정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즉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복음을 수용하고 나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26)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신앙이 예정에 의존한다고 할 때, 결코 영원의 차원으로 날아가서도 안된다. 이 신앙 내용의 초점은 成肉하시고, 十字架와 復活 사건을 통하여 구속을 이루시고, 지금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관계 맺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신앙 내용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는다”(요3:16)는 사실과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에로 옮겨졌다”(요5:24)는 사실과 “이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요6:51,58)인데, 결국 자유의지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을 전제하고 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나아가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화해 관계이다. 칼빈은 구원 신앙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복음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 증거된다. 이것이 다름 아니라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롬 8:32).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롬 13:14).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성장한다(엡 4:15). 그래서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으로 우리도 살아 있다.”27)
다음의 인용에서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이 얼마나 기독론 中心的인가를 알 수 있다(칼빈적인 이중 예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길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려야 한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 생명, 하늘 나라의 영생을 찾으려면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원천이요, 구원의 닻이요, 하늘나라의 상속자인고로 오직 우리는 이 그리스도에게로 피난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거울이다. 이 거울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예정을 묵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속이기 쉽다.”28)
따라서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확신은 위의 신앙 내용에 초점을 맞춘 확신이어야 한다.
누가 우리에게(믿는 성도들) 하나님의 예정이 어떤 싸인들을 통해서 나타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위에서 지적한대로 기독론적-구원론적 신앙고백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회개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칼빈신학을 특정짓는 성화가 예정의 싸인이라는 점을 두드러지게 말해야 한다. 어는 정도 신앙과 회개도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성화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피택의 싸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교리가 기독교인들을 나태하게 만든다는 비난에 대하여 예정교리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오히려 이 예정의 의도는 사람들이 겸손해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떨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를 높이는 데 있다.”29) 그리고 나서 칼빈은 엡1:4-5을 인용한다. 칼빈은 피택자에게 있어야 할 성화를 주장하기 위하여, 예정을 가르치는 바울이 거룩한 삶을 위한 많은 훈령들을 명했다고 지적하면서, 엡 2:10을 인용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소위 “실천적 삼단논법”과 비슷한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즉 선택된 사람들은 윤리적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나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고로 나도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퓨리탄들에게서 이 실천적 삼단논법이 강조되는 것을 보는데 칼빈의 다음과 같은 글은 구원과 그 열매의 관계를 상당히 온건하게 말한다. 즉, “···믿는 자들은 행위들을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싸인들로 여긴다. 이들은 이 싸인들을 보고 자기들의 피택을 확인한다.”30) 이는 “성령이 內住하신다는 증거로서 중생의 열매들이기에 성도들은 이 증거를 보고 온갖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계속 기대한다. 이와 같은 열매를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다.”31) 따라서 “성도들은 자기들의 양심이 깨끗하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들의 신앙을 재확인하며 더욱 기뻐한다. 그러나 이 부르심의 열매를 보고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셨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열매들이 신앙과 예정을 구축할 수 없다. 이 열매들은 다만 예정과 신앙이 경험적으로 드러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실천적 삼단 논법은 개혁 교회의 신학을 특징 지운다.32) 즉 루터의 경우에 이와 같은 논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나님의 선택이 어떻게 증명되는가? 이미 우리는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에 관해서 언급했다. 이어서 교회론과 연결시킬 때, 칼빈은 교회란 “피택자의 총수”라고 하면서, 이 교회의 可視的指標를 말한다. 부언하면, 이 可視的指標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설교하고 세례와 성만찬을 베풀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성화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교회가 교회된 싸인이다. 따라서 피택된 싸인이란 적어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신앙을 고백하고 회개와 성화의 삶을 지속하며,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는 안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사랑의 판단”33)을 주장한다. 즉 위의 싸인들이 있을 경우 그들을 피택자와 교회로 인정하자는 사랑의 판단인 것이다.
Ⅳ. 結 論
우리는 지금까지 칼빈의 예정론을 개혁주의 신학전통에 조명하면서 칼빈 자신의 주장에 유의하였으며, 그의 예정론을 초기 작품에서부터 더듬기 시작하여 기독교강요 최종판의 내용에 집중하였다.
칼빈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자리는 결코 초월의 차원으로 날아가 버리거나 모든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이나 대전제 같은 것이 아니라 바울의 로마서에 나타난 예정론의 자리와 어거스틴의 反Pelagius 作品에 나타나는 은혜론 내지는 구원론의 자리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칼빈 선생이 교회 정의를 위해서 이 예정 교리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았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교회가 곧 피택자라 하는 것이다. 제네바 신앙고백(1537)은 좀더 경험적으로 말한다. 즉 복음 말씀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곧 예정된 사람이라고 칼빈은 그의 목회 경험에 근거하여 주장한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 역시 그의 초기 예정론과 연속성을 갖는다. 즉, 교회의 말씀 설교에 대한 신앙과 순종으로의 반응은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는 초월적 근거를 갖는다. 그리스도와의 성령을 통한 신비적 연합,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는 현실적인 경험으로서 하나님의 先결단이라고 하는 초월적 근거 없이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이리라. 태초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先결단은 인간의 공로와 자만을 배제한다. 이 예정 교리는 구원 얻은 성도들의 단순한 고백,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한 뜻에 의한 사건이다.
칼빈이 교회의 표지를 말씀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 집행 및 이에 대한 신앙과 순종으로의 반응이라고 할 때 적어도 예배하는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신비적 연합에 이르고, 이어서 이신칭의 경험과 아울러 회개와 성화 및 기도에 힘쓰는 사람들은 사람의 판단에 의하여 택정된 사람들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이상의 신앙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아마도 유기된 사람들의 부류에 속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비밀한 판단에 맡겨야 하겠으나 적어도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의 특수 경험 및 특수 공동체인 교회론적 경험 없이는 예정론을 논하기 어렵다.
우리는 적어도 성경이 말씀하는 데까지 말해야 한다. 은폐된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사변적으로 캐내어서도 안되며, K. Barth처럼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인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여 만인 구원론으로 나가서도 안 될 것이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태초에 모든 인류를 구원에로 택정하셨으며, 이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를 통하여 모든 인류가 심판을 받았고, 復活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대표하는 인간으로서 피택된자인 동시에 주님이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신 예수를 택정하신 자라고 하는 기독론적 역설에 의하여 바르트는 萬人救援論의 경향으로 나간다. 이에 反하여 우리가 論한 칼빈 자신의 예정론은 이중 예정론과 아울러 궁극적인 판단을 하나님께 돌린다. 바울 역시 예정론의 결론은 하나님의 신비로 돌린다. 따라서 바르트는 바울보다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더 아는 것처럼 보인다.
< 참 고 문 헌 >
1.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I (New York : Harper & Brrother, 1931)
2. 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 Nicene Fathers, vol. V
3. Hyung Ki Rhee, A Study of Man in Erasmus and Luther, 1980
4.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도)
5. 기독교 강요 vol. Ⅱ, Ⅲ, Ⅳ
6. Opera Selecta Calvini, ed. W. Niesel, vol. I
7. John Cavin, Christliche UnterWeisung ; Der Genfer Katechismus von 1537 ubersetzt von Lothar Schukert(Furche, 1963)
8. Karl Barth, Die Kirchiche Dogmatik(Zurich : Er. Verlag, 1539)
9. J.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L.c.D, Tr. by Ford Lewis Battles(Philadelphia : The Westminster Press, 1967), Ⅳ
10. 이종성, 회갑논문(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비추어 본 칼빈에 있어서 인간과 구원), 1982
11. 기독교 신학개론, 루이스뻘콮 저,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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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우리는 1559년에 출판된 최종판 “기독교 강요”를 논하고 있다.
2) A Select of the Niceme And Post Nicene Father, vol. V, (Anti-Pellagian Writings), ed. by Philip Schaff. 특히 이 책에 소개된 On the Grace and Free Will(A.D.426-27)과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A.D. 428-29)에 나타남
3) Hyung Ki Rhee, A Study of Man in Erasmus and Luther(Ph.D. Dissertation at Drew, 1980), p.178ff.
4) 1536판의 내용 구조는 다음과 같다.
Ⅰ. 율법에 관하여 Ⅱ. 신앙에 관하여 Ⅲ. 기도와 주기도문
Ⅳ. 성례전들 Ⅴ. 다섯 가지 거짓 성례전들 Ⅵ. 기독자의 자유
5) Opera Selecta Calvini, ed. W. Niesel, vol. I, p.88.
6) Jean Calvin, Christliche Unterwereisung ; Der Genfer Katechismus von 1537, p.29.
7) Loc. Cit.
8)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pp.87-88.
9) Ibid., p.90.
10) J.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L.C.C, Tr. by ford Lewis “Credo” 다음에 “in”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도들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구별한다.
11) Inst. Ⅳ, i, 2.
12) Ⅳ, 1, 3.
13) Ⅲ, xxi, 1.
14) Ⅲ, xxi, 7.
15) 에베소서 1:4-5
16) 신7:6-9, 9:6, 사47:4, 100:3, 105:6, 65:4, 33:2, 14:1,9.
17) 요15:16
18) 요6:37-39.
19) 요6:44-45.
20) Ⅲ, xxiii, 8.
21) Ⅱ, ii, 14,15,16.
22) Ⅱ, iv, 1.
23) Ⅲ, xxiii, 11.
24) Ⅲ, xxiii, 11.
25)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비추어 본 칼빈에 있어서 인간과 구원”, 이종성 회갑논문(1982), pp. 93ff
26) Ⅲ, xxiv, 3.
27) Ⅲ, xxiv, 5.
28) Ⅲ, xxiv, 5.
29) Ⅲ, xxiii, 12.
30) Ⅲ, xiv, 20.
31) Ⅲ, xiv, 20.
32) Niesel, op. cit., pp.175 : Niesel은 칼빈에게 있어서 Syllogismus Practicus를 인정하기 어렵다 고 한다.
33) Ⅳ, i,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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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칼빈 신학에 있어서 豫定敎理의 자리
칼빈에 있어서 豫定論의 위치가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칼빈은 1559년에 출판된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豫定敎理를 제Ⅲ권(성령론 혹은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의 끝부분과 제Ⅳ권(교회론) 직전에서 취급한다.1) 환언하면 창조주 하나님(제I권), 구속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업(제Ⅱ권)을 다룬 후, 제Ⅲ권, 화해의 실현 내지는 화해의 적용 끝부분에서 취급한다. 따라서 칼빈은 제Ⅲ권에서 이신칭의 내지는 구원론, 회개, 성화, 기도에 관하여 논한 다음에 예정론을 취급한다. 적어도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Ⅱ권에서는 이 예정론을 신학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지 않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내지는 화해 사건에 있어서가 아니라, 이 구속 사업이 성령을 통하여 실현될 때, 예정론이 문제시되고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 칭의, 회개, 성화라고 하는 교회 공동체의 특수 경험이 곧 선택의 증거이다.
어거스틴의 경우, 이 예정 교리는 은총과 자유의 문제를 취급하는 反펠라기우스 작품들 가운데에 나온다. 즉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쪽의 은총을 강조하는 마당에서 이 예정 교리가 등장한다.2) 루터의 경우 역시 칼빈보다는 훨씬 예정론을 덜 강조하지만 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자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공로에 반대하여 오직 은총과 신앙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다가 이 예정 교리를 언급하게 된다.3) 따라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경우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는 데 관련하여 이 예정 교리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구조를 검토해 볼 때, 신학 체계에 있어서 예정론의 위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즉, 롬 1:1-3:20은 인간이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 밑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선포하고, 롬 3:21-6장까지는 은혜와 신앙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서 말하며, 롬 7장은 크리스천의 좌절과 갈등을, 그리고 제8장은 좌절됐던 크리스천의 승리 혹은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을 단절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나서 비로소 제9-11장에 이르러 예정교리를 논한다. 그리고 로마서의 나머지 부분은 기독교 윤리에 해당한다.
그러면 예정론은 단순히 구원 얻은 크리스천의 신앙고백에 불과한가? 이 예정론은 단순히 구원론의 부록에 불과한가? 없어도 되는 신앙 내용 내지는 신학적 주제인데 쓸데없이 추가된 것인가? 물론 예정론을 말하는 사람은 이미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다. 구원의 경험, 혹은 복음 말씀에 대한 신앙의 반응이 전제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예정 내지는 선택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예정이 단순히 구원의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주관적 신앙고백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결단 혹은 하나님의 선택에 기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예정론을 구원의 경험과 성화의 경험에서 분리시켜, 그 자체를 추상화시켜 논리적 대상으로 삼을 때 온갖 문제가 야기될 수밖에 없다.
Ⅱ. 기독교 강요 초판(1536), 1537년 제네바 신앙고백
칼빈은 초판 기독교강요(1536)에서 제 2 장 “신앙에 관하여”4) 에서 교회를 정의하기 위해서만 豫定敎理를 사용한다. 즉 칼빈은 예정론을 하나의 신학적인 주제로서 개별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다음은 1536년판에서 인용한 것이다.
“ 첫째로 우리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 곧 선택된 사람들의 총수를 믿으며······ ”
“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 백성 내지는 그의 교회로 택정하셨기 때문에 만약 우리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통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피택된 자들이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5)
우리는 위의 인용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현재적인 관계 경험이 영원 전에 성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것과 연결되는 것을 본다.
그런데 1537년 제네바 요리문답에서는 이 예정 교리가 목회 경험과 결부되어 있다. 즉 칼빈은 제네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 대하여 올바른 반응을 보였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음을 경험하였다. 환언하면 말씀에 대하여 전혀 기대 밖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닐까라고 의심했음직도 하다.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의 내용 구조는 다음과 같다.
Ⅰ. 하나님과 인간에 관하여
Ⅱ. 주님의 율법에 관하여
Ⅲ. 신앙에 관하여
Ⅳ. 기도에 관하여
Ⅴ. 성례전에 관하여
Ⅵ. 교회와 국가의 질서에 관하여
이 중에 예정 교리는 제Ⅲ장에서 취급하였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 강요 초판의 경우와 다를 바 없으나 다음의 인용은 제네바에서의 처음 목회 경험과 결부된 예정 교리를 말하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주님께서 그의 영원한 택정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늘 나라의 상속자로 확정하신 사람들의 경우는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 다른 한편 동일한 하나님의 택정에 의하여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유기된 사람들에게는 저 하나님의 진리를 아무리 소리 높여 설교하고 아무리 진실되게 선포하여도 다만 죽음의 입김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에서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깊이 생각한다. ”6)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중예정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칼빈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라고 하였다. 즉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고 어떤 사람들은 엄격하게 심판하시는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들 모두에게 감추어진 사실로 남아 있기를 원하셨다······”7)
이미 칼빈은 그 초기부터 이중예정을 주장하였고, 무엇보다 구원의 경험과 성화의 경험에서 동떨어진 추상적 내지는 논리적 예정 교리를 취급하지 않았다. 특히 우리는 칼빈에 있어서 예정론이 교회 정의와 기독교의 핵심적인 특수 경험과 결부된 것을 보았다. 칼 바르트는 칼빈의 예정론을 신론과도 관계가 없고, 창조론과 죄론 다음에 다루어진 예정론들의 부류에 넣으면서 특히 속죄론 내지는 화해론과 교회론에 긴밀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본다.8) 특히 바르트는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경험적으로 사건화하는 장소라고 한다.9)
Ⅲ. 기독교 강요 최종판(1599)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최종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예정 교리에 관하여 보충시켜 나갔다. 그런데 최종판에 그의 예정론의 전무가 들어 잇다. 이미 언급한 1536년 기독교강요의 豫定敎理와 1537년 제네바 요리문답에 나타날 豫定敎理의 내용이 최종판에도 그대로 나오면서 그 이상의 것이 상론되고 있다.
1. 교회론과 말씀의 반응에 결부된 이중 豫定敎理
우리는 1536년 초판 기독교강요에서 豫定敎理가 “교회”를 정의하는데 사용되었음을 보았고, 1537년 제네바 요리 문답에서 말씀 설교에 대한 반응에 적용시킨 것을 알았다. 우리는 1559년 최종판에서도 같은 주장을 발견한다. 칼빈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교회를 믿사오며’에 있어서 교회란 단순히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택자들’로서 이미 세상 떠난 성도들까지 내포한다.”10)고 하였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교회는 ‘보편적’이요 혹은 ‘카톨릭적’이라 ··· 그런데 모든 피택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있으며(엡1:22-23), 따라서 하나의 머리에 의존하면서 각 마디가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나는 한 몸이다(엡 4:16). 이들은 한 신앙과 한 소망과 한 사랑 안에서 함께 살고 동일한 하나님의 영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를 이룬다.”11) 말하자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피택자에 대한 사랑에 의존해 있다. 하지만 칼빈은 피택자와 유기된 자의 구별과 판단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유기된 자와 피택된 자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오직 우리가 확신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호의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돌입함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됐다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의 피택자이기 때문에 이 은혜를 누린다고 하는 사실이다.”12)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결부된 豫定敎理를 검토해 보자. 칼빈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생명의 은혜 언약을 설교 말씀을 통해서 선호할 때, 누구나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오한 결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확실히 이와 같은 차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단을 말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대하여 알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자비의 샘터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지 않고 어떤 이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는 것을 주신다고 하는 대조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밝히 말해 준다.”13)
칼빈은 그의 이중 예정을 다음과 같이 못박았다.
“성경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영원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을 일단 결정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는 계획에 의한 것이다. 다른 한편 멸망 받을 사람들도 확정하셨다.”14)
위에서 본대로 칼빈은 이중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이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구원론적 반응과 연결시켰다.
2. 은혜와 신앙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예정교리
위에서 우리는 예정교리가 교회 정의와 말씀에 대한 반응과 직결된 것을 보았다. 여기에 우리는 구원론과 직결된 예정 교리의 성경적 근거를 더듬어 보자. 칼빈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15)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공로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결부하여 칼빈은 롬 11:5-6도 중요히 여긴다. 즉, “···그 사람들은 자기 공로로 뽑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뽑힌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무슨 공로가 있어서 뽑힌 것이라면 그 은총은 은총이 아닐 것입니다.”16) 칼빈은 이것을 더 명확히 주장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반사시키는 가장 분명한 거울이라고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와 십자가와 부활 등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일어난 것으로 보면,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예수를 그가 어떤 공로를 쌓기 이전에 글 택정하셨다고 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결코 만인 구원론의 방향으로 나가지도 않고, 인간의 자유에 의한 구원론을 펼치지도 않는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라.”17)는 칼빈에게 있어서 믿는 성도들의 피택의 수동성과 특수성을 의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언급한 말씀의 반응 역시 수동적이었다. 하나님의 선택적 결단이 먼저 일어날 때 인간의 수동적 결단이 일어난다. 이 수동적 반응에 있어서 결코 인간에게 이성과 의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칼빈은 무엇보다 롬 9:11에 호소하면서 9:11-13을 인용한다. 즉,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과의 사이에서 한 번에 두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로 보시고 불러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기록된 성경의 말씀대로입니다.”
칼빈은 이와 같은 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이중 예정 교리의 알맹이는 바울에 있어서 이신칭의 내지는 구원론에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칼빈은 이와 같은 사실을 더 강하게 주장하기 위하여 요한복음에서 인용한다. 그 예를 들어보자.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18)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19)
이상에서 칼빈은 분명히 이중 예정론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중 예정론이 말씀의 반응, 무엇보다 구원론과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칼빈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종교 개혁적 구원론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이 구원의 초월적 근거로서 하나님의 원초적 결단을 내세운다. 이 신성의 교리가 초월적 근거를 상실하는 개신교의 구원론에 반하여 칼빈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만큼 말하려는 의도를 구원의 초월적 근거에서도 찾아볼 수 잇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중 예정론이 안고 잇는 위험성도 인정해야 한다. 즉 우리들이 경험에 의해서 선택과 유기를 판단할 때, 잘 믿는 사람 같이 보이는 사람이 언젠가 넘어질 수도 있을 가능성과 불경건한 사람 같이 보이는 사람이 언젠가 넘어질 수도 있을 가능성과 불경건한 사람 같이 보이는 사람이 언젠가 잘 믿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가능성을 헤아릴 수 없다.
3. 예정과 인간의 책임
칼빈은 “모든 아담의 후예는 ··· 한 사람 까닭에 영원한 죽음에 떨어졌다(롬5:12b)”고 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밑에 있는 죄인이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 밑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책 가운데 있다. 인간은 아담과 더불어 범죄하였다.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칼빈이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죄를 범하나 이 범죄는 반드시 인간 자신의 과오임에 틀림없다”20)고 할 때, 소위 원죄나 실제로 짓는 죄를 막론하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가정, 사회, 국가, 학문 활동 등에 있어서 인간은 책임적 존재임을 칼빈은 인정한다.21) 그러면 구원에 관한 인간의 책임은 어떠한가? 칼빈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의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는 결코 구원을 쟁취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구원과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있어서 노예 의지이다.22)
모든 인간은 심판하에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지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시에 자비와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는 저 심판과 죽음에 노예된 인간들 가운데에서 그의 피택자들을 뽑아 내신다.23) 하지만 그가 자비롭고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하는 것은 만인 구원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급한 이중 예정론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예정과 은총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주님은 그가 원하는 자에게 ··· 은혜를 그냥 주신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 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신다.”24)
결국 이 하나님의 선택적 은총이 말씀 설교를 통하여 성령 역사로 일어나는데 이 때 어두워진 이성과 굽혀진 의지는 성령의 조명과 감동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신앙인데, 말씀에 대한 이성과 의지의 수동적 반응이다.25)
여기에서 인간의 책임이란 하나님의 자비로운 택정을 전제한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찾아오실 때 피택자는 책임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유기의 경우도 하나님의 의가 성립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죄의 값으로 죽음과 영원한 형벌 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중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에 앞서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한다. 따라서 유기 역시 하나님의 주권 행사를 전제한다. 예정 신학에서 말하는 “책임”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문제되는 일상적인 책임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왜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그냥 심판과 죽음에 버려 두시는가? 왜 아담은 범죄하였고, 왜 우리가 아담의 죄에 동참하였나? 왜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수용하여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며, 왜 어떤 이들은 그대로 저주와 심판 밑에 있는가? 인간의 책임이 왜 단순히 수동적이요, 소극적이요, 하나님의 적극적인 결단과 행동에 의존하는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은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신비 영역에 속한다. 칼빈은 롬 9:20-21과 롬 11:33을 인용한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 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오! 하나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 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4. 예정과 그 증거들
칼빈은 기독교강요(1559) 제Ⅲ권에서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말하는데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는 저 신비적 연합의 소산이요 또한 이 신비적 연합을 강화시킨다. 그런데 칼빈이 예정론을 이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 다음에 취급하는 것을 볼 때, 이는 곧 피택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에 이른다고 봐야 한다. 예정교리는 결코 경험적인 것(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를 떠나서 논리화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의 경험이 있는 자들이 예정된 자들이요, 예정된 자들이 곧 성도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신칭의 등의 경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부르고,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한 내적 부르심이 함께 일어남으로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의 경험에로 나아간다. 그런데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고 칼빈이 인용할 때, 우리는 “성화”라고 하는 과정을 삽입해도 좋다. 그 이유는 바울의 글 도처에서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대해서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의 경험은 기독교인들의 특수 경험이요, 교회의 특수성을 증거한다.
칼빈은 기독교 신앙이란 결코 주관적 신앙의 소산이 아니라 신앙이 예정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즉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복음을 수용하고 나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26)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신앙이 예정에 의존한다고 할 때, 결코 영원의 차원으로 날아가서도 안된다. 이 신앙 내용의 초점은 成肉하시고, 十字架와 復活 사건을 통하여 구속을 이루시고, 지금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관계 맺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신앙 내용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는다”(요3:16)는 사실과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에로 옮겨졌다”(요5:24)는 사실과 “이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요6:51,58)인데, 결국 자유의지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을 전제하고 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나아가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화해 관계이다. 칼빈은 구원 신앙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복음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 증거된다. 이것이 다름 아니라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롬 8:32).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롬 13:14).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성장한다(엡 4:15). 그래서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으로 우리도 살아 있다.”27)
다음의 인용에서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이 얼마나 기독론 中心的인가를 알 수 있다(칼빈적인 이중 예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길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려야 한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 생명, 하늘 나라의 영생을 찾으려면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원천이요, 구원의 닻이요, 하늘나라의 상속자인고로 오직 우리는 이 그리스도에게로 피난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거울이다. 이 거울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예정을 묵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속이기 쉽다.”28)
따라서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확신은 위의 신앙 내용에 초점을 맞춘 확신이어야 한다.
누가 우리에게(믿는 성도들) 하나님의 예정이 어떤 싸인들을 통해서 나타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위에서 지적한대로 기독론적-구원론적 신앙고백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회개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칼빈신학을 특정짓는 성화가 예정의 싸인이라는 점을 두드러지게 말해야 한다. 어는 정도 신앙과 회개도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성화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피택의 싸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교리가 기독교인들을 나태하게 만든다는 비난에 대하여 예정교리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오히려 이 예정의 의도는 사람들이 겸손해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떨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를 높이는 데 있다.”29) 그리고 나서 칼빈은 엡1:4-5을 인용한다. 칼빈은 피택자에게 있어야 할 성화를 주장하기 위하여, 예정을 가르치는 바울이 거룩한 삶을 위한 많은 훈령들을 명했다고 지적하면서, 엡 2:10을 인용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소위 “실천적 삼단논법”과 비슷한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즉 선택된 사람들은 윤리적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나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고로 나도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퓨리탄들에게서 이 실천적 삼단논법이 강조되는 것을 보는데 칼빈의 다음과 같은 글은 구원과 그 열매의 관계를 상당히 온건하게 말한다. 즉, “···믿는 자들은 행위들을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싸인들로 여긴다. 이들은 이 싸인들을 보고 자기들의 피택을 확인한다.”30) 이는 “성령이 內住하신다는 증거로서 중생의 열매들이기에 성도들은 이 증거를 보고 온갖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계속 기대한다. 이와 같은 열매를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다.”31) 따라서 “성도들은 자기들의 양심이 깨끗하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들의 신앙을 재확인하며 더욱 기뻐한다. 그러나 이 부르심의 열매를 보고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셨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열매들이 신앙과 예정을 구축할 수 없다. 이 열매들은 다만 예정과 신앙이 경험적으로 드러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실천적 삼단 논법은 개혁 교회의 신학을 특징 지운다.32) 즉 루터의 경우에 이와 같은 논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나님의 선택이 어떻게 증명되는가? 이미 우리는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에 관해서 언급했다. 이어서 교회론과 연결시킬 때, 칼빈은 교회란 “피택자의 총수”라고 하면서, 이 교회의 可視的指標를 말한다. 부언하면, 이 可視的指標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설교하고 세례와 성만찬을 베풀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성화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교회가 교회된 싸인이다. 따라서 피택된 싸인이란 적어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신앙을 고백하고 회개와 성화의 삶을 지속하며,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는 안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사랑의 판단”33)을 주장한다. 즉 위의 싸인들이 있을 경우 그들을 피택자와 교회로 인정하자는 사랑의 판단인 것이다.
Ⅳ. 結 論
우리는 지금까지 칼빈의 예정론을 개혁주의 신학전통에 조명하면서 칼빈 자신의 주장에 유의하였으며, 그의 예정론을 초기 작품에서부터 더듬기 시작하여 기독교강요 최종판의 내용에 집중하였다.
칼빈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자리는 결코 초월의 차원으로 날아가 버리거나 모든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이나 대전제 같은 것이 아니라 바울의 로마서에 나타난 예정론의 자리와 어거스틴의 反Pelagius 作品에 나타나는 은혜론 내지는 구원론의 자리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칼빈 선생이 교회 정의를 위해서 이 예정 교리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았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교회가 곧 피택자라 하는 것이다. 제네바 신앙고백(1537)은 좀더 경험적으로 말한다. 즉 복음 말씀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곧 예정된 사람이라고 칼빈은 그의 목회 경험에 근거하여 주장한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 역시 그의 초기 예정론과 연속성을 갖는다. 즉, 교회의 말씀 설교에 대한 신앙과 순종으로의 반응은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는 초월적 근거를 갖는다. 그리스도와의 성령을 통한 신비적 연합, 이신칭의, 회개, 성화, 기도는 현실적인 경험으로서 하나님의 先결단이라고 하는 초월적 근거 없이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이리라. 태초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先결단은 인간의 공로와 자만을 배제한다. 이 예정 교리는 구원 얻은 성도들의 단순한 고백,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한 뜻에 의한 사건이다.
칼빈이 교회의 표지를 말씀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 집행 및 이에 대한 신앙과 순종으로의 반응이라고 할 때 적어도 예배하는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신비적 연합에 이르고, 이어서 이신칭의 경험과 아울러 회개와 성화 및 기도에 힘쓰는 사람들은 사람의 판단에 의하여 택정된 사람들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이상의 신앙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아마도 유기된 사람들의 부류에 속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비밀한 판단에 맡겨야 하겠으나 적어도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의 특수 경험 및 특수 공동체인 교회론적 경험 없이는 예정론을 논하기 어렵다.
우리는 적어도 성경이 말씀하는 데까지 말해야 한다. 은폐된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사변적으로 캐내어서도 안되며, K. Barth처럼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인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여 만인 구원론으로 나가서도 안 될 것이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태초에 모든 인류를 구원에로 택정하셨으며, 이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를 통하여 모든 인류가 심판을 받았고, 復活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대표하는 인간으로서 피택된자인 동시에 주님이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신 예수를 택정하신 자라고 하는 기독론적 역설에 의하여 바르트는 萬人救援論의 경향으로 나간다. 이에 反하여 우리가 論한 칼빈 자신의 예정론은 이중 예정론과 아울러 궁극적인 판단을 하나님께 돌린다. 바울 역시 예정론의 결론은 하나님의 신비로 돌린다. 따라서 바르트는 바울보다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더 아는 것처럼 보인다.
< 참 고 문 헌 >
1.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I (New York : Harper & Brrother, 1931)
2. 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 Nicene Fathers, vol. V
3. Hyung Ki Rhee, A Study of Man in Erasmus and Luther, 1980
4.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도)
5. 기독교 강요 vol. Ⅱ, Ⅲ, Ⅳ
6. Opera Selecta Calvini, ed. W. Niesel, vol. I
7. John Cavin, Christliche UnterWeisung ; Der Genfer Katechismus von 1537 ubersetzt von Lothar Schukert(Furche, 1963)
8. Karl Barth, Die Kirchiche Dogmatik(Zurich : Er. Verlag, 1539)
9. J.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L.c.D, Tr. by Ford Lewis Battles(Philadelphia : The Westminster Press, 1967), Ⅳ
10. 이종성, 회갑논문(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비추어 본 칼빈에 있어서 인간과 구원), 1982
11. 기독교 신학개론, 루이스뻘콮 저,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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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우리는 1559년에 출판된 최종판 “기독교 강요”를 논하고 있다.
2) A Select of the Niceme And Post Nicene Father, vol. V, (Anti-Pellagian Writings), ed. by Philip Schaff. 특히 이 책에 소개된 On the Grace and Free Will(A.D.426-27)과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A.D. 428-29)에 나타남
3) Hyung Ki Rhee, A Study of Man in Erasmus and Luther(Ph.D. Dissertation at Drew, 1980), p.178ff.
4) 1536판의 내용 구조는 다음과 같다.
Ⅰ. 율법에 관하여 Ⅱ. 신앙에 관하여 Ⅲ. 기도와 주기도문
Ⅳ. 성례전들 Ⅴ. 다섯 가지 거짓 성례전들 Ⅵ. 기독자의 자유
5) Opera Selecta Calvini, ed. W. Niesel, vol. I, p.88.
6) Jean Calvin, Christliche Unterwereisung ; Der Genfer Katechismus von 1537, p.29.
7) Loc. Cit.
8)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pp.87-88.
9) Ibid., p.90.
10) J.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L.C.C, Tr. by ford Lewis “Credo” 다음에 “in”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도들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구별한다.
11) Inst. Ⅳ, i, 2.
12) Ⅳ, 1, 3.
13) Ⅲ, xxi, 1.
14) Ⅲ, xxi, 7.
15) 에베소서 1:4-5
16) 신7:6-9, 9:6, 사47:4, 100:3, 105:6, 65:4, 33:2, 14:1,9.
17) 요15:16
18) 요6:37-39.
19) 요6:44-45.
20) Ⅲ, xxiii, 8.
21) Ⅱ, ii, 14,15,16.
22) Ⅱ, iv, 1.
23) Ⅲ, xxiii, 11.
24) Ⅲ, xxiii, 11.
25)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비추어 본 칼빈에 있어서 인간과 구원”, 이종성 회갑논문(1982), pp. 93ff
26) Ⅲ, xxiv, 3.
27) Ⅲ, xxiv, 5.
28) Ⅲ, xxiv, 5.
29) Ⅲ, xxiii, 12.
30) Ⅲ, xiv, 20.
31) Ⅲ, xiv, 20.
32) Niesel, op. cit., pp.175 : Niesel은 칼빈에게 있어서 Syllogismus Practicus를 인정하기 어렵다 고 한다.
33) Ⅳ, i, 7.
http://blog.daum.net/kkho1105/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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