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설교관
칼빈의 설교관
1. 서 론
종교개혁의 원동력과 그 지속적 능력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선포되는(설교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이었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된 것일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과 선포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다름아닌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의해 종교개혁은 일어났고, 말씀의 선포에 의해 종교개혁은 성취되어 갔다. 개혁자들은 이 말씀에 사로잡혀 그들의 소명을 이루어 갔던 것이다.
진실로 말씀의 선포가 없는 종교개혁, 열정과 확신 가운데 말씀이 설교되어 지지 않는 종교개혁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었고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의 도구 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가능 했던 그 중심 이유는 그들이 인식한 설교에 대한 신학이었다.
우리는 개혁주의 성경관, 구원관, 교회관, 세계관(철학관)등은 이야기 하면서 정작 실천신학의 꽃이라 하는 설교관에 대해선 무시하고 있는 실태임을 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종교개혁자들 중에 스스로를 ‘말씀의 사역자’로 불리우길 원했던 요한 칼빈의 설교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시대에 다시금 개혁자의 후예인 우리들을 통해 선포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의 입과 입술을 친히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2. 본 론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설교할 때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사로 여겼다. 그러므로 설교는 단순히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든가 교회의 임무들 가운데 하나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부언하여 말하기를 “말은 내가 하지만 교육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도 내가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만일 저 높은 곳으로 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이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선택교의” 라는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파되어질 때마다, 이것은 마치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열리어 하나님이 자기 손을 내밀면서 생명이 가까왔으니 너희가 이 하늘나라 상속에 참여케하마고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거나 같습니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우리 앞에 생명과 불멸을 펼쳐 보이는 것을 보는 우리로서 고의적으로 못 본체 하지 맙시다”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임을 확신했으며 또한 인간을 통해 전달되어지고 말씀되어졌음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천둥소리로 그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시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임을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말씀을 드러내셨고 이로써,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것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전파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사야 주석 55:11에서 “어느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온 말씀은 인간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아니라 인간을 그 도구로써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말씀 안에서 빛나고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하나님과 가까이 마주 대한 것처럼, 말씀으로 무한한 감화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의 거룩성과 권위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증거자는 중보자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파된 곳에 오시리라는 대망을 들려주어야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목회자의 목소리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1549년 8월 16일에 행한 예레미야 강해 설교 제 25번째에서 자신을 가혹하다고 비난 하는자들을 향해 그는 이렿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던져지는 훈계의 말씀을 거역하여 일어나는 모든자들, 그들은 하나님께 맞서 그에게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내 혀가 하나님 의 심판을 선포한다해서 내 혀를 탓할 수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날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시고자 할 때 사람들이 내 인격에 맞서서는 안됩니다. 만일 내게 맞선다면 악인들은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보증이 되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고, 다니엘서 21번째 설교에서는 “만약 내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아니라고 그들이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가 선포한 것과 동일한 말씀을 전달하고 있고,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내게 주신 분량에 따라 그를 신실하게 섬겼음을 그 분 앞에서 주장할 수 있읍니다. 그리고 이것을 헐뜯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경한 짓을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할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그것은 드러나고야 말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후 에스겔서 5번째 설교에서도 “오늘날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하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저 칼빈을 보라! 그는 스스로 그것을원한다. 그러면 그가 선지자 인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교설인 까닭에 나는 이런 어투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여기 에스겔에서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나는 이 선지자가 말한것을 변형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때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선포되기도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칼빈은 자신의 사명의 중대성을 확신하고 또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었다.
이러한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사역을 수행케 했던 제일의 주된 확신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내가 율법을 모세가 쓴 것으로, 시편을 다윗과 다른 선지자들의 것으로 여기며, 이런 식으로 모든 성경에 담겨진 것을 파악한다면, 이사역은 어떻게 될까요? 나는 말씀의 사역이 유지되어야 한다, 또는 유지되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토론을 벌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나는 죽을 운명의 사역자들에 대해 반박하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과, 그리고 성경에 들어있는 모든 교리에 권위를 부여하신다면 이러한 핑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는 말이 교회에서 흔히 쓰여지는 용어라 하여 결코 공연한 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청할 것을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오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 . 나는 새로운 법률이나 신조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라고 하여 성경의 권위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며 그의 설교가 그것을 바탕으로 선포되기 때문에 동등한 권위가 있음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해석과 강해에 주력했고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기록된 말씀에 대한 진실되고 순수한 주해” 와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의 생활에 적용시키려” 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자들의 할 일 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
이러한 칼빈의 설교관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의 행태와 얼마나 상치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개혁자의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임무에 대한 깨우침에 귀기울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시편 119편 설교를 시작하며 “나는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에 맞춰 본문의 진정한 흐름을 그대로 따르려 할 것입니다. 나는 권면을 지루하게 고집하지 않고 다만 다윗의 시 (흔히 말하는 대로)를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으로 만족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은헤로 말미암아 각 8절을 한편의 설교로 완성시킬 생각을 했었고, 또 가장 배우지 못한 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만 본문의 단순한 핵심을 밝히는 것으로 그치려 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 신약 성경은 주님이 자신의 뜻을 표명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설교를 이용해 자기 고유의 사상을 표현할 권리란 없다는 것을 믿었다.
칼빈은 그의 설교집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말하였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도록 하자. 즉 경솔하게 그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기 자신의 업적을 미뵹책으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리도록 하라. 그는 마땅히 그의 교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는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본문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을 읽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어리석은 사색을 구한다든지 그들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개조해 보려고 교회로 나온다면 그들은 복음을 더럽히는 꼴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칼빈은 확신과 겸손을 진실히 갖고 성경 본문에 접근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이 우리 마음 속에 말하여질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귀담아 들으려했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 본문 해석에는 언제나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성경관이 그의 설교에 반영되어 그의 설교는 언제나 무겁고, 심각하고 열정적이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서의 설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칼빈의 설교관은 설교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임을 보여준다.
칼빈의 설교에서 특기할 만한 것 세가지 정도를 지적 할 수 있는데, 첫째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수 있는 장소는 바로 성경의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곳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설교와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칼빈은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된 수사학적도구를 채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의도는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의 것을 인식한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칼빈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책임을 가지고 그의 청중의 편에 서서 계속 일깨워 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의 특징은 그의 설교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행위임을 의식한 것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설교자의 입을 주저함없이 “하나님의 입” 이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이것은“사자” 라는 칭호보다 더 우월할 것이다. 이는 설교자가 강단에 섰을 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설교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강단에서 외치는 이는 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정도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곳에는 하늘의 위엄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여 청중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에 대한 인식에서 설교란 신적행위인 것이었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가 소유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방법으로 대화하신다... 이렇게 복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강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로마서 10:17에 “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함과 같이 만약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장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만남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는 곳에서 인 것이다.
이렇게 설교자들에 의한 말씀의 설교는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만의 베일에 싸인 채 인간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형태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입과 같이 그들의 입도 사용되고, 또 그의 입술과 같이 그들의 입술도 사용되기를 원하시는 태도로 그들 중에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계시의 역사적 사역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은헤의 징표를 사용하심으로써, 동일한 많은 방법에 있어서 계시와 자기 교통의 수단으로서 말씀 선포를 사용하신다.
이 때문에 칼빈은 설교를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혹은 항상 우리곁에 계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의 선포로 오시며 때로는 다양하게 베푸시는 갖가지 은사로서도 오신다.” 어떻든,“ 설교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주님의 선물이며, 그 자체는 죽어야 할 인간의 목소리가 영생을 얻도록 교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성경이 설교자에 의해 설교되어질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 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눈에 비친 설교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현현, 혹은 하나님의 현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목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은 실재로 임하시고, 임재하시되 성례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서 먼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주고 그 후에 그 교훈이 사람의 심령에 생생하게 접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셩령이 그 설교자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인간은 말씀안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쳤던 것이다.
(3)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으로서의 설교
설교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인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수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 설교자가 설교할때는, 비록 그가 우리와 동일하게 보이고, 대단한 존경을 받거나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하더라도, 어쨋든 예수그리스도는 여전히 이곳(=설교)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 곳에 두시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니 타락과 비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변형 시킴으로 우리는 복된 왕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왕국은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다.
복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반역자에서 시민으로 바꿔 놓으셨다. 말하자면 복음은 그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설교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지배의 세력아래에 두기 위함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라 불려 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 복음이 설교 되든지 그것은 그 땅위에 그가 주되심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치하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의 설교를 통해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왕실은 바로 복음이요.” “복음의 교리가 아닌 것은 어떤 것도 그의 통치 수단이 될 수 없다.” 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인 성경에 주어진 내용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단순하게라는 부사를 통해 설교란 “청중들의 이해력에 부응하여” 각 신자가 그 설교에서 “자신의 몫과 분깃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고, 둘째는 간결하게 “평이한 간결성과 결코 애매모호함이 없도록 하여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야 한다” 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용기있게,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간성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 말씀의 사역자는 “우물우물” 말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교회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차없이 혹은 꾸밈없이” 제시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자의 자세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확실히 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당시에 설교는 번창할 수 있었다.
교회와 강단 설교자들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 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강단은 교회 내에서와 세속적인 사회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설교란 그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왕권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치하고 나라들을 심판하기 위해 교회 그 자체에도 비밀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의 장중에 있는 검인 것이다. 교회중의 그 검은 적들을 쳐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칠 것이냐, 혹은 회개하지 않는 무리들을 또 다시 영원히 파멸시켜 버릴 것이냐 하는 택일성의 문제를 지닌 채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엡 6:7).”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에 따르지 아니한다면 하나님께는 패역이요, 우리 또한 어떠한 종류의 은사도 부여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복종하지 않으려한 “여러 사람의 반역”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사역을 옹호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이 버릇없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잘못을 범했을 때 그 사실을 자기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곧 ‘당신들이 우리에게 명령할 순 없어!’라고. 그렇다면 하나님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임하신 때문입니다...”
“누구든, 이렇게되어야 한다. 이쪽으로 가야한다는 식으로 명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념해 가르치기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한분 주님이 있고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나를 통해 전진시키기 원치 않으며,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올 생각도 없으며 오직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반박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 하며, 모든 거만한 것들이 꺽여야만 하고 또 큰자나 작은 자나 할것없이 자신이 복종해야 할 이에게 대항하여 주둥이를 내밀거나 눈을 치켜 뜨는 피조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라고 하여 설교를 통해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항 해서는 안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어느 누구든지 복종해야 할 것을 말한 성경관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설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곳 어디에나 크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인 것이다.
(4) 효력있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교회나 세상에 있어서 설교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말씀이 연약한 인간에 의해 나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그의 명령과 약속 이행으로써의 전능한 힘을 지녔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려고 준비하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 누구에게나 공평한 댓가를 지불하시기 때문이다. 즉, 그가 명하신 말씀은 바로 행하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증거자의 입을 통하여 용서를 베푸실 때에,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자는 진실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것이다. 이는 선포된 말씀이 효력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효력있는 말씀의 능력이 바로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인 것이다.
칼빈은 디모데전서 2장 3-5절에 관련된 설교에서 “인간은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어떤 지식이 있는가? 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놀라운 지식을 갖고 있는가? 인간은 천사와 같이 그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자 그가 우리의 눈을 뜨게할 것이며, 그 자신이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어느 부분이라도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기까지는 부패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우리는 소경과 같다. 그러한 사실을 일깨워 주는 성경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단지 성경의 몇몇 구절을 가지고 운운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인간은 성령께서 일깨워 주고 이끌기까지는 하나님께 올 수 있는 어떤 지혜도 없다.” 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에 대해 “그리스도는 말씀 전파자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을 비추고 그들의 정신을 새롭게 하며, 즉시 그들을 온전히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 살아 있는 것이며 바로 효력과 연결 된 것이로되; “권능과 통하는 강력한 도구이니; ” 주님의 신성한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이 온전히 효력을 발휘하리로다.”
“복음은 단지 들려주기 위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위한 씨앗으로써 우리를 거듭나게 하려 함이며,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증거되게 하기 위하여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안식을 얻고 구원을 확신함으로써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고 하여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경, 특히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은총의 선물로서의 성경관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양면적인 효력을 발생시키는 권능으로서의 설교
따라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셈인데 여기에는 두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메시지를 반항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형벌을 가중시킬 뿐이다. 반면 하나님의 은밀하신 능력에 이끌림을 받은 피선택자들은 성령이 말씀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데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고 그의 이사야 55:11의 주석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갈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과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선포에 덧붙여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 올 수 있는 비밀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심판의 부정적인 면은 “복음의 본성이 아닌 우발적인 것들” 이라고 덧붙인다. “복음의 본성을 떠난 인간의 과오로 부터 발생되는 것”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제시는 꾸밈없이 용기있게 제시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전쟁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할 내가 악을 허용하고자 한다면 뭐가 되겠읍니까? 그 같은 일이 정당하게 되거나 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구실로 이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것 저것 갖다 붙여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매우 꾸짖게 됩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0장 18절 이하를 설교하면서 “... 나는 이처럼 내가 내 양심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이 허락지 않든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때 내게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사람들이 날 강요하든 간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 이외의 것을 넘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설교하고 또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칼빈의 신념은 복음 선포의 이중적 효과를 아는 자로서의 고백인 것 같다. 그는 “타락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러 자칭 심장에 강철을 두르고 있지만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해 사슬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웃음을 삼킨 채 냉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들도 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오지 않으려하나 그들이 조소했던 그 말씀에 의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는 마치 쇠사슬에 묶인 개들이 그곳에서 헤어나려고 물고 찢고하는 격렬한 모습과도 흡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증거의 역할은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칼빈은 자신에 대한 많은 비난과 반대자들을 극복해야 했다.
아마 1549년대의 것으로 보이는 ‘우리시대에 매우 유용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설교들 중의 첫번째 설교에서 칼빈은 복음의 대의 명분에 가담했다가 다시 “교황 체제에” 돌아간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어느 시기에 그는 이들에게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특히 미사에 참석치 말것을 요구하였다. 그의 이런 당부는 위험하게 여겨젔음에 분명했는데 그의 이런 신신당부는 죽음이나 추방외의 다른 어떤 선택의 길도 남겨두고 있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그들의 비난과 경고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난과 경고에 부딪힌 칼빈은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서 행동하려는자들에게 이 엄격한 처방이 얼마나 힘들고 견딜 수 없는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목사로서의 내가 거기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목사로서의)나는 그들의 처지가 이처럼 곤란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한 그들을 너그럽게 봐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곧 정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나보다 결코 더 가혹한 형벌을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들을 너무 부드럽게만 다루어 왔다는 점을 그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런후 그는 그를 권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향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한 부분만을 트집잡아 날 비난하면서 판단자로서의 하나님은 더 이상 없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은 너무나 막중한 잘못입니다. 이러한자들이 자기들의 서류에서 내 이름을 긁어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에게 순종하는것만을 요구하고 결코 내 기호에 따라 개인의 양심들을 지배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불가피한 것이나 법을 부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복음의 대적자들에게 자신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으로 권위가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구원의 은혜와 강퍅케하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의 증거로서, 반동적인 마음을 지닌 이들을 부분적으로는 교화시킬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자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바 대로 주님의 품을 떠나 버린다” 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의 설교관에 의하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무익하게 된다... 만족할 만한 복음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말만이 필요하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 한 것이다.
“성경은 목자에게 양떼를 모으고, 또 도적떼와 늑대를 쫓기 위한 두 목소리를 제공한다.” 는 칼빈의 주장은 그의 성경권위에 대한 믿음과 결코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갖고 선포되는 말씀은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력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의 면전에서 거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칼빈은 교리의 대적자나 복음을 듣고도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난 후에도 금수와 같이 되어 모든 이성을 상실하는 자들을 보거든,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당신의 말씀을 높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위대함을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대해 모독하는자들을 악마에게 내어 주시어 그의 지배를 받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거나 망령되이 대하거나, 위장하거나, 속되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허용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말씀을 제공하여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만큼 그릇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과 반역자들은 마치 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그(하나님)의 이름을 경거망동하게 모욕하는 그들의 입을 막지 않고 있음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헤와 자비에 대해 겸손하게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왜 그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르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부르고 계시는데 그들은 오기를 거절하는 커다란 배은망덕 때문에 죄값을 치르게 되어있다”는 말을 통해 볼때 칼빈은 설교가 하나님의 권능임을 확실히 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려 행하려는 자신들 속에 존재하는 본성을 교화시키도록 스스로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이 권능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 속에서도 악을 죽이고 굴복시키며 쫓아 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은 모든 조소를 기록할 자를 두셨다... 우리의 교훈으로 이 말씀이 주어졌으니, 우리는 자신을 겸손히 함을 배우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자. 그는 천사의 왕으로 천사도 그에게 복종하니까” 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를 배웠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설교되어 진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가 곧 내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셨다. 모든 교직자가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야 된다는 것을 배우자. 그리고 우리자신은 그 설교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간섭을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다.” 라는 이러한 칼빈의 주장은 그의 철저한 성경관에 그 뿌리를 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들고 강해하며 설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앞의 청중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 설교되는 말씀을 통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을 ‘말씀의 종’으로 이끈 위대한 확신이요 강단 설교자로서의 설교 자세 였던 것이다.
(6) 성령의 능력의 현현으로서의 설교
칼빈이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성경을 중요시한 이유는 성경의 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칼빈은 딤후 1장 9, 10절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이 없이는 또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중의 가슴 속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조명과 믿음의 수반없이는 말씀의 성실한 설교일찌라도 청중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칼빈의 설교관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한 교리’ 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어느 부분이라도 깨달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성령의 내적사역을 강조하는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설교는 성령의 권능으로써만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을 뿐이며, 외적인 말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효력도 청중에게 미칠수 없다” 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 말씀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주이시고 구주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설교자는 설교에 앞서 기도로써 준비하여 말씀을 전달하는 그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렇게 칼빈은 설교가 그 자체로서는 듣는 이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음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말할때, 그것은 내 자신의 마음이 감동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또 듣는 이 각자에게 내가 제시하는 교리를 받도록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요?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가치있게 하셔야 하고, 또 그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 뿌리를 내려 우리에게 썩지 않는 생명의 씨가 되도록 생기를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라 하여 설교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 없이는 아무 효력이 없음을 주장했다.
따라서 이것은 설교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증거와 그 효력의 발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나타나심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의 은사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회심은 하나님이 은밀히 역사하시는 사람 즉 선택받은 사람들 안에서만 열매와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 이기 때문인 것이다.
회심의 역사, 구속과 영생의 기쁨이 죄인들의 영혼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설교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강조되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하여 선포될 때에 그 말씀 선포의 효력은 청중의 수용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설교자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래서 “단언하건데, 인간의 입에서는, 즉 단순한 소리 중에서는 어떠한 능력도 나올 수 없으며 이는 오로지 성령이 임하실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리고 그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를 “소경이 태양의 밝기를 즐기지 못할지라도 태양은 비추이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주사 그의 얼굴을 응시 할 수 있게 하시기 까지는 우리는 교화되지 못한 채 설교를 듣는 것이다”고 하여 설교가 우리 안에 활동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지성을 “조명” 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감동” 해야함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내적 증거의 사실은 그의 성경관에도 나타나 있는 것임을 우리는 확인 할 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한 주관적인 확신은 바로 이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가 아닌가?
이러한 그의 성경관은 그의 설교에 대한 관점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 영감을 주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밝히 보여 주어 우리가 성경의 신적 권위와 성경의 영감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칼빈에게 있어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설교에 있어서도 성령의 현현과 신비스런 역사는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의 설교관은 그의 메시지를 대하는 일에 경외심과 신중함을 갖도록 촉구하였다. 왜냐하면 설교의 효과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면 신자들은 자기들과 흡사한 한 인간이 강대상 높은 곳에서 던져준 메시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유혹을 조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설교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는 것과 “단순히 허공에만 울려 퍼지고 사라지는 목소리란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능력을 그의 설교에 더 하신다” 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존경심을 갖고 설교를 들으러” 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설교의 필요성을 의문에 붙일 권리가 없다는 것 못지않게 목사들은 “주님께서 설교에 축복을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들의 노력과 근면을 통해서는 유익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때 무기력해 져서는 안된다” 고 그는 덧붙인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사역자의 역할은 밭을 가꾸고 씨를 뿌린 후 기도로 하나님께 자신의 노력을 축복해 달라고 비는 경작자의 역할에 비할 수 있다고 하며 “사역자들은 일을 하고 씨를 심는 노동자들과도 같다” 고 하였다.
“또한 사역자들은 일꾼들이 땅에 씨를 뿌린 후, 그 씨기 배태한 것을 생산해 낼 때까지 할 수 있는대로 땅을 도우는 책임상 그와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동에 열매를 맺게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지 인간 근면의 결과가 아니다” 고 하여 오직 하나님의 기적만이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직에 성실히 임하는 자는 누구나 그 만큼의 성과를 원한다.” 는 사실을 인식하는 칼빈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노력만큼의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는 한없이 애석해 하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으리라 본다” 고 하며, 그 저조한 결실의 책임의 일부는 우리에게 있음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진리란 설령 그것을 들어 주는 이가 없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입술로써 끊임없이 들려 주어야 하는 것이니,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명을 다함에 족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서 3장 14절의 주석 가운데서 설교의 신비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는 목사와 신도들을 하나의 동일한 태도(기도함) 가운데로 연합하는 초대를 하였다.
곧 설교를 효과 있도록 복을 부여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대의 표명은 칼빈의 주된 신학 사상을 적용케 하는데, 그것은 죄된 인간성 앞에 하나님 만이 모든 은혜의 유일한 조성자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 모든 목회자의 사역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어 놓았던 것이다.
설교는 성경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할 때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나타나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 자신이 가진 신학의 입장과 성경관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성경관에 따라 설교의 방법과 방향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만나신다. 그때는 인간의 말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백성을 깨우치며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며 이때의 설교자는 오직 말씀 증거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나타남과 능력만이 그의 설교를 통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령의 능력만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신다.
이러한 확신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권위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 대한 철저한 성경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관은 곧바로 그의 설교사역과 주석사역에 전적인 헌신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자신을 ‘말씀의 종’, ‘말씀의 사역자’로 인식케 했던 것이다.
3. 결 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경관과 설교에 대한 인식은 결코 무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관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었던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리요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과 그 말씀의 선포가 갖는 의미는 곧바로 개혁자의 사역과 연결되고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신학과 설교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신학의 과제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적 고찰로부터 칼빈의 성경관과 그의 설교에 나타난 설교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의 성경관이 그대로 그의 설교와 강해에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의 신학과 설교는 항상 일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신학은 신학대로 설교는 설교대로 각기 제 나름대로 나갈 뿐이요 이 두 사이에 만남이 없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설교와 강단의 문제는 실천되어지는 성경관, 구호가 아닌 확고한 신앙에 뿌리를 둔 성경관의 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는 일차적인 과제가 바른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은 단순히 학리적인 연구대상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외쳐져야 하는 것이며, 선포되기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예배 중에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강단은 어떠한가? 교역자들은 설교 대신 간증을 나누고, 축복을 선포하는 대신 기도를 한다. 강단 설교의 본질을 확실히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에도 위협을 느끼면서 수고하고 있다.
설교의 독특하고 신비스런 성격에 대한 몰 이해는 설교를 단순한 인간적 연설 중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강단은 또 하나의 연설대 내지는 강의 장소다. 심지어는 이를 개인 연기 장소로까지 보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설교 보다 상담이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말씀 선포에 대한 경시의 경향은 결국 강단 사역 자체 뿐 아니라 사역자 자신까지도 천대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쇠퇴와 경시는 교회의 쇠퇴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서구교회의 진상이 아닌가? 이러한 사실은 이미 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모든 이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격의 몰이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할 때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강단에 선 인간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는 사실, 설교 가운데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권능을 행하시고 현현하신다는 것이다. 강단은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진실로 강단은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칼빈은 이러한 설교의 신비를 이해했고 알았기에 그것을 실천했던 것이다.
칼빈은 그의 성경관과 설교관을 결코 나누어 놓지 않았다. 그의 성경관이 그의 설교를 결정했고 그의 주석을 인도했던 것이다.
그는 강단에서의 설교사역을 통해, 그의 주석 사역을 통해, 그의 성경관을 철저히 지켜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성경을 강해하고 선포해야 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http://blog.daum.net/kkho1105/1482
1. 서 론
종교개혁의 원동력과 그 지속적 능력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선포되는(설교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이었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된 것일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과 선포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다름아닌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의해 종교개혁은 일어났고, 말씀의 선포에 의해 종교개혁은 성취되어 갔다. 개혁자들은 이 말씀에 사로잡혀 그들의 소명을 이루어 갔던 것이다.
진실로 말씀의 선포가 없는 종교개혁, 열정과 확신 가운데 말씀이 설교되어 지지 않는 종교개혁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었고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의 도구 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가능 했던 그 중심 이유는 그들이 인식한 설교에 대한 신학이었다.
우리는 개혁주의 성경관, 구원관, 교회관, 세계관(철학관)등은 이야기 하면서 정작 실천신학의 꽃이라 하는 설교관에 대해선 무시하고 있는 실태임을 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종교개혁자들 중에 스스로를 ‘말씀의 사역자’로 불리우길 원했던 요한 칼빈의 설교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시대에 다시금 개혁자의 후예인 우리들을 통해 선포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의 입과 입술을 친히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2. 본 론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설교할 때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사로 여겼다. 그러므로 설교는 단순히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든가 교회의 임무들 가운데 하나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부언하여 말하기를 “말은 내가 하지만 교육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도 내가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만일 저 높은 곳으로 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이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선택교의” 라는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파되어질 때마다, 이것은 마치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열리어 하나님이 자기 손을 내밀면서 생명이 가까왔으니 너희가 이 하늘나라 상속에 참여케하마고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거나 같습니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우리 앞에 생명과 불멸을 펼쳐 보이는 것을 보는 우리로서 고의적으로 못 본체 하지 맙시다”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임을 확신했으며 또한 인간을 통해 전달되어지고 말씀되어졌음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천둥소리로 그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시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임을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말씀을 드러내셨고 이로써,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것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전파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사야 주석 55:11에서 “어느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온 말씀은 인간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아니라 인간을 그 도구로써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말씀 안에서 빛나고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하나님과 가까이 마주 대한 것처럼, 말씀으로 무한한 감화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의 거룩성과 권위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증거자는 중보자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파된 곳에 오시리라는 대망을 들려주어야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목회자의 목소리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1549년 8월 16일에 행한 예레미야 강해 설교 제 25번째에서 자신을 가혹하다고 비난 하는자들을 향해 그는 이렿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던져지는 훈계의 말씀을 거역하여 일어나는 모든자들, 그들은 하나님께 맞서 그에게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내 혀가 하나님 의 심판을 선포한다해서 내 혀를 탓할 수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날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시고자 할 때 사람들이 내 인격에 맞서서는 안됩니다. 만일 내게 맞선다면 악인들은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보증이 되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고, 다니엘서 21번째 설교에서는 “만약 내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아니라고 그들이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가 선포한 것과 동일한 말씀을 전달하고 있고,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내게 주신 분량에 따라 그를 신실하게 섬겼음을 그 분 앞에서 주장할 수 있읍니다. 그리고 이것을 헐뜯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경한 짓을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할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그것은 드러나고야 말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후 에스겔서 5번째 설교에서도 “오늘날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하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저 칼빈을 보라! 그는 스스로 그것을원한다. 그러면 그가 선지자 인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교설인 까닭에 나는 이런 어투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여기 에스겔에서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나는 이 선지자가 말한것을 변형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때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선포되기도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칼빈은 자신의 사명의 중대성을 확신하고 또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었다.
이러한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사역을 수행케 했던 제일의 주된 확신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내가 율법을 모세가 쓴 것으로, 시편을 다윗과 다른 선지자들의 것으로 여기며, 이런 식으로 모든 성경에 담겨진 것을 파악한다면, 이사역은 어떻게 될까요? 나는 말씀의 사역이 유지되어야 한다, 또는 유지되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토론을 벌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나는 죽을 운명의 사역자들에 대해 반박하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과, 그리고 성경에 들어있는 모든 교리에 권위를 부여하신다면 이러한 핑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는 말이 교회에서 흔히 쓰여지는 용어라 하여 결코 공연한 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청할 것을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오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 . 나는 새로운 법률이나 신조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라고 하여 성경의 권위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며 그의 설교가 그것을 바탕으로 선포되기 때문에 동등한 권위가 있음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해석과 강해에 주력했고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기록된 말씀에 대한 진실되고 순수한 주해” 와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의 생활에 적용시키려” 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자들의 할 일 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
이러한 칼빈의 설교관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의 행태와 얼마나 상치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개혁자의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임무에 대한 깨우침에 귀기울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시편 119편 설교를 시작하며 “나는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에 맞춰 본문의 진정한 흐름을 그대로 따르려 할 것입니다. 나는 권면을 지루하게 고집하지 않고 다만 다윗의 시 (흔히 말하는 대로)를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으로 만족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은헤로 말미암아 각 8절을 한편의 설교로 완성시킬 생각을 했었고, 또 가장 배우지 못한 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만 본문의 단순한 핵심을 밝히는 것으로 그치려 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 신약 성경은 주님이 자신의 뜻을 표명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설교를 이용해 자기 고유의 사상을 표현할 권리란 없다는 것을 믿었다.
칼빈은 그의 설교집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말하였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도록 하자. 즉 경솔하게 그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기 자신의 업적을 미뵹책으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리도록 하라. 그는 마땅히 그의 교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는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본문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을 읽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어리석은 사색을 구한다든지 그들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개조해 보려고 교회로 나온다면 그들은 복음을 더럽히는 꼴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칼빈은 확신과 겸손을 진실히 갖고 성경 본문에 접근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이 우리 마음 속에 말하여질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귀담아 들으려했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 본문 해석에는 언제나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성경관이 그의 설교에 반영되어 그의 설교는 언제나 무겁고, 심각하고 열정적이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서의 설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칼빈의 설교관은 설교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임을 보여준다.
칼빈의 설교에서 특기할 만한 것 세가지 정도를 지적 할 수 있는데, 첫째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수 있는 장소는 바로 성경의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곳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설교와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칼빈은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된 수사학적도구를 채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의도는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의 것을 인식한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칼빈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책임을 가지고 그의 청중의 편에 서서 계속 일깨워 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의 특징은 그의 설교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행위임을 의식한 것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설교자의 입을 주저함없이 “하나님의 입” 이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이것은“사자” 라는 칭호보다 더 우월할 것이다. 이는 설교자가 강단에 섰을 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설교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강단에서 외치는 이는 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정도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곳에는 하늘의 위엄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여 청중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에 대한 인식에서 설교란 신적행위인 것이었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가 소유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방법으로 대화하신다... 이렇게 복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강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로마서 10:17에 “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함과 같이 만약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장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만남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는 곳에서 인 것이다.
이렇게 설교자들에 의한 말씀의 설교는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만의 베일에 싸인 채 인간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형태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입과 같이 그들의 입도 사용되고, 또 그의 입술과 같이 그들의 입술도 사용되기를 원하시는 태도로 그들 중에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계시의 역사적 사역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은헤의 징표를 사용하심으로써, 동일한 많은 방법에 있어서 계시와 자기 교통의 수단으로서 말씀 선포를 사용하신다.
이 때문에 칼빈은 설교를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혹은 항상 우리곁에 계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의 선포로 오시며 때로는 다양하게 베푸시는 갖가지 은사로서도 오신다.” 어떻든,“ 설교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주님의 선물이며, 그 자체는 죽어야 할 인간의 목소리가 영생을 얻도록 교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성경이 설교자에 의해 설교되어질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 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눈에 비친 설교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현현, 혹은 하나님의 현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목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은 실재로 임하시고, 임재하시되 성례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서 먼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주고 그 후에 그 교훈이 사람의 심령에 생생하게 접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셩령이 그 설교자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인간은 말씀안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쳤던 것이다.
(3)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으로서의 설교
설교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인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수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 설교자가 설교할때는, 비록 그가 우리와 동일하게 보이고, 대단한 존경을 받거나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하더라도, 어쨋든 예수그리스도는 여전히 이곳(=설교)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 곳에 두시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니 타락과 비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변형 시킴으로 우리는 복된 왕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왕국은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다.
복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반역자에서 시민으로 바꿔 놓으셨다. 말하자면 복음은 그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설교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지배의 세력아래에 두기 위함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라 불려 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 복음이 설교 되든지 그것은 그 땅위에 그가 주되심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치하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의 설교를 통해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왕실은 바로 복음이요.” “복음의 교리가 아닌 것은 어떤 것도 그의 통치 수단이 될 수 없다.” 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인 성경에 주어진 내용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단순하게라는 부사를 통해 설교란 “청중들의 이해력에 부응하여” 각 신자가 그 설교에서 “자신의 몫과 분깃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고, 둘째는 간결하게 “평이한 간결성과 결코 애매모호함이 없도록 하여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야 한다” 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용기있게,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간성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 말씀의 사역자는 “우물우물” 말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교회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차없이 혹은 꾸밈없이” 제시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자의 자세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확실히 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당시에 설교는 번창할 수 있었다.
교회와 강단 설교자들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 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강단은 교회 내에서와 세속적인 사회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설교란 그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왕권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치하고 나라들을 심판하기 위해 교회 그 자체에도 비밀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의 장중에 있는 검인 것이다. 교회중의 그 검은 적들을 쳐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칠 것이냐, 혹은 회개하지 않는 무리들을 또 다시 영원히 파멸시켜 버릴 것이냐 하는 택일성의 문제를 지닌 채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엡 6:7).”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에 따르지 아니한다면 하나님께는 패역이요, 우리 또한 어떠한 종류의 은사도 부여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복종하지 않으려한 “여러 사람의 반역”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사역을 옹호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이 버릇없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잘못을 범했을 때 그 사실을 자기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곧 ‘당신들이 우리에게 명령할 순 없어!’라고. 그렇다면 하나님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임하신 때문입니다...”
“누구든, 이렇게되어야 한다. 이쪽으로 가야한다는 식으로 명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념해 가르치기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한분 주님이 있고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나를 통해 전진시키기 원치 않으며,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올 생각도 없으며 오직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반박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 하며, 모든 거만한 것들이 꺽여야만 하고 또 큰자나 작은 자나 할것없이 자신이 복종해야 할 이에게 대항하여 주둥이를 내밀거나 눈을 치켜 뜨는 피조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라고 하여 설교를 통해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항 해서는 안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어느 누구든지 복종해야 할 것을 말한 성경관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설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곳 어디에나 크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인 것이다.
(4) 효력있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교회나 세상에 있어서 설교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말씀이 연약한 인간에 의해 나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그의 명령과 약속 이행으로써의 전능한 힘을 지녔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려고 준비하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 누구에게나 공평한 댓가를 지불하시기 때문이다. 즉, 그가 명하신 말씀은 바로 행하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증거자의 입을 통하여 용서를 베푸실 때에,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자는 진실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것이다. 이는 선포된 말씀이 효력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효력있는 말씀의 능력이 바로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인 것이다.
칼빈은 디모데전서 2장 3-5절에 관련된 설교에서 “인간은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어떤 지식이 있는가? 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놀라운 지식을 갖고 있는가? 인간은 천사와 같이 그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자 그가 우리의 눈을 뜨게할 것이며, 그 자신이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어느 부분이라도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기까지는 부패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우리는 소경과 같다. 그러한 사실을 일깨워 주는 성경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단지 성경의 몇몇 구절을 가지고 운운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인간은 성령께서 일깨워 주고 이끌기까지는 하나님께 올 수 있는 어떤 지혜도 없다.” 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에 대해 “그리스도는 말씀 전파자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을 비추고 그들의 정신을 새롭게 하며, 즉시 그들을 온전히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 살아 있는 것이며 바로 효력과 연결 된 것이로되; “권능과 통하는 강력한 도구이니; ” 주님의 신성한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이 온전히 효력을 발휘하리로다.”
“복음은 단지 들려주기 위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위한 씨앗으로써 우리를 거듭나게 하려 함이며,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증거되게 하기 위하여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안식을 얻고 구원을 확신함으로써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고 하여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경, 특히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은총의 선물로서의 성경관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양면적인 효력을 발생시키는 권능으로서의 설교
따라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셈인데 여기에는 두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메시지를 반항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형벌을 가중시킬 뿐이다. 반면 하나님의 은밀하신 능력에 이끌림을 받은 피선택자들은 성령이 말씀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데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고 그의 이사야 55:11의 주석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갈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과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선포에 덧붙여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 올 수 있는 비밀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심판의 부정적인 면은 “복음의 본성이 아닌 우발적인 것들” 이라고 덧붙인다. “복음의 본성을 떠난 인간의 과오로 부터 발생되는 것”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제시는 꾸밈없이 용기있게 제시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전쟁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할 내가 악을 허용하고자 한다면 뭐가 되겠읍니까? 그 같은 일이 정당하게 되거나 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구실로 이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것 저것 갖다 붙여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매우 꾸짖게 됩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0장 18절 이하를 설교하면서 “... 나는 이처럼 내가 내 양심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이 허락지 않든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때 내게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사람들이 날 강요하든 간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 이외의 것을 넘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설교하고 또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칼빈의 신념은 복음 선포의 이중적 효과를 아는 자로서의 고백인 것 같다. 그는 “타락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러 자칭 심장에 강철을 두르고 있지만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해 사슬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웃음을 삼킨 채 냉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들도 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오지 않으려하나 그들이 조소했던 그 말씀에 의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는 마치 쇠사슬에 묶인 개들이 그곳에서 헤어나려고 물고 찢고하는 격렬한 모습과도 흡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증거의 역할은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칼빈은 자신에 대한 많은 비난과 반대자들을 극복해야 했다.
아마 1549년대의 것으로 보이는 ‘우리시대에 매우 유용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설교들 중의 첫번째 설교에서 칼빈은 복음의 대의 명분에 가담했다가 다시 “교황 체제에” 돌아간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어느 시기에 그는 이들에게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특히 미사에 참석치 말것을 요구하였다. 그의 이런 당부는 위험하게 여겨젔음에 분명했는데 그의 이런 신신당부는 죽음이나 추방외의 다른 어떤 선택의 길도 남겨두고 있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그들의 비난과 경고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난과 경고에 부딪힌 칼빈은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서 행동하려는자들에게 이 엄격한 처방이 얼마나 힘들고 견딜 수 없는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목사로서의 내가 거기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목사로서의)나는 그들의 처지가 이처럼 곤란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한 그들을 너그럽게 봐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곧 정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나보다 결코 더 가혹한 형벌을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들을 너무 부드럽게만 다루어 왔다는 점을 그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런후 그는 그를 권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향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한 부분만을 트집잡아 날 비난하면서 판단자로서의 하나님은 더 이상 없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은 너무나 막중한 잘못입니다. 이러한자들이 자기들의 서류에서 내 이름을 긁어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에게 순종하는것만을 요구하고 결코 내 기호에 따라 개인의 양심들을 지배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불가피한 것이나 법을 부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복음의 대적자들에게 자신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으로 권위가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구원의 은혜와 강퍅케하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의 증거로서, 반동적인 마음을 지닌 이들을 부분적으로는 교화시킬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자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바 대로 주님의 품을 떠나 버린다” 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의 설교관에 의하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무익하게 된다... 만족할 만한 복음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말만이 필요하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 한 것이다.
“성경은 목자에게 양떼를 모으고, 또 도적떼와 늑대를 쫓기 위한 두 목소리를 제공한다.” 는 칼빈의 주장은 그의 성경권위에 대한 믿음과 결코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갖고 선포되는 말씀은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력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의 면전에서 거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칼빈은 교리의 대적자나 복음을 듣고도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난 후에도 금수와 같이 되어 모든 이성을 상실하는 자들을 보거든,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당신의 말씀을 높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위대함을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대해 모독하는자들을 악마에게 내어 주시어 그의 지배를 받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거나 망령되이 대하거나, 위장하거나, 속되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허용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말씀을 제공하여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만큼 그릇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과 반역자들은 마치 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그(하나님)의 이름을 경거망동하게 모욕하는 그들의 입을 막지 않고 있음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헤와 자비에 대해 겸손하게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왜 그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르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부르고 계시는데 그들은 오기를 거절하는 커다란 배은망덕 때문에 죄값을 치르게 되어있다”는 말을 통해 볼때 칼빈은 설교가 하나님의 권능임을 확실히 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려 행하려는 자신들 속에 존재하는 본성을 교화시키도록 스스로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이 권능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 속에서도 악을 죽이고 굴복시키며 쫓아 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은 모든 조소를 기록할 자를 두셨다... 우리의 교훈으로 이 말씀이 주어졌으니, 우리는 자신을 겸손히 함을 배우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자. 그는 천사의 왕으로 천사도 그에게 복종하니까” 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를 배웠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설교되어 진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가 곧 내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셨다. 모든 교직자가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야 된다는 것을 배우자. 그리고 우리자신은 그 설교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간섭을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다.” 라는 이러한 칼빈의 주장은 그의 철저한 성경관에 그 뿌리를 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들고 강해하며 설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앞의 청중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 설교되는 말씀을 통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을 ‘말씀의 종’으로 이끈 위대한 확신이요 강단 설교자로서의 설교 자세 였던 것이다.
(6) 성령의 능력의 현현으로서의 설교
칼빈이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성경을 중요시한 이유는 성경의 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칼빈은 딤후 1장 9, 10절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이 없이는 또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중의 가슴 속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조명과 믿음의 수반없이는 말씀의 성실한 설교일찌라도 청중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칼빈의 설교관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한 교리’ 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어느 부분이라도 깨달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성령의 내적사역을 강조하는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설교는 성령의 권능으로써만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을 뿐이며, 외적인 말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효력도 청중에게 미칠수 없다” 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 말씀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주이시고 구주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설교자는 설교에 앞서 기도로써 준비하여 말씀을 전달하는 그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렇게 칼빈은 설교가 그 자체로서는 듣는 이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음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말할때, 그것은 내 자신의 마음이 감동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또 듣는 이 각자에게 내가 제시하는 교리를 받도록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요?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가치있게 하셔야 하고, 또 그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 뿌리를 내려 우리에게 썩지 않는 생명의 씨가 되도록 생기를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라 하여 설교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 없이는 아무 효력이 없음을 주장했다.
따라서 이것은 설교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증거와 그 효력의 발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나타나심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의 은사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회심은 하나님이 은밀히 역사하시는 사람 즉 선택받은 사람들 안에서만 열매와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 이기 때문인 것이다.
회심의 역사, 구속과 영생의 기쁨이 죄인들의 영혼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설교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강조되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하여 선포될 때에 그 말씀 선포의 효력은 청중의 수용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설교자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래서 “단언하건데, 인간의 입에서는, 즉 단순한 소리 중에서는 어떠한 능력도 나올 수 없으며 이는 오로지 성령이 임하실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리고 그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를 “소경이 태양의 밝기를 즐기지 못할지라도 태양은 비추이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주사 그의 얼굴을 응시 할 수 있게 하시기 까지는 우리는 교화되지 못한 채 설교를 듣는 것이다”고 하여 설교가 우리 안에 활동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지성을 “조명” 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감동” 해야함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내적 증거의 사실은 그의 성경관에도 나타나 있는 것임을 우리는 확인 할 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한 주관적인 확신은 바로 이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가 아닌가?
이러한 그의 성경관은 그의 설교에 대한 관점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 영감을 주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밝히 보여 주어 우리가 성경의 신적 권위와 성경의 영감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칼빈에게 있어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설교에 있어서도 성령의 현현과 신비스런 역사는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의 설교관은 그의 메시지를 대하는 일에 경외심과 신중함을 갖도록 촉구하였다. 왜냐하면 설교의 효과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면 신자들은 자기들과 흡사한 한 인간이 강대상 높은 곳에서 던져준 메시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유혹을 조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설교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는 것과 “단순히 허공에만 울려 퍼지고 사라지는 목소리란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능력을 그의 설교에 더 하신다” 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존경심을 갖고 설교를 들으러” 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설교의 필요성을 의문에 붙일 권리가 없다는 것 못지않게 목사들은 “주님께서 설교에 축복을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들의 노력과 근면을 통해서는 유익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때 무기력해 져서는 안된다” 고 그는 덧붙인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사역자의 역할은 밭을 가꾸고 씨를 뿌린 후 기도로 하나님께 자신의 노력을 축복해 달라고 비는 경작자의 역할에 비할 수 있다고 하며 “사역자들은 일을 하고 씨를 심는 노동자들과도 같다” 고 하였다.
“또한 사역자들은 일꾼들이 땅에 씨를 뿌린 후, 그 씨기 배태한 것을 생산해 낼 때까지 할 수 있는대로 땅을 도우는 책임상 그와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동에 열매를 맺게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지 인간 근면의 결과가 아니다” 고 하여 오직 하나님의 기적만이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직에 성실히 임하는 자는 누구나 그 만큼의 성과를 원한다.” 는 사실을 인식하는 칼빈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노력만큼의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는 한없이 애석해 하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으리라 본다” 고 하며, 그 저조한 결실의 책임의 일부는 우리에게 있음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진리란 설령 그것을 들어 주는 이가 없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입술로써 끊임없이 들려 주어야 하는 것이니,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명을 다함에 족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서 3장 14절의 주석 가운데서 설교의 신비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는 목사와 신도들을 하나의 동일한 태도(기도함) 가운데로 연합하는 초대를 하였다.
곧 설교를 효과 있도록 복을 부여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대의 표명은 칼빈의 주된 신학 사상을 적용케 하는데, 그것은 죄된 인간성 앞에 하나님 만이 모든 은혜의 유일한 조성자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 모든 목회자의 사역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어 놓았던 것이다.
설교는 성경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할 때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나타나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 자신이 가진 신학의 입장과 성경관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성경관에 따라 설교의 방법과 방향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만나신다. 그때는 인간의 말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백성을 깨우치며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며 이때의 설교자는 오직 말씀 증거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나타남과 능력만이 그의 설교를 통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령의 능력만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신다.
이러한 확신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권위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 대한 철저한 성경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관은 곧바로 그의 설교사역과 주석사역에 전적인 헌신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자신을 ‘말씀의 종’, ‘말씀의 사역자’로 인식케 했던 것이다.
3. 결 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경관과 설교에 대한 인식은 결코 무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관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었던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리요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과 그 말씀의 선포가 갖는 의미는 곧바로 개혁자의 사역과 연결되고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신학과 설교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신학의 과제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적 고찰로부터 칼빈의 성경관과 그의 설교에 나타난 설교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의 성경관이 그대로 그의 설교와 강해에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의 신학과 설교는 항상 일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신학은 신학대로 설교는 설교대로 각기 제 나름대로 나갈 뿐이요 이 두 사이에 만남이 없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설교와 강단의 문제는 실천되어지는 성경관, 구호가 아닌 확고한 신앙에 뿌리를 둔 성경관의 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는 일차적인 과제가 바른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은 단순히 학리적인 연구대상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외쳐져야 하는 것이며, 선포되기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예배 중에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강단은 어떠한가? 교역자들은 설교 대신 간증을 나누고, 축복을 선포하는 대신 기도를 한다. 강단 설교의 본질을 확실히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에도 위협을 느끼면서 수고하고 있다.
설교의 독특하고 신비스런 성격에 대한 몰 이해는 설교를 단순한 인간적 연설 중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강단은 또 하나의 연설대 내지는 강의 장소다. 심지어는 이를 개인 연기 장소로까지 보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설교 보다 상담이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말씀 선포에 대한 경시의 경향은 결국 강단 사역 자체 뿐 아니라 사역자 자신까지도 천대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쇠퇴와 경시는 교회의 쇠퇴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서구교회의 진상이 아닌가? 이러한 사실은 이미 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모든 이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격의 몰이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할 때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강단에 선 인간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는 사실, 설교 가운데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권능을 행하시고 현현하신다는 것이다. 강단은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진실로 강단은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칼빈은 이러한 설교의 신비를 이해했고 알았기에 그것을 실천했던 것이다.
칼빈은 그의 성경관과 설교관을 결코 나누어 놓지 않았다. 그의 성경관이 그의 설교를 결정했고 그의 주석을 인도했던 것이다.
그는 강단에서의 설교사역을 통해, 그의 주석 사역을 통해, 그의 성경관을 철저히 지켜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성경을 강해하고 선포해야 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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