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의 인간성 (The Humanity of John Calvin)
존 칼빈의 인간성 (The Humanity of John 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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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깃발에서 퍼온 자료입니다.
존 칼빈의 인간성 (The Humanity of John Calvin)
Gregory Edward Reynolds / 최승락 역
존 칼빈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때로 그는 제네바의 무정한 독재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웹스터 콘사이스 인터랙티브 백과사전 1994년 CD-ROM판에 보면 마이클 셀베투스(Michael Servetus)가 '교회 개혁가 칼빈에 의해 산채로 화형당했다'는 것과, 또 칼빈이 '엄격한 신정체제를 수립했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런 주장들은 칼빈이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는 냉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19세기의 루터파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주장하기를 칼빈은 '하나님이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일으키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최상의 인물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수긍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내가 알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칼빈의 이미지가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인데, 이런 왜곡 현상은 칼빈의 저작조차 읽어보지 않은 그들의 후학들에 의해 그대로 답습되어졌다. 두 번째 이유는 칼빈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 대해 친히 일러주신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가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15:18-20)라는 이 말씀처럼, 존 칼빈은 그의 주께서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라도 최소한 19세기의 칼빈의 적대자였던 프랑스 사람 르낭(Ernest Renan)이 그랬던 것과 같이 그의 사상은 거부하면서도 그를 '자기 시대에서 가장 그리스도적인 사람'이라고 평하는 정도의 역사적 공정성을 사람들로부터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이 항상 그렇지는 못하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칼빈에 대한 최초의 주목할만한 비방가는 로마 카톨릭교도인 볼섹(Jerome-Hermes Bolsec)인데, 그는 1577년에 칼빈을 두고 야욕적이고 뻔뻔하고 교만하며, 잔혹스럽고 악하며 복수심에 불타고, 무엇보다도 무식한 사람이라고 욕하였다. 1688년에 보쉬에(Bossuet)는 보다 교묘한 어투로 칼빈이 침울하고 쓴 마음을 지닌 야욕적이며 성깔 사나운 독재자로서 자기의 반대자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심각한 병증'을 보여주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1841년에 오딘(J.M. Audin)은 프랑스 카톨릭교회의 위임을 받아 칼빈의 전기를 작성하였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칼빈의 모습은 '결코 사랑해본 적이 없는' 자기중심적 겁쟁이의 모습이다. '그는 뱀의 본성을 가졌다'고 적고 있다. 보다 최근인 1951년에 파브르-돌사즈 신부(Father Andre Favre-Dorsaz)는 칼빈 연구가인 스타우퍼(Richard Stauffer)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아는 한 칼빈에 대한 가장 파괴적인 책'이라고 할만한 책을 출판하였다. 파브르-돌사즈에 따르면 칼빈은 잔혹하고 가학적인 독재자요, 얄팍한 신학자이며, 그 종교적 감정이 의심스러운 신앙인이었다. 1955년에 다니엘-롭스(Daniel- Rops)는 현대의 오도된 견해를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칼빈은 '광적인 인간의 완전한 전형'이었다.
칼빈은 자신의 생전에 자기에 대한 많은 비방가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런 회상의 글을 적고 있다. '내가 도처에서 이토록 나쁘게 평가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여기에 대해 고통을 느끼지 않을만큼 그런 강철심장을 나는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칼빈은 그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결코 완벽한 성인은 아니었다. 다만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남달리 탁월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는 그의 삶과 설교, 또 편지와 타인에 대한, 심지어 자기의 원수들에 대한 배려 속에서 뚜렷이 증거되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기록을 바로 잡고자 하는 노력을 이제 한 번 시작해 보도록 하자.
칼빈의 인간성 배후의 신학적 이해
1.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창조된 세상에 대한 종으로서의 관리자(servant-ruler)이다.
성경의 연구에 기초해서 칼빈은 사람이 하나님 아래에서 종으로서의 관리자가 되도록 지음받았음을 믿었다. 사람은 자신의 창조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바로 이해될 수도, 혹은 자신을 바로 이해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롭고 자애로운 지도 아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동료 인간의 유익과 축복을 위해 창조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명함을 받은 것이다.
칼빈의 인간론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은 칼빈주의적 노동 윤리가 자연환경에 대한 낭비성 착취를 부추겨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의 이론은 결코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창세기 2:15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대해 아담과 이브에게 부여해주신 권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맡겨 주신 것들을 다음과 같은 조건 하에서 소유하고 있다. 곧, 이것들을 우리가 검소하고 겸양있게 사용함으로써 쓰고 남는 것이 무엇일지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매 해의 소출을 얻을만큼 거둠으로써 그 땅이 방치로 인해 훼손 당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자신이 받은 그대로, 혹은 그보다 더 좋게 가꾸어서 후손에게 물려주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을 섬기며 또 사람을 섬기는 방식으로 잘 활용하지 않는 사람은 이를 바로 관리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비인간화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나 다른 어떤 경제 철학의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은 결코 칼빈주의가 아니다. '왕들이라 할지라도 섬기지 않으면 정의롭게 혹은 적법하게 다스리는 것이 되지 못한다.'
섬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필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에 대하여 너무나 강하게 묶어 놓으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복종을 피하여서는 안될 것이며, 사랑이 지배하는 곳에 상호 섬김이 고양될 것이다.' '법은 이익이 큰 것을 좇게 되어 있지만, 예로부터 하나님은 삶 속에서의 작은 친절 속에서도 그것을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할 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웃는 얼굴이나 명랑한 기분, 공손한 말씨 그 이상의 것이다.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자리에 그들이 서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들 자신이 고통 당하는 사람인 것처럼, 그 사람의 심정을 동정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된 자비와 인정을 보여주고 또한 그들이 바로 그 당사자인 것처럼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어야만 한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사랑의 섬김이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님을 칼빈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어버린 것이다.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이 거역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사람은 그 자신을 하나님이나 또는 타인을 섬기는 자로 생각치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주인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가슴 속에 스스로의 왕국을 가지게 되었다.' 칼빈은 종종 사람을 '벌레'로 지칭한 것 때문에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언급을 하고 있는 문맥들을 따져보면 칼빈은 사람이 창조 세계를 그 스스로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두고 이런 언급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삶으로써 사람은 그 자신의 창조의 고귀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곧, 그의 창조자와의 교제 가운데 나아가도록 지어진 본래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사람이 저급하게 되는 것은 그의 인간성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독립을 추구하는 죄악된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 칼빈의 견해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그 지어진 대로의 고귀함과 본 모습에로 회복시킬 수가 있다. 회개와 믿음은 사람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재조정시켜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때에 사람은 둘째 아담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다. 칼빈이 인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타락한 첫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인간에 집중되어 있다. 로마서 7장에 근거한 '존속하는 죄'에 대한 논의 속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죄와 싸우는 상태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이유가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인간됨이 발견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완전함을 온전한 방식으로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사람이다.' 바울이 보았던 것처럼 칼빈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사람의 지고의 선(summum bonum)이다. 그의 구속으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종으로서의 관리자의 본래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회복의 축복은 이 땅의 삶 속에서 이미 시작이 되며,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에 대해 맺는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2. 사람은 하나님의 세상을 누리도록 속함 받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세상은 새로운 눈으로 보여지게 된다. 도처에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지고, '온 세상이 사람의 안위와 행복에 이르게 하는 목적 아래 전개되고 세워져 있다'. 이 세상은 사람의 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무대로 지어져 있는 것이다. 사람의 도성 위에 드리운 저주가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다 걷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그의 복락들을 제한적이긴 하나 진정한 형태로 이 세상 가운데서 이미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회복의 징표들이 그의 섭리 가운데서 배분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올바로 사용하는 일은 오직 믿음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지상의 복락들을 맛보는 것은 믿음의 순전한 느낌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믿음이 작용되는 가운데서 우리는 이 복락들을 바르게 그리고 적법하게 우리의 기쁨과 복지를 위해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지게 된다(고전10:31). 비록 앞으로 올 하늘나라의 삶이 훨씬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의 삶이 멸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로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창조 세계는 유용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누릴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이 최고로 아름다운 무대 위에 펼쳐져 열려 있는 하나님의 작품을 경건하게 즐기는 일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도록 하자.' 욥 3:1-10에 근거한 설교에서 칼빈은 욥이 그 난 날을 저주했던 것 대신 우리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기를 권하고 있다. 자연이 주는 과일이나 꽃이나 직물, 금속 등은 그 유용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위해서도 또한 만들어졌다. '왜 하나님께서 음식을 만드셨는가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또한 우리의 즐거움과 좋은 기분을 위한 목적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공 정부기관조차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순례의 날 동안에 평화와 안정을 증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도구로 주어져 있음을 알고 이를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참 고향을 사모하는 가운데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라면, 그리고 이 순례의 길에는 그와 같은 도움들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런 것들을 사람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자들은 그 사람의 인간성 자체를 빼앗는 것과 같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창조계와 시민 정부, 문화 등의 영역을 멸시하는 수도원주의나 재세례파 등의 철학은 그야말로 '비인간적 철학'일 뿐이다. 이는 인간을 죽은 '벽돌'처럼 취급하는 것이며,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자애의 적법한 열매를 악의적으로 빼앗아가는' 사상이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구속을 받은 사람은 이를 진정으로 누릴 수가 있게 된다.
3. 사람은 자신의 창조적 은사들을 활용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은 창조적 존재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모든 풍부한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의 현재와 장래의 기쁨을 위해 경작할 수 있는 자질이 부여되어 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으며 땅을 경작했다. 죄가 사람의 동기를 왜곡시키지만, 그러나 사람의 창조적 본성을 말소시키지는 않는다. 죄인인 인간은 자신의 창의성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창의성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며, 결코 무시되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이 어떤 탁월함을 부여해 주신 사람들을 우리가 존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의 은사들을 인하여 멸시를 받으시게 된다.'
예술이나 공예, 농업, 기술 등과 같은 문화적 은사들이 야발, 유발, 두발가인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주어져 있었는데, '이는 보기 드문 자질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빛이 믿지 않는 나라들에도 비추어진 것으로서, 이는 현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기 위해 주어졌으며, …성령의 뛰어난 은사들이 인류 모두에게 고루 주어져 있다.' 모든 학문적 업적과 학식이 존중 받아야 하고 또한 향유되어야 한다. 음악과 시를 칼빈은 특별히 사랑하였다. 그의 친구인 루이 부르조와(Louis Bourgeois)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시편에 부친 많은 곡들을 지었다. 회중이 함께 부르는 찬양에 대해 칼빈은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불을 일으키는 뛰어난 방법이요, 또한 우리의 마음을 기도의 큰 열기로 타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음악은 우리의 일상의 필요보다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즐거움이 정죄되어야 한다면 이는 다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결합되지 않고, 또 인간 사회의 공동적 유익과 결합되지 않을 때일 뿐이다.'
교회 안의 많은 조각과 그림이 제2계명과 관련하여 쉽게 우상적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칼빈이 이것들을 거부하였는데,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예술 자체를 전적으로 거부했던 것처럼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어떤 형상이든지 절대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식의 미신에 아직 붙들여 있지는 않다. 오히려 조각과 그림이 하나님의 은사들이기 때문에 나는 이들을 순수하게 또 합당하게 사용하고자 한다. 다만 주께서 그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부여해 주신 이런 것들이 잘못된 오용으로 변질되고 나아가서 우리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과 창조계와 창의성에 관련된 칼빈의 견해는 죄의 현실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 구속사의 맥락 속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긍정적 색채를 띄고 있다. 칼빈 학자인 루이스 보스(Louis A. Vos)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칼빈을 엄격하고 꼬장꼬장한 부류의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칼빈은 즐거운 삶을 증진시켰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칼빈 자신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도록 하자. '우리로 하여금 웃지 못하도록, 또는 물려받은 옛 것들 위에 새 것들을 더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음악적 조화를 즐기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면에서 칼빈은 루터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두 사람이 비록 성품이나 배경, 주어진 상황 등이 많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에서 일치된 태도를 보이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두 사람이 다같이 한 분 경이로우신 하나님을 섬기고 또 알았기 때문이다.
http://blog.daum.net/kkho1105/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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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깃발에서 퍼온 자료입니다.
존 칼빈의 인간성 (The Humanity of John Calvin)
Gregory Edward Reynolds / 최승락 역
존 칼빈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때로 그는 제네바의 무정한 독재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웹스터 콘사이스 인터랙티브 백과사전 1994년 CD-ROM판에 보면 마이클 셀베투스(Michael Servetus)가 '교회 개혁가 칼빈에 의해 산채로 화형당했다'는 것과, 또 칼빈이 '엄격한 신정체제를 수립했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런 주장들은 칼빈이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는 냉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19세기의 루터파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주장하기를 칼빈은 '하나님이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일으키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최상의 인물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수긍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내가 알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칼빈의 이미지가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인데, 이런 왜곡 현상은 칼빈의 저작조차 읽어보지 않은 그들의 후학들에 의해 그대로 답습되어졌다. 두 번째 이유는 칼빈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 대해 친히 일러주신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가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15:18-20)라는 이 말씀처럼, 존 칼빈은 그의 주께서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라도 최소한 19세기의 칼빈의 적대자였던 프랑스 사람 르낭(Ernest Renan)이 그랬던 것과 같이 그의 사상은 거부하면서도 그를 '자기 시대에서 가장 그리스도적인 사람'이라고 평하는 정도의 역사적 공정성을 사람들로부터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이 항상 그렇지는 못하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칼빈에 대한 최초의 주목할만한 비방가는 로마 카톨릭교도인 볼섹(Jerome-Hermes Bolsec)인데, 그는 1577년에 칼빈을 두고 야욕적이고 뻔뻔하고 교만하며, 잔혹스럽고 악하며 복수심에 불타고, 무엇보다도 무식한 사람이라고 욕하였다. 1688년에 보쉬에(Bossuet)는 보다 교묘한 어투로 칼빈이 침울하고 쓴 마음을 지닌 야욕적이며 성깔 사나운 독재자로서 자기의 반대자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심각한 병증'을 보여주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1841년에 오딘(J.M. Audin)은 프랑스 카톨릭교회의 위임을 받아 칼빈의 전기를 작성하였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칼빈의 모습은 '결코 사랑해본 적이 없는' 자기중심적 겁쟁이의 모습이다. '그는 뱀의 본성을 가졌다'고 적고 있다. 보다 최근인 1951년에 파브르-돌사즈 신부(Father Andre Favre-Dorsaz)는 칼빈 연구가인 스타우퍼(Richard Stauffer)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아는 한 칼빈에 대한 가장 파괴적인 책'이라고 할만한 책을 출판하였다. 파브르-돌사즈에 따르면 칼빈은 잔혹하고 가학적인 독재자요, 얄팍한 신학자이며, 그 종교적 감정이 의심스러운 신앙인이었다. 1955년에 다니엘-롭스(Daniel- Rops)는 현대의 오도된 견해를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칼빈은 '광적인 인간의 완전한 전형'이었다.
칼빈은 자신의 생전에 자기에 대한 많은 비방가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런 회상의 글을 적고 있다. '내가 도처에서 이토록 나쁘게 평가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여기에 대해 고통을 느끼지 않을만큼 그런 강철심장을 나는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칼빈은 그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결코 완벽한 성인은 아니었다. 다만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남달리 탁월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는 그의 삶과 설교, 또 편지와 타인에 대한, 심지어 자기의 원수들에 대한 배려 속에서 뚜렷이 증거되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기록을 바로 잡고자 하는 노력을 이제 한 번 시작해 보도록 하자.
칼빈의 인간성 배후의 신학적 이해
1.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창조된 세상에 대한 종으로서의 관리자(servant-ruler)이다.
성경의 연구에 기초해서 칼빈은 사람이 하나님 아래에서 종으로서의 관리자가 되도록 지음받았음을 믿었다. 사람은 자신의 창조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바로 이해될 수도, 혹은 자신을 바로 이해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롭고 자애로운 지도 아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동료 인간의 유익과 축복을 위해 창조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명함을 받은 것이다.
칼빈의 인간론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은 칼빈주의적 노동 윤리가 자연환경에 대한 낭비성 착취를 부추겨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의 이론은 결코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창세기 2:15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대해 아담과 이브에게 부여해주신 권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맡겨 주신 것들을 다음과 같은 조건 하에서 소유하고 있다. 곧, 이것들을 우리가 검소하고 겸양있게 사용함으로써 쓰고 남는 것이 무엇일지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매 해의 소출을 얻을만큼 거둠으로써 그 땅이 방치로 인해 훼손 당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자신이 받은 그대로, 혹은 그보다 더 좋게 가꾸어서 후손에게 물려주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을 섬기며 또 사람을 섬기는 방식으로 잘 활용하지 않는 사람은 이를 바로 관리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비인간화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나 다른 어떤 경제 철학의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은 결코 칼빈주의가 아니다. '왕들이라 할지라도 섬기지 않으면 정의롭게 혹은 적법하게 다스리는 것이 되지 못한다.'
섬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필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에 대하여 너무나 강하게 묶어 놓으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복종을 피하여서는 안될 것이며, 사랑이 지배하는 곳에 상호 섬김이 고양될 것이다.' '법은 이익이 큰 것을 좇게 되어 있지만, 예로부터 하나님은 삶 속에서의 작은 친절 속에서도 그것을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할 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웃는 얼굴이나 명랑한 기분, 공손한 말씨 그 이상의 것이다.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자리에 그들이 서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들 자신이 고통 당하는 사람인 것처럼, 그 사람의 심정을 동정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된 자비와 인정을 보여주고 또한 그들이 바로 그 당사자인 것처럼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어야만 한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사랑의 섬김이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님을 칼빈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어버린 것이다.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이 거역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사람은 그 자신을 하나님이나 또는 타인을 섬기는 자로 생각치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주인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가슴 속에 스스로의 왕국을 가지게 되었다.' 칼빈은 종종 사람을 '벌레'로 지칭한 것 때문에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언급을 하고 있는 문맥들을 따져보면 칼빈은 사람이 창조 세계를 그 스스로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두고 이런 언급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삶으로써 사람은 그 자신의 창조의 고귀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곧, 그의 창조자와의 교제 가운데 나아가도록 지어진 본래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사람이 저급하게 되는 것은 그의 인간성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독립을 추구하는 죄악된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 칼빈의 견해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그 지어진 대로의 고귀함과 본 모습에로 회복시킬 수가 있다. 회개와 믿음은 사람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재조정시켜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때에 사람은 둘째 아담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다. 칼빈이 인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타락한 첫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인간에 집중되어 있다. 로마서 7장에 근거한 '존속하는 죄'에 대한 논의 속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죄와 싸우는 상태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이유가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인간됨이 발견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완전함을 온전한 방식으로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사람이다.' 바울이 보았던 것처럼 칼빈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사람의 지고의 선(summum bonum)이다. 그의 구속으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종으로서의 관리자의 본래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회복의 축복은 이 땅의 삶 속에서 이미 시작이 되며,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에 대해 맺는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2. 사람은 하나님의 세상을 누리도록 속함 받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세상은 새로운 눈으로 보여지게 된다. 도처에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지고, '온 세상이 사람의 안위와 행복에 이르게 하는 목적 아래 전개되고 세워져 있다'. 이 세상은 사람의 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무대로 지어져 있는 것이다. 사람의 도성 위에 드리운 저주가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다 걷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그의 복락들을 제한적이긴 하나 진정한 형태로 이 세상 가운데서 이미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회복의 징표들이 그의 섭리 가운데서 배분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올바로 사용하는 일은 오직 믿음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지상의 복락들을 맛보는 것은 믿음의 순전한 느낌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믿음이 작용되는 가운데서 우리는 이 복락들을 바르게 그리고 적법하게 우리의 기쁨과 복지를 위해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지게 된다(고전10:31). 비록 앞으로 올 하늘나라의 삶이 훨씬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의 삶이 멸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로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창조 세계는 유용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누릴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이 최고로 아름다운 무대 위에 펼쳐져 열려 있는 하나님의 작품을 경건하게 즐기는 일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도록 하자.' 욥 3:1-10에 근거한 설교에서 칼빈은 욥이 그 난 날을 저주했던 것 대신 우리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기를 권하고 있다. 자연이 주는 과일이나 꽃이나 직물, 금속 등은 그 유용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위해서도 또한 만들어졌다. '왜 하나님께서 음식을 만드셨는가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또한 우리의 즐거움과 좋은 기분을 위한 목적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공 정부기관조차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순례의 날 동안에 평화와 안정을 증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도구로 주어져 있음을 알고 이를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참 고향을 사모하는 가운데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라면, 그리고 이 순례의 길에는 그와 같은 도움들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런 것들을 사람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자들은 그 사람의 인간성 자체를 빼앗는 것과 같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창조계와 시민 정부, 문화 등의 영역을 멸시하는 수도원주의나 재세례파 등의 철학은 그야말로 '비인간적 철학'일 뿐이다. 이는 인간을 죽은 '벽돌'처럼 취급하는 것이며,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자애의 적법한 열매를 악의적으로 빼앗아가는' 사상이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구속을 받은 사람은 이를 진정으로 누릴 수가 있게 된다.
3. 사람은 자신의 창조적 은사들을 활용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은 창조적 존재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모든 풍부한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의 현재와 장래의 기쁨을 위해 경작할 수 있는 자질이 부여되어 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으며 땅을 경작했다. 죄가 사람의 동기를 왜곡시키지만, 그러나 사람의 창조적 본성을 말소시키지는 않는다. 죄인인 인간은 자신의 창의성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창의성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며, 결코 무시되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이 어떤 탁월함을 부여해 주신 사람들을 우리가 존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의 은사들을 인하여 멸시를 받으시게 된다.'
예술이나 공예, 농업, 기술 등과 같은 문화적 은사들이 야발, 유발, 두발가인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주어져 있었는데, '이는 보기 드문 자질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빛이 믿지 않는 나라들에도 비추어진 것으로서, 이는 현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기 위해 주어졌으며, …성령의 뛰어난 은사들이 인류 모두에게 고루 주어져 있다.' 모든 학문적 업적과 학식이 존중 받아야 하고 또한 향유되어야 한다. 음악과 시를 칼빈은 특별히 사랑하였다. 그의 친구인 루이 부르조와(Louis Bourgeois)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시편에 부친 많은 곡들을 지었다. 회중이 함께 부르는 찬양에 대해 칼빈은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불을 일으키는 뛰어난 방법이요, 또한 우리의 마음을 기도의 큰 열기로 타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음악은 우리의 일상의 필요보다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즐거움이 정죄되어야 한다면 이는 다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결합되지 않고, 또 인간 사회의 공동적 유익과 결합되지 않을 때일 뿐이다.'
교회 안의 많은 조각과 그림이 제2계명과 관련하여 쉽게 우상적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칼빈이 이것들을 거부하였는데,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예술 자체를 전적으로 거부했던 것처럼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어떤 형상이든지 절대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식의 미신에 아직 붙들여 있지는 않다. 오히려 조각과 그림이 하나님의 은사들이기 때문에 나는 이들을 순수하게 또 합당하게 사용하고자 한다. 다만 주께서 그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부여해 주신 이런 것들이 잘못된 오용으로 변질되고 나아가서 우리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과 창조계와 창의성에 관련된 칼빈의 견해는 죄의 현실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 구속사의 맥락 속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긍정적 색채를 띄고 있다. 칼빈 학자인 루이스 보스(Louis A. Vos)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칼빈을 엄격하고 꼬장꼬장한 부류의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칼빈은 즐거운 삶을 증진시켰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칼빈 자신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도록 하자. '우리로 하여금 웃지 못하도록, 또는 물려받은 옛 것들 위에 새 것들을 더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음악적 조화를 즐기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면에서 칼빈은 루터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두 사람이 비록 성품이나 배경, 주어진 상황 등이 많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에서 일치된 태도를 보이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두 사람이 다같이 한 분 경이로우신 하나님을 섬기고 또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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