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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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요한 칼빈의 생애 (1)

요한 칼빈의 생애 (1)

요한 칼빈의 생애(John Calvin) (1509.7.10 ~ 1564.5.27)
                      
   칼빈의 생애를 보면 그는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과 영감성을 확신했으며, 성경을 통하여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다. 그는 성경적인 신학자였으며, 성령에 붙들린 사람이다.
  1536년 4월 그의 불후의 역작인 「기독교강요」 출판을 보게 된 전후의 일이다. 많은 개혁동지(改革同志)들은 무참히 죽어가고 개혁파 안에는 기성세력인 구교(舊敎)를 대항할만한 조직적 이론도 단결도 없이 결국 개혁운동은 일대붕괴의 위기에 도달한 때였다.
카톨릭 로마교회와 당시에 성행했던 신비주의와 자유주의에서 기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집필한 그의 저작인 기독교강요가 기독교역사상 획기적인 것으로 바로 이런 때에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1)
   한 승리자 칼빈의 모습은 건강이 나빠서 언제나 허약한 모습이었으나 가장 위대한 정신적 투사 중의 한 사람이요 승리자였다. 그가 그처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를 꺾고 길들이신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였다. 다음과 같은 고백을 신조처럼 말하곤 했다.
            “나는 나의 마음을 죽여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 Promptly and Sincerely in the work of the Lord )
 
   프랑스어로 쟝 칼뱅(Jean Calvin) 혹은 쟝 코뱅(Jean Cauvin)이라 불리는 요한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피카르디(Province of Picardy)에 있는 유명한 고도(古都) 노용(Noyon)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샤를르는 신부가 되었으나 칼빈이 종교개혁의 선봉에 설 무렵에 이단으로 고발되어 1537년에 사망하였다.2)  아래로 프랑수아와 앙뜨완느라는 동생이 있었다. 프랑스어로는 쟝 깔뱅(Jean Calvin)이지만 당시의 학문 용어인 라틴어화된 이름은 요하네스 칼비누스(Joannes Calvinus)였고, 영어로 표기된 존 칼빈(John Calvin)이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페스트와 개인의 질병 때문에 그리 오래 살지 못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칼빈의 어린 시절에 죽었고, 동생 프랑수아도 어려서 죽었으므로, 아버지는 재혼하여 마리와 다른 여동생을 낳았다. 마리와 앙뜨완느는 칼빈과 함께 제네바에서 생활하면서, 칼빈이 55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칼빈의 아버지 제라드 코뱅(Gerard Cauvin)은 1481년 시의 등기직원이 되었고, 후에 노용 주교청의 비서, 노용 참사회의 대리인이 되었으며 1498년에는 시민의 신분을 얻었다. 그의 어머니는 신앙의 인물로 정숙하고도 겸손한 여성으로 존경받는 부인이었다.
칼빈이 출생해서부터 1525년까지 노용시를 통치한 주교는 샤를 드앙제(Charles de Hangest)였는데 칼빈은 어려서부터 이 주교집안의 자녀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후에 파리로 유학을 갈 때 앙제집안의 세 자녀들과 함께 갔다. 칼빈은 1521년 5월 열두 살 때 노용 대성당에 있는 라 제진(La Gésine) 제단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의 일부를 받았다. 칼빈이 받은 성직록은 성당으로부터 받은 수입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노용대성당의 제단을 시중들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칼빈이 14세의 나이로 파리에 가서 처음 공부한 곳은 마르쉐 대학(College de Marche, 1523)이다. 파리의 그 대학에서 칼빈은 근대 교육학의 창시자들 중 하나로 간주되는 라틴어 학자, 마튜랭 꼬르디에(Matutin Cordier)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칼빈을 인문주의라는 학문 세계로 안내해 주었고, 칼빈의 지속적인 충성심을 얻기도 했다. 나중에 즉, 1559년에 그들의 권위와 역할이 서로 바뀌게 되었을 때, 꼬르디에는 제네바에서 활약 중이던 칼빈과 합류했고, 그곳에서 파리에서 젊은 칼빈을 위해 행했던 바를 제네바 시의 젊은 학자들에게 행했다.3)
  1523년 말에 몽테귀 대학으로(the Collége de la Montaigu) 옮겨 이곳에서 칼빈은 철학적 소망과 신학적 소양을 닦았다.
몽테귀 대학에서 칼빈은 처음으로 약간이지만, 전통적인 스콜라적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존 메이저(John Major)와 함께 철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메이저는 1525년에 그 학부에 입학했고, 오캄주의 전통에 호의적이었으며, 교황권(權) 제한주의(Gallicanism)의 지도적 인물이기도 했다. 그 학교는 칼빈의 엄격하고도 엄정한 마음의 틀에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칼빈의 한 학우였던 인물은 칼빈이 그의 동료 학생들 가운데서 “기피 인물”(the accu- sative case)로 알려져 있었고, 자신 역시 그를 싫어했었다고 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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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희보, “목회자로서의 칼빈”, 「파수꾼」 1564년 5월 21일 제 148 호, p. 11.
2) 볼페르트 더 흐레이프, 「칼빈의 생애와 저서들」 황대우,김미정 공역, (SFC, 2006), p. 18.
3) 강정진, 「종교개혁사」 (칼빈대학출판부, 2005), p. 370.
4) Ibid., p. 370.
http://blog.daum.net/kkho1105/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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