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칼빈의 생애 (2)
요한 칼빈의 생애 (2)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자신의 모교인 몽테규 대학을 이렇게 혹평했다. “침대는 너무 딱딱하고 음식은 너무 형편없고, 종교적 철학 연구는 너무 무거워 이 대학에 들어온 첫 해에는 장래성을 보인 많은 젊은이들이 죽지 않는다면 미치거나 맹인이 되거나 나병에 걸리거나 한다. 형벌은 매질하는 것이며 교수형 집행인의 손에서나 기대할 끔찍함으로 다스려진다. 더럽고 비좁은 칸막이 방들에다 재웠는데 신경이 예민하고 성미가 급했던 에라스무스에게는 특히 가공(可恐)할 시련이었다. 그 대학의 학장은 우리 모두를 수도사로 만들기를 원했으며 우리에게 금식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육류를 전혀 주지 않았다.…”1)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아침 미사가 있고, 그 뒤에 연달아 6시까지 강의가 있는데, 강의를 듣기 위해 4시에 일어났다. 미사와 강의가 끝나면 아침식사가 있고, 식사 후 8시부터 10시까지는 상급반의 토론이 계속되었다. 11시에는 성경이나 성자들의 생활에 대한 낭독이 있고, 이어서 기도와 학교의 광고가 따르는 점심시간이 된다. 12시에는 학생들은 자신들의 아침 일에 관한 반성의 시간이었으며, 1시부터 2시까지는 모두 함께 독서를 하는 휴식 시간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꽉 짜여진 시간표 중에서 2시에서 3시까지의 시간 사이가 하는 일이 없는 빈 시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한 시간은 3시부터 5시까지의 오후 수업을 받기 위한 학생들의 자유로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저녁 기도가 있었으며, 저녁 기도 후에는 오후 수업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복습과 예습이 있었다. 겨울에는 8시면 잠자리에 들고, 여름에는 좀 더 많은 탐구와 예배를 위한 시간이 있도록 9시가 취침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이틀은 쉬는 날이었다. 학생들은 성직자들이 있는 수도원 안마당이나, 학교의 놀이터에서 게임을 하거나 산보를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었다.2)
칼빈이 소속한 몽테귀 대학은 정통주의의 요새들 중 하나로 간주되는 곳이다. 몽테귀 대학은 악명 높은 대학이긴 했지만, 16세기의 가장 저명한 인물들인 인문주의의 왕자 에라스무스, 종교개혁의 완성자 칼빈, 카톨릭 부흥 운동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를 배출한 대학이다. 수도원적인 몽테귀 대학의 극기적 교육이 이런 위대한 인물들을 탄생시키는데 어느 정도 공헌했을 것이다.
칼빈은 이 시절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특히 왕의 주치의였던 콥(Guillaume Cop) 집안과 친하게 지냈다. 칼빈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칼빈을 성직자로 키우려했다. 칼빈이 파리대학교의 몽테규 대학에서 문학 석사를 마쳤을 때,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법학을 하라고 명했다. 칼빈의 아버지가 아들의 진로를 바꾸게 한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장래 수입에 관한 생각도 했을 것이며, 노용 참시회와의 불화 때문에 아들의 장래가 불확실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제라드 꼬뱅은 부동산 시무를 관리했다. 그 내역에 대해 납득할만한 보고서를 제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용의 참사회와 불화 중에 있었다).
칼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를레앙(Orleans) 대학교에 가서 법학 공부를 했다. 그가 오를레앙에 와서 인문주의를 접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오를레앙 대학교는 당시 법학으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은 레스토알(Pierre de L'Estoile)이었다. 칼빈은 레스토알에 대해 “정신의 통찰력, 그의 강연 법학에 있어서 경험으로 그는 이 시대에 법학에서 동배가 없는 왕자로 자리 잡고 있다”고 격찬했다.
칼빈의 명석한 머리는 의논(議論)과 논리적이며 분석(分析)에 능통하였으니 그 고상한 지식은 세계적 정통신학으로 유명한 「기독교 강요」란 조직신학을 지어낸 것이다. 칼빈의 열렬한 지식은 그의 열변을 듣는 자로 하여금 강한 인상을 가지게 하였다. 이 열변들은 카톨릭에 대한 도전(挑戰)이었다.
칼빈은 또한 오를레앙 대학에서 독일의 고전 학자 멜키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와 각별한 사이가 되기도 했는데, 그는 루터파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고, 칼빈에게 초보 헬라어를 교수했다. 그는 후에 칼빈의 뒤를 이어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이끌 데어도르 베자(Theodore Beza)를 가르친 교수이기도 했다.
칼빈이 오를레앙 대학에 재학 중에, 그 대학에서 에라스무스는 라틴어를, 로이히린(Reuchlin)는 히브리어를, 그리고 알렉산더(Alexander)와 볼마르(Wolmar)는 헬라어 교수로 있었다.3)
칼빈은 1529년 유명한 이탈리아인 학자 알치아티(Andrea Alciati)의 명성을 따라 부르쥬(Bourges) 대학교를 갔다.
“그 알치아티의 입술에는 고대 희랍과 로마의 신주(神酒)가 떨어졌다. 그것은 칼빈에게 신주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새세계,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칼빈은 1531년 법률가 자격증을 딴 것으로 보인다(브르쥬 대학교에서, 어떤 자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본다).
칼빈은 1531년 5월 26일 칼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이후 자기의 원대로 프랑소아 1세(Francois I)가 1530년에 파리에 설립한 프랑스 대학에서 희랍어 공부를 계속함과 동시에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했다.
1532년 4월 4일자로 「세네카 관용론 주석」(Seneca De Clementia)을 써서 출판했다. 이 책은 칼빈이 젊은 날 지니고 있던 인문주의를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칼빈은 여기서 세네카(Seneca)와 키케로(Cicero)를 비롯하여 56명의 라틴 저자들과 22명의 희랍저자들의 저작을 인용하고 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하여 7명의 교부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기욤 부데(Guillaume Budé)와 에라스무스(D. Erasmus)를 비롯하여 당시의 여러 저자들을 인용하고 있다. 한편, 세네카의 스토아 철학이 칼빈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
칼빈이 「시편 주석」 서문에서 “돌연한 회심(subita conversio)”이라고 부른 사건, 즉 복음주의로의 회심이 언제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칼빈 연구가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켜 왔다. 대체적으로 말하는 「세네카 관용론 주석」이 나온 1532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 전이라고 보는 학자들과 그 후라고 보는 학자들로 나눌 수 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칼빈의 회심연대를 1528년으로 고집하려 한다. 가능하면 베자의 글을 존중하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니콜라스 콥(N. Copp)의 연설문을 칼빈이 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신정통주의, 신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로마 카톨릭 역사가들은 칼빈의 회심연대를 1534년으로 생각하며, 가급적 뒤로 늦추려고 한다.4)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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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an Huizinga, Erasmus and the Age of Reformation(New York, 1957), pp. 22, 117.
2) 정성구 편저, 「칼빈의 생애와 사상」, p. 42.
3) 강정진, 「종교개혁사」, p. 371.
4) Cf. T. H. L. Parker, John Calvin, p. 192-196. Appendix 2. “Calvin's Conversion”
http://blog.daum.net/kkho1105/2222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자신의 모교인 몽테규 대학을 이렇게 혹평했다. “침대는 너무 딱딱하고 음식은 너무 형편없고, 종교적 철학 연구는 너무 무거워 이 대학에 들어온 첫 해에는 장래성을 보인 많은 젊은이들이 죽지 않는다면 미치거나 맹인이 되거나 나병에 걸리거나 한다. 형벌은 매질하는 것이며 교수형 집행인의 손에서나 기대할 끔찍함으로 다스려진다. 더럽고 비좁은 칸막이 방들에다 재웠는데 신경이 예민하고 성미가 급했던 에라스무스에게는 특히 가공(可恐)할 시련이었다. 그 대학의 학장은 우리 모두를 수도사로 만들기를 원했으며 우리에게 금식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육류를 전혀 주지 않았다.…”1)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아침 미사가 있고, 그 뒤에 연달아 6시까지 강의가 있는데, 강의를 듣기 위해 4시에 일어났다. 미사와 강의가 끝나면 아침식사가 있고, 식사 후 8시부터 10시까지는 상급반의 토론이 계속되었다. 11시에는 성경이나 성자들의 생활에 대한 낭독이 있고, 이어서 기도와 학교의 광고가 따르는 점심시간이 된다. 12시에는 학생들은 자신들의 아침 일에 관한 반성의 시간이었으며, 1시부터 2시까지는 모두 함께 독서를 하는 휴식 시간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꽉 짜여진 시간표 중에서 2시에서 3시까지의 시간 사이가 하는 일이 없는 빈 시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한 시간은 3시부터 5시까지의 오후 수업을 받기 위한 학생들의 자유로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저녁 기도가 있었으며, 저녁 기도 후에는 오후 수업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복습과 예습이 있었다. 겨울에는 8시면 잠자리에 들고, 여름에는 좀 더 많은 탐구와 예배를 위한 시간이 있도록 9시가 취침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이틀은 쉬는 날이었다. 학생들은 성직자들이 있는 수도원 안마당이나, 학교의 놀이터에서 게임을 하거나 산보를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었다.2)
칼빈이 소속한 몽테귀 대학은 정통주의의 요새들 중 하나로 간주되는 곳이다. 몽테귀 대학은 악명 높은 대학이긴 했지만, 16세기의 가장 저명한 인물들인 인문주의의 왕자 에라스무스, 종교개혁의 완성자 칼빈, 카톨릭 부흥 운동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를 배출한 대학이다. 수도원적인 몽테귀 대학의 극기적 교육이 이런 위대한 인물들을 탄생시키는데 어느 정도 공헌했을 것이다.
칼빈은 이 시절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특히 왕의 주치의였던 콥(Guillaume Cop) 집안과 친하게 지냈다. 칼빈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칼빈을 성직자로 키우려했다. 칼빈이 파리대학교의 몽테규 대학에서 문학 석사를 마쳤을 때,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법학을 하라고 명했다. 칼빈의 아버지가 아들의 진로를 바꾸게 한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장래 수입에 관한 생각도 했을 것이며, 노용 참시회와의 불화 때문에 아들의 장래가 불확실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제라드 꼬뱅은 부동산 시무를 관리했다. 그 내역에 대해 납득할만한 보고서를 제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용의 참사회와 불화 중에 있었다).
칼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를레앙(Orleans) 대학교에 가서 법학 공부를 했다. 그가 오를레앙에 와서 인문주의를 접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오를레앙 대학교는 당시 법학으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은 레스토알(Pierre de L'Estoile)이었다. 칼빈은 레스토알에 대해 “정신의 통찰력, 그의 강연 법학에 있어서 경험으로 그는 이 시대에 법학에서 동배가 없는 왕자로 자리 잡고 있다”고 격찬했다.
칼빈의 명석한 머리는 의논(議論)과 논리적이며 분석(分析)에 능통하였으니 그 고상한 지식은 세계적 정통신학으로 유명한 「기독교 강요」란 조직신학을 지어낸 것이다. 칼빈의 열렬한 지식은 그의 열변을 듣는 자로 하여금 강한 인상을 가지게 하였다. 이 열변들은 카톨릭에 대한 도전(挑戰)이었다.
칼빈은 또한 오를레앙 대학에서 독일의 고전 학자 멜키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와 각별한 사이가 되기도 했는데, 그는 루터파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고, 칼빈에게 초보 헬라어를 교수했다. 그는 후에 칼빈의 뒤를 이어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이끌 데어도르 베자(Theodore Beza)를 가르친 교수이기도 했다.
칼빈이 오를레앙 대학에 재학 중에, 그 대학에서 에라스무스는 라틴어를, 로이히린(Reuchlin)는 히브리어를, 그리고 알렉산더(Alexander)와 볼마르(Wolmar)는 헬라어 교수로 있었다.3)
칼빈은 1529년 유명한 이탈리아인 학자 알치아티(Andrea Alciati)의 명성을 따라 부르쥬(Bourges) 대학교를 갔다.
“그 알치아티의 입술에는 고대 희랍과 로마의 신주(神酒)가 떨어졌다. 그것은 칼빈에게 신주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새세계,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칼빈은 1531년 법률가 자격증을 딴 것으로 보인다(브르쥬 대학교에서, 어떤 자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본다).
칼빈은 1531년 5월 26일 칼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이후 자기의 원대로 프랑소아 1세(Francois I)가 1530년에 파리에 설립한 프랑스 대학에서 희랍어 공부를 계속함과 동시에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했다.
1532년 4월 4일자로 「세네카 관용론 주석」(Seneca De Clementia)을 써서 출판했다. 이 책은 칼빈이 젊은 날 지니고 있던 인문주의를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칼빈은 여기서 세네카(Seneca)와 키케로(Cicero)를 비롯하여 56명의 라틴 저자들과 22명의 희랍저자들의 저작을 인용하고 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하여 7명의 교부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기욤 부데(Guillaume Budé)와 에라스무스(D. Erasmus)를 비롯하여 당시의 여러 저자들을 인용하고 있다. 한편, 세네카의 스토아 철학이 칼빈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
칼빈이 「시편 주석」 서문에서 “돌연한 회심(subita conversio)”이라고 부른 사건, 즉 복음주의로의 회심이 언제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칼빈 연구가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켜 왔다. 대체적으로 말하는 「세네카 관용론 주석」이 나온 1532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 전이라고 보는 학자들과 그 후라고 보는 학자들로 나눌 수 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칼빈의 회심연대를 1528년으로 고집하려 한다. 가능하면 베자의 글을 존중하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니콜라스 콥(N. Copp)의 연설문을 칼빈이 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신정통주의, 신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로마 카톨릭 역사가들은 칼빈의 회심연대를 1534년으로 생각하며, 가급적 뒤로 늦추려고 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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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an Huizinga, Erasmus and the Age of Reformation(New York, 1957), pp. 22, 117.
2) 정성구 편저, 「칼빈의 생애와 사상」, p. 42.
3) 강정진, 「종교개혁사」, p. 371.
4) Cf. T. H. L. Parker, John Calvin, p. 192-196. Appendix 2. “Calvin's Conversion”
http://blog.daum.net/kkho1105/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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