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칼빈의 생애 (4)
요한 칼빈의 생애 (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 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던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라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3-19).1)
칼빈주의 역사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졌던 점은 개인과 사회의 성화(聖化)의 높은 표준에 대한 강화(强化)였다. 그의 사역 기간 전반에 걸쳐 칼빈은 변함없이 이른바 그가 “리베르땅(방종파)”(Libertines)과 “니고데모파들”(Nicodemites)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조롱했던, 두 집단들에 대해 극히 민감했었다. 전자는 그들의 생활이 이완(弛緩)되고 신앙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믿음이 적은 그들이 헛되이(valuelessly) 표류하고, 그들이 애착을 갖는 것들의 노예가 된다. 마이클 왈쩌(Michael Walzer)가 청교도 신앙(puritanism)에 관한 그의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칼빈주의자들이 결코 견딜 수 없었던 한 가지 사항은 “주인이 없는 사람들” (masterless men)이었다.2) 칼빈은 리베르땅들을 가르켜 “세상이 일찍이 알아왔던 종파들(sects) 중에서 가장 가증스럽고 유해한 종파(宗派)”라고 기술했다.3) 그는 제네바의 리베르땅들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귀족 가문, 파브르(Favres) 가(家) 사람들과 동류화(同類化)했는데, 그들은 스위스 연방의 금지법들(주일에 유흥, 오락, 무도들을 금지시킨 법들로 18세기 청교도들의 엄격한 법의 모태가 되었음)을 도발적으로 범하곤 했다. 칼빈은 그 가문의 족장(patriarch)인 프랑소아(Francois)를 그의 부도덕한 처신을 이유로 성찬식에서 배제시킨 적이 있었고, 그의 아내가 한 결혼식에서 난잡한 춤을 춘 일을 징책하기도 했다.
니고데모파들은 참된(복음적) 신앙으로 개종하긴 했으나, 그 신앙에 준해 자신들을 행동에로는 이끌 수 없는 즉, 그 참된 신앙을 흉내만 내고 있을 뿐, 그것의 모든 실천적 의도들과 목적들에는 운신(運身)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명칭은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다고는 했으나, “거듭남”(new-birth)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한 유대인 니고데모에 관한 신약성경 기사(요 3:1)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애초에 칼빈은 어쩌면 훌륭한 웅변들로써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개혁되지 않고 카톨릭 교회와 연합돼 있던, 프랑스의 인문주의적 개혁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일런지도 모른다.4)
이 니고데모파들은 사실은 진보적인 프로테스탄트 지성인들(advanced protestant intellectuals)을 지칭한 것이었다고, 그들은 종교개혁이 자체의 사회적 약속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 후 점차 편협화 되어 가던 16세기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만 정통적 신앙들(orthdox beliefs)을 흉내내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영성주의(靈性主義)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5) 그 파들이 늘 그렇게 자의식적이었고 조직화된 집단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6) 그런가 하면, 그 시늉만 내는 신앙이라는 문제가 한 종교개혁자로서의 칼빈의 전 생애에 걸쳐 그를 괴롭혀 왔었으리라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1533년 11월 1일 만성절 날에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은 파리 대학교의 신임 총장으로 취임 연설을 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말을 사용하여 개혁을 호소했다. 칼빈이 이 연설문을 썼는가 하는 것은 계속 논쟁되어 온 문제다. 이 사건으로 칼빈은 파리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연설문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설교였다. 콥은 신학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글들은 인용하였다. 이날 연설의 주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멍에를 정해놓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남기신 구원에 이르는 선행이라고 강조하는 교훈을 비판한 것이다. 소르본느 교수들이 주장하는 선행론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그들이 조금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이날은 마틴 루터가 1517년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고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불지른 역사적인 날이었다. 만성절(All Saints Day)은 매년 11월 1일 성자의 유품이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믿던 로마 카톨릭의 성일로서 미신적인 신앙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당시에는 여간 중요한 날이 아니었다. 로마 카톨릭의 미신숭배의 전통에 의해 생겨난 이 절기는 아픈 병자들을 위해 죽은 성자들의 유품이 있는 성당들을 찾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수입이 생기는 측은 성당의 주교와 그 지방의 영주들이었다. 질병의 치유와 소원의 성취를 위해 거액을 기증하면, 성자의 유품을 가까이에서 만지거나 마주 대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루터는 바로 그 전날 10월 31일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비텐부르그 대학 교회의 게시판에 라틴어로 된 반박문을 게재하였던 것이다.
이날 콥의 연설은 놀라운 충격이었다. 그 전반적인 내용은 루셀의 설교를 약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고, 마틴 루터의 만성절 설교문과 1534년에 출판된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 제 3 판 서문에 나온 것들을 변형시킨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마리아 숭배의 카톨릭 전통을 담고 있었지만, 이 연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원리를 추종하는 어떤 사람이 만들었다는 단서가 충분하게 느껴지는 강렬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공로에 대한 믿음이 개신교 신학의 주춧돌과 같은 핵심 사상이 아닌가!
물론 일반 시민들은 간파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평소에 니콜라스 콥과 자주 어울려 다니면서 생활했으므로 당연히 같은 사상의 소유자로 분류되었다. 경찰이 그의 집 앞에 도달했을 때에 그는 창문 밖으로 줄을 매달아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7)
칼빈은 1534년 5월 4일에 노용에서 성직록을 반환했다. 이 때 칼빈이 소요로 투옥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한편 1534년 10월 마르쿠르(Antoine Marcourt)가 미사를 반대하는 조문들을 붙인 사건이 있은 후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프랑소아 1세는 황제에 대항해 독일 신교도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프랑스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그들의 무정부주의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칼빈은 복음주의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이미 집필을 시작한 책을 서둘러 완성하여 프랑소아 1세에게 신교도들을 변호하는 서문을 봍여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했다. 이 책이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基督敎綱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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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본문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우리가 지상에서 나그네의 삶(tempus incolatus)을 살 동안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믿고 영접하지 않으면 그 삶이 미로(labyrinthus)에 헤매고 심연(abyssus)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Comm. I. Pet. 1:17, 18, 20 (CO 55, 223, 224, 226). 미로와 심연은 William J. Bouwsma가 그의 책 John Calvin: A Sixteenth Century Portrai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8)에서 칼빈의 불안(anxiety)을 설명하기 위한 두 가지 메타포이다(esp. 32-38, 230-234).
2) The Revolution of the Saints: A Study in the Origins of Radical Politics (New York, 1970), p. 313.
3) Jules Bonnet 역, Letters of John Calvin (Philadelphia, 1858), 1: 455; “Actes de Collque Intl. de sommiers, Aspects du libertinism au XVIe siècle” (Paris, 1974); R. W. Collins, Calvin and the Libertines of Geneva(Toronto, 1968)를 보라.
4) Beza는 니고데모파들(Nicodemites)을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초기에 프로테스탄트의 종료를 포기하고, 그 후에는 자신들이 자기들 마음 속에 진정한 종교를 품고 있는 한, 단지 몸만으로 미사에 참석하는 것에는 하등 되 될 것이 없다고 부인할 만큼 자신들을 뽐내기 시작한, 프랑스의 어떤 사람들”(certain persons in France, who having renounced the Protestant religion at the Commencement, turough fear of persecution, had begun afterwards so far to flatter themselves as to dany there was any sin in being present with their bodies only at the celebration of the mass, provided they embraced the true religion in their hearts)이라고 기술한다(Life of Calvin, p. 39).
Albert Autin의 “Une episode de lavie Calvin: La Crise de Nicodèmisme 1535-45”(roulon, 1917)를 보라.
5) Carlo Ginzburg, Il Nicodemismo: Similazione e dissimulazione religiosa nell' Europe del'500 (Turin, 1970). Ginzburg는 니고데모파들로, 저명한 창시자 Otto Brunfels, Wolfgang Capito, Bartholomäus Westheimer, Sebastian Frank, Johannes Brenz, Clement Ziegler, Camilio Renato, 그리고 Jacques Lefèvre를 든다.
6)Carlos M. N.Eire에 의한 Ginzbutg의 저작에 대한 비판, “Calvin and Nicodemism: A Reappraisal”, Sixteenth Century Journal 10(1979) pp.45-69를 보라; 그리고 Eire의 박사학위 논문. “Idolartry and the Reformation: A Study of the Protestant Attack on Catholic Worship in Germany, Switzerland, and France, 1500-1580”(Yale, 1979), 제5장도 보라. 강정진, 「종교개혁사」, pp. 375-376.
7) 김재성 저,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p. 149
http://blog.daum.net/kkho1105/222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 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던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라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3-19).1)
칼빈주의 역사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졌던 점은 개인과 사회의 성화(聖化)의 높은 표준에 대한 강화(强化)였다. 그의 사역 기간 전반에 걸쳐 칼빈은 변함없이 이른바 그가 “리베르땅(방종파)”(Libertines)과 “니고데모파들”(Nicodemites)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조롱했던, 두 집단들에 대해 극히 민감했었다. 전자는 그들의 생활이 이완(弛緩)되고 신앙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믿음이 적은 그들이 헛되이(valuelessly) 표류하고, 그들이 애착을 갖는 것들의 노예가 된다. 마이클 왈쩌(Michael Walzer)가 청교도 신앙(puritanism)에 관한 그의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칼빈주의자들이 결코 견딜 수 없었던 한 가지 사항은 “주인이 없는 사람들” (masterless men)이었다.2) 칼빈은 리베르땅들을 가르켜 “세상이 일찍이 알아왔던 종파들(sects) 중에서 가장 가증스럽고 유해한 종파(宗派)”라고 기술했다.3) 그는 제네바의 리베르땅들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귀족 가문, 파브르(Favres) 가(家) 사람들과 동류화(同類化)했는데, 그들은 스위스 연방의 금지법들(주일에 유흥, 오락, 무도들을 금지시킨 법들로 18세기 청교도들의 엄격한 법의 모태가 되었음)을 도발적으로 범하곤 했다. 칼빈은 그 가문의 족장(patriarch)인 프랑소아(Francois)를 그의 부도덕한 처신을 이유로 성찬식에서 배제시킨 적이 있었고, 그의 아내가 한 결혼식에서 난잡한 춤을 춘 일을 징책하기도 했다.
니고데모파들은 참된(복음적) 신앙으로 개종하긴 했으나, 그 신앙에 준해 자신들을 행동에로는 이끌 수 없는 즉, 그 참된 신앙을 흉내만 내고 있을 뿐, 그것의 모든 실천적 의도들과 목적들에는 운신(運身)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명칭은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다고는 했으나, “거듭남”(new-birth)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한 유대인 니고데모에 관한 신약성경 기사(요 3:1)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애초에 칼빈은 어쩌면 훌륭한 웅변들로써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개혁되지 않고 카톨릭 교회와 연합돼 있던, 프랑스의 인문주의적 개혁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일런지도 모른다.4)
이 니고데모파들은 사실은 진보적인 프로테스탄트 지성인들(advanced protestant intellectuals)을 지칭한 것이었다고, 그들은 종교개혁이 자체의 사회적 약속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 후 점차 편협화 되어 가던 16세기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만 정통적 신앙들(orthdox beliefs)을 흉내내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영성주의(靈性主義)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5) 그 파들이 늘 그렇게 자의식적이었고 조직화된 집단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6) 그런가 하면, 그 시늉만 내는 신앙이라는 문제가 한 종교개혁자로서의 칼빈의 전 생애에 걸쳐 그를 괴롭혀 왔었으리라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1533년 11월 1일 만성절 날에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은 파리 대학교의 신임 총장으로 취임 연설을 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말을 사용하여 개혁을 호소했다. 칼빈이 이 연설문을 썼는가 하는 것은 계속 논쟁되어 온 문제다. 이 사건으로 칼빈은 파리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연설문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설교였다. 콥은 신학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글들은 인용하였다. 이날 연설의 주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멍에를 정해놓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남기신 구원에 이르는 선행이라고 강조하는 교훈을 비판한 것이다. 소르본느 교수들이 주장하는 선행론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그들이 조금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이날은 마틴 루터가 1517년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고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불지른 역사적인 날이었다. 만성절(All Saints Day)은 매년 11월 1일 성자의 유품이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믿던 로마 카톨릭의 성일로서 미신적인 신앙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당시에는 여간 중요한 날이 아니었다. 로마 카톨릭의 미신숭배의 전통에 의해 생겨난 이 절기는 아픈 병자들을 위해 죽은 성자들의 유품이 있는 성당들을 찾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수입이 생기는 측은 성당의 주교와 그 지방의 영주들이었다. 질병의 치유와 소원의 성취를 위해 거액을 기증하면, 성자의 유품을 가까이에서 만지거나 마주 대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루터는 바로 그 전날 10월 31일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비텐부르그 대학 교회의 게시판에 라틴어로 된 반박문을 게재하였던 것이다.
이날 콥의 연설은 놀라운 충격이었다. 그 전반적인 내용은 루셀의 설교를 약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고, 마틴 루터의 만성절 설교문과 1534년에 출판된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 제 3 판 서문에 나온 것들을 변형시킨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마리아 숭배의 카톨릭 전통을 담고 있었지만, 이 연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원리를 추종하는 어떤 사람이 만들었다는 단서가 충분하게 느껴지는 강렬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공로에 대한 믿음이 개신교 신학의 주춧돌과 같은 핵심 사상이 아닌가!
물론 일반 시민들은 간파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평소에 니콜라스 콥과 자주 어울려 다니면서 생활했으므로 당연히 같은 사상의 소유자로 분류되었다. 경찰이 그의 집 앞에 도달했을 때에 그는 창문 밖으로 줄을 매달아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7)
칼빈은 1534년 5월 4일에 노용에서 성직록을 반환했다. 이 때 칼빈이 소요로 투옥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한편 1534년 10월 마르쿠르(Antoine Marcourt)가 미사를 반대하는 조문들을 붙인 사건이 있은 후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프랑소아 1세는 황제에 대항해 독일 신교도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프랑스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그들의 무정부주의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칼빈은 복음주의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이미 집필을 시작한 책을 서둘러 완성하여 프랑소아 1세에게 신교도들을 변호하는 서문을 봍여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했다. 이 책이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基督敎綱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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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본문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우리가 지상에서 나그네의 삶(tempus incolatus)을 살 동안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믿고 영접하지 않으면 그 삶이 미로(labyrinthus)에 헤매고 심연(abyssus)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Comm. I. Pet. 1:17, 18, 20 (CO 55, 223, 224, 226). 미로와 심연은 William J. Bouwsma가 그의 책 John Calvin: A Sixteenth Century Portrai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8)에서 칼빈의 불안(anxiety)을 설명하기 위한 두 가지 메타포이다(esp. 32-38, 230-234).
2) The Revolution of the Saints: A Study in the Origins of Radical Politics (New York, 1970), p. 313.
3) Jules Bonnet 역, Letters of John Calvin (Philadelphia, 1858), 1: 455; “Actes de Collque Intl. de sommiers, Aspects du libertinism au XVIe siècle” (Paris, 1974); R. W. Collins, Calvin and the Libertines of Geneva(Toronto, 1968)를 보라.
4) Beza는 니고데모파들(Nicodemites)을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초기에 프로테스탄트의 종료를 포기하고, 그 후에는 자신들이 자기들 마음 속에 진정한 종교를 품고 있는 한, 단지 몸만으로 미사에 참석하는 것에는 하등 되 될 것이 없다고 부인할 만큼 자신들을 뽐내기 시작한, 프랑스의 어떤 사람들”(certain persons in France, who having renounced the Protestant religion at the Commencement, turough fear of persecution, had begun afterwards so far to flatter themselves as to dany there was any sin in being present with their bodies only at the celebration of the mass, provided they embraced the true religion in their hearts)이라고 기술한다(Life of Calvin, p. 39).
Albert Autin의 “Une episode de lavie Calvin: La Crise de Nicodèmisme 1535-45”(roulon, 1917)를 보라.
5) Carlo Ginzburg, Il Nicodemismo: Similazione e dissimulazione religiosa nell' Europe del'500 (Turin, 1970). Ginzburg는 니고데모파들로, 저명한 창시자 Otto Brunfels, Wolfgang Capito, Bartholomäus Westheimer, Sebastian Frank, Johannes Brenz, Clement Ziegler, Camilio Renato, 그리고 Jacques Lefèvre를 든다.
6)Carlos M. N.Eire에 의한 Ginzbutg의 저작에 대한 비판, “Calvin and Nicodemism: A Reappraisal”, Sixteenth Century Journal 10(1979) pp.45-69를 보라; 그리고 Eire의 박사학위 논문. “Idolartry and the Reformation: A Study of the Protestant Attack on Catholic Worship in Germany, Switzerland, and France, 1500-1580”(Yale, 1979), 제5장도 보라. 강정진, 「종교개혁사」, pp. 375-376.
7) 김재성 저,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p.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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