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던 변증, 그 끝은 언제나 ‘진리’
| [칼빈 500주년 기념 특별기획] 거침없던 변증, 그 끝은 언제나 ‘진리’ | |||||||||||||
| 칼빈 신앙 대탐험/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 (5) 변증가 칼빈 | |||||||||||||
| |||||||||||||
|
가톨릭·재세례파 오류 명쾌하게 논박 말씀엔 타협없으나 겸손한 인간미 겸비 사도행전을 보면 초기 사도들은 소명에 따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설교하였으며, 그 순교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복음의 열정 때문에 죽음의 위협에도 여러 번 처했으나 굴하지 않았으며, 가는 곳마다 그들의 소신을 밝혔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변증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그 열정을 가슴 속에 감추어둘 수 없다. 산위에 있는 도시가 숨겨질 수 없듯이…. 칼빈의 존재 역시 그러했다. 그는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침착했고, 더불어 영혼을 껴안는 사랑과 허물을 덮어주는 온유함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
칼빈이 기독교 교리를 변증한 주요한 대상은 가톨릭과 재세례파였다. 칼빈은 시종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서 가톨릭의 형식주의와 계급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신비주의적 체험을 강조한 재세례파도 거침없이 반박하였다. 당시 재세례파는 유아 세례를 부인하고 성인이 되어서 신앙고백을 해야 그 때 구원이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네덜란드 국경 베스트팔리아 지방의 한 도시 뮌스터를 거점으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재세례파는 “인간의 영혼이 기억과 지성과 감각을 잃어버린 채, 죽은 순간부터 장차 깨어 일어날 최후 심판의 날까지 잠을 잔다”는 ‘영혼 수면설’을 주창했다. 칼빈은 자신의 첫 단행본 신학 작품인 〈영혼수면설〉을 통해 고린도 전서 15장을 중심으로 성경구절들을 무수히 인용함으로써 재세례파의 주장을 통렬하게 논박했다. 그의 진리에 대한 열정과 논변력이 빛을 발한 또 다른 곳은 1536년 스위스 로잔에서 있었던 가톨릭교회 측과의 공개토론회였다. 당시 가톨릭교회 대표들은 개혁자들이 초대 교부들을 무시하고 있다면서 개혁자들을 몰아 부쳤다. 개신교 측 대표단들이 궁지에 빠졌을 때 칼빈은 “가톨릭교회가 위대한 교부들의 서적들을 보관은 하고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신앙과 정신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은 개혁자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고 명쾌하게 논박했다. 그의 생애에서 칼빈의 변증가로서의 진가가 가장 두드러진 때는 스페인 신학자인 미카엘 세르베투스(Miguel Serveto, 1511(?)~1553) 사건에서였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의 오류들〉(1531)이란 책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를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성령이 하나님의 신성한 인격임을 부인했고 선재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육신이심은 부인했다. 또 그는 〈기독교의 회복〉(1546)을 통해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유아세례 교리가 원시 기독교를 왜곡시킨 중대한 세 가지 오류라고 주장했다. 또 예정론을 강하게 부인하면서 구원에 있어서 선행(善行)의 유효성을 받아들였다. 세르베투스는 당시 가톨릭과 루터란 등을 비롯한 모든 교단들로부터 사악한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급기야 비엔느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가톨릭교회에 체포되어 화형의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화형 직전에 그곳을 탈출하여 제네바로 숨어들었다. 제네바에서 체포된 세르베투스는 의회의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칼빈은 다만 목사와 장로의 회의 대표로서 신학적으로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지적했을 뿐이다. 칼빈은 삼위일체에 대한 세르베투스의 잘못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모세오경이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 것을 세르베투스가 비판적으로 다룬 사실을 알리며 이것은 모세오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것을 부인하는 처사라고 강조했다. 또 세르베투스의 다신론적 세계관 역시 문제 삼았다. 그리고 유아세례를 부인한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했다. 세르베투스는 재판에서 갖은 변명을 일삼고, 자신이 쓴 책들을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칼빈의 날카로운 지적 앞에 그의 잘못은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세르베투스의 이단 정죄와 화형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칼빈을 공격한 바젤대학 교수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1515~1563)와의 공박도 칼빈 생애에 빠뜨릴 수 없는 변증의 한 장면이었다. 카스텔리오는 〈이단자에 대하여〉 〈칼빈의 글에 반대함〉 등의 책자를 통해 칼빈을 독재자로 비난했으며 재세례파가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했다. 이에 대해 칼빈은 〈불량배의 중상모략〉을 발표, 카스텔리오의 견해는 사탄적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칼빈의 논증을 통해 결국 제네바 시 당국은 차츰 카스텔리오가 이단적임을 깨닫게 되었으며 당시의 재세례파 지도자 다비드 요리스나, 일부다처제를 허용했던 베르나르디노 오키노와도 돈독한 관계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했을 때 현지인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타났다. 사도행전 14장 4절은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라고 기록했다. 진리의 빛이 비추이는 곳에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칼빈의 진리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비난하지만 그의 변증들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신학 사상에 대한 것이었기에 그들의 힐난은 정당하지 않다. 칼빈의 변증가로서의 삶은 유대 권세자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 것은 없다”고 고백한 베드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 |||||||||||||
mission@kidok.com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