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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꼽 연설문 사건’이 그를 움직였다

꼽 연설문 사건’이 그를 움직였다
종교개혁 지지 발언에 권력층 신랄한 공격...‘친구’ 칼빈, 행동하는 개혁가로 방향 선회
2009년 05월 14일 (목) 15:56:53 강석근 기자 harikein@kidok.com
'칼빈 신앙 대탐험/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1. 인간 칼빈을 말한다 - 갑작스런 회심


그날 칼빈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화형대의 장작더미 위에서 초조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라’고 부르짖던 청년 파반느의 외침을 결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청년은 벌겋게 달궈진 집게로 몸이 찢기는 형벌을 당하고 화염과 함께 그렇게 사라져갔다.

화형대의 잔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신의 영원한 ‘후견인’으로 남아있을 것 같았던 아버지 제라르 꼬뱅이 사제단과 관계가 악화된 채로 1531년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는 칼빈에게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하고 자식의 성공을 누구보다도 기대하던 무너짐 없는 성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형 샤를은 교회에서 무기를 소지한 일과 신부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파면이 되고 감금을 당했다. 형은 자신의 죄를 탄원하지 않고 사제단과 끝까지 맞서면서 성찬을 거부하다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청년 칼빈은 아버지를 여윈 슬픔과 형의 파문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가족사의 불행의 늪에는 사제단과 갈등이 주 원인이었다.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은 개인적으로 복합적인 일들이 벌어질 당시인 1532년 4월에 출간되었다. 특히 이 책이 주목을 끄는 것은 칼빈의 회심의 시점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관용론〉이 발표되기 전에 칼빈이 복음주의로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세네카가 네로 황제에게 관용을 강조한 것처럼 칼빈이 당시 프란시스 1세에게 종교개혁자들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권면하면서 썼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칼빈에게 자비나 사랑의 마음이 가득차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이 인문주의적 관점이고 성경을 언급한 것은 딱 3곳 밖에 없어 회심 이후의 저서라고 주장한다. 학자적 꿈을 지닌 순수한 청년이 자신을 학계에 드러내기 위해 〈관용론〉을 발표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칼빈의 회심은 지금도 격심한 논쟁의 대상으로서 어떤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 칼빈은 파리에서 종교개혁을 부르짖다가 화형대로 사라지는 믿음의 친구들을 보고 갈등을 느꼈다. 그림은 고 한풍렬 화가가 그린 〈예술 그리고 지혜가 있는 다리〉 파리의 모습. (본 기획 그림은 고 한풍렬 화가의 유족 동의와 진흥문화사 협조로 사용함을 밝힙니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 사람들은 칼빈의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 sudden conversion)’이 〈관용론〉 주석이 완성된 이후 니콜라스 꼽의 연설문을 작성하기 전 그 사이 어느 시점 즉 1532년과 1533년 사이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1533년 11월 1일, 의학교수이던 젊은 의사 니꼴라 꼽이 소르본느 새 학장으로 임명되고 연설을 한 날은 칼빈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손꼽힌다. 마침 이날은 마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불을 지른 중요한 날이다. 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공로로 은혜를 받았다는 요지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파리의 권력층과 고위 성직자들의 거센 파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요동쳤다. 꼽에 대해 소환장을 발부하고 현상금까지 내걸게 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하며 잡아들였다. 칼빈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처없는 망명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꼽의 연설문 사건을 신호로 칼빈이 돌이킬 수 없는 개혁의 진영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은 1536년 〈기독교강요〉를 출간할 당시 신실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을 수가 없어서 그들을 옹호하는 차원에서 〈기독교강요〉를 출판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여전히 은둔자처럼 홀로 지내면서 종교개혁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이를 두고 칼빈이 한 단계 한 단계 점진적인 과정을 밟으며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친구 꼽의 연설문 사건은 칼빈을 행동하는 종교개혁가로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칼빈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1557년 〈시편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록 내 아버지께 순종하려는 소망에서 내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밀하신 섭리로 나를 제어하사 마침내 내 진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셨다. 첫째로 일어난 일은 갑작스런 회심으로 여러 해 동안 너무나 고집스러웠던 마음을 가르칠만하게(docilis, teachable) 만드셨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 가운데서 우리는 칼빈이 갑작스럽게 회심을 경험한 후 서서히 복음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굳혀 간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기독교강요〉를 저술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믿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 칼빈의 지적 산물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은 고대 문화·역사·문학에 관한 지식을 근거로 칼빈이 약관 22세의 나이에 저술한 첫 작품이다. 약 55명의 라틴 저술가와 22명의 헬라 저작자들이 인용되고 초대교회 교부들 저술이 7차례 언급되었다. 그렇지만 성경은 단지 세 번만 인용하고 있어 이때까지 칼빈이 회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가 된다. 덧붙여 〈관용론〉은 복음주의 정신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칼빈 자신이 학문적인 방향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출발한 저작물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시 말해 에라스무스와 같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의 꿈을 가진 패기 넘치는 청년의 지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아버지가 바라던 법조인이 되고자 함과는 달리 비평과 해석에 집중하는 휴머니스트가 되려고 했음직하다. 이 책에 드러나는 부드러운 기교, 설득력 있는 해석은 언어학자 수사학자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으며, 당시의 문화와 역사의 배경을 충실히 기술하고 있다는 평가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수사학자인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통치자에게 자비로운 방법으로 정치해 줄 것을 호소한 지혜를 남겨 놓았다. 이 책의 해설을 칼빈이 출판한 것이다.

비록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내용은 함의하고 있지 않지만 책에서는 칼빈이 이후 그가 강조한 하나님의 맞추심, 군주의 덕, 율법의 용법 등에 대한 입장들의 일단(一端)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책에서 군주를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불렀으며, 하나님께서 군주에서 맞추어 주시듯이 군주는 백성에게 맞추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형벌을 가할 때에는 교육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함을 지적하였다.

아무튼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은 복음적인 내용은 드러나지 않지만 칼빈이 당시 종교적인 문제로 내적인 갈등을 갖고 썼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http://blog.daum.net/kkho1105/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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