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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인문·법학 오가며 학구열 불태워

인문·법학 오가며 학구열 불태워 
파리의 두 대학서 굶주림 채우듯 공부
교리 잘못 눈뜬 후 루터의 길 걷게 돼
 
 2009년 05월 07일 (목) 09:59:38 박용미 기자  mee@kidok.com 
 
 
'칼빈 신앙 대탐험/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1. 인간 칼빈을 말한다 - 지적 뿌리, 인문학과 법학

나의 오랜 친구 클로드에게.
클로드, 오랜만이지? 나 존 칼빈이야, 너의 죽마고우. 어렸을 때 우리 고향이었던 프랑스 누아용에서부터 함께 공부하고 또 함께 뛰놀았잖아. 너의 이름을 떠올리니 옛 생각이 많이 나는구나. 오늘은 왠지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유년시절과 대학시절 일들을 더듬어보고 싶어.
기억나니? 우리가 함께 파리로 떠났을 때의 그 설렘 말이야. 앞으로 파리에서 펼쳐질 일에 우리는 기대를 많이 했었지. 얼마나 큰 도시일까, 대학에서는 어떤 것들을 배우게 될까, 발걸음이 가벼웠잖아. 나는 아직도 그 때의 기분이 생각이 나곤 해.
하지만 대학 생활은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지. 마르쉐 대학은 바퀴벌레의 천국이었잖아. 바퀴벌레를 '날개 짧은 독수리'라고 부르면서 나름 낭만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수업과 미사, 토론의 반복. 힘들었지만 나는 새로운 배움이 정말 즐거웠어. 너는 대충 공부하다가 고향에 돌아가 평범한 사제가 되겠다고 했었지만.
특히 내가 코르디에 교수님께 수업을 들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어. 그 분께 라틴어와 정통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기초를 잘 닦을 수 있었지. 너도 알지? 꼭 27년 후, 내가 <데살로니가전서 주석>을 썼을 때 이 책을 교수님께 헌정한 거. 교수님 덕분에 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대학에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은 당시 이단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의 굳건한 신앙이었어.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 로마 주교와 프랑스 왕은 물론 대학들까지 그들을 몰아내지 못해 안달이었어. 그리고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가리지 않고 화형대에 올렸지. 사실 나는 그때부터 이들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충성했던 그 새로운 종교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어.
그 호기심을 풀었던 곳이 바로 '펠리컨 하우스'야. 아마 너는 내가 그 곳에서 공부했던 것을 몰랐겠지. 그건 정말 극비였거든. 성경을 원어로 공부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건 금지된 일이었잖아. 그곳엔 나의 사촌 형 피에르와 니콜라스 콥, 클레망 마로 등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어. 그들과 공부하면서 배운 것들도 참 많았지.
내가 마르쉐 대학에 이어 몽테뉴 대학 생활을 마친 후 갑자기 법학을 하겠다고 했었을 때 혹시 놀랐니? 사실 그건 우리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어. 나도 의외이긴 했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그렇게 바라셨던 분인데. 아마 아버지는 가톨릭과 종교인의 직업이 이제 아들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하셨던 것 같아. 로마 가톨릭과 교황의 세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잖아. 그 차선책으로 변호사가 되기를 원하셨던 거겠지.
물론 내가 법을 전공하게 된 것이 꼭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었어. 너도 알다시피 당시의 시민법을 비롯한 모든 법은 사회를 기독교 가치관에 합치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어. 그러니까 그 법을 연구하는 것이 꼭 신학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도 법을 공부하게 된 것이 나쁘지는 않았지.
오를레앙 법대에서 레뚜알 교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강수의 처리나 도로 사용권, 결혼, 이혼, 상속 등 그 온갖 것들을 공부했을 때 내가 저녁도 먹지 않고 공부했던 거 알고 있었니? 저녁을 먹으면 졸려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거든. 수업 끝나고 배운 것을 공부하고, 내일 배울 것 예습하고, 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혼자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려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던 것이 사실이야. 저녁을 먹지 않는 습관 때문에 나중에 위장 장애로 고생하긴 했지만, 교수님들이 종종 나에게 대신 수업을 맡길 정도로 유능한 학생으로 인정받았지. 이거, 내 자랑을 너무 했나? 나의 법학 탐구욕은 부루쥬에서도 계속되었지. 그곳에서 나는 비록 성품은 그리 흠모할 만하지 않았으나 당대의 석학 알지아티 교수에게서 역사적-문헌학적 해석법을 배우게 되었지.

내가 이렇게 파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동안 고향 누아용에서 큰 일이 생겼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거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고 싶었던 아버지셨는데 그것이 다른 사제들에게 밉보였나봐. 누아용 특별 주교에서 밀려난 충격에 시름시름 앓으시더니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어. 그 때 너의 위로가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됐어. 아버지가 출교 당하셨기 때문에 교회 묘지에 묻는 것도 어려웠거든. 온 형제들이 모여 애를 쓴 끝에 결국 장례미사를 드릴 수 있었어.
그동안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나는 이제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됐어. 다시 파리로 돌아와 내가 공부한 것을 나타낼 수 있는 책을 쓰기 시작했어. 8개월 만에 완성한 그 책, 너도 분명 기억할 거야.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말이야. 나의 오랜 친구인 너에게 헌정했잖아. 특별히 어린 시절에 너의 집에서 배우고 자란 것을 생각하면 그 책은 너에게 주는 것이 마땅했어.
책을 쓰고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점점 내가 대학에서 배웠던 교리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어. 나도 마르틴 루터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거야. 그 후에 내가 겪게 된 어려움, 수배생활과 떠돌이 생활, 너도 잘 알지? 외롭고 괴로운 길이었어도 내가 믿는 신앙이 있었기에 힘들지 않았어. 너처럼 나에게 힘을 주는 친구도 있었으니까.
옛 일을 생각하다보니 편지가 길어졌구나. 그동안 먼 곳에서도 늘 도와준 것 고맙다는 말 꼭 하고 싶다. 그럼, 다음에 또 편지할게.
너의 벗 존 칼빈.
 
지적 성장의 디딤돌, 칼빈과 그의 친구들

칼빈의 유년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친하게 지내며 학문적인 교류를 나눔은 물론, 나중에 개혁의 동지로까지 활동한 사람들이 있다. 칼빈은 비교적 높은 가문의 자제들이나 뛰어난 지식을 가진 학자들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그들과의 동역이 칼빈을 종교개혁자요, 뛰어난 학자로 만들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클로드 당제
칼빈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죽마고우로, 그의 아버지는 차알스는 바로 칼빈에게 유아세례를 베푼 노용의 대주교였다. 칼빈은 클로드의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배우면서 자랐다. 차알스가 권하여 칼빈은 클로드와 함께 파리에서 유학한다. 클로드는 나중에 니용에 있는 성 엘로이 수도원의 수도원장 자리에 오른다. 칼빈은 그의 첫 저서를 클로드에게 헌정했을 정도로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
니콜라스 콥
칼빈은 훌륭한 가문의 친구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나누었는데, 니콜라스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니콜라스는 칼빈이 파리에 있을 때 만난 친구로 당시 왕실 주치의의 아들이었다. 칼빈이 성경을 원어로 공부했던 '펠리컨 하우스'의 멤버이기도 했다. 후에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 신앙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피에르 로베르
칼빈의 사촌 형으로 칼빈보다 먼저 개신교에 눈을 떠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후에 올리베땅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올리베땅은 '밤에 필요한 기름'이란 뜻으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그에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왈도파 그리스도인을 섬기다가 32세에 순교한다.
마튀랭 코르디에
마르쉐 대학의 교수로 칼빈이 대학교 1학년 때 그에게 라틴어와 정통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의 귀납법적 라틴어 교수법의 길을 개척하였다. 칼빈이 유창한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저서를 남길 수 있던 것은 그의 영향이 컸다. 칼빈은 자신의 저서 <데살로니가전서 주석>을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후에 개신교로 개종한 다음 칼빈이 활동하던 제네바로 피신하여 제네바 대학의 학장 직무까지 도맡게 된다.
http://blog.daum.net/kkho1105/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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