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 큰 아버지 성직 입문 적극 권해
| 야심 큰 아버지 성직 입문 적극 권해 | |||||||||||||||||||
| 종교 냄새 물씬 풍기던 프랑스 누아용서 성장 주교 집안 자제들과 교류 통해 기본교육 습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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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 신앙 대탐험/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1. 인간 칼빈을 말한다 - '꼬뱅'으로 태어나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제네바의 말씀 교사 존 칼빈(1509~1564)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원래 쟝 꼬뱅(Jean Cauvin)이었으나 이후 라틴어 필명에 따라서 요하네스 칼비누스(Ioannes Calvinus)라고 불렸습니다. 이 필명으로 저의 명성이 높아지자 저의 모국 프랑스 사람들은 이 라틴어 이름을 음차하여 쟝 깔뱅(Jean Calvin)이라고 부르게 됐죠. 깔뱅이라는 이름이 라틴어 칼비누스에서 온 이름이므로 라틴어 칼비누스에 대한 영어식 발음인 칼빈이란 이름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올해는 제가 태어난지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람들은 종교개혁자, 목회자, 신학자로 인식하지만 저 역시 삶의 출발점에는 인성이 형성된 유년기가 있었습니다. 공적인 삶 이전에 먼저 사람들이 '젊은 칼빈(the young Calvin)' 이라고 부르는 저의 생의 여명기를 여섯 번에 걸쳐서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이는 저의 유년시절 가정환경과 친구들, 그리고 그 때에 받았던 교육이 이후 제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일단 가족을 먼저 소개할까요? 아버지 제라르 꼬뱅은 누아용 주교의 공식 비서이자 시의 재정관, 그리고 법률 자문관이었습니다. 별 볼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셨지만 자수성가한 분이셨죠. 어머니 잔느 르 프랑은 제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어릴 때 돌아가신지라 얼굴은 가물가물 하지만, 세 살 무렵 어머니와 함께 예수의 조모인 성 안나의 무덤에 찾아갔던 일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답니다. 저는 새어머니의 손에 자랐습니다. 형 제라르와 남동생 앙투완느, 그리고 이복 여동생 두 명이 가족들이었습니다. 어릴 때도 물론 우애가 깊었지만, 이들은 후에 제가 어려운 길을 걷게 됐을 때 지지해주고 응원해 준 든든한 후원자들입니다. 좋은 가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아버지 덕택에 저는 누아용의 주교였던 앙제 집안의 자녀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친구들의 가정교사와 함께 공부했고, 그들로부터 승마와 같은 고급 스포츠를 배웠죠. 사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이 귀족적인 풍모와 기초지식은 다 그 시절에 배운 거랍니다. 특히 앙제 집안의 클로드와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중등사립학교에서도, 그리고 나중에 파리로 떠나 대학공부를 할 때도 클로드와 항상 함께 있었으니까요. 교육방식을 봐서도 아시겠지만 아버지는 자식이라면 끔찍하게 여기셨습니다. 야심 또한 크신 분이라 자식들이 종교인이 되기를 바라셨죠. 아 참, 미리 말씀드리지만 아버지께서 자식들이 성직자가 되길 바란 것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출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린 사람이 성직에 임명되면 그 대가로 수입의 일부를 실제 그 일을 하는 성인 사제에게 지불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이거죠. 당시 종교인이란 목회자가 아니라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직업에 불과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521년에 라 제신 성당의 사제(司祭) 장학금을 받게 됐습니다. 아버지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저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이를 두고 기도하고 성실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과연 이 길이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종교는 많이 부패해진 상태였습니다.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믿기 어려울 만큼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여러분도 잘 아시는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로마뿐만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도 면죄부의 열풍이 불었죠. 이런 종교의 타락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앞길의 선배들이라고도 할 수 있죠. 마르틴 루터는 1517년, 그러니까 제가 여덟 살이었을 때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걸어 면죄부를 파는 성당을 비판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가 준비된 개혁자였죠. 1516년에는 에라스무스가 바젤에서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판을 출간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경을 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종교의 패악을 눈으로 경험했고, 또 이런 개혁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톨릭에 대한 의심을 조금씩 하게 됐습니다. 후에 올리베땅으로 불리며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던 사촌 형 피에르가 해준 여러 이야기들은 종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해줬습니다. 이렇게 고향 누아용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으며 종교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된 저는 1523년 드디어 큰 물로 나가게 됩니다. 아버지의 지원으로 파리의 마르쉐 대학에 입학하게 된 거죠. 제가 갖고 있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파리에서 꽃피우게 된 겁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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