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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최고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 7. 10-1564. 5. 27)

최고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 7. 10-1564. 5. 27)




 

 

 

 

                   John Calvin

           1509.7.10-1564.5.27



루터(1483-1546)와 쯔빙글리(1484-1531)를 

개혁 1세대라고 한다면, 

칼빈은 개혁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이 1509년 출생하였을 때, 

루터는 이미 4년이나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칼빈이 겨우 읽기를 배우고 있을 때,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강의하고 있었다. 

칼빈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루터는 95개 조문의 항의문을 게시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루터와 칼빈에게 적당한 시간차(25년)를 두셔서 

당신의 일을 적절하게 수종 들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

칼빈과 루터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인물이었다.

칼빈은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반면, 

루터는 사교적이며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칼빈은 가끔 갑자기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를 제외하면 

성품이 치밀하고 과묵하며 꼼꼼하고 대찼던 반면, 

루터는 자유분방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리는 호탕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러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신앙이 같다는 데에 

뿌리박은 상호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1539년 루터는 

칼빈의 작품

「왜 종교개혁이 필요했는가에 대해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주는 공개서한」

(Open Letter to Cardinal Sadoleto on Why the Reformation Was Necessary)

을 읽고 그 마음에 큰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1545년 4월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한 책방에서 

칼빈이 저술한

「신앙의 교훈과 고백」(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

을 사서 읽고 

“이 저자야말로 학식과 경건을 겸전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만약 외콜람파디우스와 쯔빙글리가 처음부터 이처럼 명료했다면 

그처럼 좋지 못한 논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

이라고 논평하였다. 

루터는 쯔빙글리가 피상적이었던 것만큼이나 

칼빈은 심오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칼빈은 항상 루터를 변호하였는데, 

쯔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가 

늙은 루터를 비난하자, 

“부디 루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며, 

얼마나 용기 있게, 강건하게, 유능하게, 학식 있게, 효과적으로 

구원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적그리스도를 쳐부수느라고 

계속 열성을 기울였는가를 보십시오.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한 대로 

아래와 같은 입장에 추호도 변화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나를 가리켜 악마라고 한다 해도,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하나님의 뛰어난 종이라 부르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와 같이 루터와 칼빈은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사이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아 교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1.출생과 초기 교육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97km 떨어진 

피카르디 지방의 노용(Noyon)에서 

신흥 중산층이었던 제라르 코벵(제라드 칼빈,Gerard Calvin)과 

어머니 쟌느(즈앤) 르 프랑스(Jeanne Le France)의 

다섯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노용시의 칼빈생가

       현재는 ‘칼빈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코벵은 

대대로 이어내려 오던 와즈(Oise) 강 뱃사공 일을 하다가, 

1500년경에는 퐁 레베크의 고향집을 떠나 노용에 와 

노용 시의회 의원의 딸인 쟌느와 결혼했다. 

그 후 그는 장인 덕분에 노용 시청 서기가 되었고, 

그 후에는 대성당의 교구 서기로서의 일을 보았는데 

이때 칼빈이 태어났다.

 

칼빈의 어머니 쟌느 르 프랑스는 

당시 교양이 높은 가문으로 알려진 노용의 캉브레 호텔업자의 딸이었다. 

쟌느 르 프랑스는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며 

학문과 경건과 신앙심이 돈독한 여인으로 알려졌는데,

칼빈은 외모와 지성 그리고 종교성 모두가 

어머니 쪽으로부터 유전 받은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칼빈은 어머니 없이 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 가운데 자라났으며, 

열한 살 때는 노용 성당에 있는 라 게진느(La Gesine) 채플의 사제 보조직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칼빈은 아버지 덕분에 

그 지방 출신의 상류계급의 자녀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으며 

그들과 친한 친분 관계를 갖게 되었다. 

칼빈은 노용에서 그의 형 챨스(Charles)와 그의 동생 안토니(Antony)와 함께 

초등학교인 카피츠 학교(School of the Capettes)를 다녔다. 

그는 타고난 지성과 판단력으로 

학우들 사이에서 뛰어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칼빈은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사리를 판단하는 데에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의 지적 능력은 아주 뛰어났으므로 

아버지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게 되었다. 





2. 대학 생활



칼빈은 노용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1523년 8월 파리로 유학하여 

라 마르셰(La Marche) 대학에 등록하고

라틴어의 대가인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를 만나 

라틴어를 배웠고, 

인문주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아버지의 강력한 권고로 

사제가 되기 위하여 몽테귀(de Montaigue) 대학으로 전학하여야만 했다.

 


                                           

                                             몽테귀 대학 시절의 칼빈 

                                   에라스무스와 로욜라도 이 학교 출신이다.




몽테귀 대학은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는 대학이었다. 

하루 일과는 아침 4시에 시작되었으며 

수업은 아침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금욕주의적인 삶과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몽테귀 대학에서 칼빈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옥캄주의자였던 

존 메이저(John Major)를 만나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메이저는 

“대 영국사”(History of Great Britain, 1521), 

“복음서 주석” (Commentary on the Gospel,1529)

과 같은 책을 써서 

위클리프, 후스, 루터의 개혁 운동을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비판은 어린 칼빈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칼빈은 1528년 초반에 

몽테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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