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5대교리
개혁주의성경공부 제1강(칼빈주의5대교리)
인간의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1.도입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곧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 그리고 보수신학을 칼빈주의의 신학적인 체계와 결부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장로교(개혁주의)신학과 신앙을 바르게 보수(保守)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고 하겠습니다.
칼빈주의란?
그렇다면 칼빈주의란 무엇인가요? 칼빈주의를 곡해하는 사람들은 칼빈 개인의 신학사상이라고 이해할는지 모르지만 죤 칼빈(John Calvin)은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의 전승과 신앙고백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신학사상을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로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그는 비록 칼빈주의 신학사상 체계에서 취급된 모든 사상들을 손수 만들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진리를 가장 바르게 깨달은 사람 중 하나였으며 교의(敎義)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바울, 어거스틴등)의 사상을 후대에 가장 바르게 체계를 세워 전달한 사람입니다.
물론 역사적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신앙이 칼빈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칼빈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개혁자들(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등)에 의해 전통적인 신학이 산발적으로 제시됐는데 칼빈이 이를 종합적이고 보다 체계적으로 수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란 칼빈이 처음으로 종합적인 신학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것이지 칼빈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이론을 뉴톤이 처음 발견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뉴톤의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본래는 창조 때부터 존재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시작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 의해 신학적 기초가 수립됐으며,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이 되었고, 칼빈에 의해 종합적으로 체계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칼빈을 추종하는 신학자들(벤자민 워필드, 챨스 핫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등)에 의해 꽃이 피었으며, 현재 역사적 개혁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보수 신학자들에 의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인간의 사색된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성경적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 곧 성경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사상 체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란 성경에서 시작하여 칼빈이 체계를 세운 것을 후에 신학자들이 집을 지은 것으로 우리는 칼빈주의가 성경을 기초로 한 전통신학이요 보수신학의 기초라고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칼빈주의 신학의 기본원리는 ?하나님 중심사상(God Centered) 성경중심사상(Scripture Centered)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God's Absolute Sovereignty)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기원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형성하게 된 것은 1610년 화란신학교 교수였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가 죽은 뒤, 소위 알미니우스주의자들(Arminians)이라고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그의 가르침을 기초로 다섯까지 주요 요점으로 공식화해서 내어놓은 것이 시발점이 됩니다. 그때까지 화란 교회들은 유럽의 다른 주요 개혁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비르크의 신앙고백에 찬동하고 있었으며, 이 고백들은 둘 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철저히 기초한 교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이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성경의 교리적 가르침에 항의(抗議)해 자신들 나름대로의 교리적 입장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표명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free will or human ability) : 이는 인간이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았지만 영적 선을 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능해진 것은 아니며 따라서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 소위 예지(豫知)에 의한 예정(豫定)교리로서 구원을 받고 싶어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복음에 반응해 믿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예정에 선행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보편적 구속 혹은 일반적 속죄(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결국은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적으로 돌아가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 값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있을지언정 종래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견해입니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지에 제한을 받음(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regeneration limited by the human will) : 이는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역사(役事) 하실 때 인간의지에 의해 거부를 당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성령의 뜻이 좌절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자진해서 영생의 생명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한 성령은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요지입니다. …은혜에서 떨어 짐(falling from grace) : 이 주장은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조항은 각각의 내용이 담고 있는 교리적 성격상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하나님으로서 일체의 성경적 교리는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편에서의 교리는 다른 한편에서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성경의 자증입니다. 성경은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유기적(有機的)으로 연합돼 있습니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논쟁이 일어나자 화란 정부는 1618년 11월에 화란의 남부지역인 도르트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 129명이 모여 이 문제를 갖고 회의를 시작합니다. 이 회의는 이듬해인 1619년 5월까지 약 7개월간에 걸쳐 무려 154회에 이르는 마라톤회의를 거듭한 끝에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조항들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에 의견을 모으게 됩니다. 동시에 종교개혁에서 매우 명백히 제시됐고, 프랑스 신학자인 죤 칼빈에 의해 체계적으로 형성된 개혁주의 교리적 입장을 재확인 한 도르트 대회는 알미니안들의 체계에 대결하기 위한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공식화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교리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2.전개
우리가 흔히 칼빈주의의 5대 교리라고 일컫는 내용은 칼빈 개인의 주관적인 교리적 견해에서 나와진 독단적인 성경해석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미 종교개혁자들과 주요 종교회의에 의해 정립된 개혁주의적 성경해석의 차원에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일단의 알미니안들의 교리적 항의를 일축하고 재확인하는 형식으로 나온 성경적 변증의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이들 내용은 ‘구원의 도리’에 집중해서 연관돼 있음이 특징입니다.
한편 이들 주요 조항들을 영문의 첫 글자를 중심으로 나열했을 때 'TULIP'이라는 글자로 표기되는 바 일명 ‘튤립교리’라고도 부릅니다. 오늘은 이 중 첫 번째 교리인 ‘인간의 전적타락’에 관해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자유의지’ 및 ‘인간의 능력’ 교리의 반동(反動)으로 제시된 교리적 주제임을 쉽게 간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알미니안파들의 주장에 대한 철저한 부인과 이에 대한 성경적 답변입니다. 우리는 본 강의를 통해 성경이 증언하는 바 인간의 전적타락과 관련해서 몇 가지 측면에서 이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전적부패 또는 전적무능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 속에는 한결같이 몇 가지 동일하게 시사하는 신학적 명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주제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는 상대적 명제가 아닙니다. 절대적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인데 이는 사람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평가된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절대적 관계에 근거해서 진단된 결과라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분의 고하와 출신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죄인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정죄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은 처음 무죄자로 창조됩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죄자가 곧 완전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자는 무죄할 뿐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짓지도 않는 절대자를 일컫는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죄자이지만 불완전한 아담은 하나님께서 내신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통해 보다 완전하고 온전한 선의 상태로 발전해 나가야 할 시험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시험에서 실패합니다.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기게 됩니다. 이것이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사건입니다. 원죄의 기원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죄의 성립은 인간의 내적 욕심의 발로로 야기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본질적 성격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지 못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요16:9). 이후 아담의 범죄의 죄성(罪性)은 그의 후손들의 본성에 유전적으로 전가(轉嫁)돼 온 인류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선고하는 근본원인을 제공합니다(창2:17, 3:5-6). 롬3:23와 5:12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지적이 바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범죄행위와 이로 인한 후손에게로의 죄의 생득적 전가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이후부터 온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됩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롬3:10). 인류의 비극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죄인으로 정죄 당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체의 영적 교제에서 단절돼 영원히 결별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영적 이산가족이 돼 버린 셈입니다. 바로 죄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사59:2입니다.“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후 아담의 원죄는 그의 후손들의 본성 속에 감추어져 온갖 범죄행위의 원인 제공자로 활동하게 되는 바 곧 자범죄(自犯罪)의 근원이 됩니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 만연돼 있는 갖가지 형태의 범죄는 바로 조상으로부터 생득적으로 전수된 원죄의 다양한 외적 표현일 뿐입니다. 설령 일생에 거쳐 행위에 근거한 범죄를 한번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있을지라도 본성적으로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소위 양심(良心)이 고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은 죄인으로 전락한 인간이 현재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유일의 천성적(天性的) 흔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양심마저도 화인(火印) 맞아 그나마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때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요8:1-11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의 얘기가 소개됩니다. 한 무리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다수의 시민들이 이 얘기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고소할 목적으로 이 여인을 잡아 의도적으로 주님께 이끌어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을 명했다고 하면서 주님의 판결을 요구합니다. 사도 요한은 저들의 요구가 ‘예수님을 시험해서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라고 이 사건의 내막에 담긴 실상을 독자들에게 폭로합니다. 어찌했든 예수님은 저들의 요구에 어떤 식으로라도 답변하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계십니다. 만약에 모세의 법대로 죽이라고 하신다면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법을 위반해 스스로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고 죄를 용서하셔서 구원하시는 사랑의 법에 근거해 살려 주라고 하시면 이는 주님 또한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을 통해 오신 분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적 규범인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시는 셈이 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잠시 시간을 가지신 후에 살기등등(殺氣騰騰)하고 의기양양한 회중을 향해 일성(一聲)을 발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절). 다시 잠시의 침묵이 흐릅니다. 얼마 후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때의 상황을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회중은 간음한 여인과 비교해서 분명히 현행범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적 의의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드러난 죄인’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주님의 질문 섞인 답변에 어느 누구 한사람도 선뜻 나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회중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일말의 양심이 저들을 여인과 동일한 범죄자로 고발하고 있음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감춰진 죄인‘으로 말입니다. 요한은 이 상황을 해석하면서‘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떠나게 됐다고 기록합니다. 비록 저들이 현행범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자기 양심에 찔려 감히 자신들을 무죄자라고 주장하지 못한 사실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적나라하게 시사합니다. 여기서 양심은 바로 주님의 질문 곧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인간 본성의 실질이 어떠함을 사실적으로 직고(直告)하는 고발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지금 인류를 향해 저들의 실상이 하나님 앞에서 ‘이 여인이나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사실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드러난 죄인이나 감추어진 죄인이나를 막론하고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시선 앞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은 죄인들로 존재할 뿐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 심성의 실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여기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명제 속에는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의 영향은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전(全) 영역에 걸쳐 ‘전인적(全人的) 부패’를 초래한 나머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원을 스스로 취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死亡者)라고 정의한다는 지적입니다(롬3:10-12, 엡2:1). 다시 말해 인간의 지정의가 그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교통의 기능을 철저히 상실한 나머지 어떤 자의적 방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롬1:21-23). 이는 처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도의 영적 수준에서 자력으로는 회복불가능의 저급하고 타락한 상태로 전락돼 버렸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창2:17을 보십시오. 선악과 금과법에는 문맥상 조건부적으로 영생과 사망이 대가로 주어졌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이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하셔서 죽음이 즉각적으로 저들에게 임하는 것을 지연시킴으로 구속의 기회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과의 종전 같은 막힘 없는 전인적 교제와 교통은 한 순간에 단절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여느 때와 같이 찾아 오셨지만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음으로서 인격적 교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됨을 봅니다(창3:8-10). 도리어 하나님을 피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영적 죽음 곧 ‘전인적 관계의 단절’이라고 부릅니다.
이후로 아담의 범죄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과의 일체의 정상적인 교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죄(原罪)로 기능하게 됩니다(사59:1-2). 롬3:23과 5:12을 보십시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일하게 죄인인 사실을 증거합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 행위로 나타나는 일체의 인간의 자범죄(自犯罪)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인간의 본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원죄의 죄성으로부터 기인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합니다.
엡2:1을 보십시오. 우리의 옛사람의 형편과 처지는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들로 판정 받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죽은 자나 방불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과의 마땅한 영적 교제(전12:13)의 단절이 성경적 죽음의 일차적 판정임을 알게 됩니다. 마8:22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친의 장사(葬事)문제로 주님을 즉각적으로 좇기를 주저하는 한 제자를 향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권고하십니다(마8:22, 눅9:60). 여기서 실제로 죽은 자는 두 번째 죽은 자를 가리키며, 첫 번째 죽은 자들이란 비록 현재적으로 살아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통해 주님과 관계도 분깃도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불신자들로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에 있는 원수 된 자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은 여전히 전적부패한 자들로서 결국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로 간주됨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그렇다면 갓난아이들이나 태아들은 어떨까요? 성경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사악(邪惡)한 존재라고 정죄합니다. 원죄로 인해 처음부터 죄인으로 잉태되고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시51:5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실토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간의 심성을 고발하면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17:9)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함으로 당시의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 했음을 창세기 저자는 고발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결과가 되었음을 기록합니다(창6:5). 로마서 기자는 이런 인간의 죄악 된 상태를 힐난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3:10). 지금 저자는 인간 상호간의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 선의 기준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선의 기준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이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91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해서(원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규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목적)하는 것’을 동기유발로 삼아 행할 때 비로소 선행으로 성립된다고 가르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전적타락의 두 번째 명제는 사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근원이 원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임을 증거합니다(롬6:23).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히9:27). 왜냐하면 죄는 법정적(法定的) 측면에서 이에 상응하는 형벌을 요구하는 바 죽음은 죄 값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며 동시에 형벌이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노령으로 죽는 자연사(自然死)나 각종 병사(病死) 그리고 사고사(事故死)는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의 방식(方式)일 뿐 죽음의 근본 원인(原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의 값으로 사망이 인류에게 불청객으로 찾아온 것입니다(롬6:23). 역사이래 한 번 태어난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원리와 원칙은 지속적으로 유효해서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전히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 인류를 죽음의 포로로 사로잡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필연적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선고하는 성경의 증언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이며 선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이 안고 있는 명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 죽는 것으로 모든 지상의 삶이 마감되는 줄 압니다. 더 이상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죽음 후에는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요5:28-29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죽음을 영생(하나님 나라)과 영벌(불못 곧 지옥)의 실질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때 인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를 경유해야 할 것임을 경계시킵니다. 따라서 죽음 후에는 온 인류 앞에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히9:27). 이는 한 번 태어난 생명의 가치는 영생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로 하사된(창2:7) 탁월한 성격상 영원불멸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의 법칙이며 원리입니다.
아울러 종말론적 생명의 최후적 거처는 영생과 영벌의 장소로 나뉘어 질 것임을 성경은 지적합니다(계20:15, 21:1, 4). 본문(요5:28-29)은 하나님의 최후적 심판대에 서기 위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사실 부활의 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는 그 신비하고 초자연적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실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사건의 경우를 통해 분명한 실제적 사건으로 소개합니다(롬8:11, 고전15:20-24). 사실상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고전15: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의 종말론적 부활의 첫 열매로서의 보증이 되신 사건입니다. 그분의 부활에 속해져서 성도들은 그 분이 다시 오시는 날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15:42-44, 살전4:16-17)). 이미 부활해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체의 영광을 입고서 말입니다. 이토록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남김없이 만족시킨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증거로 작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양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고전15:3-4).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은 이 부활 후 심판(계20:11-14)에서 제외됨으로 지옥의 다른 설명인 불못의 종말론적 형벌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사면(赦免)됐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요5:24). 이 말은 역(逆)으로 현재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아직 죽음과 그 후의 부활과 심판을 현실로 경험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선취적으로 종말론적 심판에 처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요3:18). 복음이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입는 것을 통해 필연적 심판(영벌)에서 제외되며 동시에 영생하는 생명에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요5:24).
이런 복음의 내용이 이미 우리 안에서 현재적으로 성취된 사건으로 신기하게도(?)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 믿는 것이 아닌 믿어지는 것입니다. ‘절대적 타자’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이끌림을 받아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자아는 위에서 본대로 이미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자로 존재하기에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타자(他者)로서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다른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사역이 우리를 위한 대속적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미 죽어버린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이를 수납하게 하신다는 얘깁니다.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향한 정상적인 영적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역의 주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예수님의 지상적 사역의 계승자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서 당신의 종말론적 구속사역을 성령님을 통해 진행해 가십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 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에 대해 원보혜사가 되시며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통해 성령님을 자신의 대리적 파송자로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의 성격은 오직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을 증거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을 통해 부단히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시며 이를 가능케 하는 일에 집중돼 있습니다(요14:16, 26). 가시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까지도 성령님은 성도들의 심령에 관계하셔서 여전히 영생하는 생명력의 근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요14:16).
3.결론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면전에서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한 무능자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증언합니다. 바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반응할 수 있는 일체의 지정의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이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들을 일컬어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선고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도 없으며 한결같이 치우쳐 무익하게 됐음을 선포합니다(롬3:11-12). 나아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조차 싫어한다고 지적합니다(롬1:28).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심성이 전적인 타락과 부패로 인해 마땅히 섬길 자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상실된 상태를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시종일관하게 인간의 본질적인 영적 상태를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영적 파산자로 선고를 내립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거듭날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임을 지적합니다(고전2;14). 그렇습니다. 이제 외부적 타자(他者)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전무할 뿐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의 머리됨으로 인해 온 인류를 부패와 타락으로 몰아가 죄인 되게 함으로서 영적 사망과 육체적 죽음과 최후적 심판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지정의를 발동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일말의 능력조차도 앗아감으로 인류를 하나님 없는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런 교리적 내용들을 일컬어 전적타락, 전적부패 혹은 전적무능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경이 증언하는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적 무능자로 타락한 인생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타자’의 도움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당위(當爲)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 강론에서는 자연히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택정 말입니다.
개혁주의성경공부 제2강(칼빈주의5대교리) 조회 (33)
성경공부 | 2005/11/23 (수) 22:35 공감 (0) 스크랩 (0)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
1.도입
절대적 타자(他者)로서의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 방식은 죄로 인해 전적타락과 부패와 무능에 빠진 인간을 가장 자연스럽게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며 자비며 긍휼의 일환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인간의 영적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하여 자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 곧 영적 사망으로 인한 일체의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단절된 파산자(破産者)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외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무능한 범죄자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외부적 절대 타자(他者)에 의한 구원에로의 선택교리를 요청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요구이며 증언이지 상황전개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나와진 즉흥적(卽興的) 요구만은 아닙니다.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에 의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소위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에 대한 반증으로 나온 성경적 대응이며 해명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능력이 범죄로 인해 완전히 타락했거나 부패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인간 스스로의 자의적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의 허구성(虛構性)은 이미 지난번 전적타락 교리에 의한 성경의 자체 증언을 통해 충분히 밝힌바 있습니다. 결코 성경은 인간 스스로의 자력 구원의 가능성을 추호라도 용납하지 않음을 살펴봤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용인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그 신적 기원에 따른 본질적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복음주의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절대성과 충족성을 이렇게 변호합니다.“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3:21). 그렇습니다. 인간의 구원사역에 사람편의 의지적 행위는 절대불가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율법을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란 전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오히려 생각하고 행하는 것마다 불의함과 죄악뿐임을 증거합니다(창6:5, 사64:6, 렘17:9). 인간의 본성이 죄로 오염되고 부패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타자(他者)로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관련해서 흔히 사용되는 몇 몇 용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할 줄 압니다.
먼저 작정(作定)이라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물의 조성과 만사의 진행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총괄적 계획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할 때 이는 창세 전에 미리 작정하신 계획대로 피조세계 속에서 만물과 만사를 그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보존, 관리, 통치하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고 증언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해서 나온 변증(辨證)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물과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경영된다고 할 때 세상에 우연의 산물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배후에 존재하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계시적 사실의 터 위에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섭리 의존적 신앙의 교리적 정립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작정이란 전 우주적 역사를 그 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해 가시는 포괄적(包括的)인 계획을 가리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다음으로 예정(豫定)이란 용어를 들 수 있습니다. 예정은 작정의 일부입니다. 작정이 우주만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보편적(普遍的)인 사전계획이라면 예정은 우주만물 중 특별히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과 결부된 교리에 특별히 국한시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작정이 내용상 포괄적이고 광의적이며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예정은 지엽적이고 협의적이며 특별한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은 구원과 관련된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을 얘기할 때 주로 사용되기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타락한 사람들 중에서 얼마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선택해서 구원해 주실 것을 창세 전에 미리 정(定)한 사실을 가리켜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예정 속에는 선택교리와 함께 자연히 유기(遺棄)교리까지도 포함되게 됩니다. 다수 중에 일부가 선택됐다면 나머지는 자연히 버려진 바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공평할 수 없음은 인간은 본성상 죄값으로 심판에 처해 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진 자들로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전적타락과 부패).
그러나 내용이 담고 있는 범위와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정은 보다 큰 범위의 작정 안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로 인해 때로는 예정을 작정으로 대체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작정의 의미는 항상 예정의 내용과 성격인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정과 관련해서 고전적(古典的) 성경 본문인 엡1:4-5입니다. 여기서 선택과 예정은 분명히 사람의 구원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돼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행13;48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누가는 이를 설명하면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작정이란 다름 아닌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정과 작정을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리키는 바 구원의 의미나 성격이 달라지거나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2.전개
무조건적 선택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시된 성경적 교리입니다. 저들은 인간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자의적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자정(自淨)능력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남은 의지적 선택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성에 의해 이를 미래지향적으로 내다보시고(예지) 구원에로 선택하셨다(예정)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도르트 회의에 의해 그 부당성이 이미 지적되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경의 증언에 근거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로 이미 무효화된 구시대적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범죄는 인간을 전인적(지정의)으로 부패케 만듦으로 하나님을 향한 지정의의 기능을 근원적으로 상실한 나머지 자력(自力)으로는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도, 더듬어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가 됐다고 선고합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인간의 구원의 기회란 전적으로 외부적 절대 타자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하게 돼 버린 셈입니다.
예지-예정론의 허구성
오늘날 예지-예정론에 근거한 선택교리는 비단 알미니안적 사고방식에 동조하는 교단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일부 장로교 교단에서조차 이를 수용해서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지-예정론이란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성경적 논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에 반응하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당신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창세 전에 예지(豫知)하시고 이에 근거해 그 사람을 구원에로 예정(豫定)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서기2000년 8월25일에 어느 한 사람이 서울의 모교회의 전도집회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을 발휘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창세 전에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내다보시고(예지) 그를 선택해 구원하시기로 예정했기에 그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됐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이런 교리적 논리 하에서는 구원의 주체가 복음을 자의지적으로 받아들인 그 사람 곧 인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복음을 자원해서 의지적으로 받아들였기에 조건적으로 그를 구원하셨다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란 주장입니다.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만한 선한 능력이 남아 있기에 얼마든지 그 남은 선(善)을 발동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력으로 취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한편 이런 조건적 선택교리 곧 예지-예정론을 수용하는 측에서는 이 교리를 정당화시키는 증거본문으로 대부분 롬8:29을 제시합니다. 29절 한 절만을 보면 틀림없이 ‘미리 아신(예지)자’와 ‘미리 정하셨다’(예정)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순서는 예지-예정의 단계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롬8장 전체를 문맥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주관에 빠진 자의적(自意的) 해석이며 따라서 허구(虛構)인지를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롬8:1-2에서는 성도들의 죄로부터의 해방이, 곧 성도의 구원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한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았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더욱 3절에서는 육신이 죄성으로 인해 연약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들을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통해 이제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얼마든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음을 변증합니다. 나아가 7절에서는 옛 사람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굴복할 수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기에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아울러 고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과 이 사실에 대한 확증은 오직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과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할 뿐입니다(16절).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옛사람의 타락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자의지적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일말의 자각(自覺)도 불가능합니다(26절).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판정 받았기에 말입니다(엡2:1).
이렇게 롬8장 자체 문맥만을 검토하더라도 29절의 예지란 인간의 자력(自力)적 선택을 미리 보아 알고 계시다는 의미의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라(예지-예정),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역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구원시킬 자를 예정하셨기에 그들이 누구이며 또한 누가 복음을 수용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계신다(예지)라는 사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예정-예지). 이 뿐만이 아닙니다. 관련 주제를 다룬 다른 본문에서는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증거합니다. 요15: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본(本)절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제자를 선택한 주체가 제자들 스스로가 아닌 주님 자신임을 분명히 천명(闡明)합니다. 앞에서 잠깐 살펴봤던 행13:48에서도 주님을 믿는 주체가 사람이기 이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자들’로 제한돼 있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함’임을 분명히 보아 알 수 있습니다. 행16:14을 보십시오. 여기서도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됐을 때 그녀가 복음을 청종하게 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그러나 이때도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주체가 루디아의 자의적 선택이 아닌 주님으로 분명히 소개됩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님께서 루디아의 전적으로 타락하여 죽어버린 바 된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그녀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셨다는 지적입니다. 요3:3입니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상의 일련의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거나 믿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설령 성경 어느 한 구절의 내용 속에서 선택과 믿음의 주체가 사람으로 설명된다 할지라도 앞 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접근하면 결코 사람에 의해 임의대로 선택과 구원이 좌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1:12에서는 주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의 특권이 인간의 자의적 선택과 신앙적 고백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 같이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이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자녀 된 근본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과 고백의 대가와 보상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창세 전 선(先)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음임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의지로 말미암았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발견되는 구원교리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선택적 구원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미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영적 사망자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자로 선고됐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이로 인한 원죄의 생득적 전가로 말입니다(롬3:23, 5:12). 따라서 인간의 자력으로는 어떤 방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택적 구원을 임의(任意)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이러 이유로 해서 인간에 의한 하나님의 조건적 선택과 관련해 예지-예정론의 논리적 허구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
그렇다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이미 전(前) 강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실존의 비참함을 살펴봤습니다. 영적 사망자와 파산자로서 인간의 전인격적 기관은 하나님을 향해 이미 그 총체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인 사실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됐습니다(마8:21-22).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구원이란 자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뿐입니다.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외부인이라 할지라도 같은 인간의 수준에서는 또한 불가합니다. 그도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아야 할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절대 외부적 타자(他者)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됩니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당사자는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만이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사1:18, 44:22, 시103:12, 행4:12).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에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곧 창조주와 절대자로서의 그 분의 절대 주권 안에서 말입니다.
롬9:10-13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본문에서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들 두 아들이 쌍둥이로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이들의 나중 형편을 선택적으로 예정하셨습니다. ‘큰 자(에서)가 작은 자(야곱)를 섬길 것’을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했을 때부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공평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사전결정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요. 본문은 이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에서 찾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창조자적 절대 주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좀 더 원색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 마음대로’란 의미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런 사실에 대한 독자들의 반발과 이의(異意)제기를 예감하고 얘기를 계속 전개시킵니다. 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변론합니다. 창조자로서의 절대 주권과 권능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할 말을 잊게 될 뿐이며 그 분의 행하시는 처사는 어느 것 하나도 불의함과 불공평함이 있을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상 말입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저자는 노파심(老婆心)을 발동시킨 나머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기장이와 한 덩어리의 진흙의 비유를 들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을 시도합니다(롬9:20-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임의대로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도 창조자의 권능과 주권으로 택자를 임의선택 할 수 있다는 논리적 변증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본질적으로 타락한 죄인인 이상 구원을 위해 선택해 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항의할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찌했든지 아담 안에서 범죄한 불의한 죄인들로 이미 정죄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롬1:29-31)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定)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32). 지금 저자는 본문들을 통해 철저히 부패하여 타락한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 중에 일부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을 좇아서 구원에로 선택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 크신 일을 이루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 속에 우리의 구원이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지도 않았을 때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성경적 은혜의 실질과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이 호리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개입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退色)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의 은혜에 인간의 역할과 기능은 전무할 뿐입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무상으로 베푸실 수 있는 전폭적인 사랑의 호의이기에 말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에 근거하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행하시는 예정에 의한 것임을 에베소 기자는 선포합니다(엡1:5). 여기서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창조자적 주권을 가리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 ‘오게 하시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요6:37, 39, 44, 65). 이는 결국 같은 의미의 다른 설명일 뿐입니다. 내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시종일관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합니다. 그렇다면 왜 다수 중에 일부를 주권적으로 임의(任意) 선택했느냐 하는 문제 말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근거해서 선택적 구원동기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사를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해 가실 때 필요한 자들을 선택적으로 부르셔서 계시의 도구로 선용(善用)하십니다. 이 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원하심을 따라 되는 창조자적 주권에 따라서 소명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 오직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성취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롬9:11). 그렇다고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황에 따른 임시조처라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필요에 따라 임시변통(臨時變通)적으로 선택하는 즉흥적 발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필요에 따른 임기응변(臨機應變)식의 임의적 결정같이 보일지라도 창세 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先) 주권적 선택에 따른 후(後) 성취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절대자적 주권이 한낱 창조자의 횡포와 전횡(專橫)으로 오해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시고 무분별하고 소견에 좋을 대로 사사로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민23:19). 창세 전에 세우신 작정과 계획에 근거해서 만물과 만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일점 일획의 착오와 차질 없이 세상역사 속에서 섭리적으로 경영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을 신앙과 생명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음이 이런 계시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렇다면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빛도 이름도 없는 우리인가요. 왜 막강한 열국 중에 작고 미약하며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세상가운데서 택자(擇者)를 부르시는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의 동기를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發露)라고 말씀하십니다. 신7:7-8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본문에서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각별한 선택의 배경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로 열국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도구로 사용하시는 데는 이스라엘의 외부적인 열악한 여건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배려’가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둘째로 이 사랑의 선택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의 열조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한 성취를 위해 애굽으로부터 구출해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과 공과가 인정되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선택과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열국에 비해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사랑이 동기가 돼서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의 하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요3:16과 엡1:4과 2:8, 롬5:8과 요일4:10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택과 속죄와 구원의 동기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하사(下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의 결과임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속량하시기 위해 대속적 죽음을 자원해서 담당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죄악 중에 구원해 주셨을까요. 성경은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선포합니다(고전1:29, 엡2:9, 1:6, 눅17:10).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성경은 성도의 신앙적 본분을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을 즐거워하는 삶이라고 강력히 피력(披瀝)합니다(전12:13, 고전10:31, 롬14:8, 엡5:10). 그렇다면 이런 삶의 구체적 내용과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롬12:2을 통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가치관을 수립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모든 지상적 삶의 성격과 방향성을 집중시켜 나가라는 엄숙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왜 삽니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결국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요.
우리는 본 강의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성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 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근거해서 택자들에게만 베풀어주시는 선택적 은혜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차별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 와 택자들의 행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인간의 행위가 철저히 배제된 선택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해서 세 번째로 살펴 볼 문제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근거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혀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미치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미 전(前) 강의(전적타락)에서 지적한대로 인간의 영적 상태가 스스로 선을 행하거나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영적 기능과 능력을 본질적으로 상실했기에 독자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신앙적 반응을 전혀 보일 수 없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앙자는 비록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나 방불함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마8:22).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통해 찾아지는 바(전12:13) 피조자로서 창조자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생명의 원리로 삼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과는 무관한자로서 곧 영적 사망자란 지적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의 구원은 외부의 절대적 타자(他者)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사실상 이런 영적 사망자(불신자)에 의해 시도되는 어떤 행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죄인 됨의 전제하에서는 결코 선(善)과 의(義)로 평가될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는 일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역설적으로 선포합니다(롬1:28-32).
인간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상대적(相對的) 선은 하나님의 절대적(絶對的) 선의 요구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에 상대적으로 극한 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한낱 더러운 누더기 옷과 다를 바 없음이 성경이 보는 해석적 관점입니다(사64:6). 그러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성경은 전 인류를 향해 감히 선포하는 것입니다(롬3:11-12). 왜 그렇습니까. 오직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느 사람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죄인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만 인간의 죄는 사면될 수 있습니다(행4:12).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원수 된 죄(원죄, 자범죄, 불신죄 등) 문제를 깨끗이 탕감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성격은 자연히 인간의 행위를 철저히 배제시킨 하나님의 독자적인 주권과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를 통해서 베푸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하나님의 선택에 일조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는 그 본연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적 진노만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롬9:11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한 구약의 사건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두 자녀인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에 따라서 야곱을 택하여 아비 이삭의 뒤를 이을 언약의 계승자로 택정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난 이후의 에서나 야곱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만한 특별한 사건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에서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나 지극히 육신적이었으며 무책임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소극적이지만 이기적이었으며 교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졌다면 야곱은 형 에서에 비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상대적으로 독차지 할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선악의 행위와 무관하게 그가 태어나기도 전 아직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그를 에서보다 사랑하여 언약의 당사자로 선택하신 사실을 성경은 소상하게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사역에 인간의 행위는 전혀 무용지물입니다. 무관합니다. 적극적으로 배제됩니다. 만일에 호리만큼이라도 인간의 행위와 공적이 참작(參酌)된다면 이는 인간의 전적타락교리를 성경스스로가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은 자연히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의 성격이 오직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택이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에 기준으로 작용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 과연 몇이나 될는지요.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일는지요. 하나님의 선택적 구속이 우리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덮어 주셨습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행2:11).
3.결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최선의 방편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은혜 됨의 비밀이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강퍅(剛愎)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하십니다(롬9:18, 11:32). 만일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이 되었다면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택정 함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무상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와 그 분의 선하신 뜻을 감당하는 일에 남은 생애를 불사르게 만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선택을 입은 자의 생애를 계속해서 섭리적으로 간섭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일에 선용하신다는 사실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잡고 살아가게 하는 바 섭리 의존적 신앙관을 확립시킵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신앙관을 촉발시킵니다. 이런 신앙관의 확립은 흑암의 세력이 주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늘 승리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성도의 진정한 기쁨이 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천하 만민 중에 천지의 창조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행복한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이 늘 풍성히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베푸신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 개개인을 사랑하십니다.
개혁주의성경공부 제3강(칼빈주의5대교리) 조회 (37)
성경공부 | 2005/11/23 (수) 22:36 공감 (0) 스크랩 (0)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1.도입
우리는 지난 두 번의 강의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부패와 무능은 자력구원의 길이 근원적으로 차단돼 버린 나머지 외부적 절대타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하나님편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허물과 죄로 철저히 죽어버린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에 올라 하나님과 깨진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키고 화목과 교통과 교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재창조의 유일한 방식임을 도출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는 구원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바 창세 전 선택이란 창세 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지적 표명이며 동시에 구원을 위한 사전표식이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의 사전단계일 뿐 아니라 그 성격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발휘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속죄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대신해서 갚아주신다는 속량(贖良)내지는 대속(代贖) 또는 구속(救贖)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특정인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속죄교리를 제시하면서 특별히 제한속죄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모두 중 일부에게 만 적용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속죄교리는 누구를 위해 속죄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셨느냐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보편적 속죄교리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인간편에서 원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면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이 증거될 때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 바 한 부류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가 하면 다른 한편은 복음을 거부함으로 정죄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막16:15-16). 이런 결과를 볼 때 비록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은 그 분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범위는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소위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한속죄의 실상입니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해서 언제나 제한속죄 교리를 성경의 바른 증언으로 신앙고백을 해 왔습니다.
2.전개
제한속죄 교리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속죄교리의 반동으로 나왔으나 그 근거는 철저히 성경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아울러 제한속죄 교리는 앞에서 언급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내용의 전개상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제한속죄는 차별적으로 일부에게만 베푸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연장선상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할 줄 압니다. 이제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봅니다.
속죄의 필요성
하나님의 선택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 중 일부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을 좇아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가운데 죄 없다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의로운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칭의적 구원의 예비적 조치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전 선택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속죄의 범주에서도 제외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죄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해서 시행되는 연속적인 구원사역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속죄(贖罪)가 필요한 것일까요. 속죄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금품이나 공로로 지은 죄를 씻음 받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본주의적 접근방식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적 구원사역을 일컫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자력으로는 어떤 선행과 공로의 대가로도 죄의 문제를 탕감 받을 수 없기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의의기준과 가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3:10).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베푸시는 속죄사역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구체적 시행에 있어서 그 정당한 실효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선택이 미래적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전표식인 바 구원은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함과 동시에(무죄선언)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의인됨(칭의)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문제해결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상호 관련 속에서 선택은 필연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즉 죄의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은 실제적 적용에 있어서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택교리 후에 바로 속죄교리가 뒤따르는 당위성이 이런 이유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속죄사역을 통해서만이 최종적으로 실현된다는 얘깁니다.
속죄의 성격과 방식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통해 속죄의 성격이 요구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로서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무(全無)함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이는 어떤 형태의 인위적 방식으로도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절대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인간의 선택이 가능했듯이 동일한 원리로 절대적 선과 의의 소유자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인간의 속죄를 실현시키기 위한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신학적으로 ‘대속적(代贖的) 속죄’라고 일컫습니다. 말 그대로 절대적 타자가 대신 죄의 값을 지불해 주는 것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속죄는 비로소 실현 가능성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절대타자에 의한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전적타락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영적 파산자입니다. 영원히 죄인으로 정죄 될 뿐입니다.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자력구원은 요원합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인간의 죄를 사면하시는 방식은 죄인이 아닌 절대적 타자에 의한 대속의 원리가 요구됩니다. 죄와 불의와 허물이 전혀 없는 절대 타자(他者) 말입니다. 여기서 속죄의 성격 또한 대속적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대두됩니다.
이제 인간의 속죄는 절대타자가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바치는 것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게 됩니다. 죄 값은 사망 곧 죽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6:23). 구약의 율법의 제사제도하에서 요구되어진 일체의 희생제사 행위는 바로 이런 속죄사건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의 일환입니다(레1-7장, 히9:13). 이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9:22, 레17:11)는 하나님의 속죄의 원리에서 나와진 실천적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약제사의 실체(히9:14)로서 절대타자의 필요충분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절대타자이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대속물로 표현합니다(막10:15).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한 마리 희생양으로 오신 분(요1:29)임을 언급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이 바로 절대타자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야 말로 절대 선과 의로우신 분으로서 곧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빌2:5).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말입니다(요1:14, 18). 그러기에 비록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육화(肉化)하셨지만 그 분의 본체는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시고(히4:15), 죄를 모르시며(고후5:21), 죄를 짓지도 않으신 분(벧전2:22)으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신(神)-인(人)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하심으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요,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또한 알고 믿게 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요14:9).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분의 출생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눅1:26-35). 곧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비밀의 경륜 속에서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출생과 전 생애가 앞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하신 바 구속의 도리를 세상 가운데 펼치시고 이루시는 일에 집중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요17:4).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으며,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죄를 친히 사해주시는 것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왕적 권세를 발휘하고 계심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막2:1-12).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속죄사역은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대속적 사역의 절정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건에 근거해서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성경은 감히 선포합니다(롬8:1). 다시 말해 그 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으며 그 분의 다시 살아나심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우리 또한 의롭다고 칭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롬4:2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으심이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적 죽음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나아가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롬3:24) 그 결과로 주님을 왕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성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을 믿음으로 거듭나셨는지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으셨는지요. 구원 받으셨는지요. 그래서 지금은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분명한 목적과 가치관의 전환 속에서 살아가시는지요. 물론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 없다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우리의 연약과 한계를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때마다 상한 심령으로 자백하는 일과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멀어지는 일에 진보가 있어야 함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1:8-10).
속죄의 효력과 적용의 범위
이제 우리는 본 교리의 핵심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적 속죄사역을 베푸셨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속죄사역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 대속적으로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내어주셨단 말인가? 이 주제에 대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보편속죄를 주장합니다. 이는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자신이 믿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견지해 오는 칼빈주의 자들은 제한속죄를 성경적 바른 교리로 수납해 왔습니다. 이는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결국은 창세 전 택자들에게만 유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제 2 강에서 이미 살펴 본대로 당신의 기뻐하시는 절대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전체 중 일부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죄의 효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속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공효는 염소나 송아지의 희생과 같은 저급한 피조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들은 그 가치면에서 그처럼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효력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매년 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을 통해서만 한시적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속적이지는 못합니다.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이를 실체를 향한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물로서의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이렇게 해명합니다. 히9:13-14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신 바 그 가치의 우월성과 속성상 영원성으로 인해 단번에 드리신 바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린 셈이라고 설명합니다(히10:12-14).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이제는 추가적으로나 반복적으로 더 이상의 죄를 위한 다른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이런 사실은 다른 한편 ‘영 단번’으로 드려진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이 전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전담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공효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예수님의 무한하신 가치는 온 인류의 죄를 넉넉히 담당하시기에 족하고도 남습니다. “다 이루셨다”(요19:30)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드리셨다는 승리의 일성(一聲)입니다. 비록 죽으시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림으로서 후에 받으실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신 계시적 발언인 것입니다(히12:2).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안에서 죄인 된 인류는 당당히 구원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롭고 산’ (히10:20) 생명의 길이 열려진 셈입니다. 온 인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도말 되기에 족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졌습니다(시103:12). 속죄의 공효적 능력의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속죄의 적용과 범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위한 속죄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를 위해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담당해야만 하셨느냐의 관한 내용 말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결코 전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속죄의 공효는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원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적 능력이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적용의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 들어온 자들을 위해서만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은 유효하게 미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란 말인가요. 바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들입니다. ‘남은자’(사10:20-22, 롬11:4-5)들 말입니다. 성경은 이사실을 다양한 표현과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마1:21입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천사의 고지(告知)를 인용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하니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의 특성상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나시기 전에 이미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역적 측면을 확인하게 되는 데, 이는 다름 아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일’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구약제사의 제물인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모든 인류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만을 담당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실 것임을 지적합니다. 자기 백성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온 인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백성 곧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조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예수님께만 속한 당신의 특별한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죄사역을 위해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저들의 대속물로 오셨다는 사실의 증언입니다.
눅19:10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해서 그 분의 성육신 사건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에로 부르신 후에 직접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구일까요. 온 세상 만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만민 중에 일부를 가리킵니다. 요6:37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니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제한적 의미로 당신의 백성 곧 세상 가운데 잃어버린 특별한 백성이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 앞으로 나온다는 지적입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가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습니다(요10:1-6). 모두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만이 나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단의 양무리가 따로 있다는 �
인간의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1.도입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곧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 그리고 보수신학을 칼빈주의의 신학적인 체계와 결부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장로교(개혁주의)신학과 신앙을 바르게 보수(保守)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고 하겠습니다.
칼빈주의란?
그렇다면 칼빈주의란 무엇인가요? 칼빈주의를 곡해하는 사람들은 칼빈 개인의 신학사상이라고 이해할는지 모르지만 죤 칼빈(John Calvin)은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의 전승과 신앙고백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신학사상을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로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그는 비록 칼빈주의 신학사상 체계에서 취급된 모든 사상들을 손수 만들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진리를 가장 바르게 깨달은 사람 중 하나였으며 교의(敎義)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바울, 어거스틴등)의 사상을 후대에 가장 바르게 체계를 세워 전달한 사람입니다.
물론 역사적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신앙이 칼빈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칼빈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개혁자들(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등)에 의해 전통적인 신학이 산발적으로 제시됐는데 칼빈이 이를 종합적이고 보다 체계적으로 수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란 칼빈이 처음으로 종합적인 신학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것이지 칼빈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이론을 뉴톤이 처음 발견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뉴톤의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본래는 창조 때부터 존재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시작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 의해 신학적 기초가 수립됐으며,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이 되었고, 칼빈에 의해 종합적으로 체계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칼빈을 추종하는 신학자들(벤자민 워필드, 챨스 핫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등)에 의해 꽃이 피었으며, 현재 역사적 개혁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보수 신학자들에 의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인간의 사색된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성경적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 곧 성경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사상 체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란 성경에서 시작하여 칼빈이 체계를 세운 것을 후에 신학자들이 집을 지은 것으로 우리는 칼빈주의가 성경을 기초로 한 전통신학이요 보수신학의 기초라고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칼빈주의 신학의 기본원리는 ?하나님 중심사상(God Centered) 성경중심사상(Scripture Centered)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God's Absolute Sovereignty)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기원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형성하게 된 것은 1610년 화란신학교 교수였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가 죽은 뒤, 소위 알미니우스주의자들(Arminians)이라고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그의 가르침을 기초로 다섯까지 주요 요점으로 공식화해서 내어놓은 것이 시발점이 됩니다. 그때까지 화란 교회들은 유럽의 다른 주요 개혁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비르크의 신앙고백에 찬동하고 있었으며, 이 고백들은 둘 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철저히 기초한 교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이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성경의 교리적 가르침에 항의(抗議)해 자신들 나름대로의 교리적 입장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표명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free will or human ability) : 이는 인간이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았지만 영적 선을 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능해진 것은 아니며 따라서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 소위 예지(豫知)에 의한 예정(豫定)교리로서 구원을 받고 싶어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복음에 반응해 믿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예정에 선행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보편적 구속 혹은 일반적 속죄(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결국은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적으로 돌아가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 값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있을지언정 종래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견해입니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지에 제한을 받음(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regeneration limited by the human will) : 이는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역사(役事) 하실 때 인간의지에 의해 거부를 당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성령의 뜻이 좌절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자진해서 영생의 생명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한 성령은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요지입니다. …은혜에서 떨어 짐(falling from grace) : 이 주장은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조항은 각각의 내용이 담고 있는 교리적 성격상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하나님으로서 일체의 성경적 교리는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편에서의 교리는 다른 한편에서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성경의 자증입니다. 성경은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유기적(有機的)으로 연합돼 있습니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논쟁이 일어나자 화란 정부는 1618년 11월에 화란의 남부지역인 도르트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 129명이 모여 이 문제를 갖고 회의를 시작합니다. 이 회의는 이듬해인 1619년 5월까지 약 7개월간에 걸쳐 무려 154회에 이르는 마라톤회의를 거듭한 끝에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조항들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에 의견을 모으게 됩니다. 동시에 종교개혁에서 매우 명백히 제시됐고, 프랑스 신학자인 죤 칼빈에 의해 체계적으로 형성된 개혁주의 교리적 입장을 재확인 한 도르트 대회는 알미니안들의 체계에 대결하기 위한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공식화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교리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2.전개
우리가 흔히 칼빈주의의 5대 교리라고 일컫는 내용은 칼빈 개인의 주관적인 교리적 견해에서 나와진 독단적인 성경해석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미 종교개혁자들과 주요 종교회의에 의해 정립된 개혁주의적 성경해석의 차원에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일단의 알미니안들의 교리적 항의를 일축하고 재확인하는 형식으로 나온 성경적 변증의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이들 내용은 ‘구원의 도리’에 집중해서 연관돼 있음이 특징입니다.
한편 이들 주요 조항들을 영문의 첫 글자를 중심으로 나열했을 때 'TULIP'이라는 글자로 표기되는 바 일명 ‘튤립교리’라고도 부릅니다. 오늘은 이 중 첫 번째 교리인 ‘인간의 전적타락’에 관해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자유의지’ 및 ‘인간의 능력’ 교리의 반동(反動)으로 제시된 교리적 주제임을 쉽게 간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알미니안파들의 주장에 대한 철저한 부인과 이에 대한 성경적 답변입니다. 우리는 본 강의를 통해 성경이 증언하는 바 인간의 전적타락과 관련해서 몇 가지 측면에서 이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전적부패 또는 전적무능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 속에는 한결같이 몇 가지 동일하게 시사하는 신학적 명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주제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는 상대적 명제가 아닙니다. 절대적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인데 이는 사람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평가된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절대적 관계에 근거해서 진단된 결과라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분의 고하와 출신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죄인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정죄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은 처음 무죄자로 창조됩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죄자가 곧 완전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자는 무죄할 뿐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짓지도 않는 절대자를 일컫는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죄자이지만 불완전한 아담은 하나님께서 내신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통해 보다 완전하고 온전한 선의 상태로 발전해 나가야 할 시험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시험에서 실패합니다.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기게 됩니다. 이것이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사건입니다. 원죄의 기원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죄의 성립은 인간의 내적 욕심의 발로로 야기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본질적 성격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지 못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요16:9). 이후 아담의 범죄의 죄성(罪性)은 그의 후손들의 본성에 유전적으로 전가(轉嫁)돼 온 인류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선고하는 근본원인을 제공합니다(창2:17, 3:5-6). 롬3:23와 5:12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지적이 바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범죄행위와 이로 인한 후손에게로의 죄의 생득적 전가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이후부터 온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됩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롬3:10). 인류의 비극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죄인으로 정죄 당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체의 영적 교제에서 단절돼 영원히 결별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영적 이산가족이 돼 버린 셈입니다. 바로 죄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사59:2입니다.“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후 아담의 원죄는 그의 후손들의 본성 속에 감추어져 온갖 범죄행위의 원인 제공자로 활동하게 되는 바 곧 자범죄(自犯罪)의 근원이 됩니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 만연돼 있는 갖가지 형태의 범죄는 바로 조상으로부터 생득적으로 전수된 원죄의 다양한 외적 표현일 뿐입니다. 설령 일생에 거쳐 행위에 근거한 범죄를 한번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있을지라도 본성적으로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소위 양심(良心)이 고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은 죄인으로 전락한 인간이 현재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유일의 천성적(天性的) 흔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양심마저도 화인(火印) 맞아 그나마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때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요8:1-11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의 얘기가 소개됩니다. 한 무리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다수의 시민들이 이 얘기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고소할 목적으로 이 여인을 잡아 의도적으로 주님께 이끌어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을 명했다고 하면서 주님의 판결을 요구합니다. 사도 요한은 저들의 요구가 ‘예수님을 시험해서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라고 이 사건의 내막에 담긴 실상을 독자들에게 폭로합니다. 어찌했든 예수님은 저들의 요구에 어떤 식으로라도 답변하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계십니다. 만약에 모세의 법대로 죽이라고 하신다면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법을 위반해 스스로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고 죄를 용서하셔서 구원하시는 사랑의 법에 근거해 살려 주라고 하시면 이는 주님 또한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을 통해 오신 분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적 규범인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시는 셈이 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잠시 시간을 가지신 후에 살기등등(殺氣騰騰)하고 의기양양한 회중을 향해 일성(一聲)을 발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절). 다시 잠시의 침묵이 흐릅니다. 얼마 후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때의 상황을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회중은 간음한 여인과 비교해서 분명히 현행범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적 의의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드러난 죄인’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주님의 질문 섞인 답변에 어느 누구 한사람도 선뜻 나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회중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일말의 양심이 저들을 여인과 동일한 범죄자로 고발하고 있음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감춰진 죄인‘으로 말입니다. 요한은 이 상황을 해석하면서‘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떠나게 됐다고 기록합니다. 비록 저들이 현행범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자기 양심에 찔려 감히 자신들을 무죄자라고 주장하지 못한 사실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적나라하게 시사합니다. 여기서 양심은 바로 주님의 질문 곧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인간 본성의 실질이 어떠함을 사실적으로 직고(直告)하는 고발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지금 인류를 향해 저들의 실상이 하나님 앞에서 ‘이 여인이나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사실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드러난 죄인이나 감추어진 죄인이나를 막론하고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시선 앞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은 죄인들로 존재할 뿐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 심성의 실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여기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명제 속에는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의 영향은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전(全) 영역에 걸쳐 ‘전인적(全人的) 부패’를 초래한 나머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원을 스스로 취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死亡者)라고 정의한다는 지적입니다(롬3:10-12, 엡2:1). 다시 말해 인간의 지정의가 그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교통의 기능을 철저히 상실한 나머지 어떤 자의적 방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롬1:21-23). 이는 처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도의 영적 수준에서 자력으로는 회복불가능의 저급하고 타락한 상태로 전락돼 버렸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창2:17을 보십시오. 선악과 금과법에는 문맥상 조건부적으로 영생과 사망이 대가로 주어졌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이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하셔서 죽음이 즉각적으로 저들에게 임하는 것을 지연시킴으로 구속의 기회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과의 종전 같은 막힘 없는 전인적 교제와 교통은 한 순간에 단절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여느 때와 같이 찾아 오셨지만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음으로서 인격적 교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됨을 봅니다(창3:8-10). 도리어 하나님을 피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영적 죽음 곧 ‘전인적 관계의 단절’이라고 부릅니다.
이후로 아담의 범죄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과의 일체의 정상적인 교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죄(原罪)로 기능하게 됩니다(사59:1-2). 롬3:23과 5:12을 보십시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일하게 죄인인 사실을 증거합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 행위로 나타나는 일체의 인간의 자범죄(自犯罪)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인간의 본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원죄의 죄성으로부터 기인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합니다.
엡2:1을 보십시오. 우리의 옛사람의 형편과 처지는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들로 판정 받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죽은 자나 방불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과의 마땅한 영적 교제(전12:13)의 단절이 성경적 죽음의 일차적 판정임을 알게 됩니다. 마8:22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친의 장사(葬事)문제로 주님을 즉각적으로 좇기를 주저하는 한 제자를 향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권고하십니다(마8:22, 눅9:60). 여기서 실제로 죽은 자는 두 번째 죽은 자를 가리키며, 첫 번째 죽은 자들이란 비록 현재적으로 살아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통해 주님과 관계도 분깃도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불신자들로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에 있는 원수 된 자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은 여전히 전적부패한 자들로서 결국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로 간주됨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그렇다면 갓난아이들이나 태아들은 어떨까요? 성경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사악(邪惡)한 존재라고 정죄합니다. 원죄로 인해 처음부터 죄인으로 잉태되고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시51:5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실토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간의 심성을 고발하면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17:9)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함으로 당시의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 했음을 창세기 저자는 고발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결과가 되었음을 기록합니다(창6:5). 로마서 기자는 이런 인간의 죄악 된 상태를 힐난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3:10). 지금 저자는 인간 상호간의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 선의 기준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선의 기준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이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91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해서(원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규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목적)하는 것’을 동기유발로 삼아 행할 때 비로소 선행으로 성립된다고 가르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전적타락의 두 번째 명제는 사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근원이 원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임을 증거합니다(롬6:23).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히9:27). 왜냐하면 죄는 법정적(法定的) 측면에서 이에 상응하는 형벌을 요구하는 바 죽음은 죄 값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며 동시에 형벌이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노령으로 죽는 자연사(自然死)나 각종 병사(病死) 그리고 사고사(事故死)는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의 방식(方式)일 뿐 죽음의 근본 원인(原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의 값으로 사망이 인류에게 불청객으로 찾아온 것입니다(롬6:23). 역사이래 한 번 태어난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원리와 원칙은 지속적으로 유효해서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전히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 인류를 죽음의 포로로 사로잡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필연적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선고하는 성경의 증언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이며 선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이 안고 있는 명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 죽는 것으로 모든 지상의 삶이 마감되는 줄 압니다. 더 이상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죽음 후에는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요5:28-29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죽음을 영생(하나님 나라)과 영벌(불못 곧 지옥)의 실질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때 인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를 경유해야 할 것임을 경계시킵니다. 따라서 죽음 후에는 온 인류 앞에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히9:27). 이는 한 번 태어난 생명의 가치는 영생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로 하사된(창2:7) 탁월한 성격상 영원불멸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의 법칙이며 원리입니다.
아울러 종말론적 생명의 최후적 거처는 영생과 영벌의 장소로 나뉘어 질 것임을 성경은 지적합니다(계20:15, 21:1, 4). 본문(요5:28-29)은 하나님의 최후적 심판대에 서기 위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사실 부활의 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는 그 신비하고 초자연적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실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사건의 경우를 통해 분명한 실제적 사건으로 소개합니다(롬8:11, 고전15:20-24). 사실상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고전15: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의 종말론적 부활의 첫 열매로서의 보증이 되신 사건입니다. 그분의 부활에 속해져서 성도들은 그 분이 다시 오시는 날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15:42-44, 살전4:16-17)). 이미 부활해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체의 영광을 입고서 말입니다. 이토록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남김없이 만족시킨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증거로 작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양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고전15:3-4).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은 이 부활 후 심판(계20:11-14)에서 제외됨으로 지옥의 다른 설명인 불못의 종말론적 형벌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사면(赦免)됐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요5:24). 이 말은 역(逆)으로 현재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아직 죽음과 그 후의 부활과 심판을 현실로 경험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선취적으로 종말론적 심판에 처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요3:18). 복음이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입는 것을 통해 필연적 심판(영벌)에서 제외되며 동시에 영생하는 생명에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요5:24).
이런 복음의 내용이 이미 우리 안에서 현재적으로 성취된 사건으로 신기하게도(?)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 믿는 것이 아닌 믿어지는 것입니다. ‘절대적 타자’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이끌림을 받아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자아는 위에서 본대로 이미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자로 존재하기에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타자(他者)로서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다른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사역이 우리를 위한 대속적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미 죽어버린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이를 수납하게 하신다는 얘깁니다.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향한 정상적인 영적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역의 주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예수님의 지상적 사역의 계승자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서 당신의 종말론적 구속사역을 성령님을 통해 진행해 가십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 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에 대해 원보혜사가 되시며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통해 성령님을 자신의 대리적 파송자로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의 성격은 오직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을 증거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을 통해 부단히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시며 이를 가능케 하는 일에 집중돼 있습니다(요14:16, 26). 가시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까지도 성령님은 성도들의 심령에 관계하셔서 여전히 영생하는 생명력의 근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요14:16).
3.결론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면전에서 철저히 타락하고 부패한 무능자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증언합니다. 바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반응할 수 있는 일체의 지정의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이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들을 일컬어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선고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도 없으며 한결같이 치우쳐 무익하게 됐음을 선포합니다(롬3:11-12). 나아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조차 싫어한다고 지적합니다(롬1:28).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심성이 전적인 타락과 부패로 인해 마땅히 섬길 자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상실된 상태를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시종일관하게 인간의 본질적인 영적 상태를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영적 파산자로 선고를 내립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거듭날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임을 지적합니다(고전2;14). 그렇습니다. 이제 외부적 타자(他者)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전무할 뿐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그의 머리됨으로 인해 온 인류를 부패와 타락으로 몰아가 죄인 되게 함으로서 영적 사망과 육체적 죽음과 최후적 심판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지정의를 발동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일말의 능력조차도 앗아감으로 인류를 하나님 없는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런 교리적 내용들을 일컬어 전적타락, 전적부패 혹은 전적무능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경이 증언하는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적 무능자로 타락한 인생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타자’의 도움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당위(當爲)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다음 강론에서는 자연히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택정 말입니다.
개혁주의성경공부 제2강(칼빈주의5대교리) 조회 (33)
성경공부 | 2005/11/23 (수) 22:35 공감 (0) 스크랩 (0)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
1.도입
절대적 타자(他者)로서의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 방식은 죄로 인해 전적타락과 부패와 무능에 빠진 인간을 가장 자연스럽게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며 자비며 긍휼의 일환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인간의 영적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하여 자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 곧 영적 사망으로 인한 일체의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단절된 파산자(破産者)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외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무능한 범죄자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외부적 절대 타자(他者)에 의한 구원에로의 선택교리를 요청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요구이며 증언이지 상황전개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나와진 즉흥적(卽興的) 요구만은 아닙니다.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에 의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소위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에 대한 반증으로 나온 성경적 대응이며 해명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능력이 범죄로 인해 완전히 타락했거나 부패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인간 스스로의 자의적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의 허구성(虛構性)은 이미 지난번 전적타락 교리에 의한 성경의 자체 증언을 통해 충분히 밝힌바 있습니다. 결코 성경은 인간 스스로의 자력 구원의 가능성을 추호라도 용납하지 않음을 살펴봤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용인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그 신적 기원에 따른 본질적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복음주의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절대성과 충족성을 이렇게 변호합니다.“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3:21). 그렇습니다. 인간의 구원사역에 사람편의 의지적 행위는 절대불가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율법을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란 전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오히려 생각하고 행하는 것마다 불의함과 죄악뿐임을 증거합니다(창6:5, 사64:6, 렘17:9). 인간의 본성이 죄로 오염되고 부패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타자(他者)로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관련해서 흔히 사용되는 몇 몇 용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할 줄 압니다.
먼저 작정(作定)이라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물의 조성과 만사의 진행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총괄적 계획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할 때 이는 창세 전에 미리 작정하신 계획대로 피조세계 속에서 만물과 만사를 그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보존, 관리, 통치하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고 증언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해서 나온 변증(辨證)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물과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경영된다고 할 때 세상에 우연의 산물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배후에 존재하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계시적 사실의 터 위에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섭리 의존적 신앙의 교리적 정립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작정이란 전 우주적 역사를 그 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해 가시는 포괄적(包括的)인 계획을 가리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다음으로 예정(豫定)이란 용어를 들 수 있습니다. 예정은 작정의 일부입니다. 작정이 우주만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보편적(普遍的)인 사전계획이라면 예정은 우주만물 중 특별히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과 결부된 교리에 특별히 국한시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작정이 내용상 포괄적이고 광의적이며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예정은 지엽적이고 협의적이며 특별한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은 구원과 관련된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을 얘기할 때 주로 사용되기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타락한 사람들 중에서 얼마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선택해서 구원해 주실 것을 창세 전에 미리 정(定)한 사실을 가리켜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예정 속에는 선택교리와 함께 자연히 유기(遺棄)교리까지도 포함되게 됩니다. 다수 중에 일부가 선택됐다면 나머지는 자연히 버려진 바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공평할 수 없음은 인간은 본성상 죄값으로 심판에 처해 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진 자들로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전적타락과 부패).
그러나 내용이 담고 있는 범위와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정은 보다 큰 범위의 작정 안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로 인해 때로는 예정을 작정으로 대체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작정의 의미는 항상 예정의 내용과 성격인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정과 관련해서 고전적(古典的) 성경 본문인 엡1:4-5입니다. 여기서 선택과 예정은 분명히 사람의 구원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돼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행13;48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누가는 이를 설명하면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작정이란 다름 아닌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정과 작정을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리키는 바 구원의 의미나 성격이 달라지거나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2.전개
무조건적 선택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시된 성경적 교리입니다. 저들은 인간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자의적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자정(自淨)능력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남은 의지적 선택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성에 의해 이를 미래지향적으로 내다보시고(예지) 구원에로 선택하셨다(예정)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도르트 회의에 의해 그 부당성이 이미 지적되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경의 증언에 근거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로 이미 무효화된 구시대적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범죄는 인간을 전인적(지정의)으로 부패케 만듦으로 하나님을 향한 지정의의 기능을 근원적으로 상실한 나머지 자력(自力)으로는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도, 더듬어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가 됐다고 선고합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인간의 구원의 기회란 전적으로 외부적 절대 타자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하게 돼 버린 셈입니다.
예지-예정론의 허구성
오늘날 예지-예정론에 근거한 선택교리는 비단 알미니안적 사고방식에 동조하는 교단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일부 장로교 교단에서조차 이를 수용해서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지-예정론이란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성경적 논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에 반응하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당신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창세 전에 예지(豫知)하시고 이에 근거해 그 사람을 구원에로 예정(豫定)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서기2000년 8월25일에 어느 한 사람이 서울의 모교회의 전도집회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을 발휘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창세 전에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내다보시고(예지) 그를 선택해 구원하시기로 예정했기에 그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됐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이런 교리적 논리 하에서는 구원의 주체가 복음을 자의지적으로 받아들인 그 사람 곧 인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복음을 자원해서 의지적으로 받아들였기에 조건적으로 그를 구원하셨다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란 주장입니다.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만한 선한 능력이 남아 있기에 얼마든지 그 남은 선(善)을 발동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력으로 취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한편 이런 조건적 선택교리 곧 예지-예정론을 수용하는 측에서는 이 교리를 정당화시키는 증거본문으로 대부분 롬8:29을 제시합니다. 29절 한 절만을 보면 틀림없이 ‘미리 아신(예지)자’와 ‘미리 정하셨다’(예정)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순서는 예지-예정의 단계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롬8장 전체를 문맥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주관에 빠진 자의적(自意的) 해석이며 따라서 허구(虛構)인지를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롬8:1-2에서는 성도들의 죄로부터의 해방이, 곧 성도의 구원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한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았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더욱 3절에서는 육신이 죄성으로 인해 연약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들을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통해 이제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얼마든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음을 변증합니다. 나아가 7절에서는 옛 사람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굴복할 수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기에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아울러 고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과 이 사실에 대한 확증은 오직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과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할 뿐입니다(16절).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옛사람의 타락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자의지적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일말의 자각(自覺)도 불가능합니다(26절).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판정 받았기에 말입니다(엡2:1).
이렇게 롬8장 자체 문맥만을 검토하더라도 29절의 예지란 인간의 자력(自力)적 선택을 미리 보아 알고 계시다는 의미의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라(예지-예정),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역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구원시킬 자를 예정하셨기에 그들이 누구이며 또한 누가 복음을 수용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계신다(예지)라는 사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예정-예지). 이 뿐만이 아닙니다. 관련 주제를 다룬 다른 본문에서는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증거합니다. 요15: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본(本)절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제자를 선택한 주체가 제자들 스스로가 아닌 주님 자신임을 분명히 천명(闡明)합니다. 앞에서 잠깐 살펴봤던 행13:48에서도 주님을 믿는 주체가 사람이기 이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자들’로 제한돼 있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함’임을 분명히 보아 알 수 있습니다. 행16:14을 보십시오. 여기서도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됐을 때 그녀가 복음을 청종하게 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그러나 이때도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주체가 루디아의 자의적 선택이 아닌 주님으로 분명히 소개됩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님께서 루디아의 전적으로 타락하여 죽어버린 바 된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그녀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셨다는 지적입니다. 요3:3입니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상의 일련의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거나 믿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설령 성경 어느 한 구절의 내용 속에서 선택과 믿음의 주체가 사람으로 설명된다 할지라도 앞 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접근하면 결코 사람에 의해 임의대로 선택과 구원이 좌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1:12에서는 주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의 특권이 인간의 자의적 선택과 신앙적 고백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 같이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이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자녀 된 근본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과 고백의 대가와 보상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창세 전 선(先)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음임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의지로 말미암았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발견되는 구원교리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선택적 구원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미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영적 사망자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자로 선고됐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이로 인한 원죄의 생득적 전가로 말입니다(롬3:23, 5:12). 따라서 인간의 자력으로는 어떤 방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택적 구원을 임의(任意)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이러 이유로 해서 인간에 의한 하나님의 조건적 선택과 관련해 예지-예정론의 논리적 허구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
그렇다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이미 전(前) 강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실존의 비참함을 살펴봤습니다. 영적 사망자와 파산자로서 인간의 전인격적 기관은 하나님을 향해 이미 그 총체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인 사실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됐습니다(마8:21-22).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구원이란 자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뿐입니다.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외부인이라 할지라도 같은 인간의 수준에서는 또한 불가합니다. 그도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아야 할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절대 외부적 타자(他者)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됩니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당사자는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만이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사1:18, 44:22, 시103:12, 행4:12).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에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곧 창조주와 절대자로서의 그 분의 절대 주권 안에서 말입니다.
롬9:10-13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본문에서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들 두 아들이 쌍둥이로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이들의 나중 형편을 선택적으로 예정하셨습니다. ‘큰 자(에서)가 작은 자(야곱)를 섬길 것’을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했을 때부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공평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사전결정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요. 본문은 이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에서 찾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창조자적 절대 주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좀 더 원색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 마음대로’란 의미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런 사실에 대한 독자들의 반발과 이의(異意)제기를 예감하고 얘기를 계속 전개시킵니다. 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변론합니다. 창조자로서의 절대 주권과 권능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할 말을 잊게 될 뿐이며 그 분의 행하시는 처사는 어느 것 하나도 불의함과 불공평함이 있을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상 말입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저자는 노파심(老婆心)을 발동시킨 나머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기장이와 한 덩어리의 진흙의 비유를 들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을 시도합니다(롬9:20-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임의대로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도 창조자의 권능과 주권으로 택자를 임의선택 할 수 있다는 논리적 변증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본질적으로 타락한 죄인인 이상 구원을 위해 선택해 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항의할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찌했든지 아담 안에서 범죄한 불의한 죄인들로 이미 정죄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롬1:29-31)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定)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32). 지금 저자는 본문들을 통해 철저히 부패하여 타락한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 중에 일부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을 좇아서 구원에로 선택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 크신 일을 이루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 속에 우리의 구원이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지도 않았을 때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성경적 은혜의 실질과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이 호리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개입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退色)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의 은혜에 인간의 역할과 기능은 전무할 뿐입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무상으로 베푸실 수 있는 전폭적인 사랑의 호의이기에 말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에 근거하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행하시는 예정에 의한 것임을 에베소 기자는 선포합니다(엡1:5). 여기서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창조자적 주권을 가리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 ‘오게 하시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요6:37, 39, 44, 65). 이는 결국 같은 의미의 다른 설명일 뿐입니다. 내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시종일관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합니다. 그렇다면 왜 다수 중에 일부를 주권적으로 임의(任意) 선택했느냐 하는 문제 말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근거해서 선택적 구원동기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사를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해 가실 때 필요한 자들을 선택적으로 부르셔서 계시의 도구로 선용(善用)하십니다. 이 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원하심을 따라 되는 창조자적 주권에 따라서 소명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 오직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성취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롬9:11). 그렇다고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황에 따른 임시조처라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필요에 따라 임시변통(臨時變通)적으로 선택하는 즉흥적 발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필요에 따른 임기응변(臨機應變)식의 임의적 결정같이 보일지라도 창세 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先) 주권적 선택에 따른 후(後) 성취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절대자적 주권이 한낱 창조자의 횡포와 전횡(專橫)으로 오해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시고 무분별하고 소견에 좋을 대로 사사로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민23:19). 창세 전에 세우신 작정과 계획에 근거해서 만물과 만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일점 일획의 착오와 차질 없이 세상역사 속에서 섭리적으로 경영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을 신앙과 생명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음이 이런 계시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렇다면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빛도 이름도 없는 우리인가요. 왜 막강한 열국 중에 작고 미약하며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세상가운데서 택자(擇者)를 부르시는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의 동기를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發露)라고 말씀하십니다. 신7:7-8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본문에서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각별한 선택의 배경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로 열국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도구로 사용하시는 데는 이스라엘의 외부적인 열악한 여건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배려’가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둘째로 이 사랑의 선택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의 열조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한 성취를 위해 애굽으로부터 구출해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과 공과가 인정되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선택과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열국에 비해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사랑이 동기가 돼서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의 하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요3:16과 엡1:4과 2:8, 롬5:8과 요일4:10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택과 속죄와 구원의 동기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하사(下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의 결과임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속량하시기 위해 대속적 죽음을 자원해서 담당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죄악 중에 구원해 주셨을까요. 성경은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선포합니다(고전1:29, 엡2:9, 1:6, 눅17:10).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성경은 성도의 신앙적 본분을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을 즐거워하는 삶이라고 강력히 피력(披瀝)합니다(전12:13, 고전10:31, 롬14:8, 엡5:10). 그렇다면 이런 삶의 구체적 내용과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롬12:2을 통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가치관을 수립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모든 지상적 삶의 성격과 방향성을 집중시켜 나가라는 엄숙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왜 삽니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결국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요.
우리는 본 강의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성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 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근거해서 택자들에게만 베풀어주시는 선택적 은혜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차별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 와 택자들의 행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인간의 행위가 철저히 배제된 선택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해서 세 번째로 살펴 볼 문제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근거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혀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미치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미 전(前) 강의(전적타락)에서 지적한대로 인간의 영적 상태가 스스로 선을 행하거나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영적 기능과 능력을 본질적으로 상실했기에 독자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신앙적 반응을 전혀 보일 수 없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앙자는 비록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나 방불함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마8:22).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통해 찾아지는 바(전12:13) 피조자로서 창조자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생명의 원리로 삼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과는 무관한자로서 곧 영적 사망자란 지적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의 구원은 외부의 절대적 타자(他者)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사실상 이런 영적 사망자(불신자)에 의해 시도되는 어떤 행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죄인 됨의 전제하에서는 결코 선(善)과 의(義)로 평가될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는 일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역설적으로 선포합니다(롬1:28-32).
인간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상대적(相對的) 선은 하나님의 절대적(絶對的) 선의 요구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에 상대적으로 극한 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한낱 더러운 누더기 옷과 다를 바 없음이 성경이 보는 해석적 관점입니다(사64:6). 그러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성경은 전 인류를 향해 감히 선포하는 것입니다(롬3:11-12). 왜 그렇습니까. 오직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느 사람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죄인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만 인간의 죄는 사면될 수 있습니다(행4:12).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원수 된 죄(원죄, 자범죄, 불신죄 등) 문제를 깨끗이 탕감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성격은 자연히 인간의 행위를 철저히 배제시킨 하나님의 독자적인 주권과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를 통해서 베푸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하나님의 선택에 일조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는 그 본연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적 진노만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롬9:11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한 구약의 사건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두 자녀인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에 따라서 야곱을 택하여 아비 이삭의 뒤를 이을 언약의 계승자로 택정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난 이후의 에서나 야곱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만한 특별한 사건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에서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나 지극히 육신적이었으며 무책임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소극적이지만 이기적이었으며 교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졌다면 야곱은 형 에서에 비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상대적으로 독차지 할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선악의 행위와 무관하게 그가 태어나기도 전 아직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그를 에서보다 사랑하여 언약의 당사자로 선택하신 사실을 성경은 소상하게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사역에 인간의 행위는 전혀 무용지물입니다. 무관합니다. 적극적으로 배제됩니다. 만일에 호리만큼이라도 인간의 행위와 공적이 참작(參酌)된다면 이는 인간의 전적타락교리를 성경스스로가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은 자연히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의 성격이 오직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택이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에 기준으로 작용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 과연 몇이나 될는지요.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일는지요. 하나님의 선택적 구속이 우리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덮어 주셨습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행2:11).
3.결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최선의 방편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은혜 됨의 비밀이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강퍅(剛愎)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하십니다(롬9:18, 11:32). 만일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이 되었다면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택정 함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무상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와 그 분의 선하신 뜻을 감당하는 일에 남은 생애를 불사르게 만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선택을 입은 자의 생애를 계속해서 섭리적으로 간섭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일에 선용하신다는 사실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잡고 살아가게 하는 바 섭리 의존적 신앙관을 확립시킵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신앙관을 촉발시킵니다. 이런 신앙관의 확립은 흑암의 세력이 주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늘 승리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성도의 진정한 기쁨이 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천하 만민 중에 천지의 창조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행복한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이 늘 풍성히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베푸신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 개개인을 사랑하십니다.
개혁주의성경공부 제3강(칼빈주의5대교리) 조회 (37)
성경공부 | 2005/11/23 (수) 22:36 공감 (0) 스크랩 (0)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1.도입
우리는 지난 두 번의 강의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부패와 무능은 자력구원의 길이 근원적으로 차단돼 버린 나머지 외부적 절대타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하나님편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허물과 죄로 철저히 죽어버린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에 올라 하나님과 깨진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키고 화목과 교통과 교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재창조의 유일한 방식임을 도출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는 구원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바 창세 전 선택이란 창세 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지적 표명이며 동시에 구원을 위한 사전표식이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의 사전단계일 뿐 아니라 그 성격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발휘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속죄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대신해서 갚아주신다는 속량(贖良)내지는 대속(代贖) 또는 구속(救贖)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특정인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속죄교리를 제시하면서 특별히 제한속죄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모두 중 일부에게 만 적용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속죄교리는 누구를 위해 속죄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셨느냐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보편적 속죄교리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인간편에서 원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면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이 증거될 때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 바 한 부류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가 하면 다른 한편은 복음을 거부함으로 정죄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막16:15-16). 이런 결과를 볼 때 비록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은 그 분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범위는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소위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한속죄의 실상입니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해서 언제나 제한속죄 교리를 성경의 바른 증언으로 신앙고백을 해 왔습니다.
2.전개
제한속죄 교리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속죄교리의 반동으로 나왔으나 그 근거는 철저히 성경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아울러 제한속죄 교리는 앞에서 언급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내용의 전개상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제한속죄는 차별적으로 일부에게만 베푸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연장선상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할 줄 압니다. 이제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봅니다.
속죄의 필요성
하나님의 선택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 중 일부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을 좇아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가운데 죄 없다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의로운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칭의적 구원의 예비적 조치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전 선택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속죄의 범주에서도 제외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죄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해서 시행되는 연속적인 구원사역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속죄(贖罪)가 필요한 것일까요. 속죄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금품이나 공로로 지은 죄를 씻음 받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본주의적 접근방식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적 구원사역을 일컫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자력으로는 어떤 선행과 공로의 대가로도 죄의 문제를 탕감 받을 수 없기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의의기준과 가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3:10).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베푸시는 속죄사역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구체적 시행에 있어서 그 정당한 실효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선택이 미래적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전표식인 바 구원은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함과 동시에(무죄선언)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의인됨(칭의)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문제해결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상호 관련 속에서 선택은 필연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즉 죄의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은 실제적 적용에 있어서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택교리 후에 바로 속죄교리가 뒤따르는 당위성이 이런 이유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속죄사역을 통해서만이 최종적으로 실현된다는 얘깁니다.
속죄의 성격과 방식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통해 속죄의 성격이 요구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로서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무(全無)함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이는 어떤 형태의 인위적 방식으로도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절대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인간의 선택이 가능했듯이 동일한 원리로 절대적 선과 의의 소유자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인간의 속죄를 실현시키기 위한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신학적으로 ‘대속적(代贖的) 속죄’라고 일컫습니다. 말 그대로 절대적 타자가 대신 죄의 값을 지불해 주는 것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속죄는 비로소 실현 가능성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절대타자에 의한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전적타락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영적 파산자입니다. 영원히 죄인으로 정죄 될 뿐입니다.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자력구원은 요원합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인간의 죄를 사면하시는 방식은 죄인이 아닌 절대적 타자에 의한 대속의 원리가 요구됩니다. 죄와 불의와 허물이 전혀 없는 절대 타자(他者) 말입니다. 여기서 속죄의 성격 또한 대속적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대두됩니다.
이제 인간의 속죄는 절대타자가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바치는 것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게 됩니다. 죄 값은 사망 곧 죽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6:23). 구약의 율법의 제사제도하에서 요구되어진 일체의 희생제사 행위는 바로 이런 속죄사건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의 일환입니다(레1-7장, 히9:13). 이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9:22, 레17:11)는 하나님의 속죄의 원리에서 나와진 실천적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약제사의 실체(히9:14)로서 절대타자의 필요충분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절대타자이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대속물로 표현합니다(막10:15).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한 마리 희생양으로 오신 분(요1:29)임을 언급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이 바로 절대타자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야 말로 절대 선과 의로우신 분으로서 곧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빌2:5).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말입니다(요1:14, 18). 그러기에 비록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육화(肉化)하셨지만 그 분의 본체는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시고(히4:15), 죄를 모르시며(고후5:21), 죄를 짓지도 않으신 분(벧전2:22)으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신(神)-인(人)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하심으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요,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또한 알고 믿게 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요14:9).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분의 출생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눅1:26-35). 곧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비밀의 경륜 속에서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출생과 전 생애가 앞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하신 바 구속의 도리를 세상 가운데 펼치시고 이루시는 일에 집중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요17:4).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으며,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죄를 친히 사해주시는 것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왕적 권세를 발휘하고 계심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막2:1-12).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속죄사역은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대속적 사역의 절정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건에 근거해서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성경은 감히 선포합니다(롬8:1). 다시 말해 그 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으며 그 분의 다시 살아나심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우리 또한 의롭다고 칭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롬4:2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으심이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적 죽음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나아가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롬3:24) 그 결과로 주님을 왕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성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을 믿음으로 거듭나셨는지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으셨는지요. 구원 받으셨는지요. 그래서 지금은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분명한 목적과 가치관의 전환 속에서 살아가시는지요. 물론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 없다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우리의 연약과 한계를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때마다 상한 심령으로 자백하는 일과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멀어지는 일에 진보가 있어야 함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1:8-10).
속죄의 효력과 적용의 범위
이제 우리는 본 교리의 핵심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적 속죄사역을 베푸셨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속죄사역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 대속적으로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내어주셨단 말인가? 이 주제에 대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보편속죄를 주장합니다. 이는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자신이 믿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견지해 오는 칼빈주의 자들은 제한속죄를 성경적 바른 교리로 수납해 왔습니다. 이는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결국은 창세 전 택자들에게만 유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제 2 강에서 이미 살펴 본대로 당신의 기뻐하시는 절대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전체 중 일부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죄의 효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속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공효는 염소나 송아지의 희생과 같은 저급한 피조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들은 그 가치면에서 그처럼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효력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매년 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을 통해서만 한시적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속적이지는 못합니다.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이를 실체를 향한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물로서의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이렇게 해명합니다. 히9:13-14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신 바 그 가치의 우월성과 속성상 영원성으로 인해 단번에 드리신 바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린 셈이라고 설명합니다(히10:12-14).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이제는 추가적으로나 반복적으로 더 이상의 죄를 위한 다른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이런 사실은 다른 한편 ‘영 단번’으로 드려진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이 전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전담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공효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예수님의 무한하신 가치는 온 인류의 죄를 넉넉히 담당하시기에 족하고도 남습니다. “다 이루셨다”(요19:30)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드리셨다는 승리의 일성(一聲)입니다. 비록 죽으시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림으로서 후에 받으실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신 계시적 발언인 것입니다(히12:2).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안에서 죄인 된 인류는 당당히 구원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롭고 산’ (히10:20) 생명의 길이 열려진 셈입니다. 온 인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도말 되기에 족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졌습니다(시103:12). 속죄의 공효적 능력의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속죄의 적용과 범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위한 속죄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를 위해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담당해야만 하셨느냐의 관한 내용 말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결코 전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속죄의 공효는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원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적 능력이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적용의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 들어온 자들을 위해서만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은 유효하게 미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란 말인가요. 바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들입니다. ‘남은자’(사10:20-22, 롬11:4-5)들 말입니다. 성경은 이사실을 다양한 표현과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마1:21입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천사의 고지(告知)를 인용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하니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의 특성상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나시기 전에 이미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역적 측면을 확인하게 되는 데, 이는 다름 아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일’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구약제사의 제물인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모든 인류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만을 담당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실 것임을 지적합니다. 자기 백성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온 인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백성 곧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조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예수님께만 속한 당신의 특별한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죄사역을 위해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저들의 대속물로 오셨다는 사실의 증언입니다.
눅19:10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해서 그 분의 성육신 사건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에로 부르신 후에 직접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구일까요. 온 세상 만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만민 중에 일부를 가리킵니다. 요6:37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니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제한적 의미로 당신의 백성 곧 세상 가운데 잃어버린 특별한 백성이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 앞으로 나온다는 지적입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가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습니다(요10:1-6). 모두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만이 나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단의 양무리가 따로 있다는 �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