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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 Ⅳ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 Ⅳ  
영혼을 살리는 설교자 14
  
 2009년 06월 15일 (월) 00:45:36
 권영삼  032kwon@naver.com
  
칼빈의 저서를 살펴보면 자주 마주치는 단어가 ‘가르침’이다. 칼빈은 ‘가르침’을 ‘설교’와 동의어로 여기고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 선포(Kerygma)와 가르침(Didache)의 엄격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는 칼빈이 설교자를 바라본 시대적 정황이 16세기 유럽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때의 청중은 대부분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설교자의 소임은 단순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재교육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 행해지든지 본질적으로 가르침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설교자의 부담은 무엇인가? ‘가르침’ 보다는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쪽에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이로 인해 그 가치가 얼마나 많이 희석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칼빈의 설교관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설교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설교’에 대한 인식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논의는, 성찬 논쟁과 같이 루터와 츠빙글리가 양극단을 달렸다. 칼빈은 중간 입장에 있으면서 두 견해와 관련은 있지만 균형 잡힌 독특한 견해를 선보인다.
영적 광신자들은 열렬하게 말씀과 성례와 관계없이 임한다고 선언했다. 반면에, 루터는 “성령은 오직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만 임한다”고 가르쳤다.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생각한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 로마교회의 근본 오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칼빈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주도권을 두었다. 설교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설교자가 성경에서 발견한 복음을 선포할 때 그의 말은 하나님 말씀이 된다.
츠빙글리파는 중도적인 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광신주의자들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칼빈은 설교자의 분명한 정체성과 더불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설교관은 무엇일까?
성경 주해와 해석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지혜 앞에 잠잠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새로운 것을 선포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기로 하신 비밀을 설교자가 그의 말씀에서 깨달으며, 설교자가 깨닫는 것은 우리와 관계가 있거나 우리를 유익하게 할 것으로 예견한 모든 것”(『기독교 강요』Ⅲ. 21, 1)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면, 설교는 성경을 해명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직 이 해명을 통해서만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이에 따라 칼빈은 설교자는 설교에서 성경본문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청중들은 다만,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정성구, “칼빈의 설교 연구”,『신학지남』, 통권 제183호, p.57). 칼빈은 그 누구보다 성경 본래의 의미를 찾아, 간결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한 설교자였다.
하나님의 임재
칼빈의 설교관은 설교가 하나님 임재의 표징임을 보여준다. 칼빈 설교에서는 특기할 만한 것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성경 말씀이 설교되는 곳이다.
둘째,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엄선된 수사학적 도구를 차용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가지고 청중 편에서 일깨워 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설교가 하나님 임재 앞에서의 행위임을 의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설교란 ‘신적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
칼빈에게 설교란 ‘그리스도에게 듣는다’는 확신이다. 설교란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으로 행해진다는 인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교회의 ‘유일한 선생’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는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야 한다(『기독교 강요』, Ⅳ. 8. 1).
칼빈에게 설교는, 무엇보다 성도의 마음속에 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이곳(설교)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곳에 두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사탄이 주인 노릇을 함으로써 타락했다. 이에 따라 죄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형시켜 주심으로써 복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복음으로 반역자에서 하늘나라 시민으로 바꿔 놓으신 것이다. 칼빈은 복음이 설교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지배의 세력 아래에 두기 위함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설교는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주장하는 것이다.
구원과 심판의 이중 음성
칼빈에 따르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Duplex)가 있어야 한다.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다.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怒聲)이다. 칼빈은 이사야 55:11 주석에서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 데 효과적이라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구약성경주석』이사야Ⅳ, p.177).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증거할 때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고전 2:15-16).
실제로 칼빈은 수많은 비난과 반대자들을 극복해야 했다. 베자(Beza)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네바 사람 중 어떤 이는 자신이 기르는 개를 ‘칼빈’이라고 부름으로써 개혁자에 대한 경멸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혹자는 칼빈(Calvin)의 이름을 줄여 가인(Cain)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리고 적잖은 사람들이 칼빈에 대한 증오심을 핑계 삼아 성찬 참여를 중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칼빈은 “선하고 진실된 목자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전하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고 주장했다(Stauffer, Calvin et Sermon, p.71-78).
성령의 능력의 현현
칼빈은 성령의 역사를 제외한 설교는 사람의 말잔치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설교자 자신뿐 아니라 청중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을 성령의 감화와 조명 그리고 효과적인 간섭과 역사하심으로 보았다. 결코 설교자의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 아님을 확실히 했다. 칼빈은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청중이 설교를 믿음으로 받을 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약속된 구원을 받는다고 보았다. 말씀이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한다는 것이다(살전 2:13). 칼빈에게 있어 설교는 기계적으로 효력을 발(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 효력을 발(發)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어떤 설교도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는 성령의 내적 증거란 복음을 깨닫도록 마음에 빛을 비추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하지만, 죄로 어두워져서 무지하고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다. 성령은 닫힌 귀를 뚫어서 말씀을 듣게 하시고, 마음을 조명하여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성령은 믿음을 일으켜서 말씀의 신적 기원을 믿게 하시고, 그 말씀을 인정하고 순종하게 하신다(Parker, Calvin's Preaching, p.72). 칼빈은 회심의 역사, 구속과 영생의 기쁨도 성령의 권능의 결과라고 말했다. 이렇게 칼빈은 성령의 감동을 설교의 효력에 결정적 요인으로 말했다.
효력 있는 은혜의 수단
칼빈은 설교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크게 느꼈다. 이 때문에, 비록 말씀이 연약한 인간에 의해 나왔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은 항상 명령과 약속 이행으로서의 전능한 힘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증거자의 입술을 통하여 용서를 베푸실 때,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 자는 진실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으며 이는 선포된 말씀이 효력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효력 있는 말씀의 능력이 칼빈이 말하는 설교관이다.
칼빈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경, 특히 인간 구원을 위해 주신 은총의 선물로서의 성경관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성례전의 신비와 동일한 신비
칼빈은 성례전에서 주님의 은총이 임하듯,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고 보았다. 성례전의 떡과 포도즙은 객관적 실체다. 그것은 떡과 포도즙 그대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님이 약속하신 실재(예수님의 피와 살)를 먹게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에게 효력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성례에 참예하는 자들이 설교를 듣는 청중이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고 했다. 칼빈은 성례와 설교가 기록된 말씀에 의존해야 함과 동시에, 둘 다 성령의 은혜로운 임재로 채워질 때에만 실재적인 은혜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중심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보다 26살 어린 칼빈은 성경 자체의 해석자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설교에 있어서는 다르다. 루터는 주로 구원이라는 이슈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칭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 초점을 맞추었다.
칼빈의 설교는 항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섭리를 확신하는 가운데 전달되었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위한 권위요 동기일 뿐 아니라, 모든 설교의 자원과 대상이다. 모든 설교의 중심적인 요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삼위적인 충만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다. 그는 신명(神名)을 칭할 때 ‘하나님’이라는 포괄적인 칭호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였다.
이에 비해 루터는 매우 의도적으로 성경을 강해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았다. 루터가 그리스도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설교한 반면, 칼빈은 성삼위 구속주 하나님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설교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칼빈은 복음을 제시할 때 하나님 중심적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칼빈은 교회를 중심에 삼고 있는 로마교회 체계와 사람을 중심으로 삼는 자유사상가들의 철학을 배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성삼위의 제2격 위나 제3격 위에만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려는 종파들의 잘못된 경향을 논박할 의도도 갖고 있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든 영광스러운 충만함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은 모든 설교안의 근원이요 꽃이었다.
 
<교회와 신앙>
[출처]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 Ⅳ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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