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의 '삼위일체'에 대한 고찰
Calvin의 '삼위일체'에 대한 고찰
윤석주 전도사
1. 서론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러한 교리인가? 아니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그러한 교리인가? 단순히 목사가 되기 전에 신학교에서 배우고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배우기는 하지만 그 실제적인 필요성에 대해서는 큰 의의를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이후로 논의되고 있는 것임을 감안 할 때 그 중요성은 커질 것이다.1)
본 연구에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러면 어떻게 이해할 때 바르게 이해하는 것인지를 '칼빈의 삼위일체'를 통해서 살펴보고 그의 삼위일체 교리의 특징과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어떻게 주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를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
2. 본론
1) 바른 교리의 중요성
바른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헌사와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죽음과 바꾸기를 주저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교리(헌사)
칼빈이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에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는 목적에 대해서 잘 언급이 되어 있다. 기독교 강요를 왕에게 드리려고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그는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기술하여, 종교에 열심 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참된 경건의 생활을 하는데는 열심으로만 되어지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원리가 있어야 함을 발견한다. 그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이 주리고 목마른 듯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적은 지식마저도 바로 터득한 자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모하는 열심에는 바른 지식이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사악한 자들과 사악한 교리들이 득세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당시의 상황을 "어떤 사악(邪惡)한 자들의 광포가 극도에 달하여 …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곳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만큼 교회 교리가 건전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 인용문은 칼빈이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였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현재 불과 검으로 나라를 소란하게 하고 있는 그 광인(狂人)들에게 광적인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 교리의 성질이 어떤 것임을 폐하께서 알게 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이 교리는 마땅히 투옥과 추방, 몰수와 화형의 처벌을 받아야 하며, 육지에서나 바다에서 완전히 뿌리째 없어져야 한다고 하나, 나는 이 교리의 개요를 고백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아무런 변명도 듣지 않고 이 교리에 대하여 무참한 선고를 내리시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처사이며, 따라서 이 교리를 반역과 악행으로 몰아 부당하게 비난하시는 것은 기만인 줄로 압니다.(당시 왕에게까지 강한 어조로 그의 교리를 변호-발췌자)… 이제 옹호의 보루는 이 교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리로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2)
(2)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바른 교리(헌사)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교리가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신학교에서 점수를 얻기 위해서 배우는 그러한 차원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칼빈은 당시 왕이 이 교리의 잘잘못을 판단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지상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리가 그 존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우리들 가운데 잘 보존될 수 있을까 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 교리는 우리(당시 개혁자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교리는 세계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솟아나야 하며, 일체의 세상의 권세가 정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3) 바른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헌사)
칼빈은 이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강하게 질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칼빈의 표현을 보면 "사악한 자들의 광포", "광인들", "잔인하고 교활", "바리새인들", "맹목적인 신앙으로 교회의 판단에 따르는 자들"과 같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입증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그들의 무자비함을 지적한다.
저들이 "그들의 신은 배요"(빌3;19), 저들의 부엌을 종교로 삼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들이 없으면 그들은 벌써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일 수도 없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사치스러운 음식으로 저들을 배불리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마른 빵 껍질을 씹어 먹고 있으나, 모든 사람은 이러한 연료가 없어 식어 버린, 마침내는 완전히 얼어붙은 남비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까지 분내며 반대자들과 싸우는 칼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바른 교리에 대한 칼빈의 표현이 과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 바른 교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너무 무지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는 모두 다 바른 교리에 세워져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4) 삼위일체론은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교리(Inst)4)
이단자들이 "위"라는 말을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칼빈은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라고 한다. 이를 반대하는 반대자들은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 하는 용어를 비난하는 자들이라 한다.
2) 기독교 강요(1559)를 통해 본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특징
칼빈이 삼위일체를 논함에 있어서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기독교 강요 1권 13장의 제목을 통해서 발견한다. 김영규 교수는 이 제목(라틴어를 직접 번역 "성경에서 창조 자체로부터 자체 안에 세 위격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한 본체를 알려 준다는 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마지막 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5) 사도신경의 첫 부분의 주석 안에 종속적으로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논한다면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칼빈은 그런 구조에서 벗어나서 창조자 하나님, 구주 하나님을 소개하는 구조로 바꾸면서, 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삼위일체의 내용을 포함하는 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 2권은 기독론이고 제 3권은 성령론이라고 이해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구주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이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제 3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구주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얻는) 양식(modus)에 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의 1559년판 기독교 강요는 삼위일체론을 논함에 있어서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도록 구조 자체에서 특별하게 신경을 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은 '창조 자체로부터'(시작하여) 하나님의 한 본체를 알려준다는 표현에 있는데, 그 표현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본질이 그의 모든 사역에서도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6)
그러면 좀 더 자세히 1559년판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칼빈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자.
(1) (성경에서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다.
칼빈에 의하면 신앙은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강론도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만일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면 신(神) 또한 마찬가지로 여럿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쉽게 성립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고한 원리이기 때문에,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따라서 칼빈은 아리우스파가7) 성자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체를 성자에게 배제시킨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위로 간주하고, 마케도니우스파8) 역시 영(靈)을 다만 인간에게 부어진 은혜의 은사로 이해하려고 하였던 것에 대해 '아리우스파의 광란'에 비유했다.
칼빈에게는 지혜, 총명, 진리, 용기, 주님께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지혜, 신중, 용기, 그리고 경건의 영이시다. 그리고 은혜의 분배에 따라서 그 자신은 나누어지지 않고, 오히려 아무리 그런 것들이 다양하게 나누어질지라도, 그는 하나요 동일하게 남아 있다고 사도는 주장을 빌었다(고전 12:11)9)
아리우스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는 척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이와 같은 교활함을 그 숨은 장소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us, 동일 본질)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10)
칼빈은 그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라고 하였다.
(2) (성경에서 창조 이래로) 본체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
칼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데 대하여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옛날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부적당했다고 소개한다. 삼위에 대한 부적당한 설명은 사악한 사람들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게 된다고 한다.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인정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에 대해서는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고 한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리가 아니다. …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요 5:32, 8:16)라고 말씀하셨다.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경이 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요 15:2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요 14:16)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때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되는 것을 암시하셨다.12)
그러나 삼위의 순서는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는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서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13)
또한 칼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이러한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가? 의문을 갖을 수 있으나 칼빈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빌어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어거스틴은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14)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삼위의 순서를 인정한다고하여 성부께서 본질을 결정하는 하나님으로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자들은 이단이 되었다. 우리는 성부께서 신성을 만드는 하나님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를 잘못 생각하면 성부만이 유일한 "본질 수여 자"라고 한 세르베투스와 같은 자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3) 제네바 요리문답을 통해 본 칼빈의 삼위일체론
제네바 요리문답은 칼빈이 1537년 2월에 처음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신앙의 훈련과 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제네바 교회 개혁을 위하여 발표하였다. 이후 1542년에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문답형식으로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서"라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이 신앙문답서의 내용의 중심점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예배에 있다. 이것은 칼빈의 신앙의 요약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서 그는 제네바 교회의 아동들을 훈련한 것이다. 제네바 교회의 아동들에게까지 칼빈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얼만큼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지 그 본문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제네바 신앙문답서(1542)의 내용은 크게 4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신앙에 관한 조항(문 1-130)이고, 둘째는 율법에 관하여(문 131-232), 셋째는 기도에 관하여(문233-295), 넷째는 성례전에 관하여(문 296-373)이다. 그 중 신앙에 관한 조항 중 문 19와 문 20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 문 19.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는데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 답. 유일한 신적 본질 안에 처음이며 근원이시며, 혹은 만물의 제일 원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다음에는 영원한 지혜이신 그의 아들을, 또 일체의 피조물 위에 편재하시고, 자신 안에 있는 덕과 능력이신 성령을 고찰해야 되기 때문이다.
>> 문 20. 그러면 하나의 같은 신성 안에 우리는 이 세 가지 품격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답. 그렇다. 15)
문 19에서는 분명하게 한 분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삼위 하나님과 그 순서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문 20에서는 구별되지만 나눠지지 않는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묻고 있다. 이 두 질문과 답에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많은 이단들을 대항하기에 충분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처럼 분명하게 신앙고백문으로 삼위일체를 언급하거나 채택하고 있는 교단이 적다.16)
4) 주석을 통해 본 칼빈의 삼위일체론
주석을 통해서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말한 그리고 제네바 요리문답에서 말한 삼위일체 교리를 실제적으로 어떻게 성경에서 적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듣고 있는 설교에서는 이 본문들이 어떻게 설교되어지고 있는지도 상기해 보자.
(1) 창 1:1-2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칼빈은 창 1:1절 주석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삼위의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모세가 복수 명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행사하신 권능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엘로힘을 어떤 이들은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이 단어 속에서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억지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사벨리우스17)의 오류에 미혹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나중에 '엘로힘이 말씀하셨으며 엘로힘의 신이 수면에 운행했다'고 덧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 말속에 삼위가 암시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삼위 사이에는 어떠한 구별도 없게 되어 결국 성자가 스스로 났으며 성령도 성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다고 결론짓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각 위에 대해 불합리한 해석을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성경을 어떻게 분명하게 해석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단순히 교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그의 교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창 32:28-29
"28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위 구절은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러 가기 전 천사와 씨름한 유명한 장면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를 많이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들었는지, 들었다면 어떤 내용으로 들었는지 의문이다.
야곱은 28절에서 그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모호하고 얕게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야곱은 더 높이 올라가기를 소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주 많이 나타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휘장과 은폐물 속에 가려진 것이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 수가 없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의 소원이 경건했다고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아직 완전한 계시의 시기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를 허용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이전에 이미 중보자로서 사역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반드시 성육신 하신 이후에 사역하는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는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던 것이 아닌 것이다. 시대에 규정된 영역 안에서 제한된 것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구약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하지 않았다거나, 구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형으로만 알 수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구약을 단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교의학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코케이우스 성경신학의 잘못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시간상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과 맺게 된 은혜 언약 안에서 참으로 인간은 실행하는 자이거나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처음 그의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처음 맺으셨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은 우리와 결코 다른 방식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믿음도 하나요, 중보자도 하나이며 구원의 길도 같고 은혜 언약도 같다.
(3) 요 1:1-3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칼빈은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선언하고 있다'고 한다.
칼빈은 여기에서, ①영원한 말씀이 등장한 것을 창조할 때 나타남으로써 비롯됐다고 상상하는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논박한다. 복음서의 저자는 여기서 '말씀'에 시간적인 시작을 부여하지 않고 그가 태초부터 계셨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②아리안주의자들이 말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나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도 논박한다. 복음서 저자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함으로써 아리안주의자들의 주장이 근거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성경 구절을 바르게 해석함으로 이단들을 대항하는 바른 근거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저들의 억지 주장을 제거하는 것으로는 이처럼 분명한 성경 구절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강요에서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18)고 했다. 이단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도 항상 성경 구절을 갖고 있지만 저들은 각 구절마다 그릇된 해석을 함으로써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항상 성경이 말하는 것을 넘어서 생각하기를 거절하였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호기심을 갖는 것조차도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어리석은 자들은 항상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감을 갖고 추측하거나 넘겨 집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4) 요 14:16-17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말씀을 주석 하면서 칼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잘 규명해 주고 있다. 한 하나님이시면서도 구분되는 점을 잘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그는 성령을 가리켜 '아버지의 선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의 기도를 통해서 얻을 선물이었다. 다른 곳에 보면 그가 손수 성령을 주시 마고 약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성령의 은혜를 받는가 하면, 그는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은혜를 직접 베푸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말씀은 참되고 적절한 표현이다."19)
그럼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있지 않는가 하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계속적인 보호자이지만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방법을 이용하지는 않고 있다. 그가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그는 자신을 그들의 보호자로 공공연하게 드러내셨다. 이제 그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20)
이런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만 있어도 오늘날 오순절 성령운동과 그 견해가 다름을 짐작할 수 있다. 저들은 성부와 성자를 제외한 오직 성령의 사역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사역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분리하지 않는 개혁주의 신학과는 달리 마치 오늘날은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고 성령님만이 우리를 보호하는 자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이 지나쳐 신비주의의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5) 행 2:1-4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우리가 흔히 설교를 듣는 형태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 칼빈이 주석하고 있는 성령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다를까? 우리는 흔히 성령님의 오순절 역사가 오늘에도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것처럼 들어오지는 않았는가? 마치 오늘날은 성령님의 시대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설교를 듣다 보면 왠지 기도하면서 성령님을 더 많이 찾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실제적으로 이런 가르침을 받고 와서 그의 기도 내용 중 성령님을 얼마나 많이 찾는지 모른다. 그러나 칼빈은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를 성령님의 단독적인 사역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어서도 삼위일체로 설명하는 구조를 살펴 볼 수 있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는 우연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되어졌음을 말해 준다. 갈라진 혀는 이사야 19:18절에서21) 이미 예언하였음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의 성취로 칼빈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갈라진 불의 혀가 나타난 것에 대해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대하는 경우가 있으나 칼빈은 오히려 이렇게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 주신 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큰 유익이 아니었고 인간의 감각이 둔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제자들을 육체적 감각에 의하여 격동시키기 위해서는 그 은사는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를 인식함에 있어서 너무도 둔감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 헛되이 상실되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된 성령이 오시게 되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는 일에 도움이 되는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갈라진 불의 혀가 나타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보다도 차라리 우리들과 전체 교회를 위해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이익에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표적을 더하심이 없이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그들에게 공급해 주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처럼 갑자기 변화를 받은 것은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자기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표적은 오늘 우리가 그것은 우리의 유익이 된다고 느끼는 것처럼 모든 시대에 유익이 되도록 결정지어져 있는 것이다.…갈라진 혀는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이 모든 사람으로 가나안 방언을 말하게 하였다(사 19:18). 그들이 어떤 방언으로 말하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한 입과 한 영으로 하늘에 계신 같은 아버지를 불렀기 때문이다(롬15:6). 이 일이 우리를 위해 된 것인데, 비단 우리가 그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만이 아니요, 복음이란 것이 우연하게 우리에게 비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되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말했다."
같은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의 구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의 미리 계획하심과 성자 예수님의 약속하심으로 성령님께서 역사 하시는 과정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시각으로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해석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것이다. 워필드는 참으로 값진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도구가, 크나큰 잘못을 조장해 내는 도구로 바뀔 때, 가장 좋은 것이 가장 나쁜 것이 되는 수가 많다고 말하였다.22)
3.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바른 교리의 중요성과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았고, 또한 제네바 요리문답과 칼빈의 주석을 통해서 그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았다.
바른 교리는 신학교에서 잠시 배우고 지나가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진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이 우리 가운데 잘 보존되는 것으로 반대자들과 끝까지 싸워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 심지어 죽기까지 지켰고 그러다가 자신은 죽을 지라도 바른 교리는 세계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솟아 남아야 할 만큼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 23)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으로는 성경에서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다는 것과 본체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소개하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여기서 이단이 나오는 것을 칼빈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던 것이다.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 또한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것은 우상과 좀더 정확히 구별하기 위해 너무나 중요한 교리이다. 칼빈은 이 교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홀로 한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이 떠돌 뿐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24) 삼위 하나님을 말할 때는 순서가 있음을 안다. 그렇다고 그 순서가 능력의 차이나 서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성부를 우월하게 두는 종속이론이나 단일신론에 빠지기 쉽다.
제네바 요리문답을 통해서 칼빈이 아동들에게까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얼마나 분명하게 가르치려고 하였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마만큼 이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학교에서조차도 너무나 어렵고 난해하다고 치부하여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25)
칼빈 주석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 본문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해석해야 할지를 살펴보았다.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을 갖고 통일성 있게 해석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면서도 삼위일체 교리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칼빈은 그의 주석을 집필해 나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기독교 강요에서 언급하는 구절을 주석에서 찾아 볼 때 그가 어떤 의미로 기독교 강요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 의미가 분명해 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칼빈은 어느 한 구절에 메이지도 않고 소홀히 하지도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선까지만 알려고 했으며 그 이상이나 그 이하는 더 알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그의 삼위일체론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끝으로, 삼위일체 교리는 단순히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삼위일체의 개념이 분명하게 서 있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이단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이단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잘못된 삼위일체론의 이해는 잘못된 성경해석을 갖고 오게 되고 그것은 반드시 잘못된 신앙생활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의 바른 이해는 교리를 넘어 바른 신앙생활의 필수 요소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미 주 >
1) 터툴리안이 '삼위일체'(Trinity)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 교리를 공식적으로 제시했다(루이스뻘코프, 조직신학 상', 권수경?이상원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p.279.)
2) 죤 칼빈, 기독교강요上, 김종흠?신복윤 ?이종성?한철하 공역, 생명의말씀사, 1990, pp.41-43.
3) Ibid., pp.48-49.
4) Inst Ⅰ. ⅹⅲ. 3 에서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주는 말이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임을 주장한다. 칼빈은 이 표현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함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것이라면 반대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한다.
5)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 강요' 강의안 참조, 1999.
6) Ibid.
7) 루이스 뻘코프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를 성부의 제1 피조물로, 성령을 성자의 제1 피조물로 묘사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부와 함께 성자와 성령의 동질성(consubstanlity)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희생되었으며, 신성의 세 위격들은 지위에 있어서 달라지게 되었다" (루이스뻘코프 op. cit.)
8) Macedonius(360년경 사망)의 추종자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반 아리안주의 감독이었는데 성령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부인했다. (Inst. Ⅰ. ⅹⅲ. 16 각주36)
9)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10) Inst. Ⅰ. ⅹⅲ. 4.
11) 김영재 교수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릇된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고 있다. 우리 역시 성도들에게 삼위일체에 대해 잘 가르쳐 보고 싶은 마음에 이런 유혹을 쉽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시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은 신학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철학적인 막연한 신관이나 다신론적인 혹은 범신론적인 신관이나 다른 종교적인 신간으로 성경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물질 세계를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당신이 지으신 자연계의 유추를 통한 설명으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흔히 사용하는 ①태양의 유추 역시 그러하다. 그러한 설명은 약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 같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의문을 일으키게 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만들뿐이다. 즉, 단일신론적인 이해로 오도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②삼각형을 그려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안 되는 말이다. 그런 설명은 불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본체의 오묘한 것을 도식화함으로써 쉽게 이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비신학적인 발상이다.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 하는 의문을 그대로 받아, 그 원리를 수적으로 혹은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설명이 옳게 되지를 않는다." (김영재, ???의 한국교회의 삼위일체론, ???. pp.374-375. 복사 자료를 참조하여 출처가 불분명함)
12) Inst. Ⅰ. ⅹⅲ. 17.
13) Inst. Ⅰ. ⅹⅲ. 17.
14) Inst. Ⅰ. ⅹⅲ. 19.
15) 이장식편역, 「기독교신조사」컨콜디아사, 1987. p. 146.
16) df) 김영재 op.cit. pp.359-365.
17) 사벨리우스(Sabellius, 250년경이 전성기)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데 불과하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우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하였다.(inst Ⅰ. ⅩⅢ. 4. )
18) 죤 칼빈, op.cit., p.206.
19) comm, 요한복음Ⅰ, p. 493.
20) Ibid.
21) 사 19:18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
22) B.B. 워필드, 「워필드 명설교」,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p. 14.
23) 칼빈은 그의 헌사에서 이 교리를 위해 싸우다 고난을 당한 개혁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쇠사슬에 결박을 당하고, 어떤 이들은 채찍으로 맞고, 어떤 이들은 웃음거리로 질질 끌려 다니고, 어떤 이들은 인권을 박탈당하고, 어떤 이들은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를 피하여 달아난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가 극단의 곤경에 빠져 무시무시한 증오로 저주를 받으며, 중상 모략으로 상처를 입고 최대의 모욕적인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헌사에서)
24) Inst. Ⅰ. ⅩⅢ. 2.
25) 김영재 교수는 "삼위일체 교리를 논함에 있어서 '난해하다'든지 '신비하다'는 말을 미리부터 말하거나 혹은 결론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삼위일체 교리를 더 어렵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기독교의 교리가 난해하다면 다 난해하다. 하나님의 창조, 예정과 섭리, 그리스도의 성육, 십자가의 죽으심과 구속 등 그 어느 교리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같이 난해하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 하면서는 특별히 난해함을 상기시키거나 경고하는데, 그것은 그 교리가 다른 교리 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러한 김영재 교수의 말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분명하고 충분하게 삼위일체론을 가르쳐 주는데 이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없다.(김영재, op.cit. pp.367-368.)
<Keeper77 말씀독서실,http://cafe.daum.net/keeper77> 펌글
윤석주 전도사
1. 서론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러한 교리인가? 아니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그러한 교리인가? 단순히 목사가 되기 전에 신학교에서 배우고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배우기는 하지만 그 실제적인 필요성에 대해서는 큰 의의를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이후로 논의되고 있는 것임을 감안 할 때 그 중요성은 커질 것이다.1)
본 연구에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러면 어떻게 이해할 때 바르게 이해하는 것인지를 '칼빈의 삼위일체'를 통해서 살펴보고 그의 삼위일체 교리의 특징과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어떻게 주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를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
2. 본론
1) 바른 교리의 중요성
바른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헌사와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죽음과 바꾸기를 주저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교리(헌사)
칼빈이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에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는 목적에 대해서 잘 언급이 되어 있다. 기독교 강요를 왕에게 드리려고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그는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기술하여, 종교에 열심 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참된 경건의 생활을 하는데는 열심으로만 되어지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원리가 있어야 함을 발견한다. 그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이 주리고 목마른 듯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적은 지식마저도 바로 터득한 자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모하는 열심에는 바른 지식이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사악한 자들과 사악한 교리들이 득세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당시의 상황을 "어떤 사악(邪惡)한 자들의 광포가 극도에 달하여 …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곳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만큼 교회 교리가 건전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 인용문은 칼빈이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였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현재 불과 검으로 나라를 소란하게 하고 있는 그 광인(狂人)들에게 광적인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 교리의 성질이 어떤 것임을 폐하께서 알게 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이 교리는 마땅히 투옥과 추방, 몰수와 화형의 처벌을 받아야 하며, 육지에서나 바다에서 완전히 뿌리째 없어져야 한다고 하나, 나는 이 교리의 개요를 고백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아무런 변명도 듣지 않고 이 교리에 대하여 무참한 선고를 내리시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처사이며, 따라서 이 교리를 반역과 악행으로 몰아 부당하게 비난하시는 것은 기만인 줄로 압니다.(당시 왕에게까지 강한 어조로 그의 교리를 변호-발췌자)… 이제 옹호의 보루는 이 교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리로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2)
(2)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바른 교리(헌사)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교리가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신학교에서 점수를 얻기 위해서 배우는 그러한 차원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칼빈은 당시 왕이 이 교리의 잘잘못을 판단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지상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리가 그 존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우리들 가운데 잘 보존될 수 있을까 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 교리는 우리(당시 개혁자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교리는 세계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솟아나야 하며, 일체의 세상의 권세가 정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3) 바른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헌사)
칼빈은 이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강하게 질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칼빈의 표현을 보면 "사악한 자들의 광포", "광인들", "잔인하고 교활", "바리새인들", "맹목적인 신앙으로 교회의 판단에 따르는 자들"과 같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입증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그들의 무자비함을 지적한다.
저들이 "그들의 신은 배요"(빌3;19), 저들의 부엌을 종교로 삼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들이 없으면 그들은 벌써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일 수도 없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사치스러운 음식으로 저들을 배불리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마른 빵 껍질을 씹어 먹고 있으나, 모든 사람은 이러한 연료가 없어 식어 버린, 마침내는 완전히 얼어붙은 남비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까지 분내며 반대자들과 싸우는 칼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바른 교리에 대한 칼빈의 표현이 과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 바른 교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너무 무지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는 모두 다 바른 교리에 세워져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4) 삼위일체론은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교리(Inst)4)
이단자들이 "위"라는 말을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칼빈은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라고 한다. 이를 반대하는 반대자들은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 하는 용어를 비난하는 자들이라 한다.
2) 기독교 강요(1559)를 통해 본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특징
칼빈이 삼위일체를 논함에 있어서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기독교 강요 1권 13장의 제목을 통해서 발견한다. 김영규 교수는 이 제목(라틴어를 직접 번역 "성경에서 창조 자체로부터 자체 안에 세 위격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한 본체를 알려 준다는 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마지막 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5) 사도신경의 첫 부분의 주석 안에 종속적으로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논한다면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칼빈은 그런 구조에서 벗어나서 창조자 하나님, 구주 하나님을 소개하는 구조로 바꾸면서, 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삼위일체의 내용을 포함하는 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 2권은 기독론이고 제 3권은 성령론이라고 이해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구주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이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제 3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구주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얻는) 양식(modus)에 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의 1559년판 기독교 강요는 삼위일체론을 논함에 있어서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도록 구조 자체에서 특별하게 신경을 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은 '창조 자체로부터'(시작하여) 하나님의 한 본체를 알려준다는 표현에 있는데, 그 표현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본질이 그의 모든 사역에서도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6)
그러면 좀 더 자세히 1559년판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칼빈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자.
(1) (성경에서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다.
칼빈에 의하면 신앙은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강론도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만일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면 신(神) 또한 마찬가지로 여럿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쉽게 성립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고한 원리이기 때문에,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따라서 칼빈은 아리우스파가7) 성자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체를 성자에게 배제시킨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위로 간주하고, 마케도니우스파8) 역시 영(靈)을 다만 인간에게 부어진 은혜의 은사로 이해하려고 하였던 것에 대해 '아리우스파의 광란'에 비유했다.
칼빈에게는 지혜, 총명, 진리, 용기, 주님께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지혜, 신중, 용기, 그리고 경건의 영이시다. 그리고 은혜의 분배에 따라서 그 자신은 나누어지지 않고, 오히려 아무리 그런 것들이 다양하게 나누어질지라도, 그는 하나요 동일하게 남아 있다고 사도는 주장을 빌었다(고전 12:11)9)
아리우스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는 척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이와 같은 교활함을 그 숨은 장소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us, 동일 본질)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10)
칼빈은 그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라고 하였다.
(2) (성경에서 창조 이래로) 본체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
칼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데 대하여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옛날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부적당했다고 소개한다. 삼위에 대한 부적당한 설명은 사악한 사람들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게 된다고 한다.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인정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에 대해서는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고 한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리가 아니다. …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요 5:32, 8:16)라고 말씀하셨다.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경이 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요 15:2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요 14:16)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때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되는 것을 암시하셨다.12)
그러나 삼위의 순서는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는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서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13)
또한 칼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이러한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가? 의문을 갖을 수 있으나 칼빈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빌어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어거스틴은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14)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삼위의 순서를 인정한다고하여 성부께서 본질을 결정하는 하나님으로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자들은 이단이 되었다. 우리는 성부께서 신성을 만드는 하나님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를 잘못 생각하면 성부만이 유일한 "본질 수여 자"라고 한 세르베투스와 같은 자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3) 제네바 요리문답을 통해 본 칼빈의 삼위일체론
제네바 요리문답은 칼빈이 1537년 2월에 처음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신앙의 훈련과 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제네바 교회 개혁을 위하여 발표하였다. 이후 1542년에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문답형식으로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서"라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이 신앙문답서의 내용의 중심점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예배에 있다. 이것은 칼빈의 신앙의 요약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서 그는 제네바 교회의 아동들을 훈련한 것이다. 제네바 교회의 아동들에게까지 칼빈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얼만큼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지 그 본문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제네바 신앙문답서(1542)의 내용은 크게 4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신앙에 관한 조항(문 1-130)이고, 둘째는 율법에 관하여(문 131-232), 셋째는 기도에 관하여(문233-295), 넷째는 성례전에 관하여(문 296-373)이다. 그 중 신앙에 관한 조항 중 문 19와 문 20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 문 19.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는데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 답. 유일한 신적 본질 안에 처음이며 근원이시며, 혹은 만물의 제일 원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다음에는 영원한 지혜이신 그의 아들을, 또 일체의 피조물 위에 편재하시고, 자신 안에 있는 덕과 능력이신 성령을 고찰해야 되기 때문이다.
>> 문 20. 그러면 하나의 같은 신성 안에 우리는 이 세 가지 품격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답. 그렇다. 15)
문 19에서는 분명하게 한 분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삼위 하나님과 그 순서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문 20에서는 구별되지만 나눠지지 않는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묻고 있다. 이 두 질문과 답에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많은 이단들을 대항하기에 충분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처럼 분명하게 신앙고백문으로 삼위일체를 언급하거나 채택하고 있는 교단이 적다.16)
4) 주석을 통해 본 칼빈의 삼위일체론
주석을 통해서는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말한 그리고 제네바 요리문답에서 말한 삼위일체 교리를 실제적으로 어떻게 성경에서 적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듣고 있는 설교에서는 이 본문들이 어떻게 설교되어지고 있는지도 상기해 보자.
(1) 창 1:1-2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칼빈은 창 1:1절 주석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삼위의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모세가 복수 명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행사하신 권능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엘로힘을 어떤 이들은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이 단어 속에서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억지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사벨리우스17)의 오류에 미혹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나중에 '엘로힘이 말씀하셨으며 엘로힘의 신이 수면에 운행했다'고 덧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 말속에 삼위가 암시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삼위 사이에는 어떠한 구별도 없게 되어 결국 성자가 스스로 났으며 성령도 성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다고 결론짓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각 위에 대해 불합리한 해석을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성경을 어떻게 분명하게 해석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단순히 교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그의 교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창 32:28-29
"28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위 구절은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러 가기 전 천사와 씨름한 유명한 장면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를 많이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들었는지, 들었다면 어떤 내용으로 들었는지 의문이다.
야곱은 28절에서 그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모호하고 얕게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야곱은 더 높이 올라가기를 소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주 많이 나타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휘장과 은폐물 속에 가려진 것이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 수가 없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의 소원이 경건했다고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아직 완전한 계시의 시기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를 허용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이전에 이미 중보자로서 사역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반드시 성육신 하신 이후에 사역하는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는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던 것이 아닌 것이다. 시대에 규정된 영역 안에서 제한된 것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구약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하지 않았다거나, 구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형으로만 알 수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구약을 단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교의학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코케이우스 성경신학의 잘못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시간상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과 맺게 된 은혜 언약 안에서 참으로 인간은 실행하는 자이거나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처음 그의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처음 맺으셨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은 우리와 결코 다른 방식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믿음도 하나요, 중보자도 하나이며 구원의 길도 같고 은혜 언약도 같다.
(3) 요 1:1-3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칼빈은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선언하고 있다'고 한다.
칼빈은 여기에서, ①영원한 말씀이 등장한 것을 창조할 때 나타남으로써 비롯됐다고 상상하는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논박한다. 복음서의 저자는 여기서 '말씀'에 시간적인 시작을 부여하지 않고 그가 태초부터 계셨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②아리안주의자들이 말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나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도 논박한다. 복음서 저자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함으로써 아리안주의자들의 주장이 근거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성경 구절을 바르게 해석함으로 이단들을 대항하는 바른 근거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저들의 억지 주장을 제거하는 것으로는 이처럼 분명한 성경 구절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강요에서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18)고 했다. 이단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도 항상 성경 구절을 갖고 있지만 저들은 각 구절마다 그릇된 해석을 함으로써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항상 성경이 말하는 것을 넘어서 생각하기를 거절하였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호기심을 갖는 것조차도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어리석은 자들은 항상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감을 갖고 추측하거나 넘겨 집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4) 요 14:16-17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말씀을 주석 하면서 칼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잘 규명해 주고 있다. 한 하나님이시면서도 구분되는 점을 잘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그는 성령을 가리켜 '아버지의 선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의 기도를 통해서 얻을 선물이었다. 다른 곳에 보면 그가 손수 성령을 주시 마고 약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성령의 은혜를 받는가 하면, 그는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은혜를 직접 베푸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말씀은 참되고 적절한 표현이다."19)
그럼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있지 않는가 하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계속적인 보호자이지만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방법을 이용하지는 않고 있다. 그가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그는 자신을 그들의 보호자로 공공연하게 드러내셨다. 이제 그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20)
이런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만 있어도 오늘날 오순절 성령운동과 그 견해가 다름을 짐작할 수 있다. 저들은 성부와 성자를 제외한 오직 성령의 사역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사역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분리하지 않는 개혁주의 신학과는 달리 마치 오늘날은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고 성령님만이 우리를 보호하는 자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이 지나쳐 신비주의의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5) 행 2:1-4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우리가 흔히 설교를 듣는 형태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 칼빈이 주석하고 있는 성령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다를까? 우리는 흔히 성령님의 오순절 역사가 오늘에도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것처럼 들어오지는 않았는가? 마치 오늘날은 성령님의 시대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설교를 듣다 보면 왠지 기도하면서 성령님을 더 많이 찾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실제적으로 이런 가르침을 받고 와서 그의 기도 내용 중 성령님을 얼마나 많이 찾는지 모른다. 그러나 칼빈은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를 성령님의 단독적인 사역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어서도 삼위일체로 설명하는 구조를 살펴 볼 수 있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는 우연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되어졌음을 말해 준다. 갈라진 혀는 이사야 19:18절에서21) 이미 예언하였음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의 성취로 칼빈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갈라진 불의 혀가 나타난 것에 대해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대하는 경우가 있으나 칼빈은 오히려 이렇게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 주신 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큰 유익이 아니었고 인간의 감각이 둔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제자들을 육체적 감각에 의하여 격동시키기 위해서는 그 은사는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를 인식함에 있어서 너무도 둔감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 헛되이 상실되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된 성령이 오시게 되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는 일에 도움이 되는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갈라진 불의 혀가 나타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보다도 차라리 우리들과 전체 교회를 위해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이익에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표적을 더하심이 없이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그들에게 공급해 주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처럼 갑자기 변화를 받은 것은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자기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표적은 오늘 우리가 그것은 우리의 유익이 된다고 느끼는 것처럼 모든 시대에 유익이 되도록 결정지어져 있는 것이다.…갈라진 혀는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이 모든 사람으로 가나안 방언을 말하게 하였다(사 19:18). 그들이 어떤 방언으로 말하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한 입과 한 영으로 하늘에 계신 같은 아버지를 불렀기 때문이다(롬15:6). 이 일이 우리를 위해 된 것인데, 비단 우리가 그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만이 아니요, 복음이란 것이 우연하게 우리에게 비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되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말했다."
같은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의 구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의 미리 계획하심과 성자 예수님의 약속하심으로 성령님께서 역사 하시는 과정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시각으로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해석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것이다. 워필드는 참으로 값진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도구가, 크나큰 잘못을 조장해 내는 도구로 바뀔 때, 가장 좋은 것이 가장 나쁜 것이 되는 수가 많다고 말하였다.22)
3.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바른 교리의 중요성과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았고, 또한 제네바 요리문답과 칼빈의 주석을 통해서 그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았다.
바른 교리는 신학교에서 잠시 배우고 지나가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진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이 우리 가운데 잘 보존되는 것으로 반대자들과 끝까지 싸워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 심지어 죽기까지 지켰고 그러다가 자신은 죽을 지라도 바른 교리는 세계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솟아 남아야 할 만큼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 23)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으로는 성경에서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다는 것과 본체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소개하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여기서 이단이 나오는 것을 칼빈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던 것이다.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 또한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것은 우상과 좀더 정확히 구별하기 위해 너무나 중요한 교리이다. 칼빈은 이 교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홀로 한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이 떠돌 뿐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24) 삼위 하나님을 말할 때는 순서가 있음을 안다. 그렇다고 그 순서가 능력의 차이나 서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성부를 우월하게 두는 종속이론이나 단일신론에 빠지기 쉽다.
제네바 요리문답을 통해서 칼빈이 아동들에게까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얼마나 분명하게 가르치려고 하였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마만큼 이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학교에서조차도 너무나 어렵고 난해하다고 치부하여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25)
칼빈 주석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 본문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해석해야 할지를 살펴보았다.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을 갖고 통일성 있게 해석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면서도 삼위일체 교리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칼빈은 그의 주석을 집필해 나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기독교 강요에서 언급하는 구절을 주석에서 찾아 볼 때 그가 어떤 의미로 기독교 강요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 의미가 분명해 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칼빈은 어느 한 구절에 메이지도 않고 소홀히 하지도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선까지만 알려고 했으며 그 이상이나 그 이하는 더 알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그의 삼위일체론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끝으로, 삼위일체 교리는 단순히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삼위일체의 개념이 분명하게 서 있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이단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이단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잘못된 삼위일체론의 이해는 잘못된 성경해석을 갖고 오게 되고 그것은 반드시 잘못된 신앙생활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의 바른 이해는 교리를 넘어 바른 신앙생활의 필수 요소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미 주 >
1) 터툴리안이 '삼위일체'(Trinity)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 교리를 공식적으로 제시했다(루이스뻘코프, 조직신학 상', 권수경?이상원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p.279.)
2) 죤 칼빈, 기독교강요上, 김종흠?신복윤 ?이종성?한철하 공역, 생명의말씀사, 1990, pp.41-43.
3) Ibid., pp.48-49.
4) Inst Ⅰ. ⅹⅲ. 3 에서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주는 말이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임을 주장한다. 칼빈은 이 표현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함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것이라면 반대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한다.
5)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 강요' 강의안 참조, 1999.
6) Ibid.
7) 루이스 뻘코프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를 성부의 제1 피조물로, 성령을 성자의 제1 피조물로 묘사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부와 함께 성자와 성령의 동질성(consubstanlity)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희생되었으며, 신성의 세 위격들은 지위에 있어서 달라지게 되었다" (루이스뻘코프 op. cit.)
8) Macedonius(360년경 사망)의 추종자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반 아리안주의 감독이었는데 성령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부인했다. (Inst. Ⅰ. ⅹⅲ. 16 각주36)
9)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10) Inst. Ⅰ. ⅹⅲ. 4.
11) 김영재 교수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릇된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고 있다. 우리 역시 성도들에게 삼위일체에 대해 잘 가르쳐 보고 싶은 마음에 이런 유혹을 쉽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시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은 신학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철학적인 막연한 신관이나 다신론적인 혹은 범신론적인 신관이나 다른 종교적인 신간으로 성경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물질 세계를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당신이 지으신 자연계의 유추를 통한 설명으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흔히 사용하는 ①태양의 유추 역시 그러하다. 그러한 설명은 약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 같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의문을 일으키게 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만들뿐이다. 즉, 단일신론적인 이해로 오도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②삼각형을 그려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안 되는 말이다. 그런 설명은 불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본체의 오묘한 것을 도식화함으로써 쉽게 이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비신학적인 발상이다.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 하는 의문을 그대로 받아, 그 원리를 수적으로 혹은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설명이 옳게 되지를 않는다." (김영재, ???의 한국교회의 삼위일체론, ???. pp.374-375. 복사 자료를 참조하여 출처가 불분명함)
12) Inst. Ⅰ. ⅹⅲ. 17.
13) Inst. Ⅰ. ⅹⅲ. 17.
14) Inst. Ⅰ. ⅹⅲ. 19.
15) 이장식편역, 「기독교신조사」컨콜디아사, 1987. p. 146.
16) df) 김영재 op.cit. pp.359-365.
17) 사벨리우스(Sabellius, 250년경이 전성기)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데 불과하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우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하였다.(inst Ⅰ. ⅩⅢ. 4. )
18) 죤 칼빈, op.cit., p.206.
19) comm, 요한복음Ⅰ, p. 493.
20) Ibid.
21) 사 19:18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
22) B.B. 워필드, 「워필드 명설교」,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p. 14.
23) 칼빈은 그의 헌사에서 이 교리를 위해 싸우다 고난을 당한 개혁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쇠사슬에 결박을 당하고, 어떤 이들은 채찍으로 맞고, 어떤 이들은 웃음거리로 질질 끌려 다니고, 어떤 이들은 인권을 박탈당하고, 어떤 이들은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를 피하여 달아난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가 극단의 곤경에 빠져 무시무시한 증오로 저주를 받으며, 중상 모략으로 상처를 입고 최대의 모욕적인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헌사에서)
24) Inst. Ⅰ. ⅩⅢ. 2.
25) 김영재 교수는 "삼위일체 교리를 논함에 있어서 '난해하다'든지 '신비하다'는 말을 미리부터 말하거나 혹은 결론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삼위일체 교리를 더 어렵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기독교의 교리가 난해하다면 다 난해하다. 하나님의 창조, 예정과 섭리, 그리스도의 성육, 십자가의 죽으심과 구속 등 그 어느 교리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같이 난해하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 하면서는 특별히 난해함을 상기시키거나 경고하는데, 그것은 그 교리가 다른 교리 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러한 김영재 교수의 말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분명하고 충분하게 삼위일체론을 가르쳐 주는데 이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없다.(김영재, op.cit. pp.367-368.)
<Keeper77 말씀독서실,http://cafe.daum.net/keeper77>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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