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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칼빈의 설교론1 목사와 설교

칼빈의 설교론1 목사와 설교
박건택 교수(총신대학교)
 
몇몇 개혁파 교회에서 목회사역의 성격에 대해 묻고 있는 이즘, 본 연구의 서두에서 칼빈에 있어서 설교란 목사의 근본적 의무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강조해도 무익하지 않겠다. 목사는 때로 “이제 더 이상 듣지 않는 말씀을 설교하기”1) 보다는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러가지 일들에 동분서주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다시 말해 목사는 “이제 더 이상 종교적 기분전환에 불과한 말씀들”2) 다는 그보다 더욱 좋게 여겨지는 행동주의에 끌릴 수 있다. 그럼에도 개혁주의적 전망 속에서 목사의 가장 시급한 역할이란 여전히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칼빈은 지칠줄 모르게 그런 말을 하면서, 설교라는 우선적 과업 앞에서 다른 어떤 일단의 목회적 노력들은 사라져야한다고 지적한다 :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하는 목사들은, 자신들에게 위임된 임무를 잘 수행하고자할 때, 헛된 일을 즐기는 여가를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을 수행하고자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허비하면서 여기 저기 기분전환이나 하며 돌아다닐 그런 여가를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3)
 
필수적인 기능적 임무(이 기능이 교회의 품안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그 기능은 교회를 “모든 이의 어머니”4)가 되게 한다)를 맡은, 사도들의 후계자( 왜냐하면 사도들처럼 목사도 복음을 충실하게 설교할 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가 때문)5)인 목사는 자신에게 위임된 직무를 자랑한다거나 뽐내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언제나 겸손을 보여야 한다.6) 그렇다고 이러한 겸손때문에 통렬한 책임감이나 혹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자가 탁월한 지위를 부여받았다고 하는 그런 확신감을 쫓아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칼반에게 있어서 설 교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대리하기 때문이다.7) “그(설교자)가 봉사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다.”8) 이와 같이 설교자가 “복음을 설교함으로서 하나님께 합당하고도 큰 가치있는 봉사”를 드리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수고가 하나님께 인정되기”9) 때문에, 말씀의 사역은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권위가 목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를 보내시는 이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서 모든 이에게 강요할 수 있는 어떤 지식들이라든가 또는 모종의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의지의 대변인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있게 그리고 명령형으로 설교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자들은 곧 다른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 내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곳(= 디도서2;15)에서 언급된 것, 곧 누구든 이렇게 되어야 한다, 또는 이쪽으로 가야한다라는 식으로 명령하여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기란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10)
 
칼빈이 설교자에게 부여한 권위는 말씀의 사역자와 그를 보내신 이가 한 인격, 혹은 같은 인격안에 같이 섞여있는 듯한 모든 문장들 가운데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목사들이(하나님의) “사자들”의 자격이 있을 수 있음을 주지시킨 후 이러한 칭호가 합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누구든 그가 설교할 때는, 비록 그가 우리와 동일하게 보이고, 대단한 존경을 받거나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하더라도,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이곳에(=설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곳에 두신다.”11) 하지만 칼빈이 설교자에게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하나님의) “입”이라는 칭호는 “사자”라는 칭호보다 더 우월한데,12) 이는 설교자가 강단에 섰을 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설교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강단에서 외치는 이는 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정도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곳에는 하늘의 위엄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13)
 
우리는 지금 막 그리스도의 임재나 또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본문들을 설교에서 인용하여 읽어보았는데, 20세기 사람들은 아마도 이것을 비유적 의미로 해석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심한 오해를 유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란 참말로 신적 행위이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로 오시며14)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15)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가 소유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방법으로 대화하신다. ... 이렇게 복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강하셔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16)프랑스 개혁자의 눈에 비친 설교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현현, 혹은 하나님의 현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목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은 실재로 임재하시고, 임재하시되 성례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임재하신다. 17)

(칼빈의 설교학에서)

1) La flamme dt le vent(불꽃과 바람), Paris, 1952. p.14 4반세기 전에 출판된 이 소설에서 Henri Hatzefeld는 전구적(前驅的)인 방법과 놀라운 재능으로 오늘날 수 많은 목사 사회에 창궐하고 있는 불안을 그리고 있다.

2) Ibid, p.12

3) 디모데전서 35번째 설교 Calvin Opera(=CO), LⅢ, p.427

4) 갈라디아서 30번째 설교, CO. L, p.645

5) 디도서 첫 번째 설교, CO, LⅣ, p.385

6) 신명기 35번째 설교, CO, XXⅥ, p.304

7) 공관복음 주석 vol 1, p.575와 베드로전서 주석 vol, N, p.607 참고, 여기 인용된 주석들은 1854년과 1855년 사이에 Paris의 Ch.Meyrueis사에서 출판된 Commentaires sur le Nouveau Testament(전4권)이다.

8) 벧전 주석, vol Ⅳ p.607

9) 로마서 주석, vol Ⅲ, p.19

10) 디도서 14번째 설교, CO LⅣⅣp.552

11) 고린도전서 12번째 설교, CO XLⅠX pp.734-735

12) 신명기 6번째 설교, CO XXⅤ pp.666-667

13) 신명기 76번째 설교, CO XXⅦ p.107

14) 에베소서 14번째 설교, CO LⅠ p.415

15) Ibid p.415

16) 사무엘하 16번째 설교,

supplementa Calviniana, vol 1. p.136

17) Chanoine Georges Bavaud의 발표문, "Les rapports entre la predication et les sacrements dans le conteste du dialogue oecumenique"(교회 연합적 대화의 배경 속에 있어서 설교와 성례 사이의 관계), in Communion et Communication, pp.69-73
[출처] 칼빈의 설교론1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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