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설교론2설교의 본질
칼빈의 설교론2설교의 본질
박건택 교수
설교에 있어서 신의 현현적 성격을 상기해 본 후 - 이 특성은 16세기에 설교가 담당했던, 그리고 개혁교회에서 언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침없이 담당해오는 설교의 역할을 유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 이제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설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들춰야 하겠다.
몇몇 영미 계통의 신학자들은 1548년 10월 22일, Somerset 공에게 쓴 편지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초했던 Paul Henry 의 가설을 다시 취하면서1) 칼빈에 있어 설교자가 자기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언제나 즉흥적인 것에 내맡기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2)
하지만 이보다 더 조잡하게 착각할 수는 없으리라. 반대로 설교자는, 신명기에 대한 49 번째 설교의 한 문장에서 잘 나타나듯이, 자기의 설교들을 연구 준비해야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먹이시기에 충분히 능력이 있으시다는 핑계하에 설교를 전념하여 준비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의 태도를 책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단언하고 있다 : “그것은 마치 내가 단위에 을라서서 감히 책도 참고하지 않은채 허튼 상상을 짜내며, 좋아, 내가 단 위에 갈 때 하나님은 내게 말할 충분한 것을 주실거야!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마땅히 강조해야할 것을 감히 읽지도, 생각지도 않고 또한 성경을 백성교화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미리 잘 숙고해보지도 않고 나오는 것과도 같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자만하는 자가 되며 결국 하나님은 나의 그 뻔뻔스러움을 사용하여 나를 혼란케 하실 것이다.” 3) 우리는 이 이상 더 단호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 행위를 위한다 하면서 잘못 결정짓는 즉흥의 이론을 정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칼빈의 눈에 비친 신실한 설교란 우선적으로 준비된 설교이다.
이러한 준비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자세히 살펴볼 것이지만, 성경의 사려 깊은 연구로 이루어진다. 디모데전서에 대한 47번째 설교에서4) 칼빈은 설교하는 3가지 방법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 방법은 자신의 의도를 겉치레하지 않고 또 청중의 귀를 간지럽히지 않고 “백성의 유익과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두번째 방법은 잘못된 교리에 집착하지는 않으면서도 헛된 수단에 몰두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방법이 호기심에 찬 쓸데없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세번째 방법은 백성의 영혼들을 거짓으로 “중독시키고”, “그 정신들을 수많은 환상으로 가두며, 그리하여 신자들을 교화시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미신으로 향하게 하고야 마는 그런 방법이다. 이 세가지 설교의 방법중 우리가 붙들어야할 것은 물론 첫번째 것이다. 이 방법은 칼빈의 그의 숱한 설교들 가운데서 말한 것, 곧 목사는 신자들에게 “좋은 양식”을 가져다 주기 위해 강단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5)
칼빈에게 있어서 이 양식은 오직 성경에만 있다. 한 암시적인 비유를 들면서(이 비유는 신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하는 점에 대해 그가 회의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개혁자는 성경을 빵덩어리에 비유하고 있는데 여기서 설교자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듯이, 자기 청중들에게 관대히 말해야할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 빵이 있고 그 집 주인에게는 그 큰 덩어리 빵을 들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어린아이들이 그 빵을 먹고 싶어할 때 그들은 이 큰 빵을 이로 깨물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매우 단단한 빵 껍질을 발견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많이 먹을 수 없고 여전히 배가 고픈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에까지 쾌히 응하시어 그가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 영혼의 참된 양식을 주셨을 때…, 그는 한 선한 아버지처럼 더욱 풍성하게 빵을 자르고 그 조각들을 우리 입안에 넣어주시며 그것들을 썰어주기를 원하신다.6) ”성경의 “빵을 자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시대에 따라, 인물과 현재의 사건들에 따라서” 7)성경을 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단의 높은 곳에서, 목사는 주석가(엄밀한 의미에서의) 가 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교회)의 요구와 시대의 필요성들에 따라서 성경 메시지를 해석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8)
이러한 성경해석은 세 가지 규칙에 맞추어야 한다. 곧 설교자는 성경에 주어진 것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단순하게 라는 부사를 통해 칼빈이 설명하고자 원하는 것은 설교란 “청중들의 이해력에 부응하여” 각 신자가 그 설교에서 “자신의 몫과 분깃을”9)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목사는 “마치 유모가 그의 어린아이와 함께 말을 더듬는 것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서투른 화법을 쓰시는”10) 하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이 첫 규칙을 작성하면서 칼빈은 라틴 수사학자들과 -여러 인물들 중에 키케로(Cicero)와 쿠인틸리안 (Quintilien)을 들 수 있다 -고대 교회신학자들 - 특히 오리겐과 어거스틴 -을 본받았는데 이들은 모든 연설이 적응의 원리 (principle d'accommodation, 이에 따르면 연사는 청중의 이해에 적응한다는 것) 에 입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둘째 간결하게 ; 간결성은 칼빈이 좋아했던 특성들 가운데 하나이며11) 그는 이 간결성이 설교가운데 나타나기를 바란다.12) 이 문제에 대해 견해를 같이 했던 Simon Grynee에게 개혁자는 편지를 쓰면서 그 서문에서 “주석가의 주된 힘은 평이한 간결성에 있는 것이요, 결코 애매모호함으로부터 올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씀의 사역자는 쓸모없는 여담을 피해야 하고 쓸데없는 수다를 금해야 하며 “그가 설명하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 13)
세째 용기있게, 복음설교는 악의없는 간담이 아니다. 복음설교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간성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 설교는 이 어려운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 칼빈은 이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말하기를 “순수하고 솔직한 복음 설교에 지나친 두려움보다 더 반대되는 것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말씀의 사역자는 “우물우물” 말해서는 않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교회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차없이 혹은 꾸밈없이”제시해야 한다.14)
성경해석이 가지고 있어야 할 단순성, 간결성, 그리고 용기 등의 규칙을 살펴본 후 우리는 이제 칼빈의 설교에는 항상 실천적 적용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설교란 성경 메시지만을 충실하게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본문을 한번 설명한 뒤, 그곳에서 공동체(교회)에 필요불가결한 결과들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자가 생각하는 설교는 전혀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성경에 주어진 본문을 이해하고자 최선을 다한 후, 언제나 청중들이 고통과 투쟁 속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행동지침과 격려를 그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칼빈은 방금 우리가 지적한 것을 그의 설교작품중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만일 설교가 성경적 설명만을 포함하고 있다면“하나님은 거기서 명예를 손상 당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은 “수금이나 비파를 연주하는 떠돌이 악사”의 입장에 놓이게 되어 청중들의 영혼을 결코 감동으로 떨게하지는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15) 사실 “만일 사람들이 성경을 주해하기만 한다면, 그렇게 시간은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생생한 감동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16) 그러므로 설교자는 “단순한 교리를 제시하고, ‘이것이 여기 들어있는 내용이요’라고 말하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여러번 권면해야 하는 것이다.”17) “교리와 더불어 권면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교리가 권면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 교리는 차가워서 우리의 심장을 꿰뚫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8) 요약하면 우리는 개혁자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두가지 요구된 것이었다. 그것은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하고 건전한 지성을 주어야하는 것과 또한 우리가 계속적인 열정을 가지고 교리가 보다 생생하게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도록, 그리고 사람들이 선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따르고 그것에 매달리어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수차례에 걸쳐 열렬히 권고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19) 성경의 해석과 적용, 이것이야 말로 칼빈에 있어서 참된 설교의 두 성분이다.
(칼빈의 설교학에서)
[출처] 칼빈의 설교론2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48
박건택 교수
설교에 있어서 신의 현현적 성격을 상기해 본 후 - 이 특성은 16세기에 설교가 담당했던, 그리고 개혁교회에서 언어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침없이 담당해오는 설교의 역할을 유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 이제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설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들춰야 하겠다.
몇몇 영미 계통의 신학자들은 1548년 10월 22일, Somerset 공에게 쓴 편지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초했던 Paul Henry 의 가설을 다시 취하면서1) 칼빈에 있어 설교자가 자기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언제나 즉흥적인 것에 내맡기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2)
하지만 이보다 더 조잡하게 착각할 수는 없으리라. 반대로 설교자는, 신명기에 대한 49 번째 설교의 한 문장에서 잘 나타나듯이, 자기의 설교들을 연구 준비해야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먹이시기에 충분히 능력이 있으시다는 핑계하에 설교를 전념하여 준비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의 태도를 책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단언하고 있다 : “그것은 마치 내가 단위에 을라서서 감히 책도 참고하지 않은채 허튼 상상을 짜내며, 좋아, 내가 단 위에 갈 때 하나님은 내게 말할 충분한 것을 주실거야!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마땅히 강조해야할 것을 감히 읽지도, 생각지도 않고 또한 성경을 백성교화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미리 잘 숙고해보지도 않고 나오는 것과도 같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자만하는 자가 되며 결국 하나님은 나의 그 뻔뻔스러움을 사용하여 나를 혼란케 하실 것이다.” 3) 우리는 이 이상 더 단호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 행위를 위한다 하면서 잘못 결정짓는 즉흥의 이론을 정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칼빈의 눈에 비친 신실한 설교란 우선적으로 준비된 설교이다.
이러한 준비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자세히 살펴볼 것이지만, 성경의 사려 깊은 연구로 이루어진다. 디모데전서에 대한 47번째 설교에서4) 칼빈은 설교하는 3가지 방법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 방법은 자신의 의도를 겉치레하지 않고 또 청중의 귀를 간지럽히지 않고 “백성의 유익과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두번째 방법은 잘못된 교리에 집착하지는 않으면서도 헛된 수단에 몰두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방법이 호기심에 찬 쓸데없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세번째 방법은 백성의 영혼들을 거짓으로 “중독시키고”, “그 정신들을 수많은 환상으로 가두며, 그리하여 신자들을 교화시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미신으로 향하게 하고야 마는 그런 방법이다. 이 세가지 설교의 방법중 우리가 붙들어야할 것은 물론 첫번째 것이다. 이 방법은 칼빈의 그의 숱한 설교들 가운데서 말한 것, 곧 목사는 신자들에게 “좋은 양식”을 가져다 주기 위해 강단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5)
칼빈에게 있어서 이 양식은 오직 성경에만 있다. 한 암시적인 비유를 들면서(이 비유는 신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하는 점에 대해 그가 회의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개혁자는 성경을 빵덩어리에 비유하고 있는데 여기서 설교자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듯이, 자기 청중들에게 관대히 말해야할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 빵이 있고 그 집 주인에게는 그 큰 덩어리 빵을 들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어린아이들이 그 빵을 먹고 싶어할 때 그들은 이 큰 빵을 이로 깨물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매우 단단한 빵 껍질을 발견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많이 먹을 수 없고 여전히 배가 고픈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에까지 쾌히 응하시어 그가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 영혼의 참된 양식을 주셨을 때…, 그는 한 선한 아버지처럼 더욱 풍성하게 빵을 자르고 그 조각들을 우리 입안에 넣어주시며 그것들을 썰어주기를 원하신다.6) ”성경의 “빵을 자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시대에 따라, 인물과 현재의 사건들에 따라서” 7)성경을 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단의 높은 곳에서, 목사는 주석가(엄밀한 의미에서의) 가 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교회)의 요구와 시대의 필요성들에 따라서 성경 메시지를 해석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8)
이러한 성경해석은 세 가지 규칙에 맞추어야 한다. 곧 설교자는 성경에 주어진 것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단순하게 라는 부사를 통해 칼빈이 설명하고자 원하는 것은 설교란 “청중들의 이해력에 부응하여” 각 신자가 그 설교에서 “자신의 몫과 분깃을”9)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목사는 “마치 유모가 그의 어린아이와 함께 말을 더듬는 것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서투른 화법을 쓰시는”10) 하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이 첫 규칙을 작성하면서 칼빈은 라틴 수사학자들과 -여러 인물들 중에 키케로(Cicero)와 쿠인틸리안 (Quintilien)을 들 수 있다 -고대 교회신학자들 - 특히 오리겐과 어거스틴 -을 본받았는데 이들은 모든 연설이 적응의 원리 (principle d'accommodation, 이에 따르면 연사는 청중의 이해에 적응한다는 것) 에 입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둘째 간결하게 ; 간결성은 칼빈이 좋아했던 특성들 가운데 하나이며11) 그는 이 간결성이 설교가운데 나타나기를 바란다.12) 이 문제에 대해 견해를 같이 했던 Simon Grynee에게 개혁자는 편지를 쓰면서 그 서문에서 “주석가의 주된 힘은 평이한 간결성에 있는 것이요, 결코 애매모호함으로부터 올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씀의 사역자는 쓸모없는 여담을 피해야 하고 쓸데없는 수다를 금해야 하며 “그가 설명하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 13)
세째 용기있게, 복음설교는 악의없는 간담이 아니다. 복음설교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간성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 설교는 이 어려운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 칼빈은 이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말하기를 “순수하고 솔직한 복음 설교에 지나친 두려움보다 더 반대되는 것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말씀의 사역자는 “우물우물” 말해서는 않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교회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차없이 혹은 꾸밈없이”제시해야 한다.14)
성경해석이 가지고 있어야 할 단순성, 간결성, 그리고 용기 등의 규칙을 살펴본 후 우리는 이제 칼빈의 설교에는 항상 실천적 적용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설교란 성경 메시지만을 충실하게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본문을 한번 설명한 뒤, 그곳에서 공동체(교회)에 필요불가결한 결과들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자가 생각하는 설교는 전혀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성경에 주어진 본문을 이해하고자 최선을 다한 후, 언제나 청중들이 고통과 투쟁 속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행동지침과 격려를 그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칼빈은 방금 우리가 지적한 것을 그의 설교작품중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만일 설교가 성경적 설명만을 포함하고 있다면“하나님은 거기서 명예를 손상 당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은 “수금이나 비파를 연주하는 떠돌이 악사”의 입장에 놓이게 되어 청중들의 영혼을 결코 감동으로 떨게하지는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15) 사실 “만일 사람들이 성경을 주해하기만 한다면, 그렇게 시간은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생생한 감동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16) 그러므로 설교자는 “단순한 교리를 제시하고, ‘이것이 여기 들어있는 내용이요’라고 말하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여러번 권면해야 하는 것이다.”17) “교리와 더불어 권면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교리가 권면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 교리는 차가워서 우리의 심장을 꿰뚫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8) 요약하면 우리는 개혁자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두가지 요구된 것이었다. 그것은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하고 건전한 지성을 주어야하는 것과 또한 우리가 계속적인 열정을 가지고 교리가 보다 생생하게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도록, 그리고 사람들이 선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따르고 그것에 매달리어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수차례에 걸쳐 열렬히 권고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19) 성경의 해석과 적용, 이것이야 말로 칼빈에 있어서 참된 설교의 두 성분이다.
(칼빈의 설교학에서)
[출처] 칼빈의 설교론2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48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