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설교론3 설교자의 이중 음성 교리
칼빈의 설교론3 설교자의 이중 음성 교리
박건택 교수
그러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교리, 곧 이중 음성(duplex vox) 교리에서 멈춰야할 것이다. 개혁자는 사실 “목사는 두개의 음성을 가져야 하는데 하나는 양들을 영접하고 모으는 음성이요 다른 하나는 이리와 도둑을 밀어내고 쫓아내는 음성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1) 달리 표현하면, 말씀의 사역자는 그의 설교를 통해 첫째로 “온순한 자들을 다스리고 인도하는데로” 둘째로 “진리의 적을 공박하고, 또 반박하기 좋아하는 자들의 자랑과 고집을 흔내주는 데로” 부름을 받아야한다.2)
여기서 디모데전서의 22번째 설교 중에 있는 한 귀절을 인용해야겠다. 칼빈은 거기서 우리가 방금 간략히 언급해놓은 것을 발전시키고 있다. “평온히 자리잡고 인도하는대로 따라가는 이들을 교화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적들을 물리치고, 또 순수한 교리를 부패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거짓들을 쫓아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역시 목자의 비유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 우리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양의 무리에 대해 위임된 자, 그는 그 무리를 인도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이리와 도둑에 대항하여 외치는 또 다른 음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중의 음성을 가져야 한다. 부드러운 음성으로는 온순한 이들을 권면하고 또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며, 다른 한 목소리로는 이리와 도둑들을 향해 대항하여 양의 무리에서 그들을 쫓아 내고 순수한 하나님의 교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3)
설교자의 첫번째 음성은 앞에서 강조한 설교의 구성 요소들과 대응하고 있는 두 기능과 일치하고 있다. 이 두 기능은 신자들에 대한 교훈과 훈계이다. 이처럼 설교는, 그 첫 번째 목표(교훈)에서, 함께 모인 공동체에 참된 성경지식을 가져다 줘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행위가 성경의 요구와 일치되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 두 기능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구별한다. 곧 한 기능을 통해서는 “그리스도(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 지 알 수 있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칭송받으며”, 또한 다른 한 기능을 통해서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 정직하게 행동하도록 형성되는 것이다.” 4)
이 기능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번째 기능은 “신자의 구원을 효과적으로 인도하고 안내하는데”5)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맺고 푸는 권세가 있다. 개혁자는 마태복음 16장 19절에 관해 쓰면서 “열쇠에 대한 비유는 가르치는 책무에 적용함에 매우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금 뒤에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하늘의 심판이 지상에서 어떠한 것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복음설교에서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삶 혹은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다른데서 찾아서는 결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6)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두번째 기능은 그것이,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을 “시험”과 “해부대”에 내맡겨서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은 개혁되고”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학교에서 가르치신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지적해주신다”는 사실로 특정지워진다.7) 우리가 아는데로 “개혁” 이란 것은 단순히 교회에만 적용되는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각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각 청중들이 개량되고 새 삶의 증거를 나타내 주기까지 칼빈은 “도덕화해야 할” 요구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설교가 각 신자의 실존에서 야기시켜야 할 “개혁”은 인간 노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게하여 위로부터의 도움을 기다리게하는 모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개혁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우리가 설교에로 나아올 때 우리 각자는, ‘아아, 하나님께서 내게 다소간의 선을 남겨두셨고, 어떤 선한 씨앗아 있긴 하나 그 보잘것 없는 선은 여전히 악취와 부패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나는 키로 까불리고 체로 쳐서 걸러져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쓸데없는 것들을 깨끗하게 치워주셔야 한다’라고 생각해야 한다.”8)
설교자의 첫번째 음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두번째 음성이 무엇인지를 검토해야겠다. 우리는 이 두번째 음성이 ‘건전한 교리의 대적자들을 향해 그들의 행위에 대해 말해주는 것”임을 상기하자.9) 본 연구의 한계를 셜정해야겠기에 여기서는 “적대자들의 계층”, 곧 설교를 경멸하는 부류만 언급하기로 하자. 이렇게 하므로서 우리는 칼빈에 있어 설교가 연합의 구조들(Structures d'unite) 가운데 하나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의 유용성을 회의하고 있던 모든 이들에게 칼빈은 있는 목소리를 다해 다음과 같이 반복하여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다”는 사람들이다.”10) 이미 우리가 강조한 바대로 목사들이란“하나님의 무오한 진리의 전달자가 되고 마치 대변자처럼 그의 이름으로 말하기 위해”11)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간섭을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다. 칼빈이 설교를 경멸하는 자들에 게 말한 이 모든 비판의 주제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면, 이 비판 속에는 몇 가지 상이한 양상이 있다. 개혁자는 3종류의 적대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곧 개인주의자들, 영성주의자들, 성서주의자들이다.
개인주의자들은 만인제사장이라는 개념을 핑계로 내세워 목회사역을 의문에 부친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각자는 자기의 선생이 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을 안내하는 소수 집단을 선택할 필요가 전혀 없다”라고 하며12) 또한 “누구도 우리의 화를 돋우고 우리가 원하는 것에 전혀 반대되는 모든 것을 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13) 그들의 태도는 다니엘서에 대한 설교의 한 구절에서 지울 수 없는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 “그들은 설교를 듣게 될 때 ‘이런 말이 있었고 그중 어떤 것은 기억으로 남을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들은 그 설교에서 어떤 유익을 얻었나요? 어쨌든 보다 좋게 행동하려 하겠지요? ’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오, 전혀, 한 사람이 말했을 뿐인걸요’라고 대답할 것이다.”14) 칼빈은 이 개인주의자들에게 만일 우리가 설교에 의해 붙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탈주한 말”과 “길잃은 짐승”이 될 것이라고 꼬집는다.15) 설교란 독자적인 이익과 개인적인 기호를 억제하면서 신자들을 한 몸으로 연합하는 “풀 수 없는 끈”이다. 개혁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 "우리가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고 또 가르침을 받는다하여 괴로와 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질서에 따라 오직 외적 설교 외에는 달리 우리를 완전케 하고 서로 연합시켜줄 방법은 없다.”16)
개인주의자들 곁에는 영성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성령에서 출발한 잘못된 개념을 내세워 성경과 설교란 둘 다 불필요하며 단지 계시들과 영감들을 추구하여 그것들로 은혜를 받아야한다고 믿는다. 이 자유파들(Libertins. 칼빈은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다시 말해 이 환상가들은 예배를 내버리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조소한다. 개혁자는 이 자유파들에게 비판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 “성경을 읽고 말씀 듣는 일에 마음을 굳히고 전념하는 사랍들을 어린애들로 여기는 한 무리의 영적 광신도들이 있다. 그들은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오만하게도 인간들의 사역을 경멸하고 심지어 성경을 멸시한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사탄이 그들의 귀에 불어 넣어주는 숱한 허황된 망상들을 뻔뻔스럽게도 마치 성령의 계시인양 강조한다.”17) 히브리서 8장 11절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이들 조명파들(illumines)에게18) 칼빈은 이렇게 대답한다 : “성령을 인간들의 목소리와 연결시킨 사도 바울의 예에서 배우자. 사람의 말은 성령의 기관과 도구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19) 이러한 대답은 흥미롭다. 종교개혁의 대원리 Spiritus in Verbo operans(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활동하신다)가 Spiritus in Verbo praedicato operans(성령은 설교된 말씀을 통해 활동하신다)의 원리로 굴절하는 것이다(설교된 말씀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행동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 된다 ).
개인주의자들과 영성주의자들만이 설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이 매우 잘 보여준 대로, 어떤 급진 성서주의자들도 그러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충실히 읽는 성경으로 무장되었을 뿐 아니라 진리가 성경에서 자동적으로 나온다고 확신하고서는 설교에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조용히 읽으면서 이미 그들이 발견한 것을 설교에서는 전혀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혁자는 이렇게 말한다 : “가르침을 받기 위해 교회에 오는 것을 헛걸음했다고 생각하는 환상적인 인물들을 우리는 보게 된다. 무슨 얘기요? 하나님의 모든 교리가 성경에 있지 않은가요? 그 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나요? 그들에게 성경이 있는 한, 그들이 보기에 자신들은 어떤 질서에서도 면제된 인물들이고 또 그곳에 종속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딤후2:15) 지적하기를, 우리가 단지 성경을 소지하고서 그것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오히려 성경에서 뽑아 지고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설교된 교리로 부수어진 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0)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면서 칼빈은, 보알로(Boileau)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21) 모든 개신교인이 다 “손에 성경을 든 교황”(pape, une Bible a 1a main)이 되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 개혁자는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이런 개인적 성경원기는 훗날 개신교 속에 너무나 고조되어서 성경숭배 개신교라고 비난받을 수 있었다). 그의 디모데후서 2장 15절 주석에서 칼빈은 신자들이 성경을 자기들 스스로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음을 부인한다. 다시 한번 성경을 빵으로 비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 “어떤 이들은 성경을 삭제하고, 다른 이들은 갈기갈기 찢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다른 뜻으로 왜곡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파괴하고, 또 다른 이들은 다만 표면에만 머무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리의 중심부까지 도달치 못하는 것이다.”22) 오늘날에는 이 말들이 부당하게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충실한 성경읽기는 항상 교회적으로 읽는 것이며 나아가 목회적으로 읽는 것이라(후자는 개신교가 자주 회피했던 문제이나 Congar 신부가 잘 지적한대로23)) 종교개혁의 품 안에서의 교사권위문제이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신자들이 성경 덩어리를 “바르게 자를 수”없기 때문에 성경을 정확하게 "쪼개고" 또 성경에서 풍부한 내용의 정수를 끄집어내는 일이 목사들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학에서)
[출처] 칼빈의 설교론3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49
박건택 교수
그러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교리, 곧 이중 음성(duplex vox) 교리에서 멈춰야할 것이다. 개혁자는 사실 “목사는 두개의 음성을 가져야 하는데 하나는 양들을 영접하고 모으는 음성이요 다른 하나는 이리와 도둑을 밀어내고 쫓아내는 음성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1) 달리 표현하면, 말씀의 사역자는 그의 설교를 통해 첫째로 “온순한 자들을 다스리고 인도하는데로” 둘째로 “진리의 적을 공박하고, 또 반박하기 좋아하는 자들의 자랑과 고집을 흔내주는 데로” 부름을 받아야한다.2)
여기서 디모데전서의 22번째 설교 중에 있는 한 귀절을 인용해야겠다. 칼빈은 거기서 우리가 방금 간략히 언급해놓은 것을 발전시키고 있다. “평온히 자리잡고 인도하는대로 따라가는 이들을 교화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적들을 물리치고, 또 순수한 교리를 부패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거짓들을 쫓아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역시 목자의 비유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 우리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양의 무리에 대해 위임된 자, 그는 그 무리를 인도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이리와 도둑에 대항하여 외치는 또 다른 음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중의 음성을 가져야 한다. 부드러운 음성으로는 온순한 이들을 권면하고 또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며, 다른 한 목소리로는 이리와 도둑들을 향해 대항하여 양의 무리에서 그들을 쫓아 내고 순수한 하나님의 교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3)
설교자의 첫번째 음성은 앞에서 강조한 설교의 구성 요소들과 대응하고 있는 두 기능과 일치하고 있다. 이 두 기능은 신자들에 대한 교훈과 훈계이다. 이처럼 설교는, 그 첫 번째 목표(교훈)에서, 함께 모인 공동체에 참된 성경지식을 가져다 줘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행위가 성경의 요구와 일치되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 두 기능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구별한다. 곧 한 기능을 통해서는 “그리스도(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 지 알 수 있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칭송받으며”, 또한 다른 한 기능을 통해서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 정직하게 행동하도록 형성되는 것이다.” 4)
이 기능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번째 기능은 “신자의 구원을 효과적으로 인도하고 안내하는데”5)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맺고 푸는 권세가 있다. 개혁자는 마태복음 16장 19절에 관해 쓰면서 “열쇠에 대한 비유는 가르치는 책무에 적용함에 매우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금 뒤에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하늘의 심판이 지상에서 어떠한 것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복음설교에서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삶 혹은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다른데서 찾아서는 결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6)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두번째 기능은 그것이,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을 “시험”과 “해부대”에 내맡겨서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은 개혁되고”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학교에서 가르치신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지적해주신다”는 사실로 특정지워진다.7) 우리가 아는데로 “개혁” 이란 것은 단순히 교회에만 적용되는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각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각 청중들이 개량되고 새 삶의 증거를 나타내 주기까지 칼빈은 “도덕화해야 할” 요구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설교가 각 신자의 실존에서 야기시켜야 할 “개혁”은 인간 노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게하여 위로부터의 도움을 기다리게하는 모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개혁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우리가 설교에로 나아올 때 우리 각자는, ‘아아, 하나님께서 내게 다소간의 선을 남겨두셨고, 어떤 선한 씨앗아 있긴 하나 그 보잘것 없는 선은 여전히 악취와 부패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나는 키로 까불리고 체로 쳐서 걸러져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쓸데없는 것들을 깨끗하게 치워주셔야 한다’라고 생각해야 한다.”8)
설교자의 첫번째 음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두번째 음성이 무엇인지를 검토해야겠다. 우리는 이 두번째 음성이 ‘건전한 교리의 대적자들을 향해 그들의 행위에 대해 말해주는 것”임을 상기하자.9) 본 연구의 한계를 셜정해야겠기에 여기서는 “적대자들의 계층”, 곧 설교를 경멸하는 부류만 언급하기로 하자. 이렇게 하므로서 우리는 칼빈에 있어 설교가 연합의 구조들(Structures d'unite) 가운데 하나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의 유용성을 회의하고 있던 모든 이들에게 칼빈은 있는 목소리를 다해 다음과 같이 반복하여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다”는 사람들이다.”10) 이미 우리가 강조한 바대로 목사들이란“하나님의 무오한 진리의 전달자가 되고 마치 대변자처럼 그의 이름으로 말하기 위해”11)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간섭을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다. 칼빈이 설교를 경멸하는 자들에 게 말한 이 모든 비판의 주제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면, 이 비판 속에는 몇 가지 상이한 양상이 있다. 개혁자는 3종류의 적대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곧 개인주의자들, 영성주의자들, 성서주의자들이다.
개인주의자들은 만인제사장이라는 개념을 핑계로 내세워 목회사역을 의문에 부친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각자는 자기의 선생이 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을 안내하는 소수 집단을 선택할 필요가 전혀 없다”라고 하며12) 또한 “누구도 우리의 화를 돋우고 우리가 원하는 것에 전혀 반대되는 모든 것을 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13) 그들의 태도는 다니엘서에 대한 설교의 한 구절에서 지울 수 없는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 “그들은 설교를 듣게 될 때 ‘이런 말이 있었고 그중 어떤 것은 기억으로 남을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들은 그 설교에서 어떤 유익을 얻었나요? 어쨌든 보다 좋게 행동하려 하겠지요? ’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오, 전혀, 한 사람이 말했을 뿐인걸요’라고 대답할 것이다.”14) 칼빈은 이 개인주의자들에게 만일 우리가 설교에 의해 붙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탈주한 말”과 “길잃은 짐승”이 될 것이라고 꼬집는다.15) 설교란 독자적인 이익과 개인적인 기호를 억제하면서 신자들을 한 몸으로 연합하는 “풀 수 없는 끈”이다. 개혁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 "우리가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고 또 가르침을 받는다하여 괴로와 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질서에 따라 오직 외적 설교 외에는 달리 우리를 완전케 하고 서로 연합시켜줄 방법은 없다.”16)
개인주의자들 곁에는 영성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성령에서 출발한 잘못된 개념을 내세워 성경과 설교란 둘 다 불필요하며 단지 계시들과 영감들을 추구하여 그것들로 은혜를 받아야한다고 믿는다. 이 자유파들(Libertins. 칼빈은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다시 말해 이 환상가들은 예배를 내버리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조소한다. 개혁자는 이 자유파들에게 비판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 “성경을 읽고 말씀 듣는 일에 마음을 굳히고 전념하는 사랍들을 어린애들로 여기는 한 무리의 영적 광신도들이 있다. 그들은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오만하게도 인간들의 사역을 경멸하고 심지어 성경을 멸시한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사탄이 그들의 귀에 불어 넣어주는 숱한 허황된 망상들을 뻔뻔스럽게도 마치 성령의 계시인양 강조한다.”17) 히브리서 8장 11절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이들 조명파들(illumines)에게18) 칼빈은 이렇게 대답한다 : “성령을 인간들의 목소리와 연결시킨 사도 바울의 예에서 배우자. 사람의 말은 성령의 기관과 도구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19) 이러한 대답은 흥미롭다. 종교개혁의 대원리 Spiritus in Verbo operans(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활동하신다)가 Spiritus in Verbo praedicato operans(성령은 설교된 말씀을 통해 활동하신다)의 원리로 굴절하는 것이다(설교된 말씀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행동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 된다 ).
개인주의자들과 영성주의자들만이 설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이 매우 잘 보여준 대로, 어떤 급진 성서주의자들도 그러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충실히 읽는 성경으로 무장되었을 뿐 아니라 진리가 성경에서 자동적으로 나온다고 확신하고서는 설교에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조용히 읽으면서 이미 그들이 발견한 것을 설교에서는 전혀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혁자는 이렇게 말한다 : “가르침을 받기 위해 교회에 오는 것을 헛걸음했다고 생각하는 환상적인 인물들을 우리는 보게 된다. 무슨 얘기요? 하나님의 모든 교리가 성경에 있지 않은가요? 그 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나요? 그들에게 성경이 있는 한, 그들이 보기에 자신들은 어떤 질서에서도 면제된 인물들이고 또 그곳에 종속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딤후2:15) 지적하기를, 우리가 단지 성경을 소지하고서 그것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오히려 성경에서 뽑아 지고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설교된 교리로 부수어진 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0)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면서 칼빈은, 보알로(Boileau)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21) 모든 개신교인이 다 “손에 성경을 든 교황”(pape, une Bible a 1a main)이 되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 개혁자는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이런 개인적 성경원기는 훗날 개신교 속에 너무나 고조되어서 성경숭배 개신교라고 비난받을 수 있었다). 그의 디모데후서 2장 15절 주석에서 칼빈은 신자들이 성경을 자기들 스스로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음을 부인한다. 다시 한번 성경을 빵으로 비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 “어떤 이들은 성경을 삭제하고, 다른 이들은 갈기갈기 찢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다른 뜻으로 왜곡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파괴하고, 또 다른 이들은 다만 표면에만 머무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리의 중심부까지 도달치 못하는 것이다.”22) 오늘날에는 이 말들이 부당하게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충실한 성경읽기는 항상 교회적으로 읽는 것이며 나아가 목회적으로 읽는 것이라(후자는 개신교가 자주 회피했던 문제이나 Congar 신부가 잘 지적한대로23)) 종교개혁의 품 안에서의 교사권위문제이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신자들이 성경 덩어리를 “바르게 자를 수”없기 때문에 성경을 정확하게 "쪼개고" 또 성경에서 풍부한 내용의 정수를 끄집어내는 일이 목사들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학에서)
[출처] 칼빈의 설교론3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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