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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자의 삶과 신학: 존 칼빈을 중심으로

개혁신학자의 삶과 신학: 존 칼빈을 중심으로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안명준교수
2003년 8월 4일 JDM 특강

서론

오늘날 한국상황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을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심지어
성직자들의 여러 문제들의 노출과 성적 타락으로 한국교회는 암울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날 이런 사회의 심각한 상황이 개혁자 칼빈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재점검하게 하는 동기를 갖게 한다. 칼빈이 살았던 제네바 역시 죄인들이 수많은 문제를 보여준 도시였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신부들과 수도사들이 창녀와 난잡한 여자들 때문에 늘 문제를 일으켰다고 제네바 시의회(Registres du Conseil) 기록에 나와 있다. 또 초기 개신교 목사들도 마찬가지로 1545년 시몬 모로(Simon Moraux)를 비롯한 2명의 목사들이 위그노 여신자와 함께 목욕한 일로 해임되었다. 당시 제네바 역사에 관하여 서술한 내용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 당시 제네바 교회의 컨시스토리움은 당시의 부패된 모습속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한 것들을 보여 준다. 제네바 컨시스토리움은 가혹한 아버지들, 가혹한 채권자들, 고리 대금업자들, 독과점자들, 투기꾼들, 고객을 속이는 상인들, 폭악스런 남자들, 아픈 사람을 보살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투쟁했으며 힘없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개혁을 시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칼빈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위대한 신학자였다. 로버트 킹돈(Robert M. Kingdon)에 의하면 칼빈은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였으며, 그가 여러 저술에서 전개한 신학적, 교회적, 그리고 정치적 사상, 또 그가 제네바에 세워 지도한 모델교회, 마지막으로 그가 여러 나라의 정치적, 지적 지도자들에게 베푼 적극적인 지원은 유럽과 북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전하는데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개혁자 칼빈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 칼빈의 신학을 근거하여 개혁신학의 중요한 특징을 밝히려고 한다.

초기생애

영어식 존 칼빈(John Calvin)은 프랑스어로 장 칼뱅(Jea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피카디 주에 있는 유명한 고도 노용 Noyon,에서 태어났다. 노용이란 도시는 한때 성 머다드(St. Merdad) 성 엘오이워스 (St. Eloiwas)와 같은 감독들이 살았던 유명한 곳이었다, 또 찰스 대제(후기 신성로마 황제)가 768년 누우스트리아(Neustria)의 서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곳이며 987년에는 카페티안(Capetian) 왕조의 창시자이며 프랑스의 왕 휴우 카펫 (Hugh Capet)이 왕으로 즉위한 곳이었다.
역사가 윌 듀란트는 노용 도시를 칼빈의 신정정치의 개념과 관련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노용은 교회와 감독에 의하여 지배받는 교회 도시였다. 여기서 처음부터 칼빈은 신정정치의 -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직자들에 의하여 사회가 지배되는 것- 하나의 예를 가졌다고 한다. 칼빈이 자란 곳은 이렇게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런 의식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고 후에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했다고 볼 수 없다.

칼빈의 아버지의 이름은 제라드 코뱅(Gerard Cauvin) 이었다. 그는 근면하고 엄격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칼빈의 어머니는 깜브레(Cambrai)의 여인숙 주인의 딸인 쟌느 르 프랑끄(Jeanne Le Franc)이었다. 제라드는 노용에서 2 마일쯤 떨어진 항구로서 외스(Oise)강을 가로지는 퐁 레베크 (Pont l'Eveque)라는 작은 마을에서 사공(boatman)을 하거나 아니면 물통을 만들고 수리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아버지의 예리하고 조직적인 두뇌를 물려 받았으며 어머니의 경건심을 이어 받았다고 알려진다. 물론 그의 용모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 도시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는 노용 주교 비서 그리고 후에 대성당 참사회 소송 대리인과 그리고 주교의 재정 공중인이 되었다. 이런 교회와 관련된 제라드의 직업은 부르주아로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였고 나용에 있는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했고 후에 칼빈으로 하여금 귀족들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 계기가 된다.

학문의 시작
 
제라드는 칼빈을 노용에 있는 카페뜨 대학(the college of the Capettes)에 보냈다. 그곳에서의 학문적인 프로그램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은 수의 교수진으로 보아 파리에 있는 대학에 비해 교육의 수준은 떨어졌다. 그곳에서의 교육에 만족하지 않은 제라드는 1523년 칼빈이 라 마르셰 대학(the college of La Marche) 에 입학시켰다. 이 대학은 인문주의적 정신을 칼빈에게 주었다. 그곳에서 칼빈은 유명한 라틴어 교수인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 아래서 라틴어를 배웠다. 그는 현대 교육학의 창시자중에 한사람으로서 칼빈에게 인문주의 철학과 기독교 경건을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다. 칼빈은 자신의 데살로니가 전서의 주석(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Thessalonians)을 코디어에게 헌정하였고, 후에 그를 자신이 세운 제네바 대학에서 라틴어 교수로 청빙하였다. 후에 칼빈은 그 대학에서 몽테규 대학(college of Montaigu)으로 옮겼다. 에라스무스와 로욜라를 배출한 그 대학에서 칼빈은 자신의 지적 형성의 큰 발전을 보게된다. 당시 그 대학에는 베다(Beda), 안토니오 코로넬(Antonio Coronel) 그리고 존 메이져(John Major)와 같은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칼빈은 철학과 수사학, 교부들의 작품들을 배울 수 있었다. 몽테규에서는 루터의 사상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칼빈의 아버지는 그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이유는 아마도 법조계의 직업이 부와 명성을 얻게 하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칼빈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오르레앙 대학(University of Orleans)으로 갔다. 그는 거기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하여 레스토알( Pierre de l'Estoile) 밑에서 법률과 수사학을 배운다. 그러나 1년 후에 그는 이탈리아의 법학자 안드레아 알키아티(Andrea Alciati)의 명성을 듣고 부르지 대학(University of Bourges)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열렬한 루터파 신자였던 멜케오르 볼마르(Melchor Wolmar) 교수에게서 헬라어를 배웠다. 칼빈은 헬라어 고전은 물론 신약 성경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볼마르의 루터란 영향이 칼빈의 회심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칼빈은 인문주의자로서 원문 해석에 있어서 필요한 훈련을 배웠다. 후에 성경을 해석하는 위대한 학자로 쓰이게 된다.

1531년 5월에 칼빈의 아버지 제라드가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이제는 아버지의 뜻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하나의 새로운 전환이었다. 그는 파리 왕립 대학(Royal College)로 옮겨 피에르 다네(Pierre Danes) 밑에서 헬라어를 배우고, 바타블(Vatable)에게 히브리어를 배웠다. 칼빈은 1532년 4월 4일 23세의 나이로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해석(Calvin's 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를 출판했는데, 이 책으로 칼빈은 에라스무스에 버금가는 유명한 인문주의자가 된다. 여기서 칼빈은 에라스무스의 본문비평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의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는 것에 대하여 스토아주의적 입장에서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마음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칼빈이 세네카의 관용에 대한 해석을 쓴 것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하여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였다.

칼빈의 회심

칼빈의 이책은 내용의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칼빈 역시 루터의 성경연구가 종교개혁의 기반을 마련한 것처럼 관심을 성경연구에 집중하였다. 칼빈의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파리대학 학장으로 1533년 11월 1일 취임되었을 때 연설문을 도와주게 되는데, 그 연설문의 내용은 기존 로마 카톨릭교회를 비판하고 루터가 주장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교회의 개혁을 호소하였다. 칼빈이 이 연설문을 직접 썼는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도와주었는지 아니면 콥이 혼자서 썼는지는 계속 논쟁되고 있다.

이 연설 이후 그들에 대한 비난과 핍박으로, 니콜라스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결국 파리 남서부 250마일에 위치한 앙굴렘(Angouleme)에 은신처를 정했다. 그는 친구인 루이스 두 틸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에는 교부들의 책을 비롯한 수많은 장서가 있었다. 칼빈 이곳에서 <기독교 강요>의 쓸수 있었다.

칼빈은 1534년 5월 로용을 방문하여 성직자로서 그의 직업을 종결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와 결별을 했다. 1534년에 그는 재세례파의 영혼 수면설 - 죽을 때 영혼은 잠을 자기 시작해서 죽은 자의 마지막 부활 때 잠을 깬다는 교리-에 반대하여 '심령 수면설(Psychopannychia)이라는 책를 발간했다. 여기서는 칼빈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의 영혼는 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534년 10월 18일에. 그들에 대한 박해 이유는 1534년 10월 마르쿠르(Antoine Marcourt)가 로마 교회의 미사를 반대하는 조문들을 붙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무섭게 시작되었다. 칼빈도 결국 망명자로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35년 1월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가서 친구인 콥을 만났다. 그리고 듀 틸레의 서재에서 쓰기 시작한 <기독교 강요>의 탈고를 서둘렀다(1535년 8월).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발행하면서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사를 썼다. 1536년 3월 바젤에서 라틴어로 출판된 <기독교 강요> 초판은 바로 프랑스 신교도들에 대한 변호를 서문에 불였다.
칼빈 바로 이때 갑자스런 회심을 하게된다. 자신의 회심의 날짜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쓴 시편주석의 서문에서는 당시 자신의 회심의 상황을 설명한다.
 

1.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

개혁주의는 칼빈주의 또는 장로교라고도 불리워진다.
쯔빙글리에 의해서 시작되고 칼빈이 완전한 신학체계를 세웠다. 후에 칼빈의 영향으로 오늘날의 모습으로 신학을 형성하였다.

정의
정의를 위한 배경-로마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성경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여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루터란은 적극적으로 신학 전반과 삶에 성경적 변화의 노선에서 전진하지 못하였다. 종교 개혁의 2 세대에 속한 칼빈는 보다 더 성경에 근거하여 철저한 개혁을 강조하였다.

정의 -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와 믿음의 삶을 항상 개혁한다는 사상.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Reformed church- 독일, 화란, 남아공, 미국의 CRC 와 RCA, 헝가리.
Presbyterian church- 스콧트랜드,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한국.
Calvinism- 칼빈의 사상과 철학을 따르는 운동이다.

본질은 같으나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며, 민족적, 언어적, 지역적 차이와 신앙고백이 각각 다르다. 그러나 신앙고백의 핵심 사상과 일반적인 사상은 동일하다.

특징

신학적인 특징- 어떤 하나의 지배적인 개혁주의 중심의 주제보다는 몇 가지의 중요한 사상이 있다.

1. 성경중심의 신학- sola scriptura
1) 쯔빙글리와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강조한다.
쯔빙글리- "젊었을 때 나는 당시의 다른 사람들처럼 인문 교육에 너무 많은 정력을 소모했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온전히 성경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는 철학과 신학이 그것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나는 말씀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는 지점에 도달했다.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교리를 배울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Of the Clarity and Certainty of the Word of God, 1522).
칼빈 -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며, 성경의 가르침은 하늘로부터 왔다(Institutes 1.7.4).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모든 것들의 최고 권위의 근거가 된다는 사상
조직 교회와 혹은 교리 위에 권위가 있고, 종교회의나 논쟁에 있어서도 최종 심판자는 성경으로 모든 문제에 최고 권위를 말한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장 10절)

3) 신학 사상과 성경 해석 방법을 성경의 내용에서 이끌어 내려고 했다.
칼빈이 사용한 간결성과 용이성의 원리가 성경 그 자체에서 사용되었음을 칼빈은 확신하였다.

2. 하나님 중심의 사상
루터란은 인간의 경험을 강조하며, 기독론적 신학이며 복음과 율법의 차이점을 강조. 이신칭의를 강조. 침례교는 구원의 신비에, 감리교는 죄인의 구원에, 로마 카톨릭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에 강조를 하지만 그러나 개혁주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과 만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상을 강조. 하나님 중심과 동시에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한다.

3. 계약신학(언약신학, Covenant Theology)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계약신학에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삼위일체에서 3위는 (인격) 인격적 관계에서 볼 때 상호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계약적이시다. 아담의 행위계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계 약에서 나타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계약사상은 다음과 같다.
Zwingli -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Bullinger - 불링거가 성례전과 구원사의 전개를 취급할 때 나타난다.
Calvin - 언약은 하나님의 은총이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주도권과 함께 인간의 책임성과 믿음의 응답을 강조한다.
Olevianus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일방적인 약속으로서 은혜언약을 이해한다.
본격적으로 계약사상은 코게이우스에 의해 절정을 이루었다.

4. 철학사상 - 유한은 무한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사상 (finitum non capaxinfiniti). 이 표현은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라는 말고 동일하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알려질 수 있다라고 주장하지만, 인간이 완벽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말버그회(1529년)에서 성만찬 논쟁시에 쯔빙글리는 이 사상에 근거하여 성만찬을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현재의 몸은 땅에 있는 떡에 육신의 모양으로 있지 않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루터는 편재사상을 가지고 성만찬을 해석함으로써 의견이 일치를 보지 못하게 된다.
루터는 편재설의 근거하여 또 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있다라는 사상에 근거하여 성만찬의 신학을 설명하였고 지금까지 그 당시의 주장한 편재설을 루터란들은 주장하게 되었다.
멜랑톤은 개혁파를 의식하여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 10항 (1540)- 떡과 포도주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나타난다(vere exhibeantur)라는 타협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참으로 임재한다(vere adsint)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철저한 루터란들은 1540년도 신앙고백을 버린다. 즉 그 물질들 안에, 함께, 위에 참으로 계신다고 말한다.

루터란과 차이점 - 성만찬 논쟁,
루터란 - 속성의 전달(communicatio idiomatum)을 주장함으써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속성의 전달이란 한 쪽의 속성이 다른 쪽의 속성에서도 타당성을 갖는다는 주장 (quae sunt hominis, recte de Deo et contra, quae Dei sunt, de homine dicantur). 신성과 인성의 속성은 각각 상호 교류한다는 뜻이다. 루터는 성만찬에서 영화된 몸의 실체적 임재가 가능하다고 본다. 일치신조는 인격의 통일, 속성의 교통,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이 편재하는 신적 속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에 속하는 일부 속성(전지, 전능, 편재)이 그의 인간적 본성에 전달되어서, 그리스도는 그가 임재하시기로 약속하신 거기에 나누이지 않는 한 인격으로 임재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개혁파의 철학적 원리 - 이 사상이 신학, 정치, 예배에 스며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주권.

5. 예정론 - 이중 예정론(선택과 유기), 어거스틴의 영향과 발전으로 형성됨
바르트는 이중 예정론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되고 버리움을(유기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도르트시조와 웨스트미스터 신앙고백서.
예정론은 막스웨버의 논문에 근거할 때 자본주의 정신에 영향을 준 것은 설득력이 있다.
앙드레 비엘의 해석은

6. 특징이 되는 중요 교리- 5대 교리- 도르트회의에서 결정
전적 타락, 제한 속죄, 불가항력인 은혜, 무조건적인 선택, 성도의 견인

7. 신조
화란 개혁파에서 하이델베르그 문답서, 돌트 신경, 벨직 신앙고백서를 인정하고, 영어권의 스코트랜드와 영국, 미국 등에서 웨스트민스터 대. 소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을 사용한다.

해석학적인 특징

1.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성경의 권위와 명료성에서 나왔다. 칼빈의 성경해석학을 참조하라.
쯔빙글리와 칼빈, 불링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등.

2. 성령의 내적 조명(testimonium spirtus sancti internum)
성령의 역사를 말씀함께 강조한다.
말씀은 객관적 요소를 공급하고 성령은 주관적 요소를 공급한다.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을 통한 해석을 주장한다.

일반적인 특징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제1 스위스 신조, 하이델베르그, 도르트, 벨직.

정치 - 장로 정치, 당회, 노회, 총회. 회중교회와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사회 - 신정 정치적 체제, 제네바, 카이퍼의 영역주권,

경제 -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 Max Weber- 예정론 사상에 따라 신의 소명과 직업에 소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는 사상

문화 -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 사회의 모든 문화 속에서 실현되게 한다.
 
개혁신학의 전망

기존의 성경적인 사상을 이어받고,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개혁 신학적 도약을 모색해야 한다. 신학을 발전을 위한 무한한 연구가 필요하다. 단지 방어적인 수동적인 자세와 폐쇠적이며 배타적인 자세를 버리고 현대인 포용할 수 있는 수준 높은 학문적인 발전을 가져야 한다.
첨단 과학 문명시대를 이끌 수 있는 성경적 사상을 인출해야 한다.
문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현대인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현대 문명과 사회, 국가의 주인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올바른 인간상을 제시해야 한다. 죄인이며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일반 은총에 사는 인간)을 균형있게 말하여야 한다.
http://blog.daum.net/kkho11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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