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캘빈
목회자 캘빈
엘시 맥키 미국 프린스톤신학교 교회사 교수
캘빈은 제네바의 목사였으며 성경학자며 설교자였고 평신도와 목회자 리더십이 협력하여 일하는 교회정치의 설계자였다. 그는 교회가 시정부와 상호 협력하여 기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아버지였으며, 종교난민들을 제네바로 끌어당겨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선교하게 만든 자석과 같은 존재였고, 개혁주의 전통의 갈래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신학자였으며, 제네바와 같은 작은 도시를 지적으로나 자기 훈련의 면에서 유명한 국제적 운동의 중심이 되게 한 프랑스 난민이었다.
존 캘빈은 나무통을 만드는 사람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드는 누와이용Noyon 시민의 딸과 결혼하면서 당시 오래되고 유명한 교구의 중심인 누와이용 주교의 대리인으로 신분이 상승되었다. 캘빈과 그의 형 찰스 캘빈의 사제직은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찰스 캘빈은 나중에 신부가 되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파리로 떠날 준비가 되었을 즈음 캘빈도 이미 신부가 되기 위한 첫 과정에 입문해 있었고 성직록도 받았다이 성직록은 주교대리가 실제적인 의무를 행하는 동안 장래가 촉망되는 청소년이 교구 명의 신부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성직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학업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캘빈이 파리에서 인문학 수업에 매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점점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주교의 세속적 대리인으로 신부가 직접 다루기엔 적절하지 않은 일들을 맡아 처리하는 일을 했던 제라드는 빚을 지게 되었고, 결국 출교되었다. 이에 제라드는 캘빈이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캘빈은 1528년에 오를레앙대학에서 법학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성공적으로 첫 번째 법학학위를 마친 캘빈은 지금의 박사학위에 해당하는 다음 단계에 도전했다. 그러나 성경을 포함한 “원전으로 돌아가기back to the sources”라는 다른 종류의 지적이면서 종교적인 열정에 빠져 학위를 마치지는 못했다.
인문주의라고 알려진 이 운동은 교수방법을 교과서에서 1차 자료로, 증명에서 설득으로 바꾸는 교육의 혁명이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성경에 대해 한 말을 배우는 대신 성경 자체를 원어로 읽었고, 변증법으로 진리를 증명하는 대신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진리의 사람이 되도록 설득하기 원했다.
캘빈의 열정적인 마음은 법률과 언어고전 라틴어, 헬라어와 히브리어 중심의 인문주의적 연구로 쏠렸고, 그와 그의 친구들은 프랑스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어난 복음적 운동에 가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 법학도였던 캘빈이 개혁자가 되었다. 캘빈의 “회심”은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매우 내향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자신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으나 유일한 자서전적인 기록인 1557년 「시편주석」 서문에 자신의 회심을 “subito conversio”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subito”가 “갑작스런”인지 “예상하지 못했던”인지, 또는 “이신칭의와 은혜만으로”를 통해 복음의 이해를 새롭게 했다는 것인지, 전통 교회와의 단절을 말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개혁에 시동을 건 캘빈
분명한 것은 1530년대 초반에 캘빈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비전통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가톨릭교 내부의 개혁자들과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세 후반 서양 기독교는 다양한 활동들로 채워진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은 가톨릭교회의 타락을 개혁하고, 특별히 경건의 심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러한 개혁들이 교회 조직 내에서 어떻게 신학적·제도적으로 형태화되었는가이다. 사실 처음엔 누구도 교회 밖에서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종교적인 열정과 인문주의에 대한 새로운 지적 추구는 이러한 개혁이, 이전 선각자들이 시도했던 개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기존의 제도교회와의 결별을 감수하는 차원의 개혁임을 확인시켰다. 캘빈의 친구들 중 일부는 전통 교회에 남아 있었지만 프랑스복음운동 소속의 과격한 개혁자들이 개혁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결단의 때는 찾아왔다.
1533년 11월 1일 파리대학교 니콜라스 콥 총장의 취임 연설이 논란이 되었으며, 캘빈은 이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 연설의 내용이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에라스무스나 루터의 소리를 분명하게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소르본대학교당시에 가장 유명하면서도 신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이었던 신학교수들이 있었다의 반응은 예민했다. 캘빈은 빠른 시간 안에 도시를 떠나야 했다파리에 남아 있는 캘빈에 대한 유일한 공적인 표지는 그 날 캘빈이 지붕과 지붕을 뛰어 넘으며 도시를 빠져나갔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개신교도로 전향한 캘빈은 그 후 몇 달간 제도교회와 작별하면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당시 캘빈이 개신교로 전향한 것은 제도교회가 교회의 표지를 잃어버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에 캘빈은 로마가톨릭교회 안에도 복음을 순수하게 전파하고 성례가 바로 행해지는 교회공동체가 있음을 확인했다「기독교강요」 4권 1장 9절, 이후로는 권, 장. 절의 숫자만 표기함. 1534년 5월에 캘빈은 성직록을 포기하고, 복음적 친구였던 루이 뒤 티예와 함께 지냈는데 뒤 티예는 좋은 서재를 가지고 있어서 젊은 변호사 캘빈이 신학을 공부하기에 적절했다. 그 해 말에 캘빈과 뒤 티예는 개신교와 인문주의의 도시 바젤로 갔다. 이것은 그의 나머지 생애가 걸린 망명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 뒤 티예는 로마가톨릭교회에서의 큰 승진 기회를 보고 캘빈이 이해했던 복음을 포기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캘빈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에 대한 관심을 져버린 적이 없었지만 이제 이국 땅에서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역자 주: 개신교도을 위해 일했다.
「기독교강요」의 출간
캘빈이 그의 유명한 작품 「기독교강요」 초판을 쓰게 된 기본적인 동기는 프랑스 신자들의 상황이었다. 이신칭의, 은혜만으로, 성경만으로 등의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강해지는 프랑스와 1세의 핍박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고, 캘빈은 이들을 이단과 반란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변론하기 위해 변증 및 교리교육서로서 「기독교강요」를 썼다1535년 재세례파의 도시 뮌스터가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과격주의로 가고 있었던 상황이라 프랑스에서도 개신교도들의 적敵은 개신교도들을 국가모반 혐의로 기소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 반란 혐의는 특별히 중요한 문제였다.
캘빈은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은 책에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교리교육서을 요약설명하고, 서문을 프랑스와 1세에게 씀으로써 이 책이 그에게 헌정하는 변증서임을 밝혔다. 잠시 핍박이 그친 틈을 타 누와이용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길에 오르던 1536년 3월 바젤에서 이 책이 출판되었다. 개신교의 땅으로 돌아오면서 캘빈은 프랑스 종교난민들이 모여 있는 스트라스부르로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네바를 통과해야 했다. 캘빈은 무슨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제네바로 향했다.
제네바는 작은 도시국가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그 위치가 대단히 중요했다. 15세기까지는 상업적으로 무역 교차로 역할을 했으며, 1520년대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세력이 서로 끌어당기는 정치적인 지역이 되었다. 제네바 사람들은 1528년에 독립을 얻기 위해 그들의 주교를 거부했다.
막 개신교로 전환한 도시 베른은 설교하고자 제네바로 떠난 윌리엄 파렐프랑스 복음 운동의 멤버였음을 지원했다. 몇 년간의 각고 끝에 1536년 5월에 파렐과 피에르 비레는 제네바 시민들이 “복음을 따르기”로 투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당시 스위스의 북쪽과 동쪽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주들이 위험스럽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른과의 동맹이 제네바의 주요 군사적 보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네바를 스위스연방으로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동쪽으로 사보이의 가톨릭 공작은 로마를 위해 이교도들을 복속시키려고 애쓰고 있었기에이것은 공작가家의 아들이 권력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 개신교로 전환한 제네바의 결정은 그 후 거의 70년간의 정치적인 위험을 초래했다. 이것이 이제는 캘빈이라는 이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제네바시와 캘빈이 인연을 맺게 될 당시의 상황이다.
제네바는 동맹관계 속에서 개신교가 되긴 했지만 완전히 개혁되거나reformed 혹은 개혁주의적Reformed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비텐베르그, 스트라스부르, 바젤 또는 취리히와 같은 주요 개신교 도시들과 달리 제네바에는 대학교도 없었고, 그 도시 출신의 인문주의자나 고학력의 학자 같은 주요 인사도 없었다. 도시민 중심의 이 도시는 중세 후기 주교 치하에서 도시국가를 발전시켰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겨우 외교 문제내부 문제도 일부 있었다를 직접 다루기 시작했다. 도시의 주요 지도자들이 로마와 결별할 수 있도록 확신을 주고 신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준 학식 있는 설교자들은 제네바 바깥에서 왔는데 초기뿐만 아니라 그 후 몇 세대에 걸쳐 그랬다. 그들은 외국인이었지만 그 도시에 매우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분명 귀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외국인일 뿐이었다.
1536년이 되었을 때 제네바에는 설교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파렐은 사람들을 회심시킬 수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도움이 없이 혼자서 그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조직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나온 책자 「기독교강요」의 저자 캘빈이야말로 바로 파렐이 원하던 사람이었다.
7월에 캘빈이 제네바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파렐은 곧바로 캘빈이 유숙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사실 그때까지 캘빈은 자신이 믿음을 변호하기 위한 저술 활동에 부름을 받았으며, 목회에 대한 부르심은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파렐의 간청에서 교회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가르치는 사역에 동의했다. 그의 가르침은 곧 여러 가지 형태를 갖게 되었다. 라틴어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라틴어로 성경을 가르치고, 불어로 설교하고그의 불어는 제네바 불어와는 좀 달랐다, 교회법을 만들고 파렐의 신앙고백을 보완하여 교리교육서를 준비했다.
새로운 교회법은 제네바의 구미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제네바 시민들은 이미 베른에서 그들의 “대부들”이 행했던 츠빙글리식의 교회-국가 조직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주변 도시들을 식민화시키고 제네바를 사보이로부터 구하는 데 기여한 자신들의 보호자들을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회의 훈련과 권징을 시의원들에게 맡기는 츠빙글리식의 교회 정치를 택하는 것이 시의회에 더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의 권위에 눌려 어떻게든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고 하는 시정부 관계자들로서는 오랫동안 원하던 바였다. 기껏 가톨릭 주교를 피한 제네바 시민들이 새로운 설교자들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원할 리 없었다. 그래서 제네바는 이 새로운 설교자들에게 교구 사역자로서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영구적인 지위역자주: 시민권과 같은 법적 지위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성일, 세례단, 성찬 참여 등에 대한 논쟁은 마지막 지푸라기였으며 제네바는 결국 파렐과 캘빈 그리고 그들의 동료에게 도시를 떠나도록 명했다.
캘빈은 상처를 입었지만 또한 풀려난 느낌이었다. 바젤로 가서 저작 활동을 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던 마틴 부처가 파렐이 그랬던 것처럼 캘빈을 불렀다. 부처는, 요나 선지자의 예를 들어, 젊은 학자 캘빈을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불어권 난민들의 목사가 되도록 불렀다. 이 난민들 가운데서 캘빈은 아내이면서 동반자가 될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를 찾았다. 드 뷔르는 당시 어린 아이 둘을 가진 과부였다.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한 얼마 후에 캘빈은 그의 새로운 회중들에게 예배를 위한 자료를 제공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는 불어로 발간한 시편찬양집이다1539년. 이 찬송집은 이후 더 많은 시편 찬송을 포함해 편찬되었고, 다른 언어로도 번역되었다. 1562년에 이르면 시편 150편 전 편이 특별히 작곡된 곡에 붙여 찬송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시편찬송집은 개혁주의 교단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서가 되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1538년부터 1541년까지의 3년은 물질적인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캘빈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동료 난민들의 목회자로 일하면서 부처와 같은 동료 목사들과 연합하여 시정부와 상대하고, 새롭게 시작한 인문주의 학교에서 가르치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1540년대 초기에 있었던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콜로퀴에 관계하기 시작하는 것을 통해 만족스러운 목회의 경험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는 초판의 내용을 많이 확대하여 「기독교강요」 제2판을 출판했다1539년. 다음 해에 그는 첫 번째 주석으로 로마서주석을 썼다. 다른 주제들을 다루는 소논문도 썼는데 1541년에 출판된 “성찬에 관한 소논문”이 한 예다. 또한 그는 고국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위해 「기독교강요」를 불어로 번역했다.
제네바 교구목사로 돌아온 캘빈
1540년이 되었을 때 제네바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캘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스트라스부르와 스위스 개신교 공동체의 지도자인 파렐과 결국엔 캘빈까지 이에 동의하게 되었다. 교회의 뜻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인 캘빈은 1541년 9월 교구목사말씀과 성찬을 담당하는 목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번에는 방문 설교자가 아니었다로서 제네바로 돌아와 1564년 55세 생일을 얼마 앞두고 임종을 맞을 때까지 제네바를 섬겼다. 23년 반 동안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영주권자로 살았다1559년 말에 제네바시가 선물로 시민권을 줄 때까지. 그는 외국인으로, 망명자로 제네바의 주임 목사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제네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갈등을 겪고, 종교적인 난민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와 사회를 개혁했다. 개혁의 수단은 다양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었다.
설교는 목사인 캘빈에게 평생 동안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주일날 두 번 그리고 격주로 매일 그는 생피에르교회 혹은 마들렌교회의 강대상에 헬라어 성경이나 히브리어 성경을 들고 올라가 설교했다. 제네바 목사회에 속한 목사는 누구나 세 개 교구교회의 설교를 돌아가면서 맡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는 제네바 교인들이 주일날 세 번의 예배설교와 한 번의 교리교육, 그리고 주중에는 적어도 두 교회에서 매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캘빈의 설교들은 설교가 그대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개혁자들의 설교와 구별되었는데 그 이후로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당시에는 설교자가 자신이 설교했던 것을 잘 다듬어서 출판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제네바의 프랑스 난민들은 성경에 대한 캘빈의 설명들을 보존하기 위해 1549년부터 속기사를 고용하여 그의 설교를 기록하게 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설교들 중 사무엘서 1장, 2장과 욥기 강해는 캘빈이 주석서를 쓰지 않은 부분이기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
바른 성경 강해를 위해서는 가톨릭 사제들이 받았던 것과는 다른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필요했다. 루터나 츠빙글리, 부처 그리고 다른 개혁자들과는 달리 제네바에는 제네바 출신으로서 대학교육을 받은 인물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캘빈은 프랑스인외국인을 새로운 동료로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불어로 하는 “설교 연습” 시간을 소개하고, 설교자들과 미래의 설교자들을 위해 라틴어 성경 강의를 했다. 이러한 정규적인 강의들은 수강생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캘빈에 의해 교정되어져 주석서의 기본이 되었다. 캘빈은 요한 2서와 3서, 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들과 대부분의 구약성경창세기에서 여호수아, 시편, 그의 임종으로 인해 에스겔서가 미완성으로 남겨졌지만 대부분의 예언서을 주석했다. 캘빈은 「기독교강요」를 계속해서 확대했는데 이것은 목사들에게 핸드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캘빈은 이것으로 강의하지는 않았다. 목사들은 성경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독교강요」와 주석을 함께 읽었으며, 이로써 이단과 각종 폐단에 대항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
캘빈의 교회 개혁 : 성례, 예배, 교회정치, 직분
성례는 개혁주의 제네바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지켜졌다. 이는 공공성과 전체성에 강조를 둔 것으로 설교와 전 교인의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매일 예배가 있었으므로 세례는 어느 날에든지 행해질 수 있었다. 제네바 사람들은 개인적이고 가족 중심적이었던 세례식이 공적으로 전체적인 예배 시간에 거행되는 변화를 큰 어려움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끌로드, 멜키오르, 발타자르 등과 같이 유명한 성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택하거나 대부들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금지하는 세례명 개혁은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예배력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으며 주일날은 새로운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주의 만찬은 1년에 4회, 즉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9월에 행했다. 캘빈의 신약적 이상은 매주 만찬행 2:42을 행하는 것이었으나 적절한 준비가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달에 한 번 성찬으로 만족했으나 제네바 평신도들은 연 1회 성찬이라는 전통 속에 자라났기에 그 이상의 빈번한 성찬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고전 11: 26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종교개혁 이전에 행해졌던 고해성사를 통해 경험한 사제들의 권위를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성찬 준비에 대한 캘빈의 아이디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 이후 시의원들과 목사들간의 원만한 타협으로 덜 빈번한 성찬역자주: 1년에 4회과 더 온전한 준비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캘빈의 이해에 근거한 것이었다.
주의 성찬은 종교개혁기 동안 아마도 가장 뜨거운 논쟁을 거친 주제였기에 이에 대한 캘빈의 관심은 제네바를 넘어서 확대되었다.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츠빙글리보다는 루터에 가까웠다. 그러나 캘빈은 루터파들과 성찬을 함께 하는 것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츠빙글리의 후계자였던 하인리히 불링거와 일하면서 캘빈은 츠빙글리파와 캘빈주의자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여 1549년 취리히 합의서Zurich Consensus를 채택하는 공을 세웠다. 이 합의서는 개혁주의 전통을 효율적으로 세운 성찬에 대한 양자간의 합의를 담고 있다. 이것은 신앙의 일치를 위해서는 성찬에 관한 약간의 타협을 마다하지 않은 캘빈의 역량에 대한 또 다른 증명이 되었다.
캘빈은 예배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중심이 된다고 믿었는데 이때 예배는 공예배 시간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그들의 믿음을 이해하고 살아가도록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리교육서 교육과 시편찬양을 통한 쉬지 않고 기도하기는 이를 위한 두 가지 교육법이었다. 캘빈은 믿음은 머리가 아닌 마음의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마음을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은 학교에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했으며, 궁극적으로 1559년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우게 되었다. 제네바가 의무교육을 입법화시킨 첫 번째 도시 중 하나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개신교도들은 비록 실천면에서 확실한 차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와 성례, 교리교육서, 기도가 그들이 물려받은 교회를 개혁하는 데 중심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개신교 개혁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형성하는 데 필요한 방법적인 차이점이 좀 더 많이 부각된 듯하다.
사실 이러한 차이점은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다. 개신교 개혁자들은 성경이 구원에 관한 모든 것, 즉 이신칭의와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의 유일한 권위가 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캘빈은 이것을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은혜와 우리의 마음과 뜻을 움직이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받아들였다「기독교강요」3.11.2; 3.2.7. 보통 이러한 은혜는 교회의 설교와 성례를 통한 “보이는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보이는 교회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개신교의 다양한 그룹 간에는 “성경만으로”라는 원리가 어떻게 지상 교회의 조직에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를 보였다. 루터파들은 교회 조직예를 들어 목회나 예전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한다고 믿은 반면,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은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두 번째 단계second level”를 포함한다고 보았다. 구원esse을 위한 본질적인 것에 교회를 바르게 조직함bene esse을 더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르게 조직함”이란 구원에는 필수적이지 않지만 지상 교회로서 살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들을 말한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타난 예전의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바와 같지만 교회 목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bene esse 라는 큰 표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츠빙글리식의 개혁주의는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속에서 교회정치에 대한 가르침을 찾았다. 이들은 목사들에게는 설교를, 기독군주들다윗와의 후예들에게는 훈련과 권징 및 빈자 구호, 도덕적 사회적 문제들을 통치하도록 맡기는 것에 만족했다. 이러한 츠빙글리식의 이해가 처음 제네바에 소개된 개신교 모델이었다.
그러나 캘빈은 교회정치는 신약성경에서만 발견된다고 믿었다. 또한 사도 모델 교회 시절에는 기독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바르게 질서 잡힌 교회를 위해 기독 군주들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캘빈은 기독교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의 권위는 협력해야 하며, 이에 따라 군주가 장로나 집사로 선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설교와 가르침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삶을 돌아보고 가난한 자를 위한 목회 프로그램을 하는 데 있어서는 교회의 자율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신도 교회” 사역자들과 독립적이거나 시정부와 협력할 수 있는 교회정치는 사실상 교회론에서 캘빈의 독특한 기여 중 두 가지에 해당된다.
장로들과 그들이 섬긴 기관인 컨시스토리는 캘빈에게서 가장 흔하게 오해받아 온 교회 교육 프로그램이다. 캘빈은 그의 신약성경 이해에 따라 두 종류의 장로two kinds of Presbyters: 목사들과 장로가 한 컨시스토리에서 섬기는데 이 기관은 성도의 표지「기독교강요」4.1.8를 따라 믿음의 지식과 실천 양자를 관할하는 교회의 기구였다. 제네바 컨시스토리는 종교적인 미신 같은 문제들을 담당했는데, 예를 들면 성수 혹은 묵주,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 등이다. 또한 공동체 내의 불화나 도덕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에 관한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로버트 킹던은 컨시스토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웃이나 가족간의 싸움을 다루는 “의무적 상담 서비스”에 집중했다고 말한다.1 이 같은 컨시스토리의 활동은 성찬을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믿음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와 공동체에서 관계의 화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필수적인 준비로서 제네바 사람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전설과는 달리 컨시스토리에서 다뤄진 사건들의 대부분은 출교까지 가지 않고 해결되었다. 사실 출교가 실시되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성례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출교는 출교자들이 기본지식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불어로 외우는 것을 갖게 되거나 이웃에게 적절한 용서를 하고 화해를 나눌 때까지만 지속되었다. 캘빈의 치리는 “공적”이며 알려진 죄만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찬 정지는 자신의 죄에 집중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제네바의 치리가 사생활을 침입하거나 간섭하는 것으로 충분히 보일 수 있지만 근대 초기 유럽식 삶의 한 결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마치 작은 마을에 사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잘 아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캘빈의 교회 성도들은 다툼이 일어나면 서로에게 책임을 질 줄 알고 화해를 가져올 행동을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집사직의 리더십이 결코 장로들의 과제와 같은 것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종종 이들의 사역은 소홀히 여겨졌다. 집사직은 가난한 사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한 목회를 위해 설치된 상설위원회와 같은 것이었다. 캘빈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도록 맡겨진 것이라고 이해했다. 각 사람은 자신의 달란트와 직업을 즐겁고 지혜롭게 사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신자들은 일상의 일을 이웃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소명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즐길 뿐만 아니라 책임감 있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개인적은 나눔은 매우 중요하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다. 몸으로서의 교회는 자신을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는 책임 있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집사직은 바르게 질서 잡힌 교회의 절대적인 한 부분이 되었다.
캘빈은 신약성경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집사, 곧 재정을 담당하여 분배하는 집사와 아프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손수 도와주는 여집사가 있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여자 집사는 종속적이었고 실제로 캘빈파 교회에서 이를 시행한 교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뵈뵈를 집사라고 하는 로마서 16장 1~2절의 독특한 해석을 통하여 여성들에게 교회의 항존직을 마련한 개신교 개혁자는 캘빈밖에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은, 제네바가 신앙의 이유로 자신의 나라를 떠나야 했던 수많은 종교난민들을 받는 도시가 되면서 제네바 시민을 돕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1550년대 난민들의 물결은 홍수처럼 늘어났는데 그 중 다수는 프랑스인이었고, 나머지는 이태리, 영국, 스페인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교회의 자율성을 가르치는 캘빈의 교회론이 가진 특성 때문에 “십자가를 진 교회들”은 캘빈의 신학에 더 끌리게 되었다. 제네바의 피난민 회중들은 자기들 스스로 집사를 세우고 조직을 만들었으며,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게 된 사람들은 캘빈의 가르침을 가지고 가서 자신들만의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난민들의 개인적인 경험은 제네바 아카데미의 보다 넓은 교회를 위한 목사 교육의 중요성과 결합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개혁주의 전통이 캘빈의 영향력을 통해 국제적이며 에큐메니칼 지향성을 온전하게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캘빈은 제네바의 목사였으며 성경학자며 설교자였고 평신도와 목회자 리더십이 협력하여 일하는 교회정치의 설계자였다. 그는 교회가 시정부와 상호 협력하여 기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아버지였으며, 종교난민들을 제네바로 끌어당겨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선교하게 만든 자석과 같은 존재였고, 개혁주의 전통의 갈래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신학자였으며, 제네바와 같은 작은 도시를 지적으로나 자기 훈련의 면에서 유명한 국제적 운동의 중심이 되게 한 프랑스 난민이었다. 캘빈은 일치 속에서도 놀라운 다양성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살아 있는 신앙에 깊이 헌신하는 많은 교회들이 한 가족이 되도록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산을 남겨준 교회의 사람churchman이었다.
주(註)
1. Robert M. Kingdon, “Calvin and the Family: The Work of the Consistory in Geneva,” in Calvin’s Work in Geneva, ed. R. C. Gamble(New York: Garland, 1992), 96. (역자주: 제네바 컨시스토리는 당회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구성원의 내용상 현재 노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컨시스토리의 사역에 관하여서는 역자의 논문, 「제네바 컨시스토리: 캘빈의 신학과 목회의 접목」,『한국기독교신학논총』18집, 한국기독교학회, 2000을 참고하시오).
엘시 맥키 | 2009. 7.
http://blog.daum.net/kkho1105/6313
엘시 맥키 미국 프린스톤신학교 교회사 교수
캘빈은 제네바의 목사였으며 성경학자며 설교자였고 평신도와 목회자 리더십이 협력하여 일하는 교회정치의 설계자였다. 그는 교회가 시정부와 상호 협력하여 기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아버지였으며, 종교난민들을 제네바로 끌어당겨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선교하게 만든 자석과 같은 존재였고, 개혁주의 전통의 갈래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신학자였으며, 제네바와 같은 작은 도시를 지적으로나 자기 훈련의 면에서 유명한 국제적 운동의 중심이 되게 한 프랑스 난민이었다.
존 캘빈은 나무통을 만드는 사람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드는 누와이용Noyon 시민의 딸과 결혼하면서 당시 오래되고 유명한 교구의 중심인 누와이용 주교의 대리인으로 신분이 상승되었다. 캘빈과 그의 형 찰스 캘빈의 사제직은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찰스 캘빈은 나중에 신부가 되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파리로 떠날 준비가 되었을 즈음 캘빈도 이미 신부가 되기 위한 첫 과정에 입문해 있었고 성직록도 받았다이 성직록은 주교대리가 실제적인 의무를 행하는 동안 장래가 촉망되는 청소년이 교구 명의 신부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성직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학업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캘빈이 파리에서 인문학 수업에 매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점점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주교의 세속적 대리인으로 신부가 직접 다루기엔 적절하지 않은 일들을 맡아 처리하는 일을 했던 제라드는 빚을 지게 되었고, 결국 출교되었다. 이에 제라드는 캘빈이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캘빈은 1528년에 오를레앙대학에서 법학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성공적으로 첫 번째 법학학위를 마친 캘빈은 지금의 박사학위에 해당하는 다음 단계에 도전했다. 그러나 성경을 포함한 “원전으로 돌아가기back to the sources”라는 다른 종류의 지적이면서 종교적인 열정에 빠져 학위를 마치지는 못했다.
인문주의라고 알려진 이 운동은 교수방법을 교과서에서 1차 자료로, 증명에서 설득으로 바꾸는 교육의 혁명이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성경에 대해 한 말을 배우는 대신 성경 자체를 원어로 읽었고, 변증법으로 진리를 증명하는 대신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진리의 사람이 되도록 설득하기 원했다.
캘빈의 열정적인 마음은 법률과 언어고전 라틴어, 헬라어와 히브리어 중심의 인문주의적 연구로 쏠렸고, 그와 그의 친구들은 프랑스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어난 복음적 운동에 가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 법학도였던 캘빈이 개혁자가 되었다. 캘빈의 “회심”은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매우 내향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자신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으나 유일한 자서전적인 기록인 1557년 「시편주석」 서문에 자신의 회심을 “subito conversio”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subito”가 “갑작스런”인지 “예상하지 못했던”인지, 또는 “이신칭의와 은혜만으로”를 통해 복음의 이해를 새롭게 했다는 것인지, 전통 교회와의 단절을 말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개혁에 시동을 건 캘빈
분명한 것은 1530년대 초반에 캘빈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비전통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가톨릭교 내부의 개혁자들과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세 후반 서양 기독교는 다양한 활동들로 채워진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은 가톨릭교회의 타락을 개혁하고, 특별히 경건의 심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러한 개혁들이 교회 조직 내에서 어떻게 신학적·제도적으로 형태화되었는가이다. 사실 처음엔 누구도 교회 밖에서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종교적인 열정과 인문주의에 대한 새로운 지적 추구는 이러한 개혁이, 이전 선각자들이 시도했던 개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기존의 제도교회와의 결별을 감수하는 차원의 개혁임을 확인시켰다. 캘빈의 친구들 중 일부는 전통 교회에 남아 있었지만 프랑스복음운동 소속의 과격한 개혁자들이 개혁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결단의 때는 찾아왔다.
1533년 11월 1일 파리대학교 니콜라스 콥 총장의 취임 연설이 논란이 되었으며, 캘빈은 이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 연설의 내용이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에라스무스나 루터의 소리를 분명하게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소르본대학교당시에 가장 유명하면서도 신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이었던 신학교수들이 있었다의 반응은 예민했다. 캘빈은 빠른 시간 안에 도시를 떠나야 했다파리에 남아 있는 캘빈에 대한 유일한 공적인 표지는 그 날 캘빈이 지붕과 지붕을 뛰어 넘으며 도시를 빠져나갔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개신교도로 전향한 캘빈은 그 후 몇 달간 제도교회와 작별하면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당시 캘빈이 개신교로 전향한 것은 제도교회가 교회의 표지를 잃어버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에 캘빈은 로마가톨릭교회 안에도 복음을 순수하게 전파하고 성례가 바로 행해지는 교회공동체가 있음을 확인했다「기독교강요」 4권 1장 9절, 이후로는 권, 장. 절의 숫자만 표기함. 1534년 5월에 캘빈은 성직록을 포기하고, 복음적 친구였던 루이 뒤 티예와 함께 지냈는데 뒤 티예는 좋은 서재를 가지고 있어서 젊은 변호사 캘빈이 신학을 공부하기에 적절했다. 그 해 말에 캘빈과 뒤 티예는 개신교와 인문주의의 도시 바젤로 갔다. 이것은 그의 나머지 생애가 걸린 망명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 뒤 티예는 로마가톨릭교회에서의 큰 승진 기회를 보고 캘빈이 이해했던 복음을 포기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캘빈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에 대한 관심을 져버린 적이 없었지만 이제 이국 땅에서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역자 주: 개신교도을 위해 일했다.
「기독교강요」의 출간
캘빈이 그의 유명한 작품 「기독교강요」 초판을 쓰게 된 기본적인 동기는 프랑스 신자들의 상황이었다. 이신칭의, 은혜만으로, 성경만으로 등의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강해지는 프랑스와 1세의 핍박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고, 캘빈은 이들을 이단과 반란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변론하기 위해 변증 및 교리교육서로서 「기독교강요」를 썼다1535년 재세례파의 도시 뮌스터가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과격주의로 가고 있었던 상황이라 프랑스에서도 개신교도들의 적敵은 개신교도들을 국가모반 혐의로 기소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 반란 혐의는 특별히 중요한 문제였다.
캘빈은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은 책에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교리교육서을 요약설명하고, 서문을 프랑스와 1세에게 씀으로써 이 책이 그에게 헌정하는 변증서임을 밝혔다. 잠시 핍박이 그친 틈을 타 누와이용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길에 오르던 1536년 3월 바젤에서 이 책이 출판되었다. 개신교의 땅으로 돌아오면서 캘빈은 프랑스 종교난민들이 모여 있는 스트라스부르로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네바를 통과해야 했다. 캘빈은 무슨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제네바로 향했다.
제네바는 작은 도시국가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그 위치가 대단히 중요했다. 15세기까지는 상업적으로 무역 교차로 역할을 했으며, 1520년대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세력이 서로 끌어당기는 정치적인 지역이 되었다. 제네바 사람들은 1528년에 독립을 얻기 위해 그들의 주교를 거부했다.
막 개신교로 전환한 도시 베른은 설교하고자 제네바로 떠난 윌리엄 파렐프랑스 복음 운동의 멤버였음을 지원했다. 몇 년간의 각고 끝에 1536년 5월에 파렐과 피에르 비레는 제네바 시민들이 “복음을 따르기”로 투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당시 스위스의 북쪽과 동쪽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주들이 위험스럽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른과의 동맹이 제네바의 주요 군사적 보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네바를 스위스연방으로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동쪽으로 사보이의 가톨릭 공작은 로마를 위해 이교도들을 복속시키려고 애쓰고 있었기에이것은 공작가家의 아들이 권력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 개신교로 전환한 제네바의 결정은 그 후 거의 70년간의 정치적인 위험을 초래했다. 이것이 이제는 캘빈이라는 이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제네바시와 캘빈이 인연을 맺게 될 당시의 상황이다.
제네바는 동맹관계 속에서 개신교가 되긴 했지만 완전히 개혁되거나reformed 혹은 개혁주의적Reformed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비텐베르그, 스트라스부르, 바젤 또는 취리히와 같은 주요 개신교 도시들과 달리 제네바에는 대학교도 없었고, 그 도시 출신의 인문주의자나 고학력의 학자 같은 주요 인사도 없었다. 도시민 중심의 이 도시는 중세 후기 주교 치하에서 도시국가를 발전시켰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겨우 외교 문제내부 문제도 일부 있었다를 직접 다루기 시작했다. 도시의 주요 지도자들이 로마와 결별할 수 있도록 확신을 주고 신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준 학식 있는 설교자들은 제네바 바깥에서 왔는데 초기뿐만 아니라 그 후 몇 세대에 걸쳐 그랬다. 그들은 외국인이었지만 그 도시에 매우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분명 귀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외국인일 뿐이었다.
1536년이 되었을 때 제네바에는 설교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파렐은 사람들을 회심시킬 수는 있었지만 결정적인 도움이 없이 혼자서 그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조직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나온 책자 「기독교강요」의 저자 캘빈이야말로 바로 파렐이 원하던 사람이었다.
7월에 캘빈이 제네바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파렐은 곧바로 캘빈이 유숙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사실 그때까지 캘빈은 자신이 믿음을 변호하기 위한 저술 활동에 부름을 받았으며, 목회에 대한 부르심은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파렐의 간청에서 교회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가르치는 사역에 동의했다. 그의 가르침은 곧 여러 가지 형태를 갖게 되었다. 라틴어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라틴어로 성경을 가르치고, 불어로 설교하고그의 불어는 제네바 불어와는 좀 달랐다, 교회법을 만들고 파렐의 신앙고백을 보완하여 교리교육서를 준비했다.
새로운 교회법은 제네바의 구미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제네바 시민들은 이미 베른에서 그들의 “대부들”이 행했던 츠빙글리식의 교회-국가 조직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주변 도시들을 식민화시키고 제네바를 사보이로부터 구하는 데 기여한 자신들의 보호자들을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회의 훈련과 권징을 시의원들에게 맡기는 츠빙글리식의 교회 정치를 택하는 것이 시의회에 더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의 권위에 눌려 어떻게든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고 하는 시정부 관계자들로서는 오랫동안 원하던 바였다. 기껏 가톨릭 주교를 피한 제네바 시민들이 새로운 설교자들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원할 리 없었다. 그래서 제네바는 이 새로운 설교자들에게 교구 사역자로서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영구적인 지위역자주: 시민권과 같은 법적 지위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성일, 세례단, 성찬 참여 등에 대한 논쟁은 마지막 지푸라기였으며 제네바는 결국 파렐과 캘빈 그리고 그들의 동료에게 도시를 떠나도록 명했다.
캘빈은 상처를 입었지만 또한 풀려난 느낌이었다. 바젤로 가서 저작 활동을 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던 마틴 부처가 파렐이 그랬던 것처럼 캘빈을 불렀다. 부처는, 요나 선지자의 예를 들어, 젊은 학자 캘빈을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불어권 난민들의 목사가 되도록 불렀다. 이 난민들 가운데서 캘빈은 아내이면서 동반자가 될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를 찾았다. 드 뷔르는 당시 어린 아이 둘을 가진 과부였다.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한 얼마 후에 캘빈은 그의 새로운 회중들에게 예배를 위한 자료를 제공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는 불어로 발간한 시편찬양집이다1539년. 이 찬송집은 이후 더 많은 시편 찬송을 포함해 편찬되었고, 다른 언어로도 번역되었다. 1562년에 이르면 시편 150편 전 편이 특별히 작곡된 곡에 붙여 찬송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시편찬송집은 개혁주의 교단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서가 되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1538년부터 1541년까지의 3년은 물질적인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캘빈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동료 난민들의 목회자로 일하면서 부처와 같은 동료 목사들과 연합하여 시정부와 상대하고, 새롭게 시작한 인문주의 학교에서 가르치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1540년대 초기에 있었던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콜로퀴에 관계하기 시작하는 것을 통해 만족스러운 목회의 경험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는 초판의 내용을 많이 확대하여 「기독교강요」 제2판을 출판했다1539년. 다음 해에 그는 첫 번째 주석으로 로마서주석을 썼다. 다른 주제들을 다루는 소논문도 썼는데 1541년에 출판된 “성찬에 관한 소논문”이 한 예다. 또한 그는 고국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위해 「기독교강요」를 불어로 번역했다.
제네바 교구목사로 돌아온 캘빈
1540년이 되었을 때 제네바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캘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스트라스부르와 스위스 개신교 공동체의 지도자인 파렐과 결국엔 캘빈까지 이에 동의하게 되었다. 교회의 뜻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인 캘빈은 1541년 9월 교구목사말씀과 성찬을 담당하는 목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번에는 방문 설교자가 아니었다로서 제네바로 돌아와 1564년 55세 생일을 얼마 앞두고 임종을 맞을 때까지 제네바를 섬겼다. 23년 반 동안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영주권자로 살았다1559년 말에 제네바시가 선물로 시민권을 줄 때까지. 그는 외국인으로, 망명자로 제네바의 주임 목사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제네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갈등을 겪고, 종교적인 난민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와 사회를 개혁했다. 개혁의 수단은 다양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었다.
설교는 목사인 캘빈에게 평생 동안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주일날 두 번 그리고 격주로 매일 그는 생피에르교회 혹은 마들렌교회의 강대상에 헬라어 성경이나 히브리어 성경을 들고 올라가 설교했다. 제네바 목사회에 속한 목사는 누구나 세 개 교구교회의 설교를 돌아가면서 맡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는 제네바 교인들이 주일날 세 번의 예배설교와 한 번의 교리교육, 그리고 주중에는 적어도 두 교회에서 매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캘빈의 설교들은 설교가 그대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개혁자들의 설교와 구별되었는데 그 이후로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당시에는 설교자가 자신이 설교했던 것을 잘 다듬어서 출판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제네바의 프랑스 난민들은 성경에 대한 캘빈의 설명들을 보존하기 위해 1549년부터 속기사를 고용하여 그의 설교를 기록하게 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설교들 중 사무엘서 1장, 2장과 욥기 강해는 캘빈이 주석서를 쓰지 않은 부분이기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
바른 성경 강해를 위해서는 가톨릭 사제들이 받았던 것과는 다른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필요했다. 루터나 츠빙글리, 부처 그리고 다른 개혁자들과는 달리 제네바에는 제네바 출신으로서 대학교육을 받은 인물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캘빈은 프랑스인외국인을 새로운 동료로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불어로 하는 “설교 연습” 시간을 소개하고, 설교자들과 미래의 설교자들을 위해 라틴어 성경 강의를 했다. 이러한 정규적인 강의들은 수강생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캘빈에 의해 교정되어져 주석서의 기본이 되었다. 캘빈은 요한 2서와 3서, 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들과 대부분의 구약성경창세기에서 여호수아, 시편, 그의 임종으로 인해 에스겔서가 미완성으로 남겨졌지만 대부분의 예언서을 주석했다. 캘빈은 「기독교강요」를 계속해서 확대했는데 이것은 목사들에게 핸드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캘빈은 이것으로 강의하지는 않았다. 목사들은 성경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독교강요」와 주석을 함께 읽었으며, 이로써 이단과 각종 폐단에 대항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
캘빈의 교회 개혁 : 성례, 예배, 교회정치, 직분
성례는 개혁주의 제네바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지켜졌다. 이는 공공성과 전체성에 강조를 둔 것으로 설교와 전 교인의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매일 예배가 있었으므로 세례는 어느 날에든지 행해질 수 있었다. 제네바 사람들은 개인적이고 가족 중심적이었던 세례식이 공적으로 전체적인 예배 시간에 거행되는 변화를 큰 어려움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끌로드, 멜키오르, 발타자르 등과 같이 유명한 성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택하거나 대부들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금지하는 세례명 개혁은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예배력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으며 주일날은 새로운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주의 만찬은 1년에 4회, 즉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9월에 행했다. 캘빈의 신약적 이상은 매주 만찬행 2:42을 행하는 것이었으나 적절한 준비가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달에 한 번 성찬으로 만족했으나 제네바 평신도들은 연 1회 성찬이라는 전통 속에 자라났기에 그 이상의 빈번한 성찬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고전 11: 26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종교개혁 이전에 행해졌던 고해성사를 통해 경험한 사제들의 권위를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성찬 준비에 대한 캘빈의 아이디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 이후 시의원들과 목사들간의 원만한 타협으로 덜 빈번한 성찬역자주: 1년에 4회과 더 온전한 준비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캘빈의 이해에 근거한 것이었다.
주의 성찬은 종교개혁기 동안 아마도 가장 뜨거운 논쟁을 거친 주제였기에 이에 대한 캘빈의 관심은 제네바를 넘어서 확대되었다.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츠빙글리보다는 루터에 가까웠다. 그러나 캘빈은 루터파들과 성찬을 함께 하는 것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츠빙글리의 후계자였던 하인리히 불링거와 일하면서 캘빈은 츠빙글리파와 캘빈주의자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여 1549년 취리히 합의서Zurich Consensus를 채택하는 공을 세웠다. 이 합의서는 개혁주의 전통을 효율적으로 세운 성찬에 대한 양자간의 합의를 담고 있다. 이것은 신앙의 일치를 위해서는 성찬에 관한 약간의 타협을 마다하지 않은 캘빈의 역량에 대한 또 다른 증명이 되었다.
캘빈은 예배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중심이 된다고 믿었는데 이때 예배는 공예배 시간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그들의 믿음을 이해하고 살아가도록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리교육서 교육과 시편찬양을 통한 쉬지 않고 기도하기는 이를 위한 두 가지 교육법이었다. 캘빈은 믿음은 머리가 아닌 마음의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마음을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은 학교에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했으며, 궁극적으로 1559년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우게 되었다. 제네바가 의무교육을 입법화시킨 첫 번째 도시 중 하나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개신교도들은 비록 실천면에서 확실한 차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와 성례, 교리교육서, 기도가 그들이 물려받은 교회를 개혁하는 데 중심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개신교 개혁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형성하는 데 필요한 방법적인 차이점이 좀 더 많이 부각된 듯하다.
사실 이러한 차이점은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다. 개신교 개혁자들은 성경이 구원에 관한 모든 것, 즉 이신칭의와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의 유일한 권위가 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캘빈은 이것을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은혜와 우리의 마음과 뜻을 움직이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받아들였다「기독교강요」3.11.2; 3.2.7. 보통 이러한 은혜는 교회의 설교와 성례를 통한 “보이는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보이는 교회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개신교의 다양한 그룹 간에는 “성경만으로”라는 원리가 어떻게 지상 교회의 조직에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를 보였다. 루터파들은 교회 조직예를 들어 목회나 예전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한다고 믿은 반면,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은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두 번째 단계second level”를 포함한다고 보았다. 구원esse을 위한 본질적인 것에 교회를 바르게 조직함bene esse을 더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르게 조직함”이란 구원에는 필수적이지 않지만 지상 교회로서 살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들을 말한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타난 예전의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바와 같지만 교회 목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bene esse 라는 큰 표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츠빙글리식의 개혁주의는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속에서 교회정치에 대한 가르침을 찾았다. 이들은 목사들에게는 설교를, 기독군주들다윗와의 후예들에게는 훈련과 권징 및 빈자 구호, 도덕적 사회적 문제들을 통치하도록 맡기는 것에 만족했다. 이러한 츠빙글리식의 이해가 처음 제네바에 소개된 개신교 모델이었다.
그러나 캘빈은 교회정치는 신약성경에서만 발견된다고 믿었다. 또한 사도 모델 교회 시절에는 기독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바르게 질서 잡힌 교회를 위해 기독 군주들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캘빈은 기독교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의 권위는 협력해야 하며, 이에 따라 군주가 장로나 집사로 선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설교와 가르침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삶을 돌아보고 가난한 자를 위한 목회 프로그램을 하는 데 있어서는 교회의 자율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신도 교회” 사역자들과 독립적이거나 시정부와 협력할 수 있는 교회정치는 사실상 교회론에서 캘빈의 독특한 기여 중 두 가지에 해당된다.
장로들과 그들이 섬긴 기관인 컨시스토리는 캘빈에게서 가장 흔하게 오해받아 온 교회 교육 프로그램이다. 캘빈은 그의 신약성경 이해에 따라 두 종류의 장로two kinds of Presbyters: 목사들과 장로가 한 컨시스토리에서 섬기는데 이 기관은 성도의 표지「기독교강요」4.1.8를 따라 믿음의 지식과 실천 양자를 관할하는 교회의 기구였다. 제네바 컨시스토리는 종교적인 미신 같은 문제들을 담당했는데, 예를 들면 성수 혹은 묵주,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 등이다. 또한 공동체 내의 불화나 도덕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에 관한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로버트 킹던은 컨시스토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웃이나 가족간의 싸움을 다루는 “의무적 상담 서비스”에 집중했다고 말한다.1 이 같은 컨시스토리의 활동은 성찬을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믿음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와 공동체에서 관계의 화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필수적인 준비로서 제네바 사람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전설과는 달리 컨시스토리에서 다뤄진 사건들의 대부분은 출교까지 가지 않고 해결되었다. 사실 출교가 실시되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성례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출교는 출교자들이 기본지식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불어로 외우는 것을 갖게 되거나 이웃에게 적절한 용서를 하고 화해를 나눌 때까지만 지속되었다. 캘빈의 치리는 “공적”이며 알려진 죄만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찬 정지는 자신의 죄에 집중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제네바의 치리가 사생활을 침입하거나 간섭하는 것으로 충분히 보일 수 있지만 근대 초기 유럽식 삶의 한 결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마치 작은 마을에 사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잘 아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캘빈의 교회 성도들은 다툼이 일어나면 서로에게 책임을 질 줄 알고 화해를 가져올 행동을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집사직의 리더십이 결코 장로들의 과제와 같은 것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종종 이들의 사역은 소홀히 여겨졌다. 집사직은 가난한 사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한 목회를 위해 설치된 상설위원회와 같은 것이었다. 캘빈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도록 맡겨진 것이라고 이해했다. 각 사람은 자신의 달란트와 직업을 즐겁고 지혜롭게 사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신자들은 일상의 일을 이웃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소명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즐길 뿐만 아니라 책임감 있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개인적은 나눔은 매우 중요하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다. 몸으로서의 교회는 자신을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는 책임 있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집사직은 바르게 질서 잡힌 교회의 절대적인 한 부분이 되었다.
캘빈은 신약성경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집사, 곧 재정을 담당하여 분배하는 집사와 아프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손수 도와주는 여집사가 있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여자 집사는 종속적이었고 실제로 캘빈파 교회에서 이를 시행한 교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뵈뵈를 집사라고 하는 로마서 16장 1~2절의 독특한 해석을 통하여 여성들에게 교회의 항존직을 마련한 개신교 개혁자는 캘빈밖에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은, 제네바가 신앙의 이유로 자신의 나라를 떠나야 했던 수많은 종교난민들을 받는 도시가 되면서 제네바 시민을 돕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1550년대 난민들의 물결은 홍수처럼 늘어났는데 그 중 다수는 프랑스인이었고, 나머지는 이태리, 영국, 스페인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교회의 자율성을 가르치는 캘빈의 교회론이 가진 특성 때문에 “십자가를 진 교회들”은 캘빈의 신학에 더 끌리게 되었다. 제네바의 피난민 회중들은 자기들 스스로 집사를 세우고 조직을 만들었으며,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게 된 사람들은 캘빈의 가르침을 가지고 가서 자신들만의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난민들의 개인적인 경험은 제네바 아카데미의 보다 넓은 교회를 위한 목사 교육의 중요성과 결합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개혁주의 전통이 캘빈의 영향력을 통해 국제적이며 에큐메니칼 지향성을 온전하게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캘빈은 제네바의 목사였으며 성경학자며 설교자였고 평신도와 목회자 리더십이 협력하여 일하는 교회정치의 설계자였다. 그는 교회가 시정부와 상호 협력하여 기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아버지였으며, 종교난민들을 제네바로 끌어당겨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선교하게 만든 자석과 같은 존재였고, 개혁주의 전통의 갈래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신학자였으며, 제네바와 같은 작은 도시를 지적으로나 자기 훈련의 면에서 유명한 국제적 운동의 중심이 되게 한 프랑스 난민이었다. 캘빈은 일치 속에서도 놀라운 다양성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살아 있는 신앙에 깊이 헌신하는 많은 교회들이 한 가족이 되도록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산을 남겨준 교회의 사람churchman이었다.
주(註)
1. Robert M. Kingdon, “Calvin and the Family: The Work of the Consistory in Geneva,” in Calvin’s Work in Geneva, ed. R. C. Gamble(New York: Garland, 1992), 96. (역자주: 제네바 컨시스토리는 당회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구성원의 내용상 현재 노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컨시스토리의 사역에 관하여서는 역자의 논문, 「제네바 컨시스토리: 캘빈의 신학과 목회의 접목」,『한국기독교신학논총』18집, 한국기독교학회, 2000을 참고하시오).
엘시 맥키 | 2009. 7.
http://blog.daum.net/kkho1105/6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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