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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국제 신사, 칼빈

국제 신사, 칼빈 (37) 
  
정 성구 박사 (전 총신대 및 대신대 총장, 현 칼빈대 석좌 교수)
칼빈은 국제 신사였다. 그리고 그는 국제맨이었다. 16세기는 변화의 여명기라고 해야 좋을 것인데, 그 당시는 오늘의 TV도 이메일도 신문도 없던 시대였다. 동양은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미국도 없던 시대였음으로 주로 유럽중심의 세상이었다. 그 때는 교통도 발달되지 못하고 통신도 없던 시대였으나 칼빈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졌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고 온 세계와 소통했던 국제맨이었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대 선배인 마틴 루터는 국제맨이 못 되었다. 사실 루터의 우람한 체격이나 감성, 바리톤의 음성, 열정적인 설교 등은 전 유럽과 세계를 향한 비전을 가질 만 했겠지만 루터는 겨우 게르만 민족과 독일을 넘지 못했다.
전 유럽을 상대한 교회개혁의 지도자
그러나 칼빈은 달랐다. 칼빈은 세계 곧 전 유럽을 상대로 한 교회개혁의 전도사역을 자임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칼빈은 왜소하고 깡마른 체질에 병을 앓고 있었다. 특히 철저한 개혁주의 교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칼빈의 이미지는 강직하고 폐쇄주의적이며 독선적이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칼빈의 사상과 삶은 범 민족적이고 범세계적이었음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불란서 사람이지만 그의 삶의 후반부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자로 살았다. 칼빈의 조국은 분명 불란서였지만 그의 활동 무대는 스위스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삶에는 이미 어느 한 나라 한 민족에 갇혀 있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그는 밖으로 열려져 있었고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보는 눈이 띄어져 있었다.
칼빈이 국제맨으로 지칭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유럽의 모든 왕들 그리고 제후들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편지를 교환하면서 종교개혁의 지경을 넓혀갔다. 또 다른 하나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워서 유럽의 젊은이들을 불러 모아 교육시킨 것이다. 실제로 제네바아카데미는 국제 신학대학이며 국제 칼빈주의 대학이었다. 그러면 칼빈이 실제로 국제맨으로서의 역할을 자세히 살피기로 하자.
편지로 국경을 넘나 들다
첫째로 칼빈은 편지의 사람이었다. 그 당시는 신문도 없고 잡지도 없던 시대에 자기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종교개혁의 교리적 체계를 전달하는 수단은 곧 편지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칼빈은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개혁의 동지들에게도 편지를 보냈지만 그와 의견을 달리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자들끼리만 서신교환을 한 것이 아니고 각국의 정치지도자와 교회의 지도자들과도 편지를 나누었다. 칼빈은 명실공이 전 유럽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우뚝 솟아 일했다. 칼빈은 당시 유럽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 개혁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애썼다. 칼빈은 제1차 제네바시대 이후 스트라스벍시대 그리고 제2차 제네바시대를 통해서 쯔리히의 쯔윙글리파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독일의 루터파와도 회담을 여러 번 가졌다. 그리고 칼빈은 그들과 끊임없이 서신 교환을 하면서 개혁운동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스트라스벍에서 목회와 신학교육을 하고 있을 때는 멀리 독일의 웜스(Worms)와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방문하여 조정자 역할을 했고 독일의 멜랑톤과는 일평생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칼빈은 이탈리아도 방문했고, 모국의 성도들 즉 휴그노파들에게 여러 번 위로 격려하면서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칼빈이 국제적인 인물인 것은 기독교 강요를 쓸 때 불란서 왕 프랑소와 1세에게 헌사의 서문을 썼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영국의 에드워드6세에게 이사야서와 공동서신주석을 헌사했다. 또 영국의 대 감독인 토마스 크렌머에게도 영국의 종교개혁을 격려하는 편지를 썼다. 칼빈은 또한 폴란드 왕에게까지 서신을 올렸다. 그리고 칼빈은 로마교회의 교권지상주의는 성경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지적했다. 또 멜랑톤을 통해서 간접으로 루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칼빈은 당대의 최고의 국제적인 인물로서 유럽의 종교개혁의 총 지휘관이 됐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국제 신학대학이다
칼빈이 국제맨이라는 또 다른 사실은 제네바아카데미가 국제적 칼빈대학이요 국제적 개혁주의 신학대학의 성격을 가졌다.
제네바아카데미는 개교하자마자 160여명의 학생들이 몰려왔는데 보도매체가 없던 당시에 유럽각국에서 이렇게 많이 몰려온 것은 기적 같은 사실이다. 당시는 마땅히 선전 매체가 없던 때이지만 요한 칼빈 목사라는 이름 하나가 국제적으로 인기가 폭발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 학생들 중에는 멀리서는 스코틀랜드, 영국 그리고 화란, 독일, 헝가리, 가까이에는 스위스와 불란서 등에서 몰려왔다. 제네바대학 출신의 요한 낙스(John Knox)는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종교개혁자가 되었고, 율시누스(Ursinus)는 젊은 나이로 독일 하이델벍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을 만들어 개혁교회의 교리적 체계를 세웠다. 칼빈은 국제 신사, 국제맨이었다. 그래서 그의 개혁신학과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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