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의무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의무
존 칼빈
바울은 기록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시사,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엡 4:10-13)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자기의 백성들을 한 순간에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이 오로지 교회의 교육을 통하여 장성한 자들로 자라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곧, 하늘의 도리를 전하는 일이 목사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이 규범을 따라서, 이 기능을 행하도록 지정받은 교사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심령으로 그들의 치리를 받도록 되어 있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래 전에 그리스도 나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한 바 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이로 볼 때에, 교회의 손을 통하여 신적으로 베풀어지는 신령한 양식을 물리치는 자들은 기갈과 굶주림으로 죽어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복음을 도구로 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으신다. 바울이 지적하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롬 10:17).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능력은 물론 하나님에게 있지만 (롬 1:16), 바울이 또 다시 증거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복음의선포 가운데서 그 일을 드러내시고 펼치시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은 옛적에 성회를 성소에서 회집케 하셔서 제사장의 입으로 도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배양시키기를 원하셨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원히 쉴 곳"(시 132:14)이요, 성소는 그의 "거처"(사 57:15)요,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여 계신다고 말씀한다(시 80:1).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명칭들을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하늘 도리의 사역에 존귀와 사랑과 위엄을 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잘것 없는 죽을 인간이 하는 일로 여김을 받아 그 도리의 품위가 적지 않게 떨어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도저히 측량할 수없이 고귀한 보배가 우리의 질그릇 속에 있다는 것을(고후 4:7)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시고, 친히 이 질서를 제정하신 주인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제도 속에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점, 주술, 마술, 강신술등의 미신들을 금하신 후에 (신 18:10-11; 레 19:31), 모든 사람들에게 충족한 것을 주시겠다고 덧붙이셨다. 곧, 절대로 선지자 없이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신 18:15). 고대의 백성들을 천사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땅에서 교사들을 일으키사 그들로 하여금 천사들의 직분을 수행하도록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인간적인 수단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기 원하시는 것이다.
옛날에 율법을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제사장들을 해석자들로 함께 두셔서 그들의 입술로 그 참된 의미를 가르치게 하신 것처럼(참조말 2:7),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율법을 읽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바라실 뿐 아니라 가르치는 자들을 지명하셔서 그들로하여금 우리를 돕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적으로 유익이 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의 보내신 사역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듣는지를 아주 합당한 테스트를 통하여 시험하셔서 우리의 순종을 입증하시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그런 방식으로 배려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뇌성을 발하셔서 놀라서 도망하도록 하기보다는 해석자들을 통하여 인간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우리를 그에게로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이 그들을 완전히 압도하여 몸서리치도록 두려움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과연 모든 경건한 자들은 이렇듯 친숙한 가르침의 방식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진정으로 느끼고도 남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받은 자들이 미천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말씀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탁월한 은사들이 많이 있지만, 사람들의 입과 혀를 친히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시는 것이야말로 독특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친히 그의 입으로 선포하시는 구원의 도리를 순종으로 받아들이기를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외적인 수단에 매여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일상적인 가르침의 방식에 매어 두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신적인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붙들기를 거부하여 자기들 자신을 갖가지 치명적인 올무에 얽히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교만이나, 혐오, 혹은 경쟁심 등으로 인하여 사사로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충분한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공적인 집회들을 소흘리하며 설교를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들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신성한 끈을 잘라내고 끊어내려고 안감힘을 다 쓰므로, 어느 누구도 이러한 불경한 단절에 대해 공의의 형벌을 면하지 못하며, 모두가 자기들 스스로 그 치명적인 오류와 몹쓸 망상에 현혹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순결하고도 단순한 믿음이 우리들 가운데서 번성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앙의 실천방식을 사용하기를 꺼려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방식을 친히 제정하셔서 그 필요성을 보여 주셨고 또한 높이 인정하신 것이다. 아무도 – 심지어 광신적인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 하나님을 향하여 귀를 닫으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선지자들과 경건한 교사들은 불경건한 자들과 어려운 싸움을 싸워야 했다. 그들이 완악하여 인간의 말과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는 멍에를 지지 않으려고 안감힘을 썼기 때문이다. 이런 처사는 가르침 속에서 우리에게 비치는 하나님의 얼굴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옛날 신자들은 성소에서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명을 받았고(시 105:4), 율법에서도 이런 명령이 자주 반복되는데 (시 27:8; 100:2; 105:4; 대상 16:11; 대하 7:14),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율법의 가르침과 선지자들의 교훈들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의 설교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4:6).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몹쓸 태도는 바로 배도자들의 태도인데, 이들은 교회를 분열시키고자 는 열정을 갖고서 양 떼들을 우리에서 몰아내어 늑대들의 입에 던져 넣으려 하는것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인용한 말씀을 붙들어야 할것이다.
곧, 교회는 오로지 외적인 설교를 통해서만 세워지며, 또한 성도들은 오직 하나의 끈에 의해서만 묶여지며, 하나로 연합하여 배우고 전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참조 엡 4:12).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 옛날 율법 아래 있던 시절, 모든 신자들이 성소에 모이도록 명령을 받은 것은 특히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함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처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념하신 곳을 가리켜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이라 부르고 있다(참조 출 20:24). 이로써 그는 경건의 도리를 떠나서는 그곳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이유로 다윗도 원수들의 횡포와 잔임함으로 인하여 자신이 성막에서 쫓겨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극히 쓰라림으로 아파하며 그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시 84:2-3).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어린 아이같은 불평처럼 생각한다. 다른 쾌락거리들이 아직 손에 닿아 있는 한,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작은 손실로서 약간의 불쾌감을 주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 한 가지 괴로움과 번민과 슬픔 때문에 괴로워 미칠 지경이라고 하며 애곡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 신자들에게 공적인 예배보다 더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없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한 걸음씩 위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그의 가르침의 거울 속에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를 영적으로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의 얼굴"이라 부르며(참조 시 42:2) 동시에 – 미신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 그의 "발등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시 132:7; 99:5; 대상 28:2). 미천한 자나 높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머리를 열망하는 가운데 한 믿음을 이룬다는 것(참조 엡 4:13)이야말로 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이방인들이 다른 원리를 근거로 지은 온갖 성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더럽히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물론 그들처럼 그렇게 난잡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대인들도 어느 정도 거기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스데반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으로 그를 꾸짖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 7:48; 사 66:1-2).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의 말씀으로 성전들을 거룩하게 하사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어떤 일을 경솔하게 시도하게 되면, 처음부터 건실하지 못한 원리에 근거하게 되고, 또한 거기에 이상야릇한 허구들이 달라붙어서 한량없이 악을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지혜자들의 간언을 듣고서, 모든 만물을 자유로이 접하여야 마땅한 신들이 – 마치 그들이 장소를 바꾸거나 사람들에게 땅의 수단들을 동원시키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강림하여 그들을 가까이 할 능력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 벽과 지붕 속에 같혀 있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스의 모든 신전들을 무차별하게 불태우고 파괴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성전을 통해서 마치 마차를 타고 오르듯, 우리를 그의 하늘의 영광에로 높이 들어올리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광대함으로 만물을 가득 채우며 심지어 하늘까지도 능가하는 그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에서
[출처]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의무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283
존 칼빈
바울은 기록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시사,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엡 4:10-13)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자기의 백성들을 한 순간에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이 오로지 교회의 교육을 통하여 장성한 자들로 자라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곧, 하늘의 도리를 전하는 일이 목사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이 규범을 따라서, 이 기능을 행하도록 지정받은 교사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심령으로 그들의 치리를 받도록 되어 있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래 전에 그리스도 나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한 바 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이로 볼 때에, 교회의 손을 통하여 신적으로 베풀어지는 신령한 양식을 물리치는 자들은 기갈과 굶주림으로 죽어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복음을 도구로 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으신다. 바울이 지적하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롬 10:17).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능력은 물론 하나님에게 있지만 (롬 1:16), 바울이 또 다시 증거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복음의선포 가운데서 그 일을 드러내시고 펼치시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은 옛적에 성회를 성소에서 회집케 하셔서 제사장의 입으로 도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배양시키기를 원하셨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원히 쉴 곳"(시 132:14)이요, 성소는 그의 "거처"(사 57:15)요,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여 계신다고 말씀한다(시 80:1).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명칭들을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하늘 도리의 사역에 존귀와 사랑과 위엄을 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잘것 없는 죽을 인간이 하는 일로 여김을 받아 그 도리의 품위가 적지 않게 떨어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도저히 측량할 수없이 고귀한 보배가 우리의 질그릇 속에 있다는 것을(고후 4:7)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시고, 친히 이 질서를 제정하신 주인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제도 속에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점, 주술, 마술, 강신술등의 미신들을 금하신 후에 (신 18:10-11; 레 19:31), 모든 사람들에게 충족한 것을 주시겠다고 덧붙이셨다. 곧, 절대로 선지자 없이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신 18:15). 고대의 백성들을 천사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땅에서 교사들을 일으키사 그들로 하여금 천사들의 직분을 수행하도록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인간적인 수단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기 원하시는 것이다.
옛날에 율법을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제사장들을 해석자들로 함께 두셔서 그들의 입술로 그 참된 의미를 가르치게 하신 것처럼(참조말 2:7),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율법을 읽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바라실 뿐 아니라 가르치는 자들을 지명하셔서 그들로하여금 우리를 돕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적으로 유익이 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의 보내신 사역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듣는지를 아주 합당한 테스트를 통하여 시험하셔서 우리의 순종을 입증하시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그런 방식으로 배려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뇌성을 발하셔서 놀라서 도망하도록 하기보다는 해석자들을 통하여 인간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우리를 그에게로 이끄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이 그들을 완전히 압도하여 몸서리치도록 두려움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과연 모든 경건한 자들은 이렇듯 친숙한 가르침의 방식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진정으로 느끼고도 남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받은 자들이 미천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말씀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탁월한 은사들이 많이 있지만, 사람들의 입과 혀를 친히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시는 것이야말로 독특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친히 그의 입으로 선포하시는 구원의 도리를 순종으로 받아들이기를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외적인 수단에 매여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일상적인 가르침의 방식에 매어 두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신적인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붙들기를 거부하여 자기들 자신을 갖가지 치명적인 올무에 얽히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교만이나, 혐오, 혹은 경쟁심 등으로 인하여 사사로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충분한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공적인 집회들을 소흘리하며 설교를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들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신성한 끈을 잘라내고 끊어내려고 안감힘을 다 쓰므로, 어느 누구도 이러한 불경한 단절에 대해 공의의 형벌을 면하지 못하며, 모두가 자기들 스스로 그 치명적인 오류와 몹쓸 망상에 현혹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순결하고도 단순한 믿음이 우리들 가운데서 번성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앙의 실천방식을 사용하기를 꺼려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방식을 친히 제정하셔서 그 필요성을 보여 주셨고 또한 높이 인정하신 것이다. 아무도 – 심지어 광신적인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 하나님을 향하여 귀를 닫으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선지자들과 경건한 교사들은 불경건한 자들과 어려운 싸움을 싸워야 했다. 그들이 완악하여 인간의 말과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는 멍에를 지지 않으려고 안감힘을 썼기 때문이다. 이런 처사는 가르침 속에서 우리에게 비치는 하나님의 얼굴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옛날 신자들은 성소에서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명을 받았고(시 105:4), 율법에서도 이런 명령이 자주 반복되는데 (시 27:8; 100:2; 105:4; 대상 16:11; 대하 7:14),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율법의 가르침과 선지자들의 교훈들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의 설교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4:6).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몹쓸 태도는 바로 배도자들의 태도인데, 이들은 교회를 분열시키고자 는 열정을 갖고서 양 떼들을 우리에서 몰아내어 늑대들의 입에 던져 넣으려 하는것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인용한 말씀을 붙들어야 할것이다.
곧, 교회는 오로지 외적인 설교를 통해서만 세워지며, 또한 성도들은 오직 하나의 끈에 의해서만 묶여지며, 하나로 연합하여 배우고 전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참조 엡 4:12).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 옛날 율법 아래 있던 시절, 모든 신자들이 성소에 모이도록 명령을 받은 것은 특히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함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처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념하신 곳을 가리켜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이라 부르고 있다(참조 출 20:24). 이로써 그는 경건의 도리를 떠나서는 그곳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이유로 다윗도 원수들의 횡포와 잔임함으로 인하여 자신이 성막에서 쫓겨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극히 쓰라림으로 아파하며 그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시 84:2-3).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어린 아이같은 불평처럼 생각한다. 다른 쾌락거리들이 아직 손에 닿아 있는 한,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작은 손실로서 약간의 불쾌감을 주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 한 가지 괴로움과 번민과 슬픔 때문에 괴로워 미칠 지경이라고 하며 애곡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 신자들에게 공적인 예배보다 더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없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한 걸음씩 위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그의 가르침의 거울 속에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를 영적으로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의 얼굴"이라 부르며(참조 시 42:2) 동시에 – 미신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 그의 "발등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시 132:7; 99:5; 대상 28:2). 미천한 자나 높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머리를 열망하는 가운데 한 믿음을 이룬다는 것(참조 엡 4:13)이야말로 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이방인들이 다른 원리를 근거로 지은 온갖 성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더럽히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물론 그들처럼 그렇게 난잡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대인들도 어느 정도 거기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스데반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으로 그를 꾸짖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 7:48; 사 66:1-2).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의 말씀으로 성전들을 거룩하게 하사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어떤 일을 경솔하게 시도하게 되면, 처음부터 건실하지 못한 원리에 근거하게 되고, 또한 거기에 이상야릇한 허구들이 달라붙어서 한량없이 악을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지혜자들의 간언을 듣고서, 모든 만물을 자유로이 접하여야 마땅한 신들이 – 마치 그들이 장소를 바꾸거나 사람들에게 땅의 수단들을 동원시키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강림하여 그들을 가까이 할 능력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 벽과 지붕 속에 같혀 있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스의 모든 신전들을 무차별하게 불태우고 파괴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성전을 통해서 마치 마차를 타고 오르듯, 우리를 그의 하늘의 영광에로 높이 들어올리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광대함으로 만물을 가득 채우며 심지어 하늘까지도 능가하는 그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에서
[출처]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의무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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