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에게서 배운다!
칼빈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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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는 적지 않은 목회자들에게서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방법으로는 목회가 안 된다. 교회가 부흥할 수 없다”라는 소리가 나온다. 황당하게 들리는 이 말은 과연 그러한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칼빈을 제대로 연구해 보고 이런 말을 할까?” 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결국 이것은 신학교 (이론)와 목회 현장 (실천) 사이의 엇박자와 불일치로 인해 발생한 괴리감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신학교와 교회 사이의 거리는 얼마일까? 몇 몇 사안에 대해서는 너무 멀게 느껴진다. 이 간격을 줄이려면 무엇보다도 교회 (목회자)가 신학교 (신학자)를 안심하고 수용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전적인 경건에 뿌리를 둔 ‘교회의 교사’의 영적 권위와 현장감 있는 학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동시에 목회자도 신학자로서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위대한 교회의 교사였던 칼빈은 현대 교회의 경건한 신앙생활, 신학 그리고 목회를 위한 변함없는 ‘보물 창고’와 같은 인물이다. 그의 인생을 간략히 되짚어 보면서 살펴보자.
1. 칼빈의 출생과 어린 시절1)
2009년은 제네바의 개혁가 존 칼빈 탄생 500주년이다. 한국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행사들이 열렸지만, 자칫 반짝 이벤트로 그치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피카디 (Picardy)의 노용 (Noyon)에서 출생했다. 노용은 수도원, 성당, 신부가 많은 종교적인 도시였다. 칼빈의 아버지 ‘제라드 코뱅’ (Gerard Cauvin)은2) 노용의 주교의 공식 비서이자 시의 공증인이었는데, 성격은 엄격했다. 나중에 제라드 코뱅은 참사회에 남겨진 어떤 재산에 관한 계정을 놓고 노용 대성당의 참사회원들과 대립하다 출교를 당한다. 칼빈의 어머니 ‘잔느 르프랑’ (Jeanne Lefrance)은 여관 주인 ‘장 르프랑’의 딸이었는데, 미모의 신앙심 깊은 여인으로서 칼빈이 3살 때 사망했다. 어머니는 넷째 아들 칼빈을 성인의 사당에 데리고 다녔고, 어린 칼빈은 성인의 유골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참고. 맥닐, 1990:108). 칼빈에게 형제는 4명 (샤를, 장, 앙투안, 프랑수아) 그리고 아버지가 재혼하여 낳은 이복누이는 2명 (Marie, 다른 한 명의 이름은 모름)있었다. 형제 중 두 명은 일찍 죽었다. 1518년에 칼빈의 형 ‘샤를’은 대성당의 신부가 되었지만 1531년에 이단혐의로 파문당했고 1537년에 사망했다. 동생 ‘앙투안’ (Antoine)도 신부가 되었다가 결국 개신교로 전향했다.3) 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앙투안은 여동생 ‘마리’와 함께 제네바로 이주하여 서점을 운영했으며, 그 후 시의회 의원도 지냈고 시민권도 얻었다. 칼빈의 가족에는 ‘반 교황정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유소년-청년기의 칼빈의 교육
어린 시절 칼빈은 ‘꼴레주 데 까페뜨’라는 학교를 다녔다. 귀족 가문 몽모르 (Montmor)의 자제와 함께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칼빈을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서 파리로 유학을 보냈고, 대장장이 삼촌 ‘리샤르 코뱅’ (Richard Cauvin)의 집에 기거 했다. 칼빈은 채 12살이 되기도 전에 대성당 신부직 (chaplaincy)에 임명되어 맡은 일 없이 괜찮은 수입을 얻게 되었다. 14세 때 (1523년 8월) 파리의 마르슈 (Marche)대학에 입학하여, ‘꼬르디에’ (M. Cordier)에게서 문법과 수사학, 라틴어를 배웠다. 그 후 꼬르디에는 개신교로 개종하여 제네바대학 학장을 지내다 칼빈이 죽은 그 해 (1564)에 사망했다. 1524년에 더 유명한 몽테규 (Montaigu)대학으로 옮겨 스페인 출신 ‘코로넬’ (A. Coronel)로부터 철학을 배웠다. 불과 18세의 나이로 칼빈이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던 1528년에, 예수회 창시자 로욜라도 이 대학교에서 코로넬로부터 배웠다. 이곳에서의 열악한 숙식 그리고 엄격한 훈련 덕택에 칼빈은 이때 위장병을 얻게 된 것 같다 (참고. Selderhuis, 2009:196). 1528-1533년 사이, 오를레앙, 부르주, 파리의 주요 대학에서 인문학, 철학, 신학을 배웠다.4)
1528년 칼빈이 19세 때에, 리용의 참사원으로 부터 출교 당한 아버지는 아들을 변호사로 만들려고 오를레앙대학으로 보내 법률을 전공하게 하였다. 이것을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아들을 변호사를 만들려는 제라드 코뱅에게 자신의 출교 때문에 칼빈에게 지급되는 성직록이 철회되는 것과 같은 불이익이 닥칠지 모른다고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칼빈은 ‘피에르 드 에투알’같은 최고의 법률 교수 아래서 공부했다. 이태리의 유명한 법률학자 ‘알치아티’가 부르주 (Bourges)대학으로 옮겼기에, 칼빈도 그곳으로 옮겼다 (1529년). 그리고 독일 인문주의자요 루터파의 교회개혁에 동조한 ‘볼마르’ (M. Volmar)에게서 헬라어를 배웠다. 1531년 5월 26일에 부친이 사망하자, 1530년에 프랑수아 1세가 세운 왕립 프랑스대학 (College de France)으로 갔다. 거기서 ‘다네스’ (P. Danes)로부터 고전어를 배웠다. 그 후 칼빈은 법학 박사 학위를 마치기 위해서, 오를레앙대학으로 옮겨 1532년 1월에 과정을 마쳤다. 22살이던 1532년 4월 4일에 ‘세네카의 두 권으로 된 관용론에 관한 주석’을 세련된 라틴어로 써서 자비로 출판했다.5) 그러나 당시의 종교적 논란거리 (예. 1530년의 개신교 제후들의 슈말칼트 동맹, 스위스 내란, 프랑수아 1세의 정책 등)를 반영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 책은 독자층을 파고들지 못했다 (참고. 맥닐, 1990:122). 칼빈은 1533년 사촌 ‘올리베탕’이 번역한 성경 (1535년 6월에 뇌샤텔 [Neuchatel]에서 출판)에 두 개의 서문을 썼다.
3. 칼빈의 회심과 도피생활
사제, 인문주의자, 법학자로서 꿈을 키워가던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밝힌 대로, 1533년 말 혹은 1534년경에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한다.6) 이제 미신적인 카톨릭, 인문주의, 스콜라주의적 전통주의로부터 복음적 개신교, 인문주의를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성경의 사람으로 탈바꿈했다. 칼빈의 회심을 위해 어떤 요소가 작용했을까? 1533년 11월 1일, 칼빈의 친구 ‘니콜라스 콥’ (Cop)이 마튀랭 (Mathurins)교회당에서 파리 루브르대학 학장 (혹은 총장) 취임 강연을 했다. 그 연설에서 값없는 은혜라는 루터의 설교 (1522) 중 일부를 인용하기도 했으며, 예수님의 유일한 중보자 되심을 강조하고, 카톨릭과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을 이단과 부정한 자로 단정 지었기에, 콥은 바젤 친척집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혐의7) 혹은 니콜라스 콥과 친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칼빈은 침대 시트를 밧줄처럼 꼬아 머물고 있던 ‘꼴레저 포르테’ 건물의 창문을 타고 도망쳐, 포도원 농부의 옷차림으로 노용까지 걸어갔다 (비교. 다메섹에서 바울의 도망, 행 9:25). 칼빈은 1534년 5월 4일 노용의 성직록을 받는 직책을 사임함으로써 로마 교회와 완전히 결별했다. 교황에 비타협적인 루터의 글을 접한 것, 경건한 개신교도들과의 접촉, 비성경적인 카톨릭의 행태를 깨달음 (예. 성자숭배, 거룩한 행렬, 성물, 면죄부, 여러 미신적 의식 등), 성경과 교부에 대한 심도 있는 공부 등이 축적되어 회심을 일으킨 것이다 (참고. 맥닐, 1990:133). 1534년 5월 26일에 ‘교회 내의 소요’와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이단 혐의로 기소된 형 샤를 때문에 일어난 것 같다. 짧은 토옥 생활을 거친 후 칼빈은 노용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534년 10월 18일, 왕의 약제사의 하인이었던 ‘페레’ (Feret)가 미사를 비난하는 벽보를 왕궁을 포함하여 여러 곳에 붙인 것이 발단이 되어 파리에서 개신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몇 주 후에, 칼빈은 제자이자 친구인 ‘뒤 티에’ (L. du Tillet)와 함께 메츠와 슈트라스부르크 (거기서 Bucer를 만남)를 거쳐 바젤로 갔다.
1534년 말경, 나바라의 여왕 ‘마르가리타’의 보호를 받으며, 그녀의 고향 앙굴렘에서 ‘기독교 강요’를 준비했다. 1534년 말, 칼빈은 위험을 무릅쓰고 잠시 파리로 왔는데, 스페인 의사 출신으로서 과격한 반 삼위일체론자 ‘미카엘 세베르투스’ (Michael Severtus; 나중에 제네바에서 화형 당함)를 만나 논쟁을 하려고 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1534년 오를레앙에 체류할 때, 죽은 자의 영혼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자고 있다고 주장한 재세례파를 반박하여 ‘영혼수면설 논박’ (Psychopannychia)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것은 그의 첫 번째 신학서이다. 1535년 1월-1536년 3월까지 ‘뒤 티에’와 함께 바젤에 머물 때, 바젤대학교의 지도자였던 ‘그리나이우스’ (S. Grynaeus)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칼빈은 1533-6년까지 가명 (예. Martianus Lucanius, Charles d'Espeville)을 쓰면서 남부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등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1536년 4-5월에, 바젤에서 종적을 감춘 칼빈은 이태리의 페라라 (Ferrara)로 갔다. 칼빈은 이태리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고, 개신교에 지지를 보낸 프랑스 공주 출신으로 페라라의 공작 ‘에꼴 데스떼’ (Ercole II d'Este)의 부인이 된 ‘르네’ (Renee, 1510-75)와 상의하고 싶어 했다. 칼빈은 페라라가 개신교 운동의 중심지요 프랑스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루어 지지 않았다.
4. ‘기독교 강요’
칼빈이 바젤에 머물던 1536년 3월에, ‘토마스 플라터’ (Thomas Platter)의 출판사를 통해서 ‘기독교 강요’ (초판,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를 출간했다. 이때는 칼빈이 노용의 성직록을 사임한지 거의 2년이 지난 때다. 이미 1535년 8월에 기독교 강요의 원고는 완성되었다. 칼빈은 ‘마르티아누스 루카니우스’ (Martianus Lucanius)라는 가명을 사용했기에 바젤에 살던 사람들은 칼빈이 그 책의 저자인지 알지 못했다. 칼빈이 가명을 쓴 것은 개신교 도시 바젤에 있는 박해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집필 활동에 방해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나중에 서점에 진열된 책에 ‘노용의 존 칼빈 지음’이라는 글이 선명히 박혀 있었다 (참고. 맥닐, 1990:139). 이 책을 개신교를 박해하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1494-1547)에게 헌정했는데, 기록 목적은 기독교를 보호하고 변증하기 위해서 였다. 이 책은 520매의 8절판 책으로, 총 6장으로 구성 되었다: (1) 십계명, (2) 사도신경, (3) 주기도문, (4) 세례와 성찬, (5) 다른 성례들, (6)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 정치 그리고 치리에 대한 설명. 칼빈은 루터의 ‘교리 문답’에서 이런 순서를 취했는지 모르지만, 일반 성도의 교육을 위한 중세의 많은 책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증보된 개정판 (제 2판)은 총 17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538년 슈트라스부르크의 ‘리헬’ (W. Rihel)이 인쇄했고, 제목은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로 바뀌었다. 프랑스에 보급할 목적으로 편집된 책에 저자를 'Alcuinus'로 인쇄했다. 칼빈은 1541년에 제네바에서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를 직접 불어로 번역했다. 그 때까지 불어로 된 책 중에 기독교 강요만큼 정교하고 탁월한 사상서는 없었다. 1543년 라틴어판은 총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첨가된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수도원의 맹세’에 과한 장 (4장)이다. 이 책은 1545년에 재판되었고, 1550, 1553, 1554년에 개정되었다. 1550년 판에서 칼빈은 번호를 붙인 단락들 마다 소제목을 도입했다. 1545년과 1551년에 불어판이 출판되었다. 제네바의 ‘로베르 에띠엔’ (Robert Etienne)출판사를 통해서 1559년에 제 5판 (라틴어)이 출판되었다. 각 권이 17-25장으로 구성된 총 4권의 책이다. 칼빈은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서, 제 1권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론), 2권은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기독론), 3권은 성령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적용 (구원론), 4권은 은혜의 수단, 교회와 성례를 다루었다. 칼빈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구속주로, 인간에게 영감을 주시는 분으로 다루며, 교회를 신적인 사회로 묘사 한다 (참고. 맥닐, 1990:141-147).
‘기독교 강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교리 체계와 신학을 종합한 탁월한 작품임. (2) 매 페이지마다 성경을 단순한 증거 구절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보면서 성경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함. (3) 기독교의 원천으로 돌아가서 (ad fontes) 살펴보려고 했기에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을 비평적으로 탐구했음. (4) 필수적으로 알아야할 경건과 구원에 관한 교리로서 경건을 열망하는 사람이 읽어야 할 가슴으로 쓴 책임.
5. 제 1차 제네바 개혁과 슈트라스부르크 시절 (1536-41)
1536년 5월 제네바 시는 교회개혁을 받아들였다. 칼빈은 그 해 6월 파리로 가서 동생 앙투안과 이복 여동생 마리를 데리고, 부친이 남긴 노용의 유산을 정리한 후, 슈트라스부르크로 도피하려고 했다. 그 무렵 프랑수아 1세와 카롤 5세 황제 사이의 전쟁으로 그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제네바를 경유해야 했다. 칼빈은 7월 말에 제네바에 도착했다. 목소리가 크고, 수염이 붉고, 자그마한 체구의 뜨거운 복음주의자로서 칼빈보다 20살 연상이었던 ‘파렐’ (G. Farel, 1489-1565)이 칼빈에게 “만약 자신의 연구를 주님의 일보다 더 선호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그리스도보다 더 선호한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라고 경고 했다. 칼빈은 이것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칼빈은 안수를 받아 목사로 임직했는가? 제네바에서 오래 살았던 ‘유니우스’ (Unius)는 1608년에 “칼빈의 선임자들이 그에게 안수했다”고 기록한다. 1536년 11월에 마틴 부처는 칼빈을 ‘동료 목사’라고 불렀다. 칼빈이 어떤 개신교 모임에서 목회를 위해서 구별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목사로서의 임직이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참고. 맥닐, 1990:158).
칼빈은 1536년 9월, 제네바의 성 베드로교회당에서 바울 서신과 신약 성경 강해를 시작했다.8) 거기서 칼빈은 ‘파렐, 쿠롤, 소니에, 코르디에’의 도움을 받아 개혁운동을 주도해 갔다. 칼빈과 파렐이 작성한 ‘신앙고백과 규율집’ 그리고 ‘교리문답’은 11월 16일에 시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시의회는 1537년 1월에 비도덕적 행습들을 금했다. 성찬을 한 달에 1번 시행할 것, 권징을 행하고, 시편을 부르는 것 등을 요구했다.9) 하지만 개혁에 불만을 품은 세력 (예. 200인회는 1538년 1월 4일에 목사가 교인을 성찬에서 제외시키고 출교의 권한을 갖는 것을 반대함)이 발생했고, 칼빈은 시의회를 ‘사단의 의회’라고 비판했다. 결국 그 다음해 1537년 4월 23일, 시의회는 재판도 없이 파렐과 칼빈을 면직시키고 제네바에서 3일 안에 떠나라고 명령했다. 칼빈은 비바람이 부는 날씨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바젤로 향했다.10)
1538년 9월에 칼빈은 독일의 자유로운 대도시였으며, 개신교인의 피난처요 ‘새 예루살렘’이라 불린 슈트라스부르크로 갔다. 이 도시는 1254년 이래로 슈바르츠 (D. Schwarz)의 활동으로 복음주의적 예배를 도입했다. 거기에 ‘부처, 카피토, 헤디오’와 같은 개혁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칼빈이 거기서 은거할 생각이었으나, ‘마틴 부처’가 슈트라스부르크의 개혁에 동참할 것을 간청하자 승낙했다. 칼빈은 1541년 까지 3년 동안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프랑스 난민 (칼빈은 종종 ‘작은 프랑스교회’라고 부름)을 대상으로 성 니콜라스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그곳 신학교에서 교수했다. 1539년 3월에 ‘사돌레토’ (Sadoleto) 추기경 (1477-1547)이 복음 운동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 제네바 행정 장관과 시민 그리고 칼빈에게 편지를 보냈다. 칼빈은 반박의 글을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불어와 라틴어로 써서 9월 1일에 제네바로 보냈다. 그 책은 카톨릭으로부터 개종한 자들에 대해 쏟아지는 이단과 분열이라는 비난을 다루었다. 칼빈은 교회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카톨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정당한 일로 변호하고, 교황의 헛된 주장과 폭정을 거부하고, 참된 교회의 영광을 높이고 변호했다. 그 후 ‘기독교 강요’ 2판 (1539년 8월 1일), ‘로마서 주석’ (1539년 10월 18일)을 출판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은 약 52길더 (약 200마르크, 약 30만원)의 월급만 받았기에 극심한 가난을 겪었기에, 제네바에 두고 온 책을 팔아서 집세를 내었다. 칼빈은 주일에 두 번, 주중에 두 번 설교하고, 여러 번의 강의, 방대한 서신 교환, 성경공부반 운영 등으로 바빴다. 정부 관리의 간섭을 제네바에서보다 적게 받았다. 성찬은 매주하려고 했지만, 관원들은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했다.11) 1539년 칼빈이 출판한 ‘곡조를 붙인 시편과 아가서의 일부’를 교회가 부름으로써 세상 음악과는 구분했다 (참고. 1542년의 시편집). 시 25, 36, 46, 91, 138편은 칼빈이 작사했고, 나머지는 프랑스 궁중 시인 ‘마로’ (C. Marot)가 썼다 (참고. 1562년의 125곡으로 구성된 제네바 시편). 이 무렵 칼빈은 12살 연상의 ‘멜랑히톤’과도 교제 했다.
칼빈은 31세 (1540년 8월) 때, 목회하던 교회의 교인이었던 ‘이들레트 드 뷔르’ (Idelette de Bure)와 파렐의 주례로 결혼했다. 그녀는 칼빈이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할 때 재세례파에서12) 개종시킨 ‘장 스토르더’ (Jean Stordeur. 직업은 장인. 전염병으로 죽음)의 과부였고 두 자녀가 있었다. 이들레트에게는 10살 난 아들과 그보다 어린 딸 ‘주디스’가 있었다. 주디스는 제네바에서 결혼할 때 까지 칼빈의 집에서 살았다. 이들레트는 칼빈이 배우자의 자질로 중요하게 생각한 대로 마음이 착하고 경건했다.13) 또한 예쁘고 명석했지만 몸은 약했다. 칼빈이 40세가 되던 1549년 4월에 아내 이들레트가 사망했기에,14) 결혼 생활은 단지 9년간 지속되었다. 그 후 15년을 독신으로 지냈다. 1542년에 아들 ‘자크’ (즉 야고보)가 조산으로 태어났지만 2주 만에 죽었고, 그 후 다른 두 아기도 태어났지만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 아들이 죽었을 때 “우리 아버지는 자기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임을 아신다”라고 썼다. 그리고 대적들이 칼빈에게 자녀가 없다고 비웃자, 하나님은 자신에게 무수히 많은 영적 자녀를 주셨다고 대답했다.
3년 동안의 슈트라스부르크에서의 사역은 칼빈의 신학 (기독교 강요 2판, 로마서 주석 및 성례론 등)과 개혁을 다듬어 주는 중요한 발판이었다. 거기서 ‘부처’로부터 예배 모범과 권징을 배웠다. 그리고 근대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스트롬’으로부터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배웠는데, 그것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
6. 제 2차 제네바 개혁과 부흥 그리고 죽음 (1541-64)
이 무렵 제네바는 정부파, 로마 카톨릭파 그리고 친 개혁파 (예. 기욤 파렐의 이름을 딴 ‘기욤당’)로 3등분 되었다.15) 칼빈에게 1538년 4월 23일에 추방령을 내렸던 정부파의 4명의 장관 (장 필립, 샤포루주, 룰랭, 리샤르데)들이 폭동 주모죄, 살인죄, 사기죄, 반역죄 등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1540년 제네바 소의회는 칼빈이 돌아와야 한다고 표결로 결정했다. 1541년 5월 1일, 제네바 총회는 칼빈에게 내려진 추방령을 취소했다. 물론 슈트라스부르크도 관원들도 칼빈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는데, 칼빈이 슈트라스부르크 시민권을 계속 유지하고, 봉급을 계속 받는 조건으로 강권했다. 칼빈은 봉급을 계속 받는 것은 사양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물질에 초연한 칼빈의 모습을 본다. 칼빈이 제네바로 복귀할 때 제네바에 내건 조건은 2가지이다: (1) 교리교육의 도입, (2) 교회 치리법의 재정. 슈트라스부르크 시절에 칼빈은 이미 ‘교리’와 ‘치리’의 결합에 대한 부처의 이념을 알고 있었다. 제네바 의회의 공식 초청을 받은 칼빈은 고민 끝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1541년 9월 13일 양 떼가 있던 제네바로 시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돌아갔다. 이 때 제네바의 교회 개혁의 표어는 ‘흑암 뒤의 빛’ (post tenebras lux)이었다. 성격이 쾌활했던 동역자 ‘비레’ (P. Viret)가 1542년 7월에 로잔으로 옮긴 것은 칼빈에게 큰 손실이었다. 칼빈이 제네바를 완전히 장악하기 까지는 약 14년 (1541-55)의 풍파 많은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참고로 1549-59년 사이에, 영국, 프랑스, 화란 등에서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유입되어 영주권을 얻는 사람은 5.019명에 달했다.
의학, 신학, 법학을 공부한 ‘미카엘 세베르투스’ (Michael Severtus, 1511-53)는 ‘삼위일체의 오류’ (1531), ‘기독교의 회복’ (1553)을 출판하여 ‘기독교 강요’를 대항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죄와 유아세례도 반대했다. 그는 1534년에 칼빈이 설복시키기 위해 파리에서 만나려 했다가 무산된 바로 그 인물이다. 1553년 8월 13일에 칼빈의 고소로 투옥되었다. 불링거를 비롯하여 베른과 쮜리히의 지도자들은 사형이 적합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칼빈은 세베르투스의 주장의 오류를 찾아내고 반박했으며, 회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적으로 논쟁하기도 했다. 결국 세베르투스는 1553년 10월 27일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이 화형의 책임을 칼빈에게 돌리는 이도 있었다. 칼빈은 사형을 제안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참고. 맥닐, 1990:220).
칼빈은 성경과 초대교회에 일치하는 모습으로 교회를 재정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참고. 기독교 강요, 4.1.9). 1541년 11월 20일 주일에 총회에서 채택된 ‘제네바 교회의 법령들’은 후대 개혁교회의 원리들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교회 헌법책이었다. 참 교회는 순수한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라는 두 표지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목사는 말씀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례 해야 한다.16) 칼빈은 ‘교회의 근육 (힘줄)’인 권징 (church discipline)을 목사와 장로의 사역으로 보지만 (참고. 기독교 강요, 4.12.1), 교회의 표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권징은 교회의 표지를 수호하기 위해 필요하다. 칼빈은 ‘교리문답서’도 만들었다.
칼빈은 1541년 교회법에서 교회의 직분을 4개로 나눈다: 목사, 박사 (혹은 교사), 장로, 집사. 목사는 내적 소명은 물론이거니와 (성경 지식, 교리 수용, 가르치는 능력, 좋은 생활 습관 등을 목사회의 심사를 거친 후) 외적 소명으로 개 교회에 임직할 수 있었는데,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성도와 소통하는 것’이다. 칼빈은 중세에서 임직식 때 안수가 미신화 되었기에 선포로 임직하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목사의 감독기구로 ‘목사회’를 두어 목사후보생을 심사하고, 성경을 토론하여 목사 사이의 교리 일치를 보존하고, 목사의 생활을 (예. 3개월 마다) 감독하도록 했다. 일반 성도가 교회에서 투표를 하는 참정권을 성경적인 것으로 보았다. ‘박사’ (교사)는 참된 교리를 가르치는 이로서 현재의 신학 교수에 가까운 직분이다. 목사가 박사의 직분을 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장로’는 중세에 사라져 버렸는데, 칼빈이 롬 12:6-8절과 고전 12:28절을 연구하여 회복한 것이다. 장로는 성도의 생활을 감독하고, 잘못을 범한 자를 권면하고, 사랑에 근거하여 교정을 명령 했다. 장로들은 직분을 계속 할지를 두고 (제네바의 소의회 혹은 200인회로부터) 연말에 승인을 받았다.17) 제네바의 소의회와 60인회, 그리고 200인회에서 선출된 장로와 비슷한 절차를 거쳐 선발되는 ‘집사’는 두 종류로 나누는데, (1)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이, (2)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는 이. 칼빈은 병원을 운영하는 자금을 조달하는 집사와 직접 구제 병원에서 섬기는 집사로 구분하기도 했다. 집사들은 제네바 시가 세운 구제 병원을 운영했지만, 정기적으로 목사와 장로의 감독을 받았다 (보라. 이은선, 2009:145-152).
성도의 도덕적 생활을 감독하는 기구로서 오늘 날 장로교회의 ‘당회’와는 조금 다른 컨시스토리 (consistory)는 매년 위정자들에 의해서 선택된 12인의 장로들과, 1564년에는 19인이었던 목사회 (the venerable company of pastors)의 모든 구성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 모두는 위원회에서 선출되었다. 칼빈은 치리법원을 통해서 권징의 원칙을 세웠는데, 예배 불참자나 지각자, 사소한 비행들과 경박한 말, 자녀를 교리 교육에 보내지 않는 부모, 음주, 이혼, 정욕을 유발하는 춤, 운에 달린 경기들 (games of chance), 오락, 간음, 간통, 혼외 출산, 가정 폭력, 이단, 고리대금 등 150여 가지의 권징 조건이 있었다고 한다. 더 중요한 일은 치리법원에서 다루기 전에 소의회를 거치기도 했다. 이때는 ‘제네바 시민’과 ‘교회의 구성원’ 사이에 구분이 없었다 (보라. 정성구, 2009:119). 1561년에 교회법이 개정되어 출판되었다. 칼빈의 말년에 제네바의 법률 집행은 더욱 구체적이며 엄격해 졌다. 1561년에 사형이 11건이나 집행되었다. 제네바는 ‘성경에 의한 통치‘ (Bibliocracy), ‘그리스도의 통치’ (christocracy) 혹은 신정 통치 (theocracy)를 받았지, ‘목사 정치’ (clerocracy) 혹은 ‘성직자 정치’ (hierocracy)를 받지 않았다. 이 사실은 한국 교회에 만연한 비성경적이며 편 가르기 식의 성직자 정치에 대해 일갈 한다 (참고. 맥닐, 1990:211-212).
칼빈과 당국자들은 술집과 사창가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결혼과 이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였기에 교회의 허락이 필요했다. 장례식에서는 미신적 행동을 배제했다. 이것은 치리가 사라지고, 개인의 결정으로 결혼과 이혼이 만연하며, 결혼과 장례에 유교적 잔재가 많은 한국교회에 시사 하는 면이 많다.
칼빈은 성찬과 관련하여 신비주의적인 카톨릭의 화체설, 루터파의 공재설 그리고 쯔빙글리파의 순수 영적 임재설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성찬에 대해 단호히 논쟁으로 물리치기도 했지만 (예. 함부르크의 강경주의적 루터파 목사 Joachim Westphal와 Tilleman Hesshus와의 논쟁. 1554, 1556, 1557, 1561), 다른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과 토론으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성찬 횟수를 1년에 4번에서, 매달 1번으로 조정했다.18) 라틴어 예배를 불어 예배로 개혁했다.19)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성도의 삶의 변화에 역점을 두었다.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할 때 직접 모금을 했고, 정부 관리와 개혁 신학에 기초하여 목회자를 양성 했다. 칼빈보다 10살 후배인 데오도레 베자 (1519-1605, 이전에 Melchior Wolmar의 제자였음)가 40세에 초대 학장 겸 헬라어 교수를 맡았다. 개혁주의 신학의 모판이자 에딘버러대학과 같은 많은 대학의 모델이 된 제네바 아카데미는 신앙 훈련이 학생의 삶 속에 녹아지도록 훈련했고, 새벽 기도와 성경 암송은 필수였다.20) 이 아카데미는 개혁 활동을 유럽에 확산시키는 중요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교회 연합을 중요하게 여긴 칼빈은 비록 교리, 권징, 예배에 차이가 있었지만 루터파, 성공회, 왈도파, 보헤미안형제들과의 교제를 소중하게 여겼다. 마틴 부처와 함께 교파간의 관용을 발전시켰다. 카톨릭 안에도 교회의 흔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진리를 손상시키며 까지 연합을 하는 것은 반대했다.
칼빈은 매주 목요일 치리법원 (consistory)의 회의 주재, 주일 (오전은 신약, 오후는 시편을 설교)은 물론 주중 이틀에 한 번씩 설교 (1주에 3번 즉 월, 수, 금요일 오전 6-7시 [겨울은 오전 7-8시]에 구약을 강해함. 1시간 정도에 걸친 연속 강해 설교), 사흘에 한 번 강의, 매주 수요일에 있었던 특별 기도회, 매주 금요일 회중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 강해, 저술, 서신 교환, 학교 감독, 인근 국가에서 종교 문제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일 등으로 바쁘게 지냈다 (참고. 이은선, 2009:131).
칼빈은 매우 적은 수면, 관절염, 두통, 치질, 소화불량, 천식, 열병, 학질, 통풍, 약간의 불면증, 결석, 늑막염 등으로 고생했다. 30대에 이미 만성질환자가 되었다. 소화불량으로 마지막 10년 동안은 하루에 한 끼만 식사했다. 그는 자신의 육체의 약함을 불굴의 영적인 힘과 섭리 신앙으로 극복했다.21) 제네바 시의회가 별도의 대가를 지불하려고 했을 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부하고 극도로 소박한 생활을 했다. 1543-1545년의 전염병으로 제네바 인구의 10분의 1이 죽었다. 이 때 마녀 재판과 화형이 무수했지만, 이를 막기 위해서 마법에 대한 전통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칼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보라. 맥닐, 1990:197).22)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칼빈은 1564년 2월 6일, 성 베드로교회당에서 마지막으로 설교 했다. 4월 2일 부활절에 베자가 집례 한 성찬식에 참석했다. 4월 25일 대서공증인을 불러 유언장을 작성하도록 했는데, 자신의 사역을 억제된 어조로 언급하면서, 대신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됨 및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강조하고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고백했다. 4월 27일에 4명의 제네바 시 장관들과 소 의회 의원들이 칼빈을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칼빈은 신정국가적 (theocratic)인 뉘앙스의 여러 권면을 했다. 특히 자신의 결점을 용서해 달라고 여러 번 말했다. 4월 28일에는 제네바의 동료 목회자들을 불러 특별히 목회자 사이의 우정을 강조했으며, 악한 제네바 시민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막아야 했던 소란은 3,000번도 넘었다고 말했다 (참고. 판 스파이커, 2009:12). 칼빈은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면서 시편에서 위안을 주는 구절을 암송했다. 1564년 5월 27일 토요일 저녁 8시에 후계자 베자의 품에서 평안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 다음으로 최고의 위로자’, ‘모두의 아버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스승’, ‘가장 지혜로운 시민’, ‘신실한 목자’를 잃은 제네바는 슬픔에 잠겼다. 그 다음 날 주일 오후 2시 플랭 팔레의 공동묘지에서 장례식을 교회법에 따라 간소하게 치른 후, 유언에 따라 묘비도 없이 매장되었다. 참고로 칼빈의 개혁 동역자 ‘파렐’도 같은 해 9월 13일, 76세로 숨을 거두었다.
7. 칼빈의 기여
칼빈은 천성적으로 겁이 많고 소심했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약함 속에서도 강했다. 그는 전투적인 인생을 살았다. 자신을 저주 받은 이단으로 낙인찍은 카톨릭은 말할 것 없고, 같은 개신교 진영의 ‘리버틴파’ (Libertines)와의 투쟁에서도 수차례 생명의 위협을 감수했다.23) 칼빈의 습관과 취미는 단순했고, 옷차림은 깨끗했으며, 매우 절제된 경건의 생활이 몸에 배었다.24) 적은 월급 이외에는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체의 돈을 더 받지 않았으며, 급료 인상도 반대 했다. 칼빈을 이단으로 본 ‘교황 피우스 4세’조차도 물욕이 없는 것을 칼빈의 장점으로 들 정도였다. 칼빈의 지적 능력은 최고였다. 그는 예리한 이성과 건전한 판단력,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고, 언어에도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었기에 인문주의와 같은 세상 지식을 성경을 위해서 활용할 줄 알았다. 그의 말과 글은 명료하고 정확하며 순수하여 설득력이 있었다. 칼빈의 저술은 크게 ‘성경 주석’,25) ‘변증서’ (예. 'Psychopannichia', 1534; ‘방종파에 반대함’, 1544; ‘재세례파 이단에 반대함’, 1544; ‘신통하다고 일컬어지는 점성술을 반대하는 경고’, 1549), ‘교회와 교리 예전’, ‘설교’ (1541년 이후로만 2000번 이상. 총 4000번 이상 설교함), 그리고 ‘편지’ (4271통)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성경 주석 방식은 문법-역사적 주석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 받는데, 독창성과 깊이, 명료함과 건전함은 탁월했다. 칼빈은 계시의 점진적인 발전을 믿었다 (기독교 강요, 2.10.20). 구약 보다 신약을 더 의존하는 칼빈은 종종 복음서에서 추출한 해석들을 가지고 구약 본문을 채색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에 인용된 신약 구절은 4330개, 구약은 2470개 였다 (참고. 맥닐, 1990:242-243). 멜랑히톤으로 부터 ‘유일한 신학자’ (the theologian),26) 구약 학자 디스텔 (Diestel)로부터는 ‘진정한 주해를 탄생시킨 인물’이라는 명예로운 평가를 받았다.27)
루터와 쯔빙글리가 이룩한 개혁의 토대 위에 개혁을 완성한 칼빈의 영향은 1550년 이후의 영국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들의 형성, 영국 청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들,28)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 선조들, 화란의 칼빈주의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다. 그리고 칼빈은 노동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보았기에 (참고. 문화명령과 유사한 ‘경건의 속화’ [laicization of piety]), 자본주의와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가난한 자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없지만, 대부를 통해서 부를 획득하는 사람에게는 그 이윤을 나누는 차원에서 이자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사상은 자본주의와 상공업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만들었다. 프랑스 난민을 위한 프랑스 기금을 조성함으로써 사회 복지 정책을 위한 길도 닦았다. 카톨릭과 같이 탄압하는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참고. 박용규, 2009:159-160). 또한 주로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집필했기에 라틴어와 프랑스 언어, 지성, 학문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칼빈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가혹한 면이 없지 않았고, 자신의 주장을 매우 강경하게 고수했으며, 성급하고 격렬한 기질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평생 동안 최우선으로 삼은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철저히 믿었던 신앙인, 자기를 부인하고 삶을 다 드린 헌신적인 하나님의 사람,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말씀으로 개혁하기 원한 목회자,29) 최고의 지적 능력과 열정으로 촌음을 아끼며 성경을 풀이하고 거짓 교리를 반박하며 참 교리를 세운 신학자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풍성한 칼빈의 가르침을 우리 삶과 목회 현장에 적용해 보자. 그 때 교회가 바르게 개혁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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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derhuis, H.J. 2009. John Calvin: a pilgrim's life. Downers Grove : IVP Acade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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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2009. 종교개혁자로서 존 칼빈의 생애. (In 오정호 ed. 칼빈과 한국교회. 생명의 말씀사. p. 1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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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섭. 2009. 인문주의자 칼빈. (In 오정호 ed. 칼빈과 한국교회. 생명의 말씀사. p. 211-248.)
유해무. 2007. 칼빈의 교회론. (In 개혁주의학술원 ed. 칼빈과 교회. 고신대 개혁주 의학술원. p. 13-41.)
이은선. 2009. 목회자로서의 칼빈. (In 오정호 ed. 칼빈과 한국교회. 생명의 말씀사. p. 109-167.)
이환봉. 2007. 칼빈의 성찬론: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 (In 개혁주의학술원 ed. 칼빈과 교회.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 p. 109-145.)
정성구. 2009. 칼빈의 유산: 목회와 실천. (In 개혁주의 학술원 ed. 칼빈의 유산과 현대적 의의. 고신대 개혁주의 학술원. p. 95-119.)
판 스파이커, W. 2009. 칼빈의 유산: 칼빈 신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In 개혁주 의 학술원 ed. 칼빈의 유산과 현대적 의의. 고신대 개혁주의 학술원. p.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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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 전체를 위해 총신대 박용규 교수의 글을 많이 참고 했다.
2) 프랑스어 Cauvin을 라틴어로 쓰면 Calvinus,가 된다.
3) 제 2 제네바 개혁 시기에, 칼빈은 창녀를 제네바에서 추방했다. 그런데 그 때 동생 앙투안의 아내가 칼빈의 곱추 사환과 간통한 것이 발각되기도 했다. 칼빈의 결혼한 의붓딸 ‘주디스 스토르데’도 간통을 했다.
4) 칼빈처럼 쯔빙글리의 경우도 고전어, 유명한 인문주의자들과 교부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점차 인문주의를 성경과 개혁주의에 종속시켰다. 현대는 학문 간의 통섭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성경 해석을 위해서도 구원계시사적 해석을 더 잘하기 위해서 다른 학문의 도움을 선별적으로 받을 필요가 있다 (참고. 맥닐, 1990:33-34).
5) 고대 세계에 ‘관용’ (clemency)은 군주의 미덕이었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이교도들에게도 관용 (mercy)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세네카의 의견을 따라서, 칼빈은 프랑수아 1세도 개신교의 복음주의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을 기대 했다. 하지만 이 주석에서 칼빈은 성경 구절을 단지 3번만 우연히 언급했는데, 이 무렵 칼빈의 사상은 개혁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참고. 안인섭, 2003:233).
6) 이때를 칼빈의 회심의 연도로 잡는 근거는 무엇인가? 1533년 6월, 칼빈은 니콜라스 콥과 함께 한 카톨릭 수녀원을 방문하여 친구 프랑수아 다니엘의 여동생이 거기 들어갈 수 있도록 원장과 면담했다. 그리고 8월 23일에는 노용의 참사회에 참여했는데, 전염병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엄숙한 행진’을 하기로 결의했다 (맥닐, 1990:130).
7) 이것은 베자의 의견인데, 한 때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연설문의 문체는 칼빈의 문체와 다르다.
8)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 이후의 최고의 강해설교자로 평가되는 칼빈의 설교는 원고를 직접 작성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즉석 설교의 형태였다. 물론 생각나는 대로 했던 설교는 아니었다. 성경 원어를 깊이 연구한 후에, 신구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를 깨닫고, 성도의 삶을 고려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강단으로 나아갔고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 칼빈이 설교할 때 주로 프랑스 출신 ‘라구니에’ (D. Raguenier)가 속기했다. 마틴 루터는 넓은 어깨에 얼굴이 넓고 솔직한 독일인으로서 건강미와 해박한 지식과 감수성 그리고 열정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칼빈의 턱은 좁고, 수염은 뾰족하고, 코는 오뚝했으며, 가냘픈 체구로 병약했는데, 그의 설교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명료했으며 가끔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유머는 별로 없었다 (보라. 정성구, 2009:107-109).
9) 시편송을 보급하기 위해서 소년합창단을 구성하려고 했다. 이것은 시편송에 무지한 현대 교회가 찬양대를 두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참고로 칼빈은 무급으로 봉사했는데, 파렐의 제안으로 제네바 시의회가 1537년 2월 13일 ‘금화 6크라운’을 처음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현대 목회자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월급은 얼마가 적절하며, 월급 이외에 다양한 명목 (심지어 교통 위반 벌칙금, 신문구독비 등)으로 교회가 목회자에게 지불하는 것은 올바른지 재고해 볼 때다.
10) 참고로 칼빈은 심방과 상담을 자상하게 했던 목회자였다. 1538년 칼빈이 바젤에 머물고 있었을 때, 파렐의 조카가 흑사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서 심방했다. 결국 그가 젊은 나이게 죽고 말았는데, 칼빈은 자비로 장례비를 부담하고, 그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었다. 칼빈은 신학적으로는 예리한 논리로 냉정하게 투쟁한 인물일지 몰라도, 그의 친구 ‘니콜라스 데 갈라르’가 말했듯이 목사로서 칼빈은 사랑이 많은 참 목자였다 (참고. 정성구, 2009:102).
11) 칼빈 당시 성찬식 때 분병과 분잔은 집사가 했다 (맥닐, 1990:175).
12) 재세례파는 교황 체제 하에서 불경한 우상숭배자들이 베푼 세례를 반대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다. 칼빈은 세례의 효력이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기에 재 세례를 반대했다 (기독교 강요, 4.15.16; 참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7장 7절). 칼빈은 재세례파를 ‘잘못된 세례파들’ (Catabaptist)이라고 불렀다 (참고. 맥닐, 1990:142).
13) 칼빈은 외모보다는 결혼 대상자 (여자)의 ‘심성 (heart)과 영성 (경건, spirituality)’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구혼 (courtship) 기간 동안 섹시한 옷차림, 화장, 성적으로 상스러운 농담, 외설적인 시와 노래, 술집 출입, 과음, 과식, 같이 수영하거나 목욕하는 것 및 성교를 금했다. 불신 결혼과 나이 차이가 많은 남여의 결혼을 반대했는데, 십대 소녀와 결혼한 기욤 파렐 (당시 65세)의 결혼식에 바쁘다는 이유로 불참했고 그 후 그와는 연락도 거의 하지 않았다 (참고. Selderhuis, 2009:178-181).
14) 데오도레 베자는 칼빈의 아내 이들레트가 죽기 2시간 전에 “오 영광스런 부활이여. 오 아브라함과 조상의 하나님이여. 과거에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헛되게 믿기 않았습니다. 저도 그러합니다”라고 고백을 했다고 전한다.
15)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후, 기득권과 교권의 세력에 의해 축출된 것을 알고, 그의 설교를 사모하고 지지하던 사람들이 뭉쳐서 만든 모임이 기욤당 (기에르멩, Guillermins)이다. 칼빈은 기욤당이 제네바 교회에 새로 부임한 설교자 (마르쿠, A. Marcourt 혹은 모랑, J. Morand)로부터 성찬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며 그를 불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로 신임 목사를 도와 화해하고 교회를 세워가라고 말했다. 이것은 선임 목사와 후임 목사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좋은 가르침이다.
16) 설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기독교 강요, 4.1.6),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교사이시고 (기독교 강요, 4.3.3; 4.8.7), 성령께서 내적 교사가 뙤실 때 (기독교 강요, 2.2.20; 3.2.34; 4.149)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설교가 된다 (참고. 유해무, 2007:37).
17) 지금도 개혁교회는 장로와 집사의 임기를 제한한다. 한국에서는 항존직을 오해하여 카톨릭처럼 봉사하지 않아도 직분을 계속 인정하는 폐단이 있다.
18) 칼빈은 루터파가 주장하는 성찬에서의 자연적 몸의 신체적 임재를 부인했으며,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영과의 순수한 영적 교재만을 용납하려는 쯔빙글리파의 주장에도 반대했다.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참된 전달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재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그러한 임재가 이루어졌다면 그 표징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닌 실제로 그 실체를 유효하게 제시해 보여주는 ‘실제성과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칼빈이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적으로 또는 실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반대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와의 ‘참된 그리고 실재적인 교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찬에 그리스도의 천상의 몸이 실재로 장소적으로 임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성찬에 실재적으로 임재하시는데, 왜냐하면 성령의 신비한 능력에 의해 수찬자가 하늘로 이끌려 올려져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으로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이환봉, 2007:111, 114-115).
19) 칼빈은 신약 성경에 찬양대나 악기 사용 그리고 찬양의 작곡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참고. 이은선, 2009:140).
20)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20장 전체를 ‘기도’에 할애한다. 말씀을 믿는 믿음 위에서 은혜의 방편인 기도할 것을 강조 했다.
21) 기독교 강요, 1.17.10-11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면 인생을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 3.7.10에도 동일한 사상이 나타난다. 참고로 칼빈의 초상이 80여개가 있지만, 유독 제네바에서 그린 것만 유별나게 눈이 날카롭고, 눈에 흰자가 많고, 차갑고, 전투적인 모습을 띤다. 독일, 화란, 헝가리 등에서 그린 것은 자비로운 목자의 모습이다.
22) 1551년, 칼빈의 고향인 피카르디의 노용 대성당의 참사회 의원들은 엄숙한 행렬 가운데 칼빈의 죽음을 경축했다. 소문만 듣고 무려 13년을 앞지른 시기상조의 해프닝이었다. 1552년 노용의 대 화재로 참변이 닥쳤을 때, 칼빈은 노용에 대해 조의를 표했다 (참고. 맥닐, 1990:107).
23) ‘방종파’라고도 번역되는 리버틴파는 프랑스와 화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영’을 강조하여 율법을 거부했다. 이후에 도덕법을 조롱했던 리버틴파는 제네바에서 권징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1547년 12월 13일에 방종파의 소동이 진압되기도 했다 (보라. 맥닐, 1990:193).
24) 칼빈은 고리 던지기, 공굴리기, 열쇠 꾸러미 던지기와 같은 오락을 했는데, 그는 금욕주의자는 아니다. “참된 경건 (‘영성’이라는 말보다 더 선호함)의 요점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쁨으로 피하고자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주님으로서 진정으로 경외하고, 그분의 의를 받아들여, 죽는 것보다 그를 거스리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순수하며 참된 열심을 내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1,2.1.).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 (unio mystica)을 이루는데, 경건한 사람은 예수님이 주시는 포괄적인 모든 은총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은혜와 함께 자신을 그들에게(성도) 나눠주셔서 그의 것은 모두 그대의 것이 되고, 그대는 그의 지체가 되며, 실로 그와 하나가 되고, 그의 의는 그대의 죄를 가리우며, 그의 구원은 그대가 받을 정죄를 도말하신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분리시키거나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우리를 결합시키신 그 친교를 용감하게 양손으로 굳게 붙잡아야 한다. ... 그리스도께서는 끊을 수 없는 교제의 유대로 우리와 결합하실 뿐 아니라 놀라운 영적 교제에 의해서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우리와 한 몸이 도시며, 마침내는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신다” (기독교 강요, 3.2.24).
25) 칼빈의 주석을 시간적으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롬(1540), 유(1542), 고전(1546), 고후(1547), 갈-골(1548), 딤전후(1548), 히(1549), 딛(1550), 약(1550), 살전후(1550), 벧전후/사(1551), 몬(1551), 요일(1551), 행(1552, 1554), 요(1553), 창(1554), 마-눅(1555). 시, 호(1557), 소 선지서(1559), 단(1561), 창-신(1563), 렘-애(1563), 수(1564, 사후에), 겔(1565, 사후에). 요한계시록과 많은 간본문을 가지고 있는 에스겔과 다니엘 주석은 칼빈의 후기 작품이다. 칼빈은 생애 마지막 8년을 구약 선지서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바쳤다. 이러한 주석 작업의 순서는 칼빈이 계시록 주석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26) 1578년 영국에서 출판된 칼빈의 요나서 강의와 설교집에 칼빈은 “제네바의 하나님의 교회 목회자, 신학 박사, 요한 칼빈 목사‘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칼빈이 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은 없지만, 유명한 신학자로 알려진 증거이다.
27) 헝가리 출신의 개혁신학자 Bela Vasady는 칼빈의 신학의 특징을 5가지로 요약 한다: (1) ‘믿음으로 말미암은 실용주의’ (belief-ful pragmatism). 여기서 실용주의란 철학적 실용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실제로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영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성도의 삶이 이끌림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2) ‘믿음으로 말미암은 실재주의’ (belief-ful realism). 실재주의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성도의 삶에 성취됨을 의미한다. (3) ‘믿음으로 말미암은 전체주의’ (belief-ful totalitarianism). 규범과 약속이 전체적으로 명령하시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4) ‘믿음으로 말미암은 불가지론’ (belief-ful agnosticism). 비록 하나님의 섭리의 숭고함과 영광이 우리에게 맞추어져 계시되나,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 가운데 숨겨져 있다. (5) ‘믿음으로 말미암은 반 율법주의’ (belief-ful antinomism). 여기서 하나님을 입법자가 아니라 단지 사람의 준칙에 대한 판단의 기준 정도로 여기는 칸트의 이성주의적 윤리관과는 다른 칼빈의 율법관을 본다. 하나님은 법의 수여자이시기에, 이미 그분의 명령에서 은혜를 예지하셨다 (인용. 문병호, 2009:183-184).
28) ‘위그노’ (Huguenots)라는 말은 스위스 제네바의 애국자들이 만든 당의 이름 'Eidguenots'에서 온 것 같다 (멕닐, 1990:154).
29) 정성구 (2009:115-117)는 칼빈의 목회원리를 5가지로 제시 하는데, 현대 목회자가 새겨들어야 한다: (1) 말씀의 순수한 전파를 강조, (2) 성례의 강조, (3) 권징과 훈련을 강조, (4) 교육을 강조, (5) 예배가 교회의 중심이 되도록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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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는 적지 않은 목회자들에게서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방법으로는 목회가 안 된다. 교회가 부흥할 수 없다”라는 소리가 나온다. 황당하게 들리는 이 말은 과연 그러한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칼빈을 제대로 연구해 보고 이런 말을 할까?” 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결국 이것은 신학교 (이론)와 목회 현장 (실천) 사이의 엇박자와 불일치로 인해 발생한 괴리감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신학교와 교회 사이의 거리는 얼마일까? 몇 몇 사안에 대해서는 너무 멀게 느껴진다. 이 간격을 줄이려면 무엇보다도 교회 (목회자)가 신학교 (신학자)를 안심하고 수용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전적인 경건에 뿌리를 둔 ‘교회의 교사’의 영적 권위와 현장감 있는 학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동시에 목회자도 신학자로서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위대한 교회의 교사였던 칼빈은 현대 교회의 경건한 신앙생활, 신학 그리고 목회를 위한 변함없는 ‘보물 창고’와 같은 인물이다. 그의 인생을 간략히 되짚어 보면서 살펴보자.
1. 칼빈의 출생과 어린 시절1)
2009년은 제네바의 개혁가 존 칼빈 탄생 500주년이다. 한국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행사들이 열렸지만, 자칫 반짝 이벤트로 그치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피카디 (Picardy)의 노용 (Noyon)에서 출생했다. 노용은 수도원, 성당, 신부가 많은 종교적인 도시였다. 칼빈의 아버지 ‘제라드 코뱅’ (Gerard Cauvin)은2) 노용의 주교의 공식 비서이자 시의 공증인이었는데, 성격은 엄격했다. 나중에 제라드 코뱅은 참사회에 남겨진 어떤 재산에 관한 계정을 놓고 노용 대성당의 참사회원들과 대립하다 출교를 당한다. 칼빈의 어머니 ‘잔느 르프랑’ (Jeanne Lefrance)은 여관 주인 ‘장 르프랑’의 딸이었는데, 미모의 신앙심 깊은 여인으로서 칼빈이 3살 때 사망했다. 어머니는 넷째 아들 칼빈을 성인의 사당에 데리고 다녔고, 어린 칼빈은 성인의 유골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참고. 맥닐, 1990:108). 칼빈에게 형제는 4명 (샤를, 장, 앙투안, 프랑수아) 그리고 아버지가 재혼하여 낳은 이복누이는 2명 (Marie, 다른 한 명의 이름은 모름)있었다. 형제 중 두 명은 일찍 죽었다. 1518년에 칼빈의 형 ‘샤를’은 대성당의 신부가 되었지만 1531년에 이단혐의로 파문당했고 1537년에 사망했다. 동생 ‘앙투안’ (Antoine)도 신부가 되었다가 결국 개신교로 전향했다.3) 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앙투안은 여동생 ‘마리’와 함께 제네바로 이주하여 서점을 운영했으며, 그 후 시의회 의원도 지냈고 시민권도 얻었다. 칼빈의 가족에는 ‘반 교황정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유소년-청년기의 칼빈의 교육
어린 시절 칼빈은 ‘꼴레주 데 까페뜨’라는 학교를 다녔다. 귀족 가문 몽모르 (Montmor)의 자제와 함께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칼빈을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서 파리로 유학을 보냈고, 대장장이 삼촌 ‘리샤르 코뱅’ (Richard Cauvin)의 집에 기거 했다. 칼빈은 채 12살이 되기도 전에 대성당 신부직 (chaplaincy)에 임명되어 맡은 일 없이 괜찮은 수입을 얻게 되었다. 14세 때 (1523년 8월) 파리의 마르슈 (Marche)대학에 입학하여, ‘꼬르디에’ (M. Cordier)에게서 문법과 수사학, 라틴어를 배웠다. 그 후 꼬르디에는 개신교로 개종하여 제네바대학 학장을 지내다 칼빈이 죽은 그 해 (1564)에 사망했다. 1524년에 더 유명한 몽테규 (Montaigu)대학으로 옮겨 스페인 출신 ‘코로넬’ (A. Coronel)로부터 철학을 배웠다. 불과 18세의 나이로 칼빈이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던 1528년에, 예수회 창시자 로욜라도 이 대학교에서 코로넬로부터 배웠다. 이곳에서의 열악한 숙식 그리고 엄격한 훈련 덕택에 칼빈은 이때 위장병을 얻게 된 것 같다 (참고. Selderhuis, 2009:196). 1528-1533년 사이, 오를레앙, 부르주, 파리의 주요 대학에서 인문학, 철학, 신학을 배웠다.4)
1528년 칼빈이 19세 때에, 리용의 참사원으로 부터 출교 당한 아버지는 아들을 변호사로 만들려고 오를레앙대학으로 보내 법률을 전공하게 하였다. 이것을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아들을 변호사를 만들려는 제라드 코뱅에게 자신의 출교 때문에 칼빈에게 지급되는 성직록이 철회되는 것과 같은 불이익이 닥칠지 모른다고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칼빈은 ‘피에르 드 에투알’같은 최고의 법률 교수 아래서 공부했다. 이태리의 유명한 법률학자 ‘알치아티’가 부르주 (Bourges)대학으로 옮겼기에, 칼빈도 그곳으로 옮겼다 (1529년). 그리고 독일 인문주의자요 루터파의 교회개혁에 동조한 ‘볼마르’ (M. Volmar)에게서 헬라어를 배웠다. 1531년 5월 26일에 부친이 사망하자, 1530년에 프랑수아 1세가 세운 왕립 프랑스대학 (College de France)으로 갔다. 거기서 ‘다네스’ (P. Danes)로부터 고전어를 배웠다. 그 후 칼빈은 법학 박사 학위를 마치기 위해서, 오를레앙대학으로 옮겨 1532년 1월에 과정을 마쳤다. 22살이던 1532년 4월 4일에 ‘세네카의 두 권으로 된 관용론에 관한 주석’을 세련된 라틴어로 써서 자비로 출판했다.5) 그러나 당시의 종교적 논란거리 (예. 1530년의 개신교 제후들의 슈말칼트 동맹, 스위스 내란, 프랑수아 1세의 정책 등)를 반영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 책은 독자층을 파고들지 못했다 (참고. 맥닐, 1990:122). 칼빈은 1533년 사촌 ‘올리베탕’이 번역한 성경 (1535년 6월에 뇌샤텔 [Neuchatel]에서 출판)에 두 개의 서문을 썼다.
3. 칼빈의 회심과 도피생활
사제, 인문주의자, 법학자로서 꿈을 키워가던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밝힌 대로, 1533년 말 혹은 1534년경에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한다.6) 이제 미신적인 카톨릭, 인문주의, 스콜라주의적 전통주의로부터 복음적 개신교, 인문주의를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성경의 사람으로 탈바꿈했다. 칼빈의 회심을 위해 어떤 요소가 작용했을까? 1533년 11월 1일, 칼빈의 친구 ‘니콜라스 콥’ (Cop)이 마튀랭 (Mathurins)교회당에서 파리 루브르대학 학장 (혹은 총장) 취임 강연을 했다. 그 연설에서 값없는 은혜라는 루터의 설교 (1522) 중 일부를 인용하기도 했으며, 예수님의 유일한 중보자 되심을 강조하고, 카톨릭과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을 이단과 부정한 자로 단정 지었기에, 콥은 바젤 친척집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혐의7) 혹은 니콜라스 콥과 친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칼빈은 침대 시트를 밧줄처럼 꼬아 머물고 있던 ‘꼴레저 포르테’ 건물의 창문을 타고 도망쳐, 포도원 농부의 옷차림으로 노용까지 걸어갔다 (비교. 다메섹에서 바울의 도망, 행 9:25). 칼빈은 1534년 5월 4일 노용의 성직록을 받는 직책을 사임함으로써 로마 교회와 완전히 결별했다. 교황에 비타협적인 루터의 글을 접한 것, 경건한 개신교도들과의 접촉, 비성경적인 카톨릭의 행태를 깨달음 (예. 성자숭배, 거룩한 행렬, 성물, 면죄부, 여러 미신적 의식 등), 성경과 교부에 대한 심도 있는 공부 등이 축적되어 회심을 일으킨 것이다 (참고. 맥닐, 1990:133). 1534년 5월 26일에 ‘교회 내의 소요’와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이단 혐의로 기소된 형 샤를 때문에 일어난 것 같다. 짧은 토옥 생활을 거친 후 칼빈은 노용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534년 10월 18일, 왕의 약제사의 하인이었던 ‘페레’ (Feret)가 미사를 비난하는 벽보를 왕궁을 포함하여 여러 곳에 붙인 것이 발단이 되어 파리에서 개신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몇 주 후에, 칼빈은 제자이자 친구인 ‘뒤 티에’ (L. du Tillet)와 함께 메츠와 슈트라스부르크 (거기서 Bucer를 만남)를 거쳐 바젤로 갔다.
1534년 말경, 나바라의 여왕 ‘마르가리타’의 보호를 받으며, 그녀의 고향 앙굴렘에서 ‘기독교 강요’를 준비했다. 1534년 말, 칼빈은 위험을 무릅쓰고 잠시 파리로 왔는데, 스페인 의사 출신으로서 과격한 반 삼위일체론자 ‘미카엘 세베르투스’ (Michael Severtus; 나중에 제네바에서 화형 당함)를 만나 논쟁을 하려고 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1534년 오를레앙에 체류할 때, 죽은 자의 영혼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자고 있다고 주장한 재세례파를 반박하여 ‘영혼수면설 논박’ (Psychopannychia)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것은 그의 첫 번째 신학서이다. 1535년 1월-1536년 3월까지 ‘뒤 티에’와 함께 바젤에 머물 때, 바젤대학교의 지도자였던 ‘그리나이우스’ (S. Grynaeus)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칼빈은 1533-6년까지 가명 (예. Martianus Lucanius, Charles d'Espeville)을 쓰면서 남부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등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1536년 4-5월에, 바젤에서 종적을 감춘 칼빈은 이태리의 페라라 (Ferrara)로 갔다. 칼빈은 이태리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고, 개신교에 지지를 보낸 프랑스 공주 출신으로 페라라의 공작 ‘에꼴 데스떼’ (Ercole II d'Este)의 부인이 된 ‘르네’ (Renee, 1510-75)와 상의하고 싶어 했다. 칼빈은 페라라가 개신교 운동의 중심지요 프랑스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루어 지지 않았다.
4. ‘기독교 강요’
칼빈이 바젤에 머물던 1536년 3월에, ‘토마스 플라터’ (Thomas Platter)의 출판사를 통해서 ‘기독교 강요’ (초판,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를 출간했다. 이때는 칼빈이 노용의 성직록을 사임한지 거의 2년이 지난 때다. 이미 1535년 8월에 기독교 강요의 원고는 완성되었다. 칼빈은 ‘마르티아누스 루카니우스’ (Martianus Lucanius)라는 가명을 사용했기에 바젤에 살던 사람들은 칼빈이 그 책의 저자인지 알지 못했다. 칼빈이 가명을 쓴 것은 개신교 도시 바젤에 있는 박해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집필 활동에 방해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나중에 서점에 진열된 책에 ‘노용의 존 칼빈 지음’이라는 글이 선명히 박혀 있었다 (참고. 맥닐, 1990:139). 이 책을 개신교를 박해하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1494-1547)에게 헌정했는데, 기록 목적은 기독교를 보호하고 변증하기 위해서 였다. 이 책은 520매의 8절판 책으로, 총 6장으로 구성 되었다: (1) 십계명, (2) 사도신경, (3) 주기도문, (4) 세례와 성찬, (5) 다른 성례들, (6)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 정치 그리고 치리에 대한 설명. 칼빈은 루터의 ‘교리 문답’에서 이런 순서를 취했는지 모르지만, 일반 성도의 교육을 위한 중세의 많은 책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증보된 개정판 (제 2판)은 총 17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538년 슈트라스부르크의 ‘리헬’ (W. Rihel)이 인쇄했고, 제목은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로 바뀌었다. 프랑스에 보급할 목적으로 편집된 책에 저자를 'Alcuinus'로 인쇄했다. 칼빈은 1541년에 제네바에서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를 직접 불어로 번역했다. 그 때까지 불어로 된 책 중에 기독교 강요만큼 정교하고 탁월한 사상서는 없었다. 1543년 라틴어판은 총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첨가된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수도원의 맹세’에 과한 장 (4장)이다. 이 책은 1545년에 재판되었고, 1550, 1553, 1554년에 개정되었다. 1550년 판에서 칼빈은 번호를 붙인 단락들 마다 소제목을 도입했다. 1545년과 1551년에 불어판이 출판되었다. 제네바의 ‘로베르 에띠엔’ (Robert Etienne)출판사를 통해서 1559년에 제 5판 (라틴어)이 출판되었다. 각 권이 17-25장으로 구성된 총 4권의 책이다. 칼빈은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서, 제 1권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론), 2권은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기독론), 3권은 성령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적용 (구원론), 4권은 은혜의 수단, 교회와 성례를 다루었다. 칼빈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구속주로, 인간에게 영감을 주시는 분으로 다루며, 교회를 신적인 사회로 묘사 한다 (참고. 맥닐, 1990:141-147).
‘기독교 강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교리 체계와 신학을 종합한 탁월한 작품임. (2) 매 페이지마다 성경을 단순한 증거 구절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보면서 성경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함. (3) 기독교의 원천으로 돌아가서 (ad fontes) 살펴보려고 했기에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을 비평적으로 탐구했음. (4) 필수적으로 알아야할 경건과 구원에 관한 교리로서 경건을 열망하는 사람이 읽어야 할 가슴으로 쓴 책임.
5. 제 1차 제네바 개혁과 슈트라스부르크 시절 (1536-41)
1536년 5월 제네바 시는 교회개혁을 받아들였다. 칼빈은 그 해 6월 파리로 가서 동생 앙투안과 이복 여동생 마리를 데리고, 부친이 남긴 노용의 유산을 정리한 후, 슈트라스부르크로 도피하려고 했다. 그 무렵 프랑수아 1세와 카롤 5세 황제 사이의 전쟁으로 그들은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제네바를 경유해야 했다. 칼빈은 7월 말에 제네바에 도착했다. 목소리가 크고, 수염이 붉고, 자그마한 체구의 뜨거운 복음주의자로서 칼빈보다 20살 연상이었던 ‘파렐’ (G. Farel, 1489-1565)이 칼빈에게 “만약 자신의 연구를 주님의 일보다 더 선호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그리스도보다 더 선호한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라고 경고 했다. 칼빈은 이것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칼빈은 안수를 받아 목사로 임직했는가? 제네바에서 오래 살았던 ‘유니우스’ (Unius)는 1608년에 “칼빈의 선임자들이 그에게 안수했다”고 기록한다. 1536년 11월에 마틴 부처는 칼빈을 ‘동료 목사’라고 불렀다. 칼빈이 어떤 개신교 모임에서 목회를 위해서 구별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목사로서의 임직이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참고. 맥닐, 1990:158).
칼빈은 1536년 9월, 제네바의 성 베드로교회당에서 바울 서신과 신약 성경 강해를 시작했다.8) 거기서 칼빈은 ‘파렐, 쿠롤, 소니에, 코르디에’의 도움을 받아 개혁운동을 주도해 갔다. 칼빈과 파렐이 작성한 ‘신앙고백과 규율집’ 그리고 ‘교리문답’은 11월 16일에 시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시의회는 1537년 1월에 비도덕적 행습들을 금했다. 성찬을 한 달에 1번 시행할 것, 권징을 행하고, 시편을 부르는 것 등을 요구했다.9) 하지만 개혁에 불만을 품은 세력 (예. 200인회는 1538년 1월 4일에 목사가 교인을 성찬에서 제외시키고 출교의 권한을 갖는 것을 반대함)이 발생했고, 칼빈은 시의회를 ‘사단의 의회’라고 비판했다. 결국 그 다음해 1537년 4월 23일, 시의회는 재판도 없이 파렐과 칼빈을 면직시키고 제네바에서 3일 안에 떠나라고 명령했다. 칼빈은 비바람이 부는 날씨 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바젤로 향했다.10)
1538년 9월에 칼빈은 독일의 자유로운 대도시였으며, 개신교인의 피난처요 ‘새 예루살렘’이라 불린 슈트라스부르크로 갔다. 이 도시는 1254년 이래로 슈바르츠 (D. Schwarz)의 활동으로 복음주의적 예배를 도입했다. 거기에 ‘부처, 카피토, 헤디오’와 같은 개혁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칼빈이 거기서 은거할 생각이었으나, ‘마틴 부처’가 슈트라스부르크의 개혁에 동참할 것을 간청하자 승낙했다. 칼빈은 1541년 까지 3년 동안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프랑스 난민 (칼빈은 종종 ‘작은 프랑스교회’라고 부름)을 대상으로 성 니콜라스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그곳 신학교에서 교수했다. 1539년 3월에 ‘사돌레토’ (Sadoleto) 추기경 (1477-1547)이 복음 운동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 제네바 행정 장관과 시민 그리고 칼빈에게 편지를 보냈다. 칼빈은 반박의 글을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불어와 라틴어로 써서 9월 1일에 제네바로 보냈다. 그 책은 카톨릭으로부터 개종한 자들에 대해 쏟아지는 이단과 분열이라는 비난을 다루었다. 칼빈은 교회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카톨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정당한 일로 변호하고, 교황의 헛된 주장과 폭정을 거부하고, 참된 교회의 영광을 높이고 변호했다. 그 후 ‘기독교 강요’ 2판 (1539년 8월 1일), ‘로마서 주석’ (1539년 10월 18일)을 출판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은 약 52길더 (약 200마르크, 약 30만원)의 월급만 받았기에 극심한 가난을 겪었기에, 제네바에 두고 온 책을 팔아서 집세를 내었다. 칼빈은 주일에 두 번, 주중에 두 번 설교하고, 여러 번의 강의, 방대한 서신 교환, 성경공부반 운영 등으로 바빴다. 정부 관리의 간섭을 제네바에서보다 적게 받았다. 성찬은 매주하려고 했지만, 관원들은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했다.11) 1539년 칼빈이 출판한 ‘곡조를 붙인 시편과 아가서의 일부’를 교회가 부름으로써 세상 음악과는 구분했다 (참고. 1542년의 시편집). 시 25, 36, 46, 91, 138편은 칼빈이 작사했고, 나머지는 프랑스 궁중 시인 ‘마로’ (C. Marot)가 썼다 (참고. 1562년의 125곡으로 구성된 제네바 시편). 이 무렵 칼빈은 12살 연상의 ‘멜랑히톤’과도 교제 했다.
칼빈은 31세 (1540년 8월) 때, 목회하던 교회의 교인이었던 ‘이들레트 드 뷔르’ (Idelette de Bure)와 파렐의 주례로 결혼했다. 그녀는 칼빈이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할 때 재세례파에서12) 개종시킨 ‘장 스토르더’ (Jean Stordeur. 직업은 장인. 전염병으로 죽음)의 과부였고 두 자녀가 있었다. 이들레트에게는 10살 난 아들과 그보다 어린 딸 ‘주디스’가 있었다. 주디스는 제네바에서 결혼할 때 까지 칼빈의 집에서 살았다. 이들레트는 칼빈이 배우자의 자질로 중요하게 생각한 대로 마음이 착하고 경건했다.13) 또한 예쁘고 명석했지만 몸은 약했다. 칼빈이 40세가 되던 1549년 4월에 아내 이들레트가 사망했기에,14) 결혼 생활은 단지 9년간 지속되었다. 그 후 15년을 독신으로 지냈다. 1542년에 아들 ‘자크’ (즉 야고보)가 조산으로 태어났지만 2주 만에 죽었고, 그 후 다른 두 아기도 태어났지만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 아들이 죽었을 때 “우리 아버지는 자기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임을 아신다”라고 썼다. 그리고 대적들이 칼빈에게 자녀가 없다고 비웃자, 하나님은 자신에게 무수히 많은 영적 자녀를 주셨다고 대답했다.
3년 동안의 슈트라스부르크에서의 사역은 칼빈의 신학 (기독교 강요 2판, 로마서 주석 및 성례론 등)과 개혁을 다듬어 주는 중요한 발판이었다. 거기서 ‘부처’로부터 예배 모범과 권징을 배웠다. 그리고 근대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스트롬’으로부터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배웠는데, 그것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
6. 제 2차 제네바 개혁과 부흥 그리고 죽음 (1541-64)
이 무렵 제네바는 정부파, 로마 카톨릭파 그리고 친 개혁파 (예. 기욤 파렐의 이름을 딴 ‘기욤당’)로 3등분 되었다.15) 칼빈에게 1538년 4월 23일에 추방령을 내렸던 정부파의 4명의 장관 (장 필립, 샤포루주, 룰랭, 리샤르데)들이 폭동 주모죄, 살인죄, 사기죄, 반역죄 등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1540년 제네바 소의회는 칼빈이 돌아와야 한다고 표결로 결정했다. 1541년 5월 1일, 제네바 총회는 칼빈에게 내려진 추방령을 취소했다. 물론 슈트라스부르크도 관원들도 칼빈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는데, 칼빈이 슈트라스부르크 시민권을 계속 유지하고, 봉급을 계속 받는 조건으로 강권했다. 칼빈은 봉급을 계속 받는 것은 사양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물질에 초연한 칼빈의 모습을 본다. 칼빈이 제네바로 복귀할 때 제네바에 내건 조건은 2가지이다: (1) 교리교육의 도입, (2) 교회 치리법의 재정. 슈트라스부르크 시절에 칼빈은 이미 ‘교리’와 ‘치리’의 결합에 대한 부처의 이념을 알고 있었다. 제네바 의회의 공식 초청을 받은 칼빈은 고민 끝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1541년 9월 13일 양 떼가 있던 제네바로 시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돌아갔다. 이 때 제네바의 교회 개혁의 표어는 ‘흑암 뒤의 빛’ (post tenebras lux)이었다. 성격이 쾌활했던 동역자 ‘비레’ (P. Viret)가 1542년 7월에 로잔으로 옮긴 것은 칼빈에게 큰 손실이었다. 칼빈이 제네바를 완전히 장악하기 까지는 약 14년 (1541-55)의 풍파 많은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참고로 1549-59년 사이에, 영국, 프랑스, 화란 등에서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유입되어 영주권을 얻는 사람은 5.019명에 달했다.
의학, 신학, 법학을 공부한 ‘미카엘 세베르투스’ (Michael Severtus, 1511-53)는 ‘삼위일체의 오류’ (1531), ‘기독교의 회복’ (1553)을 출판하여 ‘기독교 강요’를 대항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죄와 유아세례도 반대했다. 그는 1534년에 칼빈이 설복시키기 위해 파리에서 만나려 했다가 무산된 바로 그 인물이다. 1553년 8월 13일에 칼빈의 고소로 투옥되었다. 불링거를 비롯하여 베른과 쮜리히의 지도자들은 사형이 적합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칼빈은 세베르투스의 주장의 오류를 찾아내고 반박했으며, 회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적으로 논쟁하기도 했다. 결국 세베르투스는 1553년 10월 27일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이 화형의 책임을 칼빈에게 돌리는 이도 있었다. 칼빈은 사형을 제안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참고. 맥닐, 1990:220).
칼빈은 성경과 초대교회에 일치하는 모습으로 교회를 재정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참고. 기독교 강요, 4.1.9). 1541년 11월 20일 주일에 총회에서 채택된 ‘제네바 교회의 법령들’은 후대 개혁교회의 원리들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교회 헌법책이었다. 참 교회는 순수한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라는 두 표지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목사는 말씀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례 해야 한다.16) 칼빈은 ‘교회의 근육 (힘줄)’인 권징 (church discipline)을 목사와 장로의 사역으로 보지만 (참고. 기독교 강요, 4.12.1), 교회의 표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권징은 교회의 표지를 수호하기 위해 필요하다. 칼빈은 ‘교리문답서’도 만들었다.
칼빈은 1541년 교회법에서 교회의 직분을 4개로 나눈다: 목사, 박사 (혹은 교사), 장로, 집사. 목사는 내적 소명은 물론이거니와 (성경 지식, 교리 수용, 가르치는 능력, 좋은 생활 습관 등을 목사회의 심사를 거친 후) 외적 소명으로 개 교회에 임직할 수 있었는데,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성도와 소통하는 것’이다. 칼빈은 중세에서 임직식 때 안수가 미신화 되었기에 선포로 임직하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목사의 감독기구로 ‘목사회’를 두어 목사후보생을 심사하고, 성경을 토론하여 목사 사이의 교리 일치를 보존하고, 목사의 생활을 (예. 3개월 마다) 감독하도록 했다. 일반 성도가 교회에서 투표를 하는 참정권을 성경적인 것으로 보았다. ‘박사’ (교사)는 참된 교리를 가르치는 이로서 현재의 신학 교수에 가까운 직분이다. 목사가 박사의 직분을 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장로’는 중세에 사라져 버렸는데, 칼빈이 롬 12:6-8절과 고전 12:28절을 연구하여 회복한 것이다. 장로는 성도의 생활을 감독하고, 잘못을 범한 자를 권면하고, 사랑에 근거하여 교정을 명령 했다. 장로들은 직분을 계속 할지를 두고 (제네바의 소의회 혹은 200인회로부터) 연말에 승인을 받았다.17) 제네바의 소의회와 60인회, 그리고 200인회에서 선출된 장로와 비슷한 절차를 거쳐 선발되는 ‘집사’는 두 종류로 나누는데, (1)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이, (2)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는 이. 칼빈은 병원을 운영하는 자금을 조달하는 집사와 직접 구제 병원에서 섬기는 집사로 구분하기도 했다. 집사들은 제네바 시가 세운 구제 병원을 운영했지만, 정기적으로 목사와 장로의 감독을 받았다 (보라. 이은선, 2009:145-152).
성도의 도덕적 생활을 감독하는 기구로서 오늘 날 장로교회의 ‘당회’와는 조금 다른 컨시스토리 (consistory)는 매년 위정자들에 의해서 선택된 12인의 장로들과, 1564년에는 19인이었던 목사회 (the venerable company of pastors)의 모든 구성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 모두는 위원회에서 선출되었다. 칼빈은 치리법원을 통해서 권징의 원칙을 세웠는데, 예배 불참자나 지각자, 사소한 비행들과 경박한 말, 자녀를 교리 교육에 보내지 않는 부모, 음주, 이혼, 정욕을 유발하는 춤, 운에 달린 경기들 (games of chance), 오락, 간음, 간통, 혼외 출산, 가정 폭력, 이단, 고리대금 등 150여 가지의 권징 조건이 있었다고 한다. 더 중요한 일은 치리법원에서 다루기 전에 소의회를 거치기도 했다. 이때는 ‘제네바 시민’과 ‘교회의 구성원’ 사이에 구분이 없었다 (보라. 정성구, 2009:119). 1561년에 교회법이 개정되어 출판되었다. 칼빈의 말년에 제네바의 법률 집행은 더욱 구체적이며 엄격해 졌다. 1561년에 사형이 11건이나 집행되었다. 제네바는 ‘성경에 의한 통치‘ (Bibliocracy), ‘그리스도의 통치’ (christocracy) 혹은 신정 통치 (theocracy)를 받았지, ‘목사 정치’ (clerocracy) 혹은 ‘성직자 정치’ (hierocracy)를 받지 않았다. 이 사실은 한국 교회에 만연한 비성경적이며 편 가르기 식의 성직자 정치에 대해 일갈 한다 (참고. 맥닐, 1990:211-212).
칼빈과 당국자들은 술집과 사창가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결혼과 이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였기에 교회의 허락이 필요했다. 장례식에서는 미신적 행동을 배제했다. 이것은 치리가 사라지고, 개인의 결정으로 결혼과 이혼이 만연하며, 결혼과 장례에 유교적 잔재가 많은 한국교회에 시사 하는 면이 많다.
칼빈은 성찬과 관련하여 신비주의적인 카톨릭의 화체설, 루터파의 공재설 그리고 쯔빙글리파의 순수 영적 임재설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성찬에 대해 단호히 논쟁으로 물리치기도 했지만 (예. 함부르크의 강경주의적 루터파 목사 Joachim Westphal와 Tilleman Hesshus와의 논쟁. 1554, 1556, 1557, 1561), 다른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과 토론으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성찬 횟수를 1년에 4번에서, 매달 1번으로 조정했다.18) 라틴어 예배를 불어 예배로 개혁했다.19)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성도의 삶의 변화에 역점을 두었다.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할 때 직접 모금을 했고, 정부 관리와 개혁 신학에 기초하여 목회자를 양성 했다. 칼빈보다 10살 후배인 데오도레 베자 (1519-1605, 이전에 Melchior Wolmar의 제자였음)가 40세에 초대 학장 겸 헬라어 교수를 맡았다. 개혁주의 신학의 모판이자 에딘버러대학과 같은 많은 대학의 모델이 된 제네바 아카데미는 신앙 훈련이 학생의 삶 속에 녹아지도록 훈련했고, 새벽 기도와 성경 암송은 필수였다.20) 이 아카데미는 개혁 활동을 유럽에 확산시키는 중요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교회 연합을 중요하게 여긴 칼빈은 비록 교리, 권징, 예배에 차이가 있었지만 루터파, 성공회, 왈도파, 보헤미안형제들과의 교제를 소중하게 여겼다. 마틴 부처와 함께 교파간의 관용을 발전시켰다. 카톨릭 안에도 교회의 흔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진리를 손상시키며 까지 연합을 하는 것은 반대했다.
칼빈은 매주 목요일 치리법원 (consistory)의 회의 주재, 주일 (오전은 신약, 오후는 시편을 설교)은 물론 주중 이틀에 한 번씩 설교 (1주에 3번 즉 월, 수, 금요일 오전 6-7시 [겨울은 오전 7-8시]에 구약을 강해함. 1시간 정도에 걸친 연속 강해 설교), 사흘에 한 번 강의, 매주 수요일에 있었던 특별 기도회, 매주 금요일 회중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 강해, 저술, 서신 교환, 학교 감독, 인근 국가에서 종교 문제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일 등으로 바쁘게 지냈다 (참고. 이은선, 2009:131).
칼빈은 매우 적은 수면, 관절염, 두통, 치질, 소화불량, 천식, 열병, 학질, 통풍, 약간의 불면증, 결석, 늑막염 등으로 고생했다. 30대에 이미 만성질환자가 되었다. 소화불량으로 마지막 10년 동안은 하루에 한 끼만 식사했다. 그는 자신의 육체의 약함을 불굴의 영적인 힘과 섭리 신앙으로 극복했다.21) 제네바 시의회가 별도의 대가를 지불하려고 했을 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부하고 극도로 소박한 생활을 했다. 1543-1545년의 전염병으로 제네바 인구의 10분의 1이 죽었다. 이 때 마녀 재판과 화형이 무수했지만, 이를 막기 위해서 마법에 대한 전통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칼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보라. 맥닐, 1990:197).22)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칼빈은 1564년 2월 6일, 성 베드로교회당에서 마지막으로 설교 했다. 4월 2일 부활절에 베자가 집례 한 성찬식에 참석했다. 4월 25일 대서공증인을 불러 유언장을 작성하도록 했는데, 자신의 사역을 억제된 어조로 언급하면서, 대신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됨 및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강조하고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고백했다. 4월 27일에 4명의 제네바 시 장관들과 소 의회 의원들이 칼빈을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칼빈은 신정국가적 (theocratic)인 뉘앙스의 여러 권면을 했다. 특히 자신의 결점을 용서해 달라고 여러 번 말했다. 4월 28일에는 제네바의 동료 목회자들을 불러 특별히 목회자 사이의 우정을 강조했으며, 악한 제네바 시민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막아야 했던 소란은 3,000번도 넘었다고 말했다 (참고. 판 스파이커, 2009:12). 칼빈은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면서 시편에서 위안을 주는 구절을 암송했다. 1564년 5월 27일 토요일 저녁 8시에 후계자 베자의 품에서 평안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 다음으로 최고의 위로자’, ‘모두의 아버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스승’, ‘가장 지혜로운 시민’, ‘신실한 목자’를 잃은 제네바는 슬픔에 잠겼다. 그 다음 날 주일 오후 2시 플랭 팔레의 공동묘지에서 장례식을 교회법에 따라 간소하게 치른 후, 유언에 따라 묘비도 없이 매장되었다. 참고로 칼빈의 개혁 동역자 ‘파렐’도 같은 해 9월 13일, 76세로 숨을 거두었다.
7. 칼빈의 기여
칼빈은 천성적으로 겁이 많고 소심했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약함 속에서도 강했다. 그는 전투적인 인생을 살았다. 자신을 저주 받은 이단으로 낙인찍은 카톨릭은 말할 것 없고, 같은 개신교 진영의 ‘리버틴파’ (Libertines)와의 투쟁에서도 수차례 생명의 위협을 감수했다.23) 칼빈의 습관과 취미는 단순했고, 옷차림은 깨끗했으며, 매우 절제된 경건의 생활이 몸에 배었다.24) 적은 월급 이외에는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체의 돈을 더 받지 않았으며, 급료 인상도 반대 했다. 칼빈을 이단으로 본 ‘교황 피우스 4세’조차도 물욕이 없는 것을 칼빈의 장점으로 들 정도였다. 칼빈의 지적 능력은 최고였다. 그는 예리한 이성과 건전한 판단력,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고, 언어에도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었기에 인문주의와 같은 세상 지식을 성경을 위해서 활용할 줄 알았다. 그의 말과 글은 명료하고 정확하며 순수하여 설득력이 있었다. 칼빈의 저술은 크게 ‘성경 주석’,25) ‘변증서’ (예. 'Psychopannichia', 1534; ‘방종파에 반대함’, 1544; ‘재세례파 이단에 반대함’, 1544; ‘신통하다고 일컬어지는 점성술을 반대하는 경고’, 1549), ‘교회와 교리 예전’, ‘설교’ (1541년 이후로만 2000번 이상. 총 4000번 이상 설교함), 그리고 ‘편지’ (4271통)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성경 주석 방식은 문법-역사적 주석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 받는데, 독창성과 깊이, 명료함과 건전함은 탁월했다. 칼빈은 계시의 점진적인 발전을 믿었다 (기독교 강요, 2.10.20). 구약 보다 신약을 더 의존하는 칼빈은 종종 복음서에서 추출한 해석들을 가지고 구약 본문을 채색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에 인용된 신약 구절은 4330개, 구약은 2470개 였다 (참고. 맥닐, 1990:242-243). 멜랑히톤으로 부터 ‘유일한 신학자’ (the theologian),26) 구약 학자 디스텔 (Diestel)로부터는 ‘진정한 주해를 탄생시킨 인물’이라는 명예로운 평가를 받았다.27)
루터와 쯔빙글리가 이룩한 개혁의 토대 위에 개혁을 완성한 칼빈의 영향은 1550년 이후의 영국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들의 형성, 영국 청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들,28)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 선조들, 화란의 칼빈주의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다. 그리고 칼빈은 노동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보았기에 (참고. 문화명령과 유사한 ‘경건의 속화’ [laicization of piety]), 자본주의와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가난한 자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없지만, 대부를 통해서 부를 획득하는 사람에게는 그 이윤을 나누는 차원에서 이자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사상은 자본주의와 상공업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만들었다. 프랑스 난민을 위한 프랑스 기금을 조성함으로써 사회 복지 정책을 위한 길도 닦았다. 카톨릭과 같이 탄압하는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참고. 박용규, 2009:159-160). 또한 주로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집필했기에 라틴어와 프랑스 언어, 지성, 학문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칼빈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가혹한 면이 없지 않았고, 자신의 주장을 매우 강경하게 고수했으며, 성급하고 격렬한 기질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평생 동안 최우선으로 삼은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철저히 믿었던 신앙인, 자기를 부인하고 삶을 다 드린 헌신적인 하나님의 사람,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말씀으로 개혁하기 원한 목회자,29) 최고의 지적 능력과 열정으로 촌음을 아끼며 성경을 풀이하고 거짓 교리를 반박하며 참 교리를 세운 신학자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풍성한 칼빈의 가르침을 우리 삶과 목회 현장에 적용해 보자. 그 때 교회가 바르게 개혁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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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derhuis, H.J. 2009. John Calvin: a pilgrim's life. Downers Grove : IVP Acade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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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무. 2007. 칼빈의 교회론. (In 개혁주의학술원 ed. 칼빈과 교회. 고신대 개혁주 의학술원. p. 13-41.)
이은선. 2009. 목회자로서의 칼빈. (In 오정호 ed. 칼빈과 한국교회. 생명의 말씀사. p. 109-167.)
이환봉. 2007. 칼빈의 성찬론: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 (In 개혁주의학술원 ed. 칼빈과 교회.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 p. 109-145.)
정성구. 2009. 칼빈의 유산: 목회와 실천. (In 개혁주의 학술원 ed. 칼빈의 유산과 현대적 의의. 고신대 개혁주의 학술원. p. 95-119.)
판 스파이커, W. 2009. 칼빈의 유산: 칼빈 신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In 개혁주 의 학술원 ed. 칼빈의 유산과 현대적 의의. 고신대 개혁주의 학술원. p.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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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 전체를 위해 총신대 박용규 교수의 글을 많이 참고 했다.
2) 프랑스어 Cauvin을 라틴어로 쓰면 Calvinus,가 된다.
3) 제 2 제네바 개혁 시기에, 칼빈은 창녀를 제네바에서 추방했다. 그런데 그 때 동생 앙투안의 아내가 칼빈의 곱추 사환과 간통한 것이 발각되기도 했다. 칼빈의 결혼한 의붓딸 ‘주디스 스토르데’도 간통을 했다.
4) 칼빈처럼 쯔빙글리의 경우도 고전어, 유명한 인문주의자들과 교부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점차 인문주의를 성경과 개혁주의에 종속시켰다. 현대는 학문 간의 통섭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성경 해석을 위해서도 구원계시사적 해석을 더 잘하기 위해서 다른 학문의 도움을 선별적으로 받을 필요가 있다 (참고. 맥닐, 1990:33-34).
5) 고대 세계에 ‘관용’ (clemency)은 군주의 미덕이었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이교도들에게도 관용 (mercy)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세네카의 의견을 따라서, 칼빈은 프랑수아 1세도 개신교의 복음주의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을 기대 했다. 하지만 이 주석에서 칼빈은 성경 구절을 단지 3번만 우연히 언급했는데, 이 무렵 칼빈의 사상은 개혁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참고. 안인섭, 2003:233).
6) 이때를 칼빈의 회심의 연도로 잡는 근거는 무엇인가? 1533년 6월, 칼빈은 니콜라스 콥과 함께 한 카톨릭 수녀원을 방문하여 친구 프랑수아 다니엘의 여동생이 거기 들어갈 수 있도록 원장과 면담했다. 그리고 8월 23일에는 노용의 참사회에 참여했는데, 전염병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엄숙한 행진’을 하기로 결의했다 (맥닐, 1990:130).
7) 이것은 베자의 의견인데, 한 때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연설문의 문체는 칼빈의 문체와 다르다.
8)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 이후의 최고의 강해설교자로 평가되는 칼빈의 설교는 원고를 직접 작성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즉석 설교의 형태였다. 물론 생각나는 대로 했던 설교는 아니었다. 성경 원어를 깊이 연구한 후에, 신구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를 깨닫고, 성도의 삶을 고려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강단으로 나아갔고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 칼빈이 설교할 때 주로 프랑스 출신 ‘라구니에’ (D. Raguenier)가 속기했다. 마틴 루터는 넓은 어깨에 얼굴이 넓고 솔직한 독일인으로서 건강미와 해박한 지식과 감수성 그리고 열정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칼빈의 턱은 좁고, 수염은 뾰족하고, 코는 오뚝했으며, 가냘픈 체구로 병약했는데, 그의 설교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명료했으며 가끔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유머는 별로 없었다 (보라. 정성구, 2009:107-109).
9) 시편송을 보급하기 위해서 소년합창단을 구성하려고 했다. 이것은 시편송에 무지한 현대 교회가 찬양대를 두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참고로 칼빈은 무급으로 봉사했는데, 파렐의 제안으로 제네바 시의회가 1537년 2월 13일 ‘금화 6크라운’을 처음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현대 목회자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월급은 얼마가 적절하며, 월급 이외에 다양한 명목 (심지어 교통 위반 벌칙금, 신문구독비 등)으로 교회가 목회자에게 지불하는 것은 올바른지 재고해 볼 때다.
10) 참고로 칼빈은 심방과 상담을 자상하게 했던 목회자였다. 1538년 칼빈이 바젤에 머물고 있었을 때, 파렐의 조카가 흑사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서 심방했다. 결국 그가 젊은 나이게 죽고 말았는데, 칼빈은 자비로 장례비를 부담하고, 그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었다. 칼빈은 신학적으로는 예리한 논리로 냉정하게 투쟁한 인물일지 몰라도, 그의 친구 ‘니콜라스 데 갈라르’가 말했듯이 목사로서 칼빈은 사랑이 많은 참 목자였다 (참고. 정성구, 2009:102).
11) 칼빈 당시 성찬식 때 분병과 분잔은 집사가 했다 (맥닐, 1990:175).
12) 재세례파는 교황 체제 하에서 불경한 우상숭배자들이 베푼 세례를 반대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다. 칼빈은 세례의 효력이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기에 재 세례를 반대했다 (기독교 강요, 4.15.16; 참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7장 7절). 칼빈은 재세례파를 ‘잘못된 세례파들’ (Catabaptist)이라고 불렀다 (참고. 맥닐, 1990:142).
13) 칼빈은 외모보다는 결혼 대상자 (여자)의 ‘심성 (heart)과 영성 (경건, spirituality)’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구혼 (courtship) 기간 동안 섹시한 옷차림, 화장, 성적으로 상스러운 농담, 외설적인 시와 노래, 술집 출입, 과음, 과식, 같이 수영하거나 목욕하는 것 및 성교를 금했다. 불신 결혼과 나이 차이가 많은 남여의 결혼을 반대했는데, 십대 소녀와 결혼한 기욤 파렐 (당시 65세)의 결혼식에 바쁘다는 이유로 불참했고 그 후 그와는 연락도 거의 하지 않았다 (참고. Selderhuis, 2009:178-181).
14) 데오도레 베자는 칼빈의 아내 이들레트가 죽기 2시간 전에 “오 영광스런 부활이여. 오 아브라함과 조상의 하나님이여. 과거에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헛되게 믿기 않았습니다. 저도 그러합니다”라고 고백을 했다고 전한다.
15)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후, 기득권과 교권의 세력에 의해 축출된 것을 알고, 그의 설교를 사모하고 지지하던 사람들이 뭉쳐서 만든 모임이 기욤당 (기에르멩, Guillermins)이다. 칼빈은 기욤당이 제네바 교회에 새로 부임한 설교자 (마르쿠, A. Marcourt 혹은 모랑, J. Morand)로부터 성찬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며 그를 불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로 신임 목사를 도와 화해하고 교회를 세워가라고 말했다. 이것은 선임 목사와 후임 목사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좋은 가르침이다.
16) 설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기독교 강요, 4.1.6),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교사이시고 (기독교 강요, 4.3.3; 4.8.7), 성령께서 내적 교사가 뙤실 때 (기독교 강요, 2.2.20; 3.2.34; 4.149)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설교가 된다 (참고. 유해무, 2007:37).
17) 지금도 개혁교회는 장로와 집사의 임기를 제한한다. 한국에서는 항존직을 오해하여 카톨릭처럼 봉사하지 않아도 직분을 계속 인정하는 폐단이 있다.
18) 칼빈은 루터파가 주장하는 성찬에서의 자연적 몸의 신체적 임재를 부인했으며,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영과의 순수한 영적 교재만을 용납하려는 쯔빙글리파의 주장에도 반대했다.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참된 전달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재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그러한 임재가 이루어졌다면 그 표징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닌 실제로 그 실체를 유효하게 제시해 보여주는 ‘실제성과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칼빈이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적으로 또는 실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반대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와의 ‘참된 그리고 실재적인 교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찬에 그리스도의 천상의 몸이 실재로 장소적으로 임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성찬에 실재적으로 임재하시는데, 왜냐하면 성령의 신비한 능력에 의해 수찬자가 하늘로 이끌려 올려져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으로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이환봉, 2007:111, 114-115).
19) 칼빈은 신약 성경에 찬양대나 악기 사용 그리고 찬양의 작곡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참고. 이은선, 2009:140).
20)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20장 전체를 ‘기도’에 할애한다. 말씀을 믿는 믿음 위에서 은혜의 방편인 기도할 것을 강조 했다.
21) 기독교 강요, 1.17.10-11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면 인생을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 3.7.10에도 동일한 사상이 나타난다. 참고로 칼빈의 초상이 80여개가 있지만, 유독 제네바에서 그린 것만 유별나게 눈이 날카롭고, 눈에 흰자가 많고, 차갑고, 전투적인 모습을 띤다. 독일, 화란, 헝가리 등에서 그린 것은 자비로운 목자의 모습이다.
22) 1551년, 칼빈의 고향인 피카르디의 노용 대성당의 참사회 의원들은 엄숙한 행렬 가운데 칼빈의 죽음을 경축했다. 소문만 듣고 무려 13년을 앞지른 시기상조의 해프닝이었다. 1552년 노용의 대 화재로 참변이 닥쳤을 때, 칼빈은 노용에 대해 조의를 표했다 (참고. 맥닐, 1990:107).
23) ‘방종파’라고도 번역되는 리버틴파는 프랑스와 화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영’을 강조하여 율법을 거부했다. 이후에 도덕법을 조롱했던 리버틴파는 제네바에서 권징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1547년 12월 13일에 방종파의 소동이 진압되기도 했다 (보라. 맥닐, 1990:193).
24) 칼빈은 고리 던지기, 공굴리기, 열쇠 꾸러미 던지기와 같은 오락을 했는데, 그는 금욕주의자는 아니다. “참된 경건 (‘영성’이라는 말보다 더 선호함)의 요점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쁨으로 피하고자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주님으로서 진정으로 경외하고, 그분의 의를 받아들여, 죽는 것보다 그를 거스리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순수하며 참된 열심을 내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1,2.1.).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 (unio mystica)을 이루는데, 경건한 사람은 예수님이 주시는 포괄적인 모든 은총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은혜와 함께 자신을 그들에게(성도) 나눠주셔서 그의 것은 모두 그대의 것이 되고, 그대는 그의 지체가 되며, 실로 그와 하나가 되고, 그의 의는 그대의 죄를 가리우며, 그의 구원은 그대가 받을 정죄를 도말하신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분리시키거나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우리를 결합시키신 그 친교를 용감하게 양손으로 굳게 붙잡아야 한다. ... 그리스도께서는 끊을 수 없는 교제의 유대로 우리와 결합하실 뿐 아니라 놀라운 영적 교제에 의해서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우리와 한 몸이 도시며, 마침내는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신다” (기독교 강요, 3.2.24).
25) 칼빈의 주석을 시간적으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롬(1540), 유(1542), 고전(1546), 고후(1547), 갈-골(1548), 딤전후(1548), 히(1549), 딛(1550), 약(1550), 살전후(1550), 벧전후/사(1551), 몬(1551), 요일(1551), 행(1552, 1554), 요(1553), 창(1554), 마-눅(1555). 시, 호(1557), 소 선지서(1559), 단(1561), 창-신(1563), 렘-애(1563), 수(1564, 사후에), 겔(1565, 사후에). 요한계시록과 많은 간본문을 가지고 있는 에스겔과 다니엘 주석은 칼빈의 후기 작품이다. 칼빈은 생애 마지막 8년을 구약 선지서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바쳤다. 이러한 주석 작업의 순서는 칼빈이 계시록 주석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26) 1578년 영국에서 출판된 칼빈의 요나서 강의와 설교집에 칼빈은 “제네바의 하나님의 교회 목회자, 신학 박사, 요한 칼빈 목사‘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칼빈이 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은 없지만, 유명한 신학자로 알려진 증거이다.
27) 헝가리 출신의 개혁신학자 Bela Vasady는 칼빈의 신학의 특징을 5가지로 요약 한다: (1) ‘믿음으로 말미암은 실용주의’ (belief-ful pragmatism). 여기서 실용주의란 철학적 실용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실제로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영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성도의 삶이 이끌림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2) ‘믿음으로 말미암은 실재주의’ (belief-ful realism). 실재주의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성도의 삶에 성취됨을 의미한다. (3) ‘믿음으로 말미암은 전체주의’ (belief-ful totalitarianism). 규범과 약속이 전체적으로 명령하시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4) ‘믿음으로 말미암은 불가지론’ (belief-ful agnosticism). 비록 하나님의 섭리의 숭고함과 영광이 우리에게 맞추어져 계시되나,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 가운데 숨겨져 있다. (5) ‘믿음으로 말미암은 반 율법주의’ (belief-ful antinomism). 여기서 하나님을 입법자가 아니라 단지 사람의 준칙에 대한 판단의 기준 정도로 여기는 칸트의 이성주의적 윤리관과는 다른 칼빈의 율법관을 본다. 하나님은 법의 수여자이시기에, 이미 그분의 명령에서 은혜를 예지하셨다 (인용. 문병호, 2009:183-184).
28) ‘위그노’ (Huguenots)라는 말은 스위스 제네바의 애국자들이 만든 당의 이름 'Eidguenots'에서 온 것 같다 (멕닐, 1990:154).
29) 정성구 (2009:115-117)는 칼빈의 목회원리를 5가지로 제시 하는데, 현대 목회자가 새겨들어야 한다: (1) 말씀의 순수한 전파를 강조, (2) 성례의 강조, (3) 권징과 훈련을 강조, (4) 교육을 강조, (5) 예배가 교회의 중심이 되도록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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