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 칼빈의 {영적 임재설}
성찬 - 칼빈의 {영적 임재설}
칼빈의 성찬론에서 중심사는 그리스도이시다.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만져지듯, 보여지듯 제시된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회적으로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 떡과 포도주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믿는 자는
양육받고 생기를 얻으며 강건해지며 기쁨이 충만해진다.
즉, 성찬은 영적인 잔치로서 이 잔치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떡(요 6:51)은 우리의 영혼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례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중생의 삶을 확증한다면 성찬은 이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유비 관계, analogia이다.
칼빈의 성찬론은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과 같은 물질적인 실재론, realism도 아니요,
쯔빙글리와 같은 상징주의, 기념설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와 영적인 연합이 일어난다는 영적 임재설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형태로 주의 성찬에 임재하시는가.
그것은 너무 신비스러운 일로서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칼빈은
우리가 이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합일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을 위하여 이루신 온갖
구원의 은사, 의인, 성화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 이 그리스도와 합일 없이는
구원이 없다.
결코 물질적인 실재론이 아니다. 성찬의 요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표지, 또는 의의, significatio는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둘째는 실체, substantia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수난, 죽음과 부활이다.
셋째는 효력, efficatio 곧,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모든 축복이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체 없이는 효능이 없다.
그에 의하면 성찬의 신비는 두가지이다.
첫째는 우리의 연약성 때문에 불가시적인 것을 우리 눈에 보이도록 우리 앞에 표현하는 물질적인 표지들이요
둘째로는 이 상징들 자체에 의해서 표현하는 영적인 진리이다.
결코 물질적인 실재론이나 단순한 기억으로 그치는 기념이 아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교류와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몸으로 성장해가며 영생을 상속하며,
그리스도의 우리의 짐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의로운 옷을 입혀주시는 행복한 교환,
fr hlicher Wechsel이 일어나는 것이다.
칼빈은 또 무엇보다도 성찬에서의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찬은 {보이는 말씀}으로서 성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복음, 말씀 설교이다.
옳바른 성찬은 말씀과 떨어질 수 없다.
유일회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고 성찬의 신비를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희생을 확증시키는 것이다.
칼빈의 성찬론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성찬에서의 성령의
역할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합일시키는 것은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 그 썩어질 떡과 포도주 밑으로 끌어 내려질 수 없는 동시에 그것이 편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찬에서 우리 믿는 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것은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따라서 그의 살과 피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승귀하신 후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신비스러운 영광의 성체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연결의 줄이다. 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이 성령이
통로가 되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살이 진정한
음식이요 그 피가 진정한 음료로 믿는 자들을 양육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물질적인 실재론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지체로서 영적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의 공재설, 쯔빙글리의 상징설,
또는 기념설과는 달리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 성찬을 이해한다. 이들이 삼위일체의 간여를
고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성찬론은 영적이기 보다는 주술적인
면이 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물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상징물이 그리스도의 본체와 연결되고 이를 그리스도인들이 받아 먹음으로
그리스도와 합일되고 그가 하신 모든 은사가 우리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집례자는 사제나 목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물체 안에 임재하시고
참여자와 공동체에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떡과 포도주는 공허한 상징이 아니다. 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는 진실로
그의 몸을 제시하고 보이신다." 그리고 "그리스도 몸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하여 믿는 자들은 상징을 통하여 진정으로, 실재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상상력이나 이해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영생의 영양소로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성찬에서 영적인 몸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만나며 장차 일어날 부활을
확약받는다. 성찬에서 만나게 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영광의 주님"으로서 두 본성은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찬에서 성령의 역사를 말씀 사역으로 {전 그리스도, totus
Christus}와 연합하게 되는데 여기에 신앙과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가 성찬에 앞서 자기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성찬에서 성화의 측면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강요 제 4권의 교회론에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서 비롯되고 동시에 이것을 돕는 외적 보조 수단이라고 말한 칼빈은 교회가 복음의
외적인 보조 수단이듯이 성례전 역시 복음 설교의 외적인 보조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없어도 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복음의 설교에 의해서 생긴 신앙을 강화시키는 보조
수단으로서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의 연약성을 지탱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향하신 주님 자신의
선의의 약속들을 우리의 마음에 인 치시는 외적 표시이다. 실로 "주님은 그의 거룩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의 자비와 그의 은혜의 보증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찬은 그리스도인들이 전 생애를 통하여 없어서는 아니될 영적 잔치요
영의 양식이다.
http://cafe.daum.net/dusonma/3mTf/5544
칼빈의 성찬론에서 중심사는 그리스도이시다.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만져지듯, 보여지듯 제시된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회적으로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 떡과 포도주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믿는 자는
양육받고 생기를 얻으며 강건해지며 기쁨이 충만해진다.
즉, 성찬은 영적인 잔치로서 이 잔치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떡(요 6:51)은 우리의 영혼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례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중생의 삶을 확증한다면 성찬은 이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유비 관계, analogia이다.
칼빈의 성찬론은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과 같은 물질적인 실재론, realism도 아니요,
쯔빙글리와 같은 상징주의, 기념설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와 영적인 연합이 일어난다는 영적 임재설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형태로 주의 성찬에 임재하시는가.
그것은 너무 신비스러운 일로서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칼빈은
우리가 이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합일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을 위하여 이루신 온갖
구원의 은사, 의인, 성화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 이 그리스도와 합일 없이는
구원이 없다.
결코 물질적인 실재론이 아니다. 성찬의 요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표지, 또는 의의, significatio는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둘째는 실체, substantia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수난, 죽음과 부활이다.
셋째는 효력, efficatio 곧,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모든 축복이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체 없이는 효능이 없다.
그에 의하면 성찬의 신비는 두가지이다.
첫째는 우리의 연약성 때문에 불가시적인 것을 우리 눈에 보이도록 우리 앞에 표현하는 물질적인 표지들이요
둘째로는 이 상징들 자체에 의해서 표현하는 영적인 진리이다.
결코 물질적인 실재론이나 단순한 기억으로 그치는 기념이 아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교류와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몸으로 성장해가며 영생을 상속하며,
그리스도의 우리의 짐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의로운 옷을 입혀주시는 행복한 교환,
fr hlicher Wechsel이 일어나는 것이다.
칼빈은 또 무엇보다도 성찬에서의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찬은 {보이는 말씀}으로서 성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복음, 말씀 설교이다.
옳바른 성찬은 말씀과 떨어질 수 없다.
유일회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고 성찬의 신비를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희생을 확증시키는 것이다.
칼빈의 성찬론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성찬에서의 성령의
역할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합일시키는 것은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 그 썩어질 떡과 포도주 밑으로 끌어 내려질 수 없는 동시에 그것이 편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찬에서 우리 믿는 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것은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따라서 그의 살과 피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승귀하신 후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신비스러운 영광의 성체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연결의 줄이다. 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이 성령이
통로가 되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살이 진정한
음식이요 그 피가 진정한 음료로 믿는 자들을 양육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물질적인 실재론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지체로서 영적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의 공재설, 쯔빙글리의 상징설,
또는 기념설과는 달리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 성찬을 이해한다. 이들이 삼위일체의 간여를
고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성찬론은 영적이기 보다는 주술적인
면이 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물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상징물이 그리스도의 본체와 연결되고 이를 그리스도인들이 받아 먹음으로
그리스도와 합일되고 그가 하신 모든 은사가 우리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집례자는 사제나 목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물체 안에 임재하시고
참여자와 공동체에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떡과 포도주는 공허한 상징이 아니다. 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는 진실로
그의 몸을 제시하고 보이신다." 그리고 "그리스도 몸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하여 믿는 자들은 상징을 통하여 진정으로, 실재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상상력이나 이해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영생의 영양소로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성찬에서 영적인 몸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만나며 장차 일어날 부활을
확약받는다. 성찬에서 만나게 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영광의 주님"으로서 두 본성은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찬에서 성령의 역사를 말씀 사역으로 {전 그리스도, totus
Christus}와 연합하게 되는데 여기에 신앙과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가 성찬에 앞서 자기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성찬에서 성화의 측면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강요 제 4권의 교회론에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서 비롯되고 동시에 이것을 돕는 외적 보조 수단이라고 말한 칼빈은 교회가 복음의
외적인 보조 수단이듯이 성례전 역시 복음 설교의 외적인 보조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없어도 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복음의 설교에 의해서 생긴 신앙을 강화시키는 보조
수단으로서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의 연약성을 지탱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향하신 주님 자신의
선의의 약속들을 우리의 마음에 인 치시는 외적 표시이다. 실로 "주님은 그의 거룩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의 자비와 그의 은혜의 보증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찬은 그리스도인들이 전 생애를 통하여 없어서는 아니될 영적 잔치요
영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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