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부활’을 역설한 청교도 존 코튼의 출생
‘교회의 부활’을 역설한 청교도 존 코튼의 출생
(1584년 12월 4일)
존 코튼(1584-1652)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목회자였고 뉴잉글랜드에서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롤랜드 코튼은 성공한 변호사였고, 어머니 메리 헐버트는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여인이었다. 코튼의 가정은 당시의 청교도처럼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곤 했다.
코튼은 열세 살이 되던 1597년 캠브리지 대학 내의 트리니티(삼위일체) 대학에 진학하였다. 1604년에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훌륭한 학자로 인정받아 대학 졸업 후에는 선임연구원이 되었다. 임마누엘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라틴어를 연구하여 고전어의 전문가가 되었다.
한때 그는 청교도 신앙에 반발하기도 했으나, 1609년 리차드 십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되었다. 십스는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였다. 코튼은 자신의 영적 변화에 영향을 준 십스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그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그는 1610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설교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후에 보스톤 교회에 부임하였고, 처음 3년 동안 성경연구와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615년부터 영국 교회의 비성경적인 의식들과 제도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코튼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이를 두려워 한 대주교 로우드는 1632년 코튼을 고등종교법원에 소환하였다. 이에 도피생활에 들어간 코튼은 신대륙에로의 이민을 결심하였다. 뉴잉글랜드로 건너간 그는 보스톤 제일교회에서 일하였고, 가능한 한 순수한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17세기 청교도 가운데서 뛰어난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는 상처 난 심령을 위로하고 죄악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존 코튼의 설교를 들은 어떤 사람은 이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코튼 목사는 권위 있고 능력 있게, 또 생명력 있게 설교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선지자나 사도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때면 그 분의 목소리가 아니라, 선지자 자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제 마음 속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코튼은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그는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다. 임종 전에 아내에게 서재를 가리키며 “내가 저 방에는 더 이상 갈 일이 없을 것이요”라고 말한 후,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652년 12월 23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http://blog.daum.net/kkho1105/6422
(1584년 12월 4일)
존 코튼(1584-1652)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목회자였고 뉴잉글랜드에서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롤랜드 코튼은 성공한 변호사였고, 어머니 메리 헐버트는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여인이었다. 코튼의 가정은 당시의 청교도처럼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곤 했다.
코튼은 열세 살이 되던 1597년 캠브리지 대학 내의 트리니티(삼위일체) 대학에 진학하였다. 1604년에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훌륭한 학자로 인정받아 대학 졸업 후에는 선임연구원이 되었다. 임마누엘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라틴어를 연구하여 고전어의 전문가가 되었다.
한때 그는 청교도 신앙에 반발하기도 했으나, 1609년 리차드 십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되었다. 십스는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였다. 코튼은 자신의 영적 변화에 영향을 준 십스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그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그는 1610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설교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후에 보스톤 교회에 부임하였고, 처음 3년 동안 성경연구와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615년부터 영국 교회의 비성경적인 의식들과 제도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코튼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이를 두려워 한 대주교 로우드는 1632년 코튼을 고등종교법원에 소환하였다. 이에 도피생활에 들어간 코튼은 신대륙에로의 이민을 결심하였다. 뉴잉글랜드로 건너간 그는 보스톤 제일교회에서 일하였고, 가능한 한 순수한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17세기 청교도 가운데서 뛰어난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는 상처 난 심령을 위로하고 죄악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존 코튼의 설교를 들은 어떤 사람은 이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코튼 목사는 권위 있고 능력 있게, 또 생명력 있게 설교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선지자나 사도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때면 그 분의 목소리가 아니라, 선지자 자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제 마음 속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코튼은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그는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다. 임종 전에 아내에게 서재를 가리키며 “내가 저 방에는 더 이상 갈 일이 없을 것이요”라고 말한 후,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652년 12월 23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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