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소스톰의 설교술
크리소스톰의 설교술
크리소스톰의 설교술은 크게 세가지의 능력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
는 그의 풍부한 동정심이었다. 또 그는 신학적 진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졌으며 이것들을 실제적인 삶에 적용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이와함께 그
는 그의 설교들을 번쩍이게 하는 열정을 가졌다. 그는 훌륭한 언어 구사력
을 가졌고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성경을 설명
하는 능력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설교 한장은 약간의 암시나 예증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적인 기법은 그의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
상의 비교가 그의 설교를 채웠다.
그의 말투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가 그의 처음 설명으 로
부터 예증까지, 성경적 원리로부터 실천적인 예시로 나아갈 때 그의 말은
보다 빨라지고 그의 제스처는 보다 생동감이 넘치며, 그의 목소리는 격렬
해져갔다. 그의 회중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미리 내쉬었으며 종종 그
의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는 그의 설교에서 종종 그의 청
중들의 " 박수와 격려","떠들석한 찬동의 환호"를 받았다.
그것은 그 시대의 습관이었고 크리소스톰은 그가 받아야 할 몫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성직자론"이라는 크리소스톰의 다섯번째
논문에서 그는 칭찬을 향한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논했다. "만일 설교자가
칭찬에 대해 무관심 하다면 '소금으로 간을 맞춘듯한 은혜'인 교리를 산출
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의 마음의 고결함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동안에
그는 군중들에게 멸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만약그가
설교자로서 성공해서 박수갈채에 연연해 한다면 그 자신이 나 그의 청중
들에게는 양쪽다 수치가 되돌아 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칭찬을 받겠다
는 그의 욕망으로 인하여 이익을 얻는 것 보다는 즐거움을 보여주려고 설교
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로서 그 자신의 느낌들을 말하면서 크리소스톰은 설교단상에 있는
동안 설교자가 박수 갈채를 받고 기뻐하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을
짧은 순간의 감동이다. 왜냐하면 후에 그는 그를 격려했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의 메세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의 박수갈채는 그가 금지된 것들을 말하였기 때문에 녹아든 것 뿐이
었음을 알려줬다.
크리소스톰은 즉석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그의 은사를 그의 회중들에게 그의 설교를 적용시키는 일에 사용했다. 즉
그는 그의 회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반응하는 것 여하에 따라 그의 본
문의 각자 구절에 대한 언급(논의)을 길게 하기도 하고 짧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설교술은 감각적인 청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증폭시켰다.
그의 광범위한 지식은 그가 무지한 청중들과 상통(커뮤니케이팅)하는 것
을 막았다.
그는 자연으로 말했고 복잡한 개념(사상)들과 어려운 단어들을 피하게했
다. 그는 상류층에게 행했던 것보다 더 많은 평범한 사들에게 호감을 샀
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그가 비문화적인 청중들과 상통하게 했다. 그는 자
연스럽게 말했으며 복잡한 생각이나 어려운 단어들을 피했다. 그는 상류층
의 사람들에게 호소했던 것보다 더 많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종종 그의 설교술은 합리적인 이성에 호소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대개는 대
중적인 방법의 호소와 성경적인 강해의 두드러진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오늘날 남아있는 그의 설교가 크리소스톰이 강단에서 서서 실제로 말한
것들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지 어떨지를 말하기란 가능한
일은 아니다. 단지 그의 설교들이 속기되어 출판물로 개정된 문자적인 번
역물일 가능성은 있다. 또 그 설교적인 주석들이 크리소스톰 자신의 이름
으로 구성되어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설교들중에는 크리소스톰이 행한 설교중 최고의 것이 선택되어 포함
되었다. 확실히 이 설교들은 많은 것들 중에서 선택된 것이다. 크리소스톰
은 약 1천편 이상의 설교를 남겼다. 그 설교들 중에서 "친구들의 죽음에
깊은 슬픔"은 특별히 역사적 흥미를 느끼게 한다. 그 설교는 다른 그의 설
교들처럼 천천히 시작된다. 그러나 그때 크리소스톰이 크리스천들은 이교
도들의 깊은 슬픔에 의해 그들의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을 간곡히 타이름으
로써 그 설교의 흥미로운 가치는 배가되고 있다.
"나를 믿으십시오 시장을 따라 지나가는 여자들의 어울리지 않는 무리
를 보는 것이 부끄럽고 얼굴을 붉히게 합니다.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팔과
뺨을 다치고 이 모든 것이 헬라인들의 눈아래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우리에 대해서 알리지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이 부활에 대하여 이론적 설명이 가능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부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만
일 이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들은 이와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 자신이 그들에게 죽은 한 친구가 있다면
그가 더 좋은 곳으로 떠났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들은 이와같이 슬퍼하지 않
을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리고 이것들보다도 더한 것들은 불신자들이 그들의 비탄의
소리(애곡)을 들을때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부끄러워하고 보다
적절하고,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게.그리고 우리를 쳐다보는 그들에게 그렇
게 많은 수치를 야기시키지 않도록 합시다." 그의 "빌레몬서 설교" 에서
그는 청중들이 겸손은 자부심의 원천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했다. 그는 그들
에게 그들 자신의 겸손의 연습때문에 우쭐대지 않기를 강조하였다.
그 전체적인 귀절들은 놀랍게도 그것에 대한 현대적인 소리였다. '12번
설교'에서 크리소스톰은 이방신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로 가득차
있다. 그는 이교도의 화신 숭배자들과 태양신 숭배자들과 땅과 물을 숭배
하는 이교도들을 조롱하였는데 이것들을 잘 묘사하였다. 그 설교는 이교도
의 미신들의 계시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크리소스톰은 그와 동시대에 살았
던 어떤 사람들이 가장 조잡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대해 설교하기도
했다. 예를들어 만일 종들이 그들의 주인들에게 왼쪽 신발을 먼저 신겨주
는 것은 이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불길한 징조로 간주되었다. 크리소스톰은
그의 그리스도인인 청중들에게 이와 같은 미신들로부터 자유로와 질것을 강
권하였다.
'여섯번째 가르침'이라는 제목이 붙은 설교에서 그 특별한 설교는'전차
경주와 연극무대에서 퇴장한 사람들과 소외된 우리의 형제들에게 우리가 어
떤 종교적 봉사가 풍성한 기독교 신자와 개종자들에게 우리가 어떤 종교적
봉사가 풍성한 기독교 신자와 개종자들에 대한 연설'이라는 세계에서 그 부
제가 가장 길지 않다면 아마 두번째쯤 갈만한 그런 설교에서 크리소스톰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 대해 한탄하는 현대적인 설교자와 같은 소리를
발하였다.
크리소스톰은 그 회중들에게 말하기를 군중들이 전차 경기장으로 줄달
음쳐서 주일날 출석율이 왜소해 지고 있다면서 그들이 영적인 강론을 들을
기회를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주일날 열리는 굵직한 스포츠
경기를 참관하기 위해 예배를 소홀히 하는 교인들이 고대에도 골치거리였다
는 것이다. 이와같은 설교는 후에 크리소스톰이 그같은 주제에 상당한 힘
을 낭비한 후에 그는 그 자신 스스로에게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에게 이러
한 강력한 권고는 거의 소용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크리소스톰은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자신을 달랬다. 즉의
사가 병든 사람들을 제쳐 두고 그 친구에게 치료를 받으라는 것과 같다고
그래서 그는 출석하는 교인들에게 스포츠 게임보다는 주일날을 지키라고
강권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에베소서 6:13을 본문으로 한 "설교의 중요성
"이라는 짧은 설교도 크리스천들에게 설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초기 설교중
하나였다.
크리소스톰은 그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감염된 질병들을 오로지 설교
로써 고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환경이 변화든지 혹은 짧은 계절적인동 면
이든지 간에 모든 신체적인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른 질병과는 고
쳐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건강문제에 대해 건강할 때 이 건장을
필요한 것을 위해 강요한다면 이 건강을 결코 잃지 안다는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후에 로마 가톨릭 신학 중 건강의 포기에 대한 거르침과 대조 되
었다. 의문이 없다면, 크리소스톰이 초대 교회의 위대한 설교자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이 설교가로서의 우수성 때문에 그는 모든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 중 하나로 인식되어질 가치가 있다.
'황금의 입'이라는 뜻의 '크리소스톰'이라는 타이틀은 적어도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언어의 낭비가 아니였다. 어떤 교대의 설교자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만들어낸 명성들이 값어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크리소스톰
의 경우 모르면 몰라도 그가 받았던 모든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다. 만약
에 현대 어떤 설교가 앞으로 3천 5백년 후에 사람들도 그대로읽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은 크리소스톰의 설교와 같이 그 시대의 분석대상이
될 것은 확실하다.
http://blog.daum.net/kkho1105/2429
크리소스톰의 설교술은 크게 세가지의 능력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
는 그의 풍부한 동정심이었다. 또 그는 신학적 진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졌으며 이것들을 실제적인 삶에 적용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이와함께 그
는 그의 설교들을 번쩍이게 하는 열정을 가졌다. 그는 훌륭한 언어 구사력
을 가졌고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성경을 설명
하는 능력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설교 한장은 약간의 암시나 예증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적인 기법은 그의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
상의 비교가 그의 설교를 채웠다.
그의 말투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가 그의 처음 설명으 로
부터 예증까지, 성경적 원리로부터 실천적인 예시로 나아갈 때 그의 말은
보다 빨라지고 그의 제스처는 보다 생동감이 넘치며, 그의 목소리는 격렬
해져갔다. 그의 회중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미리 내쉬었으며 종종 그
의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는 그의 설교에서 종종 그의 청
중들의 " 박수와 격려","떠들석한 찬동의 환호"를 받았다.
그것은 그 시대의 습관이었고 크리소스톰은 그가 받아야 할 몫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성직자론"이라는 크리소스톰의 다섯번째
논문에서 그는 칭찬을 향한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논했다. "만일 설교자가
칭찬에 대해 무관심 하다면 '소금으로 간을 맞춘듯한 은혜'인 교리를 산출
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의 마음의 고결함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동안에
그는 군중들에게 멸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만약그가
설교자로서 성공해서 박수갈채에 연연해 한다면 그 자신이 나 그의 청중
들에게는 양쪽다 수치가 되돌아 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칭찬을 받겠다
는 그의 욕망으로 인하여 이익을 얻는 것 보다는 즐거움을 보여주려고 설교
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로서 그 자신의 느낌들을 말하면서 크리소스톰은 설교단상에 있는
동안 설교자가 박수 갈채를 받고 기뻐하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을
짧은 순간의 감동이다. 왜냐하면 후에 그는 그를 격려했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의 메세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의 박수갈채는 그가 금지된 것들을 말하였기 때문에 녹아든 것 뿐이
었음을 알려줬다.
크리소스톰은 즉석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그의 은사를 그의 회중들에게 그의 설교를 적용시키는 일에 사용했다. 즉
그는 그의 회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반응하는 것 여하에 따라 그의 본
문의 각자 구절에 대한 언급(논의)을 길게 하기도 하고 짧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설교술은 감각적인 청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증폭시켰다.
그의 광범위한 지식은 그가 무지한 청중들과 상통(커뮤니케이팅)하는 것
을 막았다.
그는 자연으로 말했고 복잡한 개념(사상)들과 어려운 단어들을 피하게했
다. 그는 상류층에게 행했던 것보다 더 많은 평범한 사들에게 호감을 샀
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그가 비문화적인 청중들과 상통하게 했다. 그는 자
연스럽게 말했으며 복잡한 생각이나 어려운 단어들을 피했다. 그는 상류층
의 사람들에게 호소했던 것보다 더 많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종종 그의 설교술은 합리적인 이성에 호소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대개는 대
중적인 방법의 호소와 성경적인 강해의 두드러진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오늘날 남아있는 그의 설교가 크리소스톰이 강단에서 서서 실제로 말한
것들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지 어떨지를 말하기란 가능한
일은 아니다. 단지 그의 설교들이 속기되어 출판물로 개정된 문자적인 번
역물일 가능성은 있다. 또 그 설교적인 주석들이 크리소스톰 자신의 이름
으로 구성되어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설교들중에는 크리소스톰이 행한 설교중 최고의 것이 선택되어 포함
되었다. 확실히 이 설교들은 많은 것들 중에서 선택된 것이다. 크리소스톰
은 약 1천편 이상의 설교를 남겼다. 그 설교들 중에서 "친구들의 죽음에
깊은 슬픔"은 특별히 역사적 흥미를 느끼게 한다. 그 설교는 다른 그의 설
교들처럼 천천히 시작된다. 그러나 그때 크리소스톰이 크리스천들은 이교
도들의 깊은 슬픔에 의해 그들의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을 간곡히 타이름으
로써 그 설교의 흥미로운 가치는 배가되고 있다.
"나를 믿으십시오 시장을 따라 지나가는 여자들의 어울리지 않는 무리
를 보는 것이 부끄럽고 얼굴을 붉히게 합니다.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팔과
뺨을 다치고 이 모든 것이 헬라인들의 눈아래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우리에 대해서 알리지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이 부활에 대하여 이론적 설명이 가능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부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만
일 이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들은 이와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 자신이 그들에게 죽은 한 친구가 있다면
그가 더 좋은 곳으로 떠났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들은 이와같이 슬퍼하지 않
을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리고 이것들보다도 더한 것들은 불신자들이 그들의 비탄의
소리(애곡)을 들을때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부끄러워하고 보다
적절하고,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게.그리고 우리를 쳐다보는 그들에게 그렇
게 많은 수치를 야기시키지 않도록 합시다." 그의 "빌레몬서 설교" 에서
그는 청중들이 겸손은 자부심의 원천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했다. 그는 그들
에게 그들 자신의 겸손의 연습때문에 우쭐대지 않기를 강조하였다.
그 전체적인 귀절들은 놀랍게도 그것에 대한 현대적인 소리였다. '12번
설교'에서 크리소스톰은 이방신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로 가득차
있다. 그는 이교도의 화신 숭배자들과 태양신 숭배자들과 땅과 물을 숭배
하는 이교도들을 조롱하였는데 이것들을 잘 묘사하였다. 그 설교는 이교도
의 미신들의 계시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크리소스톰은 그와 동시대에 살았
던 어떤 사람들이 가장 조잡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대해 설교하기도
했다. 예를들어 만일 종들이 그들의 주인들에게 왼쪽 신발을 먼저 신겨주
는 것은 이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불길한 징조로 간주되었다. 크리소스톰은
그의 그리스도인인 청중들에게 이와 같은 미신들로부터 자유로와 질것을 강
권하였다.
'여섯번째 가르침'이라는 제목이 붙은 설교에서 그 특별한 설교는'전차
경주와 연극무대에서 퇴장한 사람들과 소외된 우리의 형제들에게 우리가 어
떤 종교적 봉사가 풍성한 기독교 신자와 개종자들에게 우리가 어떤 종교적
봉사가 풍성한 기독교 신자와 개종자들에 대한 연설'이라는 세계에서 그 부
제가 가장 길지 않다면 아마 두번째쯤 갈만한 그런 설교에서 크리소스톰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 대해 한탄하는 현대적인 설교자와 같은 소리를
발하였다.
크리소스톰은 그 회중들에게 말하기를 군중들이 전차 경기장으로 줄달
음쳐서 주일날 출석율이 왜소해 지고 있다면서 그들이 영적인 강론을 들을
기회를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주일날 열리는 굵직한 스포츠
경기를 참관하기 위해 예배를 소홀히 하는 교인들이 고대에도 골치거리였다
는 것이다. 이와같은 설교는 후에 크리소스톰이 그같은 주제에 상당한 힘
을 낭비한 후에 그는 그 자신 스스로에게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에게 이러
한 강력한 권고는 거의 소용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크리소스톰은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자신을 달랬다. 즉의
사가 병든 사람들을 제쳐 두고 그 친구에게 치료를 받으라는 것과 같다고
그래서 그는 출석하는 교인들에게 스포츠 게임보다는 주일날을 지키라고
강권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에베소서 6:13을 본문으로 한 "설교의 중요성
"이라는 짧은 설교도 크리스천들에게 설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초기 설교중
하나였다.
크리소스톰은 그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감염된 질병들을 오로지 설교
로써 고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환경이 변화든지 혹은 짧은 계절적인동 면
이든지 간에 모든 신체적인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른 질병과는 고
쳐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건강문제에 대해 건강할 때 이 건장을
필요한 것을 위해 강요한다면 이 건강을 결코 잃지 안다는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후에 로마 가톨릭 신학 중 건강의 포기에 대한 거르침과 대조 되
었다. 의문이 없다면, 크리소스톰이 초대 교회의 위대한 설교자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이 설교가로서의 우수성 때문에 그는 모든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 중 하나로 인식되어질 가치가 있다.
'황금의 입'이라는 뜻의 '크리소스톰'이라는 타이틀은 적어도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언어의 낭비가 아니였다. 어떤 교대의 설교자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만들어낸 명성들이 값어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크리소스톰
의 경우 모르면 몰라도 그가 받았던 모든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다. 만약
에 현대 어떤 설교가 앞으로 3천 5백년 후에 사람들도 그대로읽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은 크리소스톰의 설교와 같이 그 시대의 분석대상이
될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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