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발판이 된 중세 개혁자들과 그들의 개혁 내용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의 발판이 된 중세 개혁자들과 그들의 개혁 내용은 무엇인가
대표적인 중세 개혁자들 중에 피터 왈도는 프랑스 리용 출신으로1170년경 4복음서 일부를 불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제들을 고용함으로써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 번역을 통하여 오직 성경만이 교리나 전통보다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 자는 마리아나 성인들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성례는 오직 세례와 성찬 만이다. 그는 1177년 왈도派 결성하여 말씀운동을 펼쳤는데 둘 씩 둘 씩 각 동네로 파송하였다(눅10장의 70인 전도요원). 이 요원들은 行商을 가장하여 사명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당시의 부패한 사제들을 비판하였으며,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여 민중들에게 보급하였다. 1229년 발렌시아 회의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교회가 반발하여 왈도派에 대한 족쇄령을 내렸으며, “사제가 아닌 사람은 라틴어와 그 밖의 성경을 읽지 못한다”는 법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禁書目錄에 성경을 집어넣음으로써 복음이 내부에서부터 방해를 받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왈도파는 여러 곳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후에 크롬웰을 통해 왈도파에 대한 박해가 중지가 되었다.
존 위클리프는 개혁의 샛별, 복음박사, 옥스포드의 꽃 등의 別名을 지니고 있는 중세 개혁자였다. 그는 죽는 날까지 로마의 사제 임무를 수행하였다.그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다”고 하였으며, “복음정신으로 사역하지 않는 사제는 敵그리스도의 代理者이다”라고 까지 하였다. 그는 수도승들의 퇴행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으며, 로마 교회의 무오성 등 잘못된 교리들을 비 성경적 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영어로 성경 번역을 하였고,청빈 전도단(롤라드) 결성하여 붉은 갈색에 흰옷을 입혀 전국에 파송하였다. 이들의 전도에 많은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에 교회와 의회는 전도단(롤라드)을 火刑 시킬 것과 위클리프 성경번역에 정죄할 것을 결의하였다.
존 훗스는 보헤미야의 농부 출신으로 34세에 프라하 대학 총장을 지냈다. 유년 시절 위클리프의 영어성경과 경건서적들을 읽으면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며, 성경진리는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 훗스는 프라하의 베들레헴 성당에서 영어로 설교를 하는 등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대주교가 “교황의 명령으로 너는 화형이다”라고 했을 때 존 훗스는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순될 경우 내 몸에 기름을 부어라”고 하면서 순순히 사형집행에 응했다. 그러나 그는 불타지 않았다. 1414년 콘스탄쯔 회의에서 존 훗스는 제 4위(삼위일체의)로 자신을 높였다고 조작하여 신성모독 자로 심문을 받고 정죄되었다. 화형을 당할 때에 그는 ‘스데반의 기도’를 하면서 최후를 마쳤다. 그 후에 훗스의 후예들은 그후 보헤미야에서 훗스派를 조직했으며, 보헤미야 형제단(모라비안 형제단)으로 발전하였다.
http://blog.daum.net/kkho1105/6230
대표적인 중세 개혁자들 중에 피터 왈도는 프랑스 리용 출신으로1170년경 4복음서 일부를 불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제들을 고용함으로써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 번역을 통하여 오직 성경만이 교리나 전통보다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 자는 마리아나 성인들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성례는 오직 세례와 성찬 만이다. 그는 1177년 왈도派 결성하여 말씀운동을 펼쳤는데 둘 씩 둘 씩 각 동네로 파송하였다(눅10장의 70인 전도요원). 이 요원들은 行商을 가장하여 사명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당시의 부패한 사제들을 비판하였으며,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여 민중들에게 보급하였다. 1229년 발렌시아 회의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교회가 반발하여 왈도派에 대한 족쇄령을 내렸으며, “사제가 아닌 사람은 라틴어와 그 밖의 성경을 읽지 못한다”는 법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禁書目錄에 성경을 집어넣음으로써 복음이 내부에서부터 방해를 받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왈도파는 여러 곳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후에 크롬웰을 통해 왈도파에 대한 박해가 중지가 되었다.
존 위클리프는 개혁의 샛별, 복음박사, 옥스포드의 꽃 등의 別名을 지니고 있는 중세 개혁자였다. 그는 죽는 날까지 로마의 사제 임무를 수행하였다.그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다”고 하였으며, “복음정신으로 사역하지 않는 사제는 敵그리스도의 代理者이다”라고 까지 하였다. 그는 수도승들의 퇴행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으며, 로마 교회의 무오성 등 잘못된 교리들을 비 성경적 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영어로 성경 번역을 하였고,청빈 전도단(롤라드) 결성하여 붉은 갈색에 흰옷을 입혀 전국에 파송하였다. 이들의 전도에 많은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에 교회와 의회는 전도단(롤라드)을 火刑 시킬 것과 위클리프 성경번역에 정죄할 것을 결의하였다.
존 훗스는 보헤미야의 농부 출신으로 34세에 프라하 대학 총장을 지냈다. 유년 시절 위클리프의 영어성경과 경건서적들을 읽으면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며, 성경진리는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 훗스는 프라하의 베들레헴 성당에서 영어로 설교를 하는 등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대주교가 “교황의 명령으로 너는 화형이다”라고 했을 때 존 훗스는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순될 경우 내 몸에 기름을 부어라”고 하면서 순순히 사형집행에 응했다. 그러나 그는 불타지 않았다. 1414년 콘스탄쯔 회의에서 존 훗스는 제 4위(삼위일체의)로 자신을 높였다고 조작하여 신성모독 자로 심문을 받고 정죄되었다. 화형을 당할 때에 그는 ‘스데반의 기도’를 하면서 최후를 마쳤다. 그 후에 훗스의 후예들은 그후 보헤미야에서 훗스派를 조직했으며, 보헤미야 형제단(모라비안 형제단)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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