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보스톤 목사와 회개 교리[2]
토마스 보스톤 목사와 회개 교리[2]
두 번째 강좌(Second Discourse)
잡다한 질문들 속에 있는 두 번째 강좌는 과거와 현재 및 미래에 지은 모든 죄가 다 함께 즉시 사함을 받게 되는가 아닌가? 이다. 이 논제는 회개론보다는 보다 더 폭넓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보스톤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이 질문은 앞의 질문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이미 말씀드린 것은 이 질문에 대답할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하도록 기여하는 것이다’.
첫 강좌와 더불어 충분하게 다루었기에 이 질문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보스톤은 모든 죄가 즉시 용서받게 된다고 믿었다. 회심한 이후에 범한 죄와 의롭다함을 입은 후에 범한 죄는 죄 사함을 보장하는 회개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를 회개해야만 하지만 우리의 구원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강좌(Third Discourse)
세 번째 강좌의 주제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회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였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이 강좌는 1702년에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매로 논쟁 전에 이미 보스톤의 입장이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보스톤은 유다에게서 보여진 것처럼 ‘법적인 회개’ 즉 ‘하나님의 진노를 인식하여 생기는 회개’와 ‘복음적 회개’(Gospel repentance or evangelical repentance),즉 구원을 받게 하는 은혜 및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은총을 구분하고 있다.
이것 역시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칼빈은 어떤 사람이 율법의 회개와 복음의 회개를 구분하여 사용한 것을 인용하였다. 이 부분에 있어서 칼빈은 ‘법적인 참회’(legal penance)와 ‘복음적인 참회’(evavngelical penance)를 구분하여 사용한 부써의 입장을 따른 것이다. 이 개념은 스코트랜드에서도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처음으로 언약 신학을 가르친 롤록(Rollock) 박사가 비록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한 개념을 말한적이 있다. 아주 조심스럽게 학문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특별히 회개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관련하여 롤록박사는 그러한 개념을 말한 것이다. 회개의 첫 부분은 슬퍼하는 것이다. 두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하나는
‘죄에 수반되는 형벌 때문에 생기는 슬픔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이것은 하나님께 돌아서는 이 거룩한 변화의 일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일 자체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들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을 롤록박사는 ‘법적 슬픔’(legal sorrow)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따라 복음에 의하여 감동받은 슬픔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롤록 박사이후 18세기초까지 스코틀랜드에서 대부분의 개혁주의 학자들은 회개를 말할 때 이러한 구분을 사용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구분을 명백히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음적인 은총’으로서의 회개를 말하고 있다. 1845년 후반기에 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집을 쓴 쇼(Shaw) 목사는 이 문구는 신앙고백서에서 ‘법적인 회개’로부터 참된 회개의 위치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비록 ‘법적인 회개’가 가룟 유다와 같이 진짜 회개가 아닌 경우에 사용된 것일지라도 이것은 잠시 후에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회개는 구원을 위한 필요한 선행조건이라고 가르친 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구분을 한 보스톤 목사는 회개의 필요성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설교에서 일반적으로 함께 병행되어 나타나는 회개와 믿음은 실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 둘을 구분해야만 할지라도 분리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시간상의 차이보다는 특성의 순서적인 구분일 뿐이다...’
아주 중요한 한 문장에서 보스톤 목사는 매로 논쟁에서 위기에 몰리게 된 핵심적인 사항에 근접한 것을 보여준다.
“루터포드와 더불어 나는 영원한 진노에 대한 우리의 책임문제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공의의 질서에 따라 죄에 대한 모든 형벌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속박과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요 방편임을 주장한다.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믿음의 길을 말하는 것은 더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이론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은혜의 언약의 조건성과 칭의에 있어서 믿음의 도구성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는 일은 중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에게 둘째 언약의 참된 속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져다주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회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보스톤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첫 번째 효과는 신자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것임을 말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만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믿음의 즉각적인 효과라면 회개는 믿음 전에 있어야 하든지 아니면 죄 사함을 받은 후에 와야만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이므로’(히 11:6) 성립될 수 없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 라고 하셨다...이제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까지는 여전히 그리스도 없이 존재한다(엡 3:17).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믿음 앞에 올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죄 사함 받은 후에 오는 것이다”.
보스톤은 참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흐른다는 것을 주목함으로써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고로 나는 반증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회개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죄 사함의 열매이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순서상 이것은 믿음 뒤에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 사함을 수반한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지지하고 있다: 회개는 ‘성결케 하는 은혜’이며 사함보다 선행될 수밖에 없는 성결케 하는 은혜는 칭의와 성화의 상대적인 위치를 뒤집어엎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요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보스톤은 반박자들을 공격한다. 그는 회개가 죄 사함보다 우선된다고 믿은 쏘씨니우스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구원의 조건으로써 회개의 필요성을 본 언약신학자들은 동일한 함정에 빠진 자들임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보스톤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1. 죄 사함의 조건으로 회개를 말하는 것은 ‘자연 종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은 어떤 무엇을 함으로써-이 경우엔 회개를 말함-구원을 얻어야만 한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주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하고는 무관한 것이다.
2. 회개를 죄 사함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은혜의 언약을 바꾸는 것이요 심한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실로 보스톤은 더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그는 은혜의 언약을 가짜 행위의 언약(bastard covenant of works)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7HGp/72
두 번째 강좌(Second Discourse)
잡다한 질문들 속에 있는 두 번째 강좌는 과거와 현재 및 미래에 지은 모든 죄가 다 함께 즉시 사함을 받게 되는가 아닌가? 이다. 이 논제는 회개론보다는 보다 더 폭넓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보스톤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이 질문은 앞의 질문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이미 말씀드린 것은 이 질문에 대답할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하도록 기여하는 것이다’.
첫 강좌와 더불어 충분하게 다루었기에 이 질문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보스톤은 모든 죄가 즉시 용서받게 된다고 믿었다. 회심한 이후에 범한 죄와 의롭다함을 입은 후에 범한 죄는 죄 사함을 보장하는 회개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를 회개해야만 하지만 우리의 구원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강좌(Third Discourse)
세 번째 강좌의 주제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회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였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이 강좌는 1702년에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매로 논쟁 전에 이미 보스톤의 입장이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보스톤은 유다에게서 보여진 것처럼 ‘법적인 회개’ 즉 ‘하나님의 진노를 인식하여 생기는 회개’와 ‘복음적 회개’(Gospel repentance or evangelical repentance),즉 구원을 받게 하는 은혜 및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은총을 구분하고 있다.
이것 역시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칼빈은 어떤 사람이 율법의 회개와 복음의 회개를 구분하여 사용한 것을 인용하였다. 이 부분에 있어서 칼빈은 ‘법적인 참회’(legal penance)와 ‘복음적인 참회’(evavngelical penance)를 구분하여 사용한 부써의 입장을 따른 것이다. 이 개념은 스코트랜드에서도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처음으로 언약 신학을 가르친 롤록(Rollock) 박사가 비록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한 개념을 말한적이 있다. 아주 조심스럽게 학문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특별히 회개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관련하여 롤록박사는 그러한 개념을 말한 것이다. 회개의 첫 부분은 슬퍼하는 것이다. 두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하나는
‘죄에 수반되는 형벌 때문에 생기는 슬픔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이것은 하나님께 돌아서는 이 거룩한 변화의 일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일 자체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들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을 롤록박사는 ‘법적 슬픔’(legal sorrow)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따라 복음에 의하여 감동받은 슬픔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롤록 박사이후 18세기초까지 스코틀랜드에서 대부분의 개혁주의 학자들은 회개를 말할 때 이러한 구분을 사용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구분을 명백히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음적인 은총’으로서의 회개를 말하고 있다. 1845년 후반기에 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집을 쓴 쇼(Shaw) 목사는 이 문구는 신앙고백서에서 ‘법적인 회개’로부터 참된 회개의 위치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비록 ‘법적인 회개’가 가룟 유다와 같이 진짜 회개가 아닌 경우에 사용된 것일지라도 이것은 잠시 후에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회개는 구원을 위한 필요한 선행조건이라고 가르친 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구분을 한 보스톤 목사는 회개의 필요성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설교에서 일반적으로 함께 병행되어 나타나는 회개와 믿음은 실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 둘을 구분해야만 할지라도 분리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시간상의 차이보다는 특성의 순서적인 구분일 뿐이다...’
아주 중요한 한 문장에서 보스톤 목사는 매로 논쟁에서 위기에 몰리게 된 핵심적인 사항에 근접한 것을 보여준다.
“루터포드와 더불어 나는 영원한 진노에 대한 우리의 책임문제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공의의 질서에 따라 죄에 대한 모든 형벌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속박과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요 방편임을 주장한다.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믿음의 길을 말하는 것은 더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이론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은혜의 언약의 조건성과 칭의에 있어서 믿음의 도구성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는 일은 중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에게 둘째 언약의 참된 속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져다주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회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보스톤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첫 번째 효과는 신자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것임을 말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만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믿음의 즉각적인 효과라면 회개는 믿음 전에 있어야 하든지 아니면 죄 사함을 받은 후에 와야만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이므로’(히 11:6) 성립될 수 없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 라고 하셨다...이제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까지는 여전히 그리스도 없이 존재한다(엡 3:17).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믿음 앞에 올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죄 사함 받은 후에 오는 것이다”.
보스톤은 참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흐른다는 것을 주목함으로써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고로 나는 반증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회개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죄 사함의 열매이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순서상 이것은 믿음 뒤에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 사함을 수반한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지지하고 있다: 회개는 ‘성결케 하는 은혜’이며 사함보다 선행될 수밖에 없는 성결케 하는 은혜는 칭의와 성화의 상대적인 위치를 뒤집어엎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요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보스톤은 반박자들을 공격한다. 그는 회개가 죄 사함보다 우선된다고 믿은 쏘씨니우스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구원의 조건으로써 회개의 필요성을 본 언약신학자들은 동일한 함정에 빠진 자들임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보스톤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1. 죄 사함의 조건으로 회개를 말하는 것은 ‘자연 종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은 어떤 무엇을 함으로써-이 경우엔 회개를 말함-구원을 얻어야만 한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주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하고는 무관한 것이다.
2. 회개를 죄 사함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은혜의 언약을 바꾸는 것이요 심한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실로 보스톤은 더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그는 은혜의 언약을 가짜 행위의 언약(bastard covenant of works)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PI2002/7HG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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