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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삼위일체 신학에서 어거스틴

현대 삼위일체 신학에서 어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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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nes, Michel Rene, Augustine in Contemporary Trinitarian Theology, Theological Studies 56/2(1995).-2
오상호 역

비록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이 깊이 있게 연구된 이후 시간이 지났지만, 최근 십년간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에 있어 어거스틴의 신학이 가지는 의미들에 대하여 일단의 조직 신학자들은 중요하고 넓은 관심을 표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한 초기 "경륜적" 이해의 존재와 특징에 대한 조직신학자들의 집중은 그 중에서도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이 이런 의미의 oeconomia를 희생하여 후기 신학에 있어 불행한 결과들을 가져왔다라는 드물지 않은 판단으로 나아갔다. 이 희생은 하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경험뿐만 아니라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관계성에 대한 강조와 자주 대조되었다. 이 논문에서 나의 목적은 오늘날 대부분의 어거스틴 연구에서 실시되고 있는 방법론적 전제들에 대하여 그들이 드러내는 것을 위하여 이런 최근 신학 저작들을 조사하는 것이고, 특별히 교부 삼위일체 신학의 전문인 역사 신학자의 관점에서 그러한 전제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최근의 조직신학적 접근의 일반적 현상에 대하여 제시한 다음, 어떻게 이러한 전제들이 조직신학자들에 의한 어거스틴의 이해에서, 그들의 방법과 특별히 그들의 결론들에서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교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은 이 신학을 두 가지 근본적인 범주들로 나눈다. 이 설명에 의하여, 헬라 신학은 구별되는 위격들의 실체에서 시작하고 반면 라틴 신학은 신적 본질의 단일성의 실체에서 시작한다. 이런 구도가 참이라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될 수없다; 내가 보여줄 것과 같이, 이런 구도를 가정하는 효과는 그것이 드러내는 만큼 적어도 숨긴다. 그러나 이 구도가 참인지 아닌지는 접어두고, 즉 그것이 정확하게 그 교리를 설명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접어두고, 그것은 오직 지난 백년간 신학자들만이 그것이 참이었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확실한 것이라고 서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헬라/라틴 패러다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현대 삼위일체적 신학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 믿음, 그리고 de Margerie와 LaCugna에게서 발견하는 연관된 도식들, 혹은 Brown에게서 발견하는 "복수 모델/단수 모델"(plurality-model/unity-model)들은 모두 100년 전에 씌어진 Theodore de Regnon의 삼위일체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라틴 패러다임, 지리적 도식들을 발명한 것은 de Regnon이기 때문이다. De Regnon의 패러다임은 어거스틴 신학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구성하는데 필수 조건(the sine qua non)이 되었다. 이런 범위에서, LaCugna와 Brown의 책들이 다르지만, 양자는 scholastic modernism을 보여주는데, 그들 모두 20세기의 동일한 시공간에 걸치는 견해를 분명히 제공하기 때문이다. Mackey와 O'Donnell도 그렇다.
이러한 저작들 모두는 de Regnon의 패러다임을 따라서 교부적 삼위일체 신학을 구성한다. 그들 중 아무도 그 패러다임은 증명될 필요가 있다 혹은 그것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라는 어떤 인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LaCugna와 Brown은 그들이 도식화하는 특별한 문제를 근거하기 위하여 그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 비록 Mackey 와 O'Dommell 양자는 패러다임에 대한 비난으로 좌절하지만, 양자는 그것이 19세기 후반의 학문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주목하지 않고, 그들에게 그들의 좌절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공하는 관찰을 주목하지 않는다. 때때로, 몰트만은 de Regnon의 패러다임을 피하려는 듯 하지만, 그러나 사실상 그는 그것을 오직 거울 이미지로 변화시키는데, 즉 어거스틴의 단일(unity) 패러다임은 그의 심리적 유비의 사용을 통하여 헬라 사회적 패러다임과 구별된다-이 주장은 일정기간동안 프랑스 어거스틴주의자들 사이에 인기있었다. 그러나 몰트만은 잘못되었는데, 왜냐하면 "몸을 통제하는 영혼"에 대한 생각에 기초되는 삼위일체에 대한 심리적 유비가 Eusebius of Caesarea와 Gregory of Nyssa라는 헬라신학자들에게도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의 책들 모두는 현대적 재구성들이 현대 해석적 범주들에 사롭잡힌 활발하게 유행하고 정도룰 보여준다. 그러나 공정하게 현대 조직신학에에서 de Regnon의 패러다임의 밖에서 어거스틴을 읽는 것에 대한 무능력보다 더욱 공통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어거스틴에 대한 그러한 현대적 접근들은 어거스틴의 신학의 넓고 일반적인 특징화들에 의존한다; 이런 넓고 일반적인 특징화들 그 자체들은 세기 전환기의 도그마의 대륙적 역사들에 의존하는데, 내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그것은 de Regnon의 패러다임이 가장 명백하다. 유사하게, 그런 현대적 접근들은 동일한 두 가지 전제들을 가진다: 첫째는 정반대의 대조에 기초한 특징화들은 대조들을 통하여 분명하고 구별되게 드러난 상세한 점에서 확증된다 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조와 관련하여 교리들을 표현하는 동일한 과정이 교리의 발전에 대한 종합적 설명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짧게 말하자면, 양극의 대조의 범주들에 대하여 조직 신학자들 가운데 경향이 있는데, 과거에 "거기에서 나온"(out there) 생각들이 실제로 양극단에 존재하고, 양극단의 대조들은 그런 생각들의 내용들과 관계성을 정확하게 서술했다 라는 믿음에 기초했다. 비록 나는 양극의 범주들에 대한 이 경향이 조직신학자들이 이 세기에 만든 방법론적 선택들에 대하여 어떤 것을 드러낸다라고 믿지만, 이런 범주들이 19세기와 20세기의 교리 독자들에 의하여 그렇게 가치가 있게 된 이유는 내가 그런 시대의 전공자들을 위하여 남겨놓는 질문이다. 양극의 범주들에 대한 이 강조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교리에 대한 이 양극화하는 해석학을 생산하는 역사들 안에 여러 제한들이 있고 현대 조직 신학자들은 그런 한계들을 근본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듯하다.
그런 한계들 중에 하나만 취하기 위하여, 패러다임적으로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에 의하여 표현된 헬라 전통과 그에 반대하여 패러다임적으로 어거스틴에 의하여 표현된 라틴 전통으로 삼위일체 신학의 표준적인 분리는 가장 초기 알렉산드리아("헬라")와 로마("라틴") 신학들 사이에 많았던 매우 밀접한 관계를 무시한다. 4세기와 5세기의 헬라와 라틴 삼위일체 신학들 사이의 실제적 분리에 대하여 말하는 경향이 많으면 많을수록,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4세기 중반의 종합 신학으로부터의 근본적인 비약을 더 많이 인정하고 설명해야만 한다. 헬라와 라틴 신학 사이의 세기전환기의 대립을 더 많이 설명하면 할수록, 이전의 일치,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에 기초한 그 당시의 지배적인 일치, 무엇보다도 "니케아"의 일치의 상실을 더 많이 주장한다.
소수의 교리 역사가들은 용감하게 그들 자신의 논리를 따르고 "로마/알렉산드리아" 일치의 상실을 인정한다. Harnack이 그렇게 했다. de Regnon을 통하여 헬라와 라틴 신학에 대한 패러다임적 표현의 시대로서 우리가 인식하는 그 시대는 하르낙의 설명에서 로마/알렉산드리아 삼위일체 일치가 배신당한 그 시대였다. 하르낙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과 381년의 콘스탄티노플의 새 신학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고 그는 그것을 "semi-Arian"과 니케아의 파괴로서 설명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Paissac과 Malet과 같은 프랑스 어거스틴주의자들로부터 매우 다른 견해를 발견하는데, 그들은 카톨릭 신학에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들이 현대 카톨릭 조직 신학자들의 repertory인 개념적 숙어중 많은 부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스콜라적 어거스틴주의자들은 어거스틴이 니케아의 억제하는 개념들, 특별히 homoousia 라는 표어에 의하여 강요된 압박을 남겼다 라는 것을 기뻐했다. 이 학자들에게 있어, 그의 라틴, 예를 들어 그의 어거스틴적이고 최초의 스콜라적 패다다임에서 de Regnon이 설명한 교리적 시대의 발전은 초기 정통 일치로부터 행복한 분리의 발전이다. 니케아 신학으로부터 어거스틴의 솔직한 분리는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어거스틴주의자들의 대립이 전재하는 그 문제들을 아주 잘 극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본문은 비록 어떠한 해명없이 LaCugna가 니케아 일치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을 위치시키는 프랑스 학자들을 그녀의 논의의 중심으로 가져놓는 것이다; Congar는 그것을 그의 각주에서 언급한다.
어거스틴에 대한 조직적 논의에서 그 패러다임의 기원에 대한 무지와 연결하여 생각되는 de Regnon의 패러다임의 약화된 설명에 대한 압도적인 표현은 웅장하고 넓게-공격받은 이야기적 형식들을 사용하는 조직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세기 전환기의 신학자들과 같이 현대의 조직신학자들은 그런 웅장하고 체계적인 이야기적 형식들을 전개하기 원하는 확신에 의하여 구별되는 듯 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확신은 두 가지 태도로부터 나온다. 첫째, 그 확신은 "패러다임 변환"(paradigm shifts)이라는 메카니즘을 통하여 현대인으로서 배운 모든 새로운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반영한다; 우리가 배운 것은 그런 패러다임들 자체의 존재에 대한 것이 전혀 아니다. 둘째, 체계적 이야기적 형식들을 말하려는 확신은 역사적 사실들은 체계적 패러다임 혹은 해석학의 부수현상일 뿐이고 그 결과 어떤 "사실"이 그 자체를 해석학이나 이데올로기의 표현 혹은 동의어로 변형된 이후로, "사실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은 본질적으로 오직 해석학이나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의 실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라는 일반적 의미를 반영한다. 그러한 태도중 어느 것이나 혹은 둘다 역사적 판단들 혹은 특징지움을 더욱 불확실하고 희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이 사실은 아니다 라고 결론짓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들이 오직 해석학의 부수현상이라는 생각은 그것이 우파적 교리 역사들을 암시하는 것과 같이 좌파적 교리 역사들을 이제 암시한다. 20세기 전반기의 카톨릭 역사 신학(그리고 일반적인 카톨릭 신학)에서 성취물들중 많은 것들이 만약 공식적인 해석들(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해석과 같이)에 파괴적이지 않다면 역사적 원천들에 대한 실제적 독해를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려는 우파의 경향을 벗어나려는 소원에 지배된다. 좌파에서의 유사한 경향에 대한 직접적인 예가 Thistlethwaite의 최근 논문에서 나타나는데, 그녀는 단 하니의 특별한 본문 혹은 심지어 이차적 자료들도 인용하지 않고 사도적 교부들, 변증가들, Tertullian에 있는 삼위일체적 언어의 의미를 특징화시킬 수 있었다. 그녀의 주장은 그녀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나타나는 Gregory of Nyssa의 삼위일체 신학의 특징화로 결정된다. 그레고리가 로고스-중심적인 신학을 가졌다 라는 그녀의 주장의 색다른(idiosyncratic) 본질은 그녀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단 하나의 원 자료도 제시할 수 없고 그녀는 오리겐에 대한 관계에서 그레고리가 공격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100년 전의 이차적 자료들에만 의존할 수 있다 라는 사실에 의하여 알려진다. 그래서 그녀는 이야기된 본문들에 대한 지식과는 다른 어떤 것에 기초한 웅장한 이야기에 대한 괴로운 예증을 제공하는데, 실제로 이야기된 본문들을 읽기 위하여 단순히 제시된 필요를 개념적으로 우회하는 것에 긍정적으로 기초하는 이야기이다. 그 본문들은 웅장한 이야기와 떨어져 내용을 가지지 않고, 그래서 직접적인 만남을 요구하는 성실이 없다.
내가 이미 그것을 언급한 것과 같이, 조직 신학자들 가운데 언급된 이야기적 형식이 체계적인데, 그것으로써 나는 두 가지 것들을 의미한다: 첫째, 개방적으로 이해하는 설명; 그리고 둘째, 사상의 내적인 논리와 관련된 교리의 발전에 대한 설명. 나에게 이해력에 대한 조직신학자들의 요구에 대하여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이해 변화를 생각의 논리에 의하여 문화적 형식, 즉 교리에 묶는 방법이다. Yannaras의 서방 문명에 대한 어거스틴의 영향에 대한 최근의 설명은 교리에 대한 이런 종류의 이상적인 설명에 대한 뚜렷한 예이다. Yannaras는 서방 기독교의 문화에서(동방 기독교 문화에 반대로) "logocentrism"의 등장은 서방의 신학적 패러다임으로서 어거스틴의 영향에 의존한다라고 주장한다. Yannaras는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 어거스틴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하는 아주 훌륭한 로고스 신학자로서 어거스틴에 대한 동일한 설명을 취하고 이상주의의 논리를 어거스틴의 영향력에 적용한다: 각 역사적 시대는 그것이 원래 어거스틴에 의한 교리적 통찰력이었던 것의 범위라는 생각으로 확대되고 세련되는 도중에 Yannaras에 의하여 정의되었다. 개념적 정제와 확대에 의하여 교리의 발선을 설명하는 이 방법은 일반적으로 교리에 대한 수많은 취급들과 특별히 어거스틴의 교리에서 나타난다; LaCugna와 Jenson의 저서는 특별히 이 패턴을 따른다.
Yannaras 자신의 저서는 Martin Heidegger와 함께 독일 관념론에 대한 그의 의심을 거부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들고, 그는 그것을 거부하려고 원하지 않는다. 그 이론을 제시하면 (1) 대립된 양극이라는 개념적 범주들에 대한 매혹, (2) 문화적 형식들을 서술하기 위한 the logic of ideas의 사용, (3) 양극 범주들과 ideal logic의 기초에 대한 이해의 주장은 조직 신학자들 가운데 독일관념론의 영향이 Yannaras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는 것을 제시한다. 조직신학자들이 서술의 구성적이고 관념적 스타일을 더 선호한 결정이 있었다; 이 결정은 객관화되었는데,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을 만드는 것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amnesia를 제외하고, 교부신학의 조직신학적 사용에서 관념론의 영향이 가지는 문제는 일반적으로 철학이 신학에 자리잡지 못하거나 혹은 심지어 특별한 관념론이 신학에서 자리잡지 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인정되지 않지만, 관념주의가 그 자체를 나쁜 역사로 끌어넣는다는 것이다: 역사적 연구의 분야의 성실은 관념주의적 용어들로 이미 던져진 "역사적" 설명을 발견하려는 필요에 의해 파멸되었다. 그래서 역사는 현대 조직(신학)들을 구성하는 그런 주제들에 대한 물질적 구성화로서 취급된다.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사이의 대화는 복화술자와 그녀나 그의 지지자 사이의 대화로 변화된다.
어거스틴에 대한 조직(신학)적 사용이 조직적 신학의 관념화한 방법에 반영되어 미리 선택된 "역사적" 설명들에 기초하는 방법은 그런 사용들의 두 특별한 특성들에서 보여질 수 있다. 첫째 Olivier du Roy의 저서를 어거스틴 신학의 독해에서 중간적 권위로서 표현하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 이 표현을 드러내기 위하여 Muller의 경우에서처럼 각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러나 LaCugna는 du Roy에 대한 그녀의 의존을 본문으로 제시하고, 그 결과 du Roy에게서 방법적 전제였던 것은 LaCugna에게서 신학적 결론이 된다. Congar는 얼마나 du Roy의 관점이 "radical"한지, 그리고 어떻게 du Roy가 내가 위에서 언급한 프랑스 어거스틴주의자들에 대한 반동에서 그것을 해야했는지 언급한 아주 드문 예이다.
Du Roy의 어거스틴의 삼위위체 신학에 대한 설명은 중요한 방법적 특질들(idiosyncrasy)을 보여준다. 한 중요한 특질은 교리들과의 근본적인 관계성이 아니라 철학과의 근본적인 관계성과 관련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du Roy의 설명이다. 여기에서 du Roy는 어거스틴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지배적인 20세기 조직적 소개들에 적절하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가 철학에 빚지고 있는 것에 대한 많은 논문들이 있는 반면, 그의 직접적인 기독교 라틴 선구자들에 대한 유사한 의존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들은 매우 적다. 어거스틴을 터툴리안에게로 축속하려는 것과 같은 그런 논의들, 혹은 Regnon의 패러다임과 관련하여 이 빚을 두는 논의들: 예를 들면, 얼마나 관계들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론은 Gregory of Nazianzus의 관계들에 대한 이론과 다른가? 우리는 많은 조직 신학자들을 따라서 종교적 교리에 대한 이전의 설명들의 영향이 없는 반면 종교적 교리에 대한 철학의 영향은 근본적이라는 이상한 입장을 초래한다.
du Roy의 방법론의 또 다른 구별되는 기능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이 정적이고 주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록 de Roy의 분명한 관점이 발전적이지만, 그의 작용원리는 비록 어거스틴이 triad에 대하여 선호한 용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문에서 본문으로 혹은 장에서 장으로 변화하였지만,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적 신학은 지속적으로 triadology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이에 대하여는 du Roy의 appendix를 참고하라) 그런 논의는 De Symbolo ad Catechumenos에서 삼위일체의 단일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논의가 그와 같은 시대의 헬라인 Evagrius의 논의와 구별될 수 없다라는 관찰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아리안에 반대하여" 요한복음 5장 19절 "아들은 아버지 없이 아무것도 할 수없다"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본질적 관계성에 대한 선언이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공동의 활동들이 공동의 본질을 요구하고 오직 공동 본질만이 공동활동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논의된 저서들의 대표인 Regnon의 패러다임의 형식에서, 이 주장과 이 언어는 "카파도키안"의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어쨌든 배타적으로 헬라적이라고 생각된다.
정적이고 테마적인 범주들에서 명료하게 된 교리의 근본적인 원천이 철학이라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적 신학에 대한 du Roy 의 설명은 우리를 어거스틴에 대한 조직적 사용들이 조직신학의 이상적 방법들에 반영된 "역사적" 설명들에 기초한 두 번째 방법으로 인도한다. 일반적으로 교부적 삼위일체 신학와 특별히 어거스틴의 신학에 대한 대부분의 조직(신학적) 취급들은 삼위일체 논쟁의 장르에서 텍스트들의 기피와 그런 저작들의 논쟁적 문맥을 취급하는데의 실패로 특징된다. 일반적으로 논쟁적이지 않은 교부적 삼위일체 텍스트들에 대한 조직신학자들 가운데에 결정적인 선호가 있고, 그런 의도가 그럴듯할 때 논쟁들을 "read out"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Gregory of Nyssa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진술에 대부분 공동으로 사용되는 것은 그의 저작 On "Not three Gods"이다; 비록 이 세기 이전에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영향이 있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는 없지만, 이 저작을 보여주지 않는 초대 기독교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선택된 원본 자료들의 모음집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매우 짧은 저술이고 가능한 삼신론에 대한 헬라의 걱정을 보여줌으로 서방인들에게 명백하게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De Regnon은 이 저술에 초점을 맞추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그것은 Cajetan의 삼위일체 신학과 같이 아퀴나스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학적인 설명들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동일한 "nature/operations" 언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 이유에 대하여 강조하는 de Regnon의 문단들은 Gregory의 신학에서 외적인 작용들에 대한 Gonzalez의 논문, Gregory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Quasten의 요약, 그리고 Gregory로부터 추려낸 Bettenson의 선집에서 보여지는 동일한 문단들이다. 더욱이, Gregory의 Ep. 189의 "nature/operations" 언어에 대한 de Regnon의 특유한 추상화는 신학자들과 학자들 대부분에게서 분명한 "essence/energy" 언어에 대한 가정에서 계속된다. 실제에 있어, On "Not three Gods" 이 논쟁적 저술이 아니라는 관찰은 한때 그의 용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적 번역자에게 관계되었지만 이 텍스트에서 발전한 Gregory의 서술은 그의 신학의 개념적으로 일반화한 형식으로서 작용한다 라는 이해를 지지한다. On "Not three Gods"에서 특별한 교리적 반대자가 분명히 빠져있고 Gregory의 언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독해에 영향을 받기 쉬웠다 하는 사실은 그 텍스트를 그 주제적 강조에 대하여 단순히 읽도록 허락한다.
그러나 심지어 논쟁적 독해들에 대한 조직적 회피를 보여주는 것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적 신학에 대한 해석들이고 논쟁적 문맥에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적 신학을 고려하는데 대한 아주 폭넓은 실패가 있다. 명백히 논쟁적인 어거스틴에 의한 삼위일체적 저작들은 더 이상 읽혀지지 않고 논쟁적 독해를 포함할 수 있는 저술들은 지속적으로 그런 방법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만약 de Trinitate가 논쟁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판단이 그렇게 필연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아주 나쁜 것이다; de Trinitate이 논쟁적 의도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것에 대한 관념적 필요는 그 원천이 그런 판단에 해로운 것이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심지어 우리는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예를 들어 이 요점의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다.
de Trinitate에서 삼위일체적 경륜에 대한 어거스틴의 취급은 원래 책 2에서 책 4에서 나타난다; 특별히 그 자체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의 경륜적 신학에 대한 학자들의 실험실로서 사용되는 것은 책 2권이다. 형식적으로 이 책에서 어거스틴의 논쟁에 세 가지 주목할 가치가 있는 기능들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 잘못된 "삼위일체의 경륜"과 싸우도록 설계된 논쟁적으로 긴장된 주장이다: Collatio cum Maximino 26과 Contra Maximinum 2의 증거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실마리들이 이런 잘못된 경륜의 지지자들을 Latin Homoians("Arians")로서 정체를 드러낸다. 반-니케안들은 그런 출현들로부터 아들의 변화 가능성과 물질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의 신의 현현들로부터 아버지를 제외시키고,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주장에 반대해야만 했다. 책 2의 또 다른 흥미있는 기능은 성경(우선적으로 구약성경의 구절들)에 대한 일련의 주석들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거스틴이 석의와 해석을 제공하기 위하여 선택한 성경 본문들은 Homoian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선택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에 지배되었다(책 5와 6에서 신약성경 구절들에 대한 예와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2는 성경 석의 주변에 구성된 것으로 남는다. 책 2에서 주장의 마지막으로 가치있는 측면은 제시된 특별한 구절들이 Homoian 논쟁에 대한 반응에서 결정된 것에 반하여, 어거스틴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인용된 어떤 성경 구절들이 경륜적 삼위일체 신학에서 더 오래된 역사, 권위, 역할을 가지기 때문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나는 de Trinitate 2.2.9에서 요한복음 1장1-3절에 대한 중추적 호소를 생각하는데, 그것은 요한복음 서문(그러나 특별히 1장 1절)을 삼위일체의 경륜에 대한 패러다임적 표현으로서 터툴리안(그리고 Hippolytus)의 사용이다.
de Trinitate에서 어거스틴의 주장에 대한 어떠한 신뢰할 수 있는 특징화와 같이, 책 2에서 어거스틴의 주장에 대한 어떠한 실질적인 해석도 이들 세 측면들의 빛에서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어거스틴의 주장이 잘못된 문맥에서 표현되고 그래서 잘못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열거되는 그 세 가지와 같은 그런 측면들의 빛에서의 de Trinitate에 대한 독해가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공통적이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는다. 더욱이 대부분의 현대 교부학자들의 어거스틴의 경륜적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설명에 책 2의 중요성이 주어진다면(특별히 카톨릭의 설명들에서), 예를 들어 LaCugna의 취급을 뛰어넘는 이 주제를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만약 그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현대적 설명들이 근거하는 어거스틴의 텍스트들의 숫자를 100년 전의 설명들이 근거하는 어거스틴의 텍스트들의 숫자에 비교해 본다면, 발견하는 것은 그 숫자가 극적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Maximinus에 반대하는 어거스틴의 마지막 삼위일체에 대한 저작들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텍스트들이 라틴어로부터 현대언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조직신학자들에 의해 읽어지지 않았고 100년 전에서 발생하지 않은 한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적 신학에 대한 조직신학적 재구성들이 이제 하나의 본문인 de Trinitate 혹은 이 하나의 텍스트로부터 선택된 본문들의 기초에서 만들어진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거스틴에 대한 실제적 독해는 기능적으로 남아돈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재구성된 이야기들의 수사적 목소리는 포괄적인 것 중의 하나이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방법"은 사실상 감소한다. 증가하는 범위의 이야기들은 축소하는 경험과 증거의 기초에서 말해진다.
조직신학에서 개념적 대립들을 형성하는 설명들에 대한 선호가 있다면, 삼위일체적 논쟁들에 대한 관심의 상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고 심지어 의아스럽다. 만약 누군가의 수사학이 한 신학의 표현을 다른 신학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선호한다면, 서로에 대한 반대에서 교리가 분명히 발전하는 그런 텍스트들을 회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du Roy의 영향은 첫 실마리를 제공한다: 논쟁들은 교리들에 대한 주장들이고 교리들은 이상적 역사에 절대 필요한 것이거나 혹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ideas are. 이상화하는 역사에 대한 계획은 구성적인 ideas의 표현으로 교리들을 바꿔말하는데, 왜냐하면 교리의 역사는 그런 ideas들 사이의 발전하는 관계성으로서만 참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논쟁적 부분에 대한 현대적 관심의 부족은 직접적으로 신학에 대한 주제적 혹은 보편화한 이해를 표현하려는 필요에서부터 결과되었다; 논쟁적 의도는 신학의 주제적 적용에 한계로서 계속 이해된다. 이 세기의 대부분에서 그런 접근은 그레고리와 어거스틴의 신학들 양자에 대한 권위있는 설명들의 특징이었다.
Gregory of Nyssa를 재발견한 이 세기 전반부의 학자들에게 최초의 호소는 20 세기 기독교를 위한 그의 신학의 중요성이었는데, 특별히 a post scholastic Catholicism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Eunomius와의 그레고리의 논쟁의 구별성은 Danielou와 von Balthasar에 의하여 짧게 소개되었다. Rather, their accounts of Eunomius's theology served only to introduce issues they eventually found better dramatized in the theology od Arius, who was himself only a transparent mask for the real protagonist, Origen. 어거스틴 신학의 논쟁적 문맥에 대한 고려의 부족 뒤에 유사한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을 4세기 후반과 5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문제에 대한 논쟁적 반응으로서 설명하는 것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이 그의 선구자들(니케아를 포함하여)의 그것을 대신하는 본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단순히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만역 "지역"이 "서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이라는 주장(앞에서 언급한 프랑스 어거스틴주의자들과 같이)을 감소시킨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들에 대한 논쟁적 문맥의 제거는 동방의 불안정에 반대하여 삼위일체 신학에 관한 동방의 안정성에 대한 주제적(만약 상상이 아니라면) 설명에 의해 더욱 지지받는다. 그런 설명은 어거스틴에 의해 패러다임적으로 표현된 라틴 삼위일체 신학이 교리들을 더욱 상극인("heterodox") 세대(such as a homoousiosbased theology)로 바꾸어야할 필요가 있었던 필수적인 정통뿐만 아니라 논쟁에서 자유로운 문맥에서 발전한 일반화된 형식을 소유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그의 삼위일체 신학이 논쟁적 기원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그 결과 Catholicism(혹은 서구 문명)의 역사를 통하여 이상적인 적용을 가지는 것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이는 단지 어거스틴의 지지자가 아니다 라는 것은 주목되어야 한다. 내가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처럼,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비판들은 이상적이고 문맥에서 자유로운 방식으로, 그리고 동일한 이유 때문에, 즉 후기 서방 신학에서 그것의 보편적 적용을 주장하기 위하여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투자를 가진다.
결론적으로 나는 어거스틴에 대한 현대 조직신학적 사용들은 폭넓게 유지된 해석학적 혹은 조직 신학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기 위하여 미리 선택된 방법들과 설명들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방법들과 설명들은 대표적으로 교리의 철학적 내용에 대한 강조로 논쟁적 장르로부터 물러남, 원 자료들의 축소적 사용과 결부된 개념적 수준에서의 백과사전적 이해를 위한 갈망을 포함하여 ideas의 논리를 향한 경향, Regnon에 대한 무의식적 의존을 포함한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은 경륜을 제물로 삼는다라는 인기있는 판단은 그런 해석학적 전제들을 확실하거나 혹은 그럴 듯 한 것으로 취급하는 무반성적 사용에 의해 너무나 무거운 책임을 명백하게 지고 있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2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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