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때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때
최승락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우리가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면서 으레 습관적으로 눈을 감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고백은 기도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신앙의 공적 선포행위입니다. ‘이 신앙이 내가 믿는 신앙이고 또 우리교회의 신앙입니다’라는 자세로 오히려 엄숙한 책임감 가운데 눈을 부릅뜨고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고백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또한 온 세상을 대면하는 것이니까요.
또 하나, 사도신경만을 우리의 고백의 정형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도신경을 예배 순서에 꼭 포함시킬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이 오랫동안 사도신경을 예배시간에 사용해왔고,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빠지면 이상한 교회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사기도 합니다. 예배의 한 순서로 신앙고백의 행위를 포함시키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우리의 신앙을 정형화하여 고백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사도신경’이 가장 보편적인 한 형태로 채용이 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굳이 ‘사도신경’만이어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공교회적 고백의 형태로 사도신경 외에 니케아신경과 아타나시우스신경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배 중에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니 그전에 우리는 니케아신경이나 아타나시우스신경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일까요?
한국교회는 한국만의 교회가 아닙니다. 마치 기독교 신앙이 한국 땅에서 출발한 것처럼, 또는 한국 땅의 사람들만 만족하는 신앙의 형태에 머물러 있으면 되는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적 신앙의 뿌리 위에 서 있고, 또 온 세계를 향하여 공교회적 신앙의 선도적 사명을 수행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공교회적 신앙의 요체가 되는 삼대신경에 대해 잘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전문적으로, 그러면서도 대중적으로 이 신경들의 형성 역사와 그 본질에 대해 잘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일단 그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서의 간단한 스케치만이라도 해보고자 합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외하고, 니케아신경과 아타나시우스신경 부분만 잠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것도 두 신경 모두의 저변에 서서 한 평생을 진리를 위한 외로운 싸움을 감당하였던 아타나시우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해볼까 합니다.
아타나시우스와 니케아 신경
니케아신경이 만들어진 배경에 아타나시우스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북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AD 293년경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향 알렉산드리아는 문화와 철학, 교육의 도시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BC 332년에 건립된 이래 헬라 왕조인 프톨레미 왕조 치하에서 헬라 문화가 왕성하게 꽃피고 있었고,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대학에 버금가는 각 학문의 영역들이 공공자금으로 육성되고 있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도 세상의 일반학문 육성에 견줄만한 ‘교리교육 학교’(Catechetical School)가 만들어져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나 그의 제자 오리겐(Origen) 같은 걸출한 교사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오리겐은 그의 나이 18살 때인 AD 202년에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팔레스틴 땅으로 추방당하기 전까지 약 30년간을 이곳에서 가르치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게 됩니다. 아타나시우스가 이 학교에서 성경을 배울 당시에는 오리겐은 이미 죽은 뒤였지만, 이런 저명한 학자들의 전통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른 나이부터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와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명하게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한번은 알렉산더 감독이 저녁식사를 하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몇 명의 아이들이 세례식 흉내를 내며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 세례를 베푸는 감독 역할을 하고 있던 아이가 다름 아닌 아타나시우스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타나시우스는 일찍 알렉산더 감독의 눈에 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아타나시우스는 이른 나이에 집사가 되었고 또 개인적으로 알렉산더 감독의 비서가 됩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그 지역의 장로(목사)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우스의 신학사상 문제였습니다. 아리우스는 리비아 출신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안수를 받고 그 지역의 바우칼리스라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이전의 모나키안주의의 일신론 사상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분되지만 그래도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것은 같으며, 그런 점에서 그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한 두 세대 앞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수스 같은 사람도 유사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포도나무가 그것을 가꾸는 농부와 다르며 선박이 그것을 축조한 목수와 다르듯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이런 사상을 더 정교하고 일관되게 확립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와 리비아에서 적지 않은 동조자들을 얻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지역의 문제로 시작되었던 이 논쟁은 점점 범교회적인 문제로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차적으로 감독 알렉산더는 그 지역 범위의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사상을 단죄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 자신의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동조자들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만의 종교회의를 따로 소집하여 아리우스의 파문을 무효화하고 자기들의 감독을 따로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확대되자 결국 콘스탄틴 황제가 개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콘스탄틴은 325년 5월에 동방지역의 모든 감독들을 니케아에 있는 자기의 왕궁으로 소집하였습니다. 총 318명의 감독들이 약 3개월간 이곳에 모여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두고 기도하며 논의한 결과 공식적으로 그의 사상을 정죄하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식적 입장을 담은 고백적 문서를 채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니케아신경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유보할 수 없는 분명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가 창조되었다는 사상을 배격하고, 하나님보다 열등한 지위나 본질을 돌리려는 것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을 가지십니다. 어쩌면 이 한 단어가 니케아신경을 대표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케아신경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아름다운 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또한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의 독생자를 믿습니다. 그는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출생하셨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요, 빛으로부터의 빛이며,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이십니다. 출생하셨지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인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성육하셨고 사람이 되시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었고 고난당하시고 묻히셨습니다. 성경을 따라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시었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영광중에 다시 오시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니케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장 많은 부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체 구성은 삼위일체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 앞에 사도신경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자’에 대한 고백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위의 고백에 이어서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따라옵니다.
원래의 니케아신경은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성령님에 대하여 좀 더 확대된 형태의 오늘날 우리가 가진 고백문은 시간이 좀 더 지나서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공의회가 모여 니케아신경을 재확인하면서 성령님에 대한 부분을 더 확대한 결과물입니다. 여기에서는 성령님을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주님이요 생명의 수여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는 것을 고백하는데, 후에 서방교회는 성령님이 아버지로부터 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는 것을 첨가하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아들로부터도’가 첨가된 형태로 니케아신경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325년의 원래 니케아신경에는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로 고백부분이 끝이 난 뒤에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정죄문이 붙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거나 ‘그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 또는 ‘그는 무에서부터 만들어졌다’, 또는 ‘그의 본질은 [하나님과] 다르다’거나 ‘하나님의 아들은 만들어졌다’, ‘그는 변하거나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도적 공교회에 의해 정죄 받아 마땅하다.”
이 부분은 325년 아리우스논쟁의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항목들은 아리우스의 사상을 요약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필요성이 감소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가 325년의 니케아회의에 참석할 때는 공식적인 총대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대표하는 알렉산더 감독의 수행원으로 참석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고향에서 발단된 이 논쟁의 전모와 아리우스 사상의 문제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니케아회의에 모인 감독들의 관심이 알렉산더 감독보다 오히려 이 젊고 총명하며 탁월한 논리 능력을 가진 아타나시우스에게 더 쏠렸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아타나시우스신경
니케아회의가 은혜롭게 종결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알렉산드리아에는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328년 6월에 감독 알렉산더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고, 후계자로 아타나시우스를 지목함에 따라 그가 30대 젊은 나이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이것은 젊은 아타나시우스에게 과분한 영예였겠지만, 공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의 생애가 마칠 때까지 끝없는 고난과 추방, 그리고 투쟁의 시작이기도 하였습니다.
니케아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파의 입지에 족쇄가 채워지는 듯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 사상의 추종자들은 살아 있었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아타나시우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리우스 사상에 동조적인 감독들이 콘스탄틴 황제를 설득하여 파문당한 아리우스의 복권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아리우스의 목회지가 알렉산드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 새롭게 그곳의 감독이 된 아타나시우스에게 직접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자신이 아리우스의 복권을 명하는 편지를 아타나시우스에게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징문제는 황제의 명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합당한 회개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한 비록 황제의 명령이라도 그것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황제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그의 대적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준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권력에 굴하지 아니하였고, 이것이 가지고 오는 대가를 달게 받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생애는 이때부터 시작된 총 5차례에 걸친 추방의 생애로 점철되었습니다.
주후 337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죽고 나자 로마 제국은 다시 동서로 양분되어 두 명의 황제 시대로 돌아갔습니다. 제국의 동부를 다스리게 된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아리우스의 사상을 선호하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의 황실 감독들도 다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아타나시우스는 콘스탄틴 황제 때보다 더 심한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나마 아타나시우스에게 우호적이었던 로마 제국 서부의 황제 콘스탄스마저 반란에 의해 폐위를 당하고 콘스탄티우스가 단독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되면서 이 박해는 노골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알렉산드리아를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아타나시우스는 은신처를 찾아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를 따르는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들이 무력에 저항하긴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이제는 아리우스파가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교회의 판도를 주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이하게도 아타나시우스가 다시금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안이 황제가 되면서였습니다. 율리안은 어린시절 기독교인으로 자랐고 예배시간에 성경 봉독자로 봉사한 경력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콘스탄틴 황제 때에 금지하였던 이교 숭배를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면서 황제인 그 자신이 이교 제사의 제사장 노릇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회 정치에 관해서는 관용의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니케아신경의 정신이나 아리우스의 사상이나 아무런 차이도 없었고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정적이었던 콘스탄티우스 때에 다시금 부활하였던 아리우스파의 박해를 당하고 있던 아타나시우스에게는 뜻밖의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평화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고, 또 달가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많이 약화되어 있었고, 많은 지도자들이 아리우스의 사상으로 변절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타나시우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리를 위한 외로운 싸움을 쉬지 않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373년 5월 3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에서의 힘든 싸움을 그치게 됩니다. 니케아회의가 열린 325년부터 친다면 근 50년에 걸친 반세기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의 진리와 그것이 가지고 오는 구원의 확신을 위하여서 지치지 않는 싸움을 많은 역경 가운데서 감당해왔던 사람입니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그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우스처럼 믿으면 그대로 따라가면 되지 않는가요? 더군다나 그것이 한 시대의 교회의 주류를 이룬다면 그 주류가 옳은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믿는 교리 한 줄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요? 교리야 어떻든 내가 믿고 구원 받아서 영육간의 축복이나 구원 효과들만 누리면 되는 것 아닌가요?
네,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만 더 들어가서 생각을 해보십시다. 우리가 얻었다고 생각하는 구원이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인데요? 그냥 내 주관적인 감정이나 사람들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우리의 구원은 견고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한 기반을 얻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하나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참 하나님과 참 사람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한 부분만이라도 결핍되거나 제거될 때 우리의 구원도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가 친히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신경 하나가 또 다른 공교회적 신조의 하나로 우리에게 물려지고 있습니다. 바로 아타나시우스신경입니다. 이 신경이 아타나시우스에게 돌려진 것은 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신경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 삼위일체론 부분은 아타나시우스보다 한 두 세대 이후의 신학자인 어거스틴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관계를 다루는 양성론 부분은 그가 죽은 지 68년이나 지나 주후 451년에 모였던 칼케돈회의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타나시우스 사후에 발전되었던 신학적 내용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이 신경을 아타나시우스가 직접 작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경의 뿌리는 아타나시우스가 그토록 지키고자 애썼고 이제는 범교회적 신앙으로 자리를 잡은 니케아신경입니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은 총 4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두 개의 항목은 서언으로 공교회적 신앙이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가 하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이는 마지막 44번째 항목인 결언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된 부분을 이루는 3~28항까지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29~43항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고백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그의 양성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타나시우스신경의 전체를 다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만, 그 특징을 나타내는 한두 군데 부분만 선별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6항까지의 내용입니다.
“3. 공교회적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삼위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일체이신 삼위를 예배하되, 4. 위격을 혼합하지 않으며 본체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5. 아버지는 한 위격이시오, 아들도 한 위격이시며, 성령도 한 위격이시기 때문입니다. 6.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며, 그 영광은 동등하고, 위엄은 동일하게 영원합니다.”
이 고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구별된 위격과 그러면서도 그 동일한 본체(또는 본질)를 양면적으로 강조합니다. ‘위격을 혼합하지 않으며 본체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이것을 잘 압축하고 있습니다. 세 위격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의 하나님만이 있어서 그 한 분이 형편에 따라 마치 가면을 바꾸어 쓰듯이 그렇게 모양과 역할만 달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세 위격의 일체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마치 세 다른 신이 존재하는 것인 양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은 이런 삼신론 사상을 엄격하게 배격합니다. 그러면서도 니케아신경에서 표방되었던 위격의 구별성을 잘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관된 어려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할 때, 한 인격 속에서 이러한 양면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일까요? 신성이 인성을 흡수하고 지배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한 몸 안에 각각 분리된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아타나시우스신경은 칼케돈회의의 입장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29. 나아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30. 바른 신앙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인 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1. 그는 아버지의 본체에서 나오시고, 만세 전에 출생하셨으니 하나님이시오, 자기 모친의 본체에서 나오시고 세상에서 태어났으니 사람이십니다. 32.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이성적 영혼과 인간의 육이 공존하니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33. 신성을 따라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인성을 따라서는 아버지에게 열등하십니다. 34. 그가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시나 두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35. 신성이 육으로 변질함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인성을 취하심으로 한 그리스도이십니다. 36. 본체의 혼합이 아니라 위격의 일체로 확실하게 한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이성적 영혼과 육이 한 사람을 이루듯, 하나님이요 사람인 그분은 한 그리스도이십니다(이상 신조 인용 부분은 유해무 교수의 번역을 참고로 다소 수정).”
이 고백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만’하거나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아리우스파의 사상은 여전히 배격을 받습니다.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각각 분리된 두 개의 인격을 가진 이중 존재(네스토리우스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안에서 양성이 뒤섞인 중간적 복합체(아폴리나리우스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성 요소인 ‘이성적 영혼과 인간의 육’을 가지시면서 이것이 그의 신성 속에 혼합, 흡수되지 않고, 역으로 그의 신성이 육으로 변질되지도 않으면서 상호침투적인 신성과 인성의 공존 상태를 가지십니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은 이처럼 가장 어렵고 신비로운 교리인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양성론의 문제를 가장 정교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신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반으로 이후의 모든 잘못된 교리들을 판가름하고 공교회적 신앙의 전통을 유지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4세기의 참 신앙의 투사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이 돌려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의미 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때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아타나시우스를 떠올려보게 되는 것은 그의 시대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여전히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진리에 대한 무관심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교리교육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극단적 실용주의 사조가 깊이 파고들어와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적 포용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중심적 행복입니다. 내가 즐거워야 하고, 내가 ‘필 굿’(I-feel-good spirit)해야 하며, 무조건 재미있어야 합니다. 심각한 것도 싫어하고, 따지고 재는 것도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바른 신앙’이란 것에 의해 내가 가늠되고 판단 받는다고 생각하면 이를 참을 수 없어 합니다. 나는 판단하는 자이지 판단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사람이 주인인 교회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통치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심히 부담스러워 하는 교회로 말입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것입니다. 정말 껍데기에 현혹되는 교회를 털어버리고 한 사람이라도 바르게 믿는 그리스도인을 찾고 또 찾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두려움이 가득한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헌금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며 교세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실종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왜곡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정말 두려워해야 될 것에는 관심이 없고 가게 문 닫는 것 걱정하는 마냥 영업전선 이상에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나 콘스탄티노플 같은 당대의 중심 도시들에 비하면 변두리 지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의 깨어있는 한 사람 아타나시우스로 말미암아 4세기 당시 이 도시는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이 시대의 공교회적 신앙의 중심에 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만의 정서를 무시할 수 없지만, 한국만을 위한 좁은 신앙 인식은 버려야 합니다. 이 시대에 공교회적 신앙을 선도해갈 수 있는 많은 아타나시우스 같은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진정 귀하게 여기는 많은 진실한 믿음의 청년들이 아타나시우스 같은 신앙의 인물을 알고 그로부터 배워서 그 정신을 이 시대에 구현해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과거의 아타나시우스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때입니다.
<교회와 신앙>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3194
[출처] [기고]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때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최승락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우리가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면서 으레 습관적으로 눈을 감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고백은 기도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신앙의 공적 선포행위입니다. ‘이 신앙이 내가 믿는 신앙이고 또 우리교회의 신앙입니다’라는 자세로 오히려 엄숙한 책임감 가운데 눈을 부릅뜨고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고백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또한 온 세상을 대면하는 것이니까요.
또 하나, 사도신경만을 우리의 고백의 정형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도신경을 예배 순서에 꼭 포함시킬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이 오랫동안 사도신경을 예배시간에 사용해왔고,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빠지면 이상한 교회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사기도 합니다. 예배의 한 순서로 신앙고백의 행위를 포함시키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우리의 신앙을 정형화하여 고백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사도신경’이 가장 보편적인 한 형태로 채용이 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굳이 ‘사도신경’만이어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공교회적 고백의 형태로 사도신경 외에 니케아신경과 아타나시우스신경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배 중에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니 그전에 우리는 니케아신경이나 아타나시우스신경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일까요?
한국교회는 한국만의 교회가 아닙니다. 마치 기독교 신앙이 한국 땅에서 출발한 것처럼, 또는 한국 땅의 사람들만 만족하는 신앙의 형태에 머물러 있으면 되는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적 신앙의 뿌리 위에 서 있고, 또 온 세계를 향하여 공교회적 신앙의 선도적 사명을 수행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공교회적 신앙의 요체가 되는 삼대신경에 대해 잘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전문적으로, 그러면서도 대중적으로 이 신경들의 형성 역사와 그 본질에 대해 잘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일단 그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서의 간단한 스케치만이라도 해보고자 합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외하고, 니케아신경과 아타나시우스신경 부분만 잠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것도 두 신경 모두의 저변에 서서 한 평생을 진리를 위한 외로운 싸움을 감당하였던 아타나시우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해볼까 합니다.
아타나시우스와 니케아 신경
니케아신경이 만들어진 배경에 아타나시우스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북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AD 293년경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향 알렉산드리아는 문화와 철학, 교육의 도시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BC 332년에 건립된 이래 헬라 왕조인 프톨레미 왕조 치하에서 헬라 문화가 왕성하게 꽃피고 있었고,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대학에 버금가는 각 학문의 영역들이 공공자금으로 육성되고 있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도 세상의 일반학문 육성에 견줄만한 ‘교리교육 학교’(Catechetical School)가 만들어져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나 그의 제자 오리겐(Origen) 같은 걸출한 교사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오리겐은 그의 나이 18살 때인 AD 202년에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팔레스틴 땅으로 추방당하기 전까지 약 30년간을 이곳에서 가르치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게 됩니다. 아타나시우스가 이 학교에서 성경을 배울 당시에는 오리겐은 이미 죽은 뒤였지만, 이런 저명한 학자들의 전통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른 나이부터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와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명하게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한번은 알렉산더 감독이 저녁식사를 하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몇 명의 아이들이 세례식 흉내를 내며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 세례를 베푸는 감독 역할을 하고 있던 아이가 다름 아닌 아타나시우스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타나시우스는 일찍 알렉산더 감독의 눈에 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아타나시우스는 이른 나이에 집사가 되었고 또 개인적으로 알렉산더 감독의 비서가 됩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그 지역의 장로(목사)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우스의 신학사상 문제였습니다. 아리우스는 리비아 출신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안수를 받고 그 지역의 바우칼리스라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이전의 모나키안주의의 일신론 사상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분되지만 그래도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것은 같으며, 그런 점에서 그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한 두 세대 앞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수스 같은 사람도 유사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포도나무가 그것을 가꾸는 농부와 다르며 선박이 그것을 축조한 목수와 다르듯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이런 사상을 더 정교하고 일관되게 확립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와 리비아에서 적지 않은 동조자들을 얻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지역의 문제로 시작되었던 이 논쟁은 점점 범교회적인 문제로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차적으로 감독 알렉산더는 그 지역 범위의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사상을 단죄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 자신의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동조자들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만의 종교회의를 따로 소집하여 아리우스의 파문을 무효화하고 자기들의 감독을 따로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확대되자 결국 콘스탄틴 황제가 개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콘스탄틴은 325년 5월에 동방지역의 모든 감독들을 니케아에 있는 자기의 왕궁으로 소집하였습니다. 총 318명의 감독들이 약 3개월간 이곳에 모여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두고 기도하며 논의한 결과 공식적으로 그의 사상을 정죄하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식적 입장을 담은 고백적 문서를 채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니케아신경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유보할 수 없는 분명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가 창조되었다는 사상을 배격하고, 하나님보다 열등한 지위나 본질을 돌리려는 것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을 가지십니다. 어쩌면 이 한 단어가 니케아신경을 대표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케아신경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아름다운 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또한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의 독생자를 믿습니다. 그는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출생하셨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요, 빛으로부터의 빛이며,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이십니다. 출생하셨지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인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성육하셨고 사람이 되시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었고 고난당하시고 묻히셨습니다. 성경을 따라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시었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영광중에 다시 오시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니케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장 많은 부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체 구성은 삼위일체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 앞에 사도신경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자’에 대한 고백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위의 고백에 이어서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따라옵니다.
원래의 니케아신경은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성령님에 대하여 좀 더 확대된 형태의 오늘날 우리가 가진 고백문은 시간이 좀 더 지나서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공의회가 모여 니케아신경을 재확인하면서 성령님에 대한 부분을 더 확대한 결과물입니다. 여기에서는 성령님을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주님이요 생명의 수여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는 것을 고백하는데, 후에 서방교회는 성령님이 아버지로부터 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는 것을 첨가하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아들로부터도’가 첨가된 형태로 니케아신경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325년의 원래 니케아신경에는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로 고백부분이 끝이 난 뒤에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정죄문이 붙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거나 ‘그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 또는 ‘그는 무에서부터 만들어졌다’, 또는 ‘그의 본질은 [하나님과] 다르다’거나 ‘하나님의 아들은 만들어졌다’, ‘그는 변하거나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도적 공교회에 의해 정죄 받아 마땅하다.”
이 부분은 325년 아리우스논쟁의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항목들은 아리우스의 사상을 요약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필요성이 감소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가 325년의 니케아회의에 참석할 때는 공식적인 총대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대표하는 알렉산더 감독의 수행원으로 참석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고향에서 발단된 이 논쟁의 전모와 아리우스 사상의 문제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니케아회의에 모인 감독들의 관심이 알렉산더 감독보다 오히려 이 젊고 총명하며 탁월한 논리 능력을 가진 아타나시우스에게 더 쏠렸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아타나시우스신경
니케아회의가 은혜롭게 종결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알렉산드리아에는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328년 6월에 감독 알렉산더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고, 후계자로 아타나시우스를 지목함에 따라 그가 30대 젊은 나이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이것은 젊은 아타나시우스에게 과분한 영예였겠지만, 공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의 생애가 마칠 때까지 끝없는 고난과 추방, 그리고 투쟁의 시작이기도 하였습니다.
니케아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파의 입지에 족쇄가 채워지는 듯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 사상의 추종자들은 살아 있었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아타나시우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리우스 사상에 동조적인 감독들이 콘스탄틴 황제를 설득하여 파문당한 아리우스의 복권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아리우스의 목회지가 알렉산드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 새롭게 그곳의 감독이 된 아타나시우스에게 직접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자신이 아리우스의 복권을 명하는 편지를 아타나시우스에게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징문제는 황제의 명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합당한 회개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한 비록 황제의 명령이라도 그것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황제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그의 대적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준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권력에 굴하지 아니하였고, 이것이 가지고 오는 대가를 달게 받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생애는 이때부터 시작된 총 5차례에 걸친 추방의 생애로 점철되었습니다.
주후 337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죽고 나자 로마 제국은 다시 동서로 양분되어 두 명의 황제 시대로 돌아갔습니다. 제국의 동부를 다스리게 된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아리우스의 사상을 선호하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의 황실 감독들도 다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아타나시우스는 콘스탄틴 황제 때보다 더 심한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나마 아타나시우스에게 우호적이었던 로마 제국 서부의 황제 콘스탄스마저 반란에 의해 폐위를 당하고 콘스탄티우스가 단독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되면서 이 박해는 노골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알렉산드리아를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아타나시우스는 은신처를 찾아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를 따르는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들이 무력에 저항하긴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이제는 아리우스파가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교회의 판도를 주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이하게도 아타나시우스가 다시금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안이 황제가 되면서였습니다. 율리안은 어린시절 기독교인으로 자랐고 예배시간에 성경 봉독자로 봉사한 경력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콘스탄틴 황제 때에 금지하였던 이교 숭배를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면서 황제인 그 자신이 이교 제사의 제사장 노릇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회 정치에 관해서는 관용의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니케아신경의 정신이나 아리우스의 사상이나 아무런 차이도 없었고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정적이었던 콘스탄티우스 때에 다시금 부활하였던 아리우스파의 박해를 당하고 있던 아타나시우스에게는 뜻밖의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평화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고, 또 달가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많이 약화되어 있었고, 많은 지도자들이 아리우스의 사상으로 변절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타나시우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리를 위한 외로운 싸움을 쉬지 않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373년 5월 3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에서의 힘든 싸움을 그치게 됩니다. 니케아회의가 열린 325년부터 친다면 근 50년에 걸친 반세기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의 진리와 그것이 가지고 오는 구원의 확신을 위하여서 지치지 않는 싸움을 많은 역경 가운데서 감당해왔던 사람입니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그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우스처럼 믿으면 그대로 따라가면 되지 않는가요? 더군다나 그것이 한 시대의 교회의 주류를 이룬다면 그 주류가 옳은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믿는 교리 한 줄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요? 교리야 어떻든 내가 믿고 구원 받아서 영육간의 축복이나 구원 효과들만 누리면 되는 것 아닌가요?
네,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만 더 들어가서 생각을 해보십시다. 우리가 얻었다고 생각하는 구원이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인데요? 그냥 내 주관적인 감정이나 사람들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우리의 구원은 견고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한 기반을 얻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하나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참 하나님과 참 사람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한 부분만이라도 결핍되거나 제거될 때 우리의 구원도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가 친히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신경 하나가 또 다른 공교회적 신조의 하나로 우리에게 물려지고 있습니다. 바로 아타나시우스신경입니다. 이 신경이 아타나시우스에게 돌려진 것은 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신경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 삼위일체론 부분은 아타나시우스보다 한 두 세대 이후의 신학자인 어거스틴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관계를 다루는 양성론 부분은 그가 죽은 지 68년이나 지나 주후 451년에 모였던 칼케돈회의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타나시우스 사후에 발전되었던 신학적 내용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이 신경을 아타나시우스가 직접 작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경의 뿌리는 아타나시우스가 그토록 지키고자 애썼고 이제는 범교회적 신앙으로 자리를 잡은 니케아신경입니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은 총 4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두 개의 항목은 서언으로 공교회적 신앙이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가 하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이는 마지막 44번째 항목인 결언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된 부분을 이루는 3~28항까지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29~43항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고백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그의 양성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타나시우스신경의 전체를 다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만, 그 특징을 나타내는 한두 군데 부분만 선별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6항까지의 내용입니다.
“3. 공교회적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삼위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일체이신 삼위를 예배하되, 4. 위격을 혼합하지 않으며 본체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5. 아버지는 한 위격이시오, 아들도 한 위격이시며, 성령도 한 위격이시기 때문입니다. 6.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며, 그 영광은 동등하고, 위엄은 동일하게 영원합니다.”
이 고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구별된 위격과 그러면서도 그 동일한 본체(또는 본질)를 양면적으로 강조합니다. ‘위격을 혼합하지 않으며 본체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이것을 잘 압축하고 있습니다. 세 위격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의 하나님만이 있어서 그 한 분이 형편에 따라 마치 가면을 바꾸어 쓰듯이 그렇게 모양과 역할만 달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세 위격의 일체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마치 세 다른 신이 존재하는 것인 양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은 이런 삼신론 사상을 엄격하게 배격합니다. 그러면서도 니케아신경에서 표방되었던 위격의 구별성을 잘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관된 어려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할 때, 한 인격 속에서 이러한 양면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일까요? 신성이 인성을 흡수하고 지배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한 몸 안에 각각 분리된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아타나시우스신경은 칼케돈회의의 입장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29. 나아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30. 바른 신앙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인 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1. 그는 아버지의 본체에서 나오시고, 만세 전에 출생하셨으니 하나님이시오, 자기 모친의 본체에서 나오시고 세상에서 태어났으니 사람이십니다. 32.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이성적 영혼과 인간의 육이 공존하니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33. 신성을 따라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인성을 따라서는 아버지에게 열등하십니다. 34. 그가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시나 두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35. 신성이 육으로 변질함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인성을 취하심으로 한 그리스도이십니다. 36. 본체의 혼합이 아니라 위격의 일체로 확실하게 한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이성적 영혼과 육이 한 사람을 이루듯, 하나님이요 사람인 그분은 한 그리스도이십니다(이상 신조 인용 부분은 유해무 교수의 번역을 참고로 다소 수정).”
이 고백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만’하거나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아리우스파의 사상은 여전히 배격을 받습니다.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각각 분리된 두 개의 인격을 가진 이중 존재(네스토리우스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안에서 양성이 뒤섞인 중간적 복합체(아폴리나리우스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성 요소인 ‘이성적 영혼과 인간의 육’을 가지시면서 이것이 그의 신성 속에 혼합, 흡수되지 않고, 역으로 그의 신성이 육으로 변질되지도 않으면서 상호침투적인 신성과 인성의 공존 상태를 가지십니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은 이처럼 가장 어렵고 신비로운 교리인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양성론의 문제를 가장 정교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신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반으로 이후의 모든 잘못된 교리들을 판가름하고 공교회적 신앙의 전통을 유지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4세기의 참 신앙의 투사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이 돌려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의미 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때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아타나시우스를 떠올려보게 되는 것은 그의 시대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여전히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진리에 대한 무관심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교리교육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극단적 실용주의 사조가 깊이 파고들어와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적 포용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중심적 행복입니다. 내가 즐거워야 하고, 내가 ‘필 굿’(I-feel-good spirit)해야 하며, 무조건 재미있어야 합니다. 심각한 것도 싫어하고, 따지고 재는 것도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바른 신앙’이란 것에 의해 내가 가늠되고 판단 받는다고 생각하면 이를 참을 수 없어 합니다. 나는 판단하는 자이지 판단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사람이 주인인 교회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통치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심히 부담스러워 하는 교회로 말입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것입니다. 정말 껍데기에 현혹되는 교회를 털어버리고 한 사람이라도 바르게 믿는 그리스도인을 찾고 또 찾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두려움이 가득한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헌금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며 교세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실종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왜곡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정말 두려워해야 될 것에는 관심이 없고 가게 문 닫는 것 걱정하는 마냥 영업전선 이상에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나 콘스탄티노플 같은 당대의 중심 도시들에 비하면 변두리 지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의 깨어있는 한 사람 아타나시우스로 말미암아 4세기 당시 이 도시는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이 시대의 공교회적 신앙의 중심에 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만의 정서를 무시할 수 없지만, 한국만을 위한 좁은 신앙 인식은 버려야 합니다. 이 시대에 공교회적 신앙을 선도해갈 수 있는 많은 아타나시우스 같은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진정 귀하게 여기는 많은 진실한 믿음의 청년들이 아타나시우스 같은 신앙의 인물을 알고 그로부터 배워서 그 정신을 이 시대에 구현해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과거의 아타나시우스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때입니다.
<교회와 신앙>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3194
[출처] [기고] 아타나시우스가 그리운 때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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