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카이퍼 사상
아브라함 카이퍼 사상
1. 서론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는 미국의 워필드(B. B Warfield), 화란의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와 함께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신학뿐만 아니라 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크게 공언한 바 있다. 그는 신칼빈주의(Neo-Calvinism)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으며 칼빈주의의 체계와 그 가르침을 보편화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고 전파하였다.
2. 본론
2.1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는 지금부터 170년전(1837년), 화란의 마슬라의스(Maasluis)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1920년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고, 그 다음해엔 헤르만 바빙크(H. Bavinck)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카이퍼는 스위스계의 어머니에게서 유아시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았고, 레이던(Leiden)의 김나지움(Gymnasium, 문법학교)에 입학하여 고전어(라틴어와 희랍어)를 배운 후 그 위에 또 레이던 대학에서 고전어를 전공하고, 또 신학도 전공하였다. 복수 전공을 한 셈이다.
그러나 현대신학의 조상으로 일컬어진 자유주의 신학자 스콜던(J.H Scholten)에게서 배운 관계로 완전히 자유주의 신학자로 일생을 바칠 뻔 했다. 그러나 그는 신학박사 학위 논문 "칼빈과 아 라스코(a Lasco)의 교회관"을 쓰는 동안에 성경적인 종교개혁 신앙의 노선으로 회개할 마음이 일어났지만, 1863년 베이스트(Beesd)교회의 부름을 받아, 부친으로 말미암아 목사로 임직되었을 때만 해도 아직 반반씩 섞은 칼빈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1864년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한 여성 교인으로부터 날카로운 비평을 받은 후, 심기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피쩌 발쿠스(Pietje Baltus)라는 여인 집에 심방을 갔을 때, 그는 뜻밖에도 자기 설교가 비성경적이라는 혹평을 들었고, 속히 회개하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칼빈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2년 후에 칼빈주의적 정치 운동을 하던 "흐룬 반 프린스터(Groen van Prinsterer)를 만난 후부터 더욱 칼빈주의에 매혹되었다.
http://blog.daum.net/kkho1105/1429
1. 서론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는 미국의 워필드(B. B Warfield), 화란의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와 함께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신학뿐만 아니라 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크게 공언한 바 있다. 그는 신칼빈주의(Neo-Calvinism)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으며 칼빈주의의 체계와 그 가르침을 보편화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고 전파하였다.
2. 본론
2.1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는 지금부터 170년전(1837년), 화란의 마슬라의스(Maasluis)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1920년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고, 그 다음해엔 헤르만 바빙크(H. Bavinck)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카이퍼는 스위스계의 어머니에게서 유아시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았고, 레이던(Leiden)의 김나지움(Gymnasium, 문법학교)에 입학하여 고전어(라틴어와 희랍어)를 배운 후 그 위에 또 레이던 대학에서 고전어를 전공하고, 또 신학도 전공하였다. 복수 전공을 한 셈이다.
그러나 현대신학의 조상으로 일컬어진 자유주의 신학자 스콜던(J.H Scholten)에게서 배운 관계로 완전히 자유주의 신학자로 일생을 바칠 뻔 했다. 그러나 그는 신학박사 학위 논문 "칼빈과 아 라스코(a Lasco)의 교회관"을 쓰는 동안에 성경적인 종교개혁 신앙의 노선으로 회개할 마음이 일어났지만, 1863년 베이스트(Beesd)교회의 부름을 받아, 부친으로 말미암아 목사로 임직되었을 때만 해도 아직 반반씩 섞은 칼빈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1864년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한 여성 교인으로부터 날카로운 비평을 받은 후, 심기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피쩌 발쿠스(Pietje Baltus)라는 여인 집에 심방을 갔을 때, 그는 뜻밖에도 자기 설교가 비성경적이라는 혹평을 들었고, 속히 회개하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칼빈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2년 후에 칼빈주의적 정치 운동을 하던 "흐룬 반 프린스터(Groen van Prinsterer)를 만난 후부터 더욱 칼빈주의에 매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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