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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아더 힐더샘

아더 힐더샘
힐더샘은 왕족과 연관이 있었다. 그의 부모는 로마 카톨릭이이었다. 그는 로마의 교리들로 머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는 라틴어로 기도를 되풀이라하라는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했고 거기서 회심하였다. 그의 부친은 크게 화가 나서 그를 카톨릭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로마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힐더샘은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유산 상속권을 박탈당하였다. 그런데 부유한 친척들 중에서 힐더샘의 곤경을 동정한 헌팅돈의 백작이 후한 후원자가 되어 그를 다시 케임브리지로 보내 주었다.
 
1588년 힐더샘은 공적으로 안수를 받기 전에 설교했다고 해서 고발되엇다. 그는 공적으로 회개를 고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현재까지 활자화된 비굴한 참회문이 보존되어 있지만 이것을 힐더샘이 실제로 공적 사과문으로 읽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공적 수치의 그늘 아래 있는 동안 그는 레세스터셔(Leicestershire)의 애쉬비 드 라 주크(Ashby-de-la-Zouch)에서 초빙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43년 동안 목회하였다. 힐더샘은 목회하면서 자주 핍박을 받았지만 그의 설교는 널리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메시지를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그에게 가장 많은 증오심을 일으키게 하는 이유였다. 제임스 왕이 등극했을 때 힐더샘은 가장 유력한 청교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았다. 그는 1천 명이 넘는 목사들이 서명한 청원서(Millenary Petition)를 왕에게 전달하는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이 청원서는 교회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힐더샘은 1590년에 결혼하였는데 매우 복된 결합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박해를 받는 동안 끊임없는 위로와 힘이 되었다.
 
힐더샘은 사역하면서 여러 번 침묵을 강요당하였다. 예를 들면 1616년 그는 파문을 당하였고 사역의 직분에서 면직되었으며 감옥에 갇혔다. 그것은 단지 그가 국교 의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더구나 그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2천 파운드라는 거액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힐더샘의 형편에서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힐더샘은 음주나 간음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부도덕으로 고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의식과 절차들을 따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처럼 극심한 처벌을 받았다. 그는 넓은 지역에 영적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에 시기를 받았고 '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힐더샘이 그를 파멸시키려던 재판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도 유사한 시련을 겪을 때에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그는 한 가지씩 기도하면서 당면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제일 먼저 그가 힘쓴 것은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관계 당국의 영향력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1년 전에 국교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됐을 때 그의 친구는 대주교에게 서신을 보내 주었다. 그때 대주교는 힐더샘이 말을 듣지 않으면 옥사할 것이라고 응답했었다. 그는 이번 일에 출옥은 되었지만 지불 능력이 없는 벌금은 면제 되지 않았다. 힐더샘은 필딩 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벌금을 줄여 주도록 당국과 교섭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또 비슷한 청탁을 서포크 백작에게도 하였다. 나중에 벌금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다.
 
힐더샘은 병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영적이고 거룩하며 천상적인 대화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양떼들을 잘 돌보라는 엄숙한 분부를 내렸다. 그는 자기 아들과 함께 기도하는 동안에 주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릴 본향으로 돌아갔다.
 
벤자민 브룩(Benjamin Brook)은 『청교도들의 생애』(Lives of the Puritans)라는 저서에서 힐더샘에게 12쪽을 할애하였다. 힐더샘은 유난히 온순하였다. 그는 국교 의식을 반대했지만 극단적이거나 공격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흔들리지 않았고 인내하였다. 그의 겸손의 정도는 자신이 항상 다른 설교자의 메시지에서 영적 유익을 받으려고 애썼다는 그의 진술에서 확인될 수 있다. 그는 신실한 설교라면 비록 설교자가 자연적인 은사가 없더라도 언제나 교훈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힐더샘이 존경한 설교자들 중에는 윌리엄 구지, 존 프레스톤 그리고 존 코튼이 있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이상적인 영적 의사가 '무지한 자를 기꺼이 가르치며, 의심하는 자에게 만족을 주며, 흔들리는 자에게 안정을 주고, 배척받은 자에게 위로를 주며, 누구에게나 복음 생활을 잘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힐더샘에게서 평생을 한 목회지에서 보내면서 엄청난 핍박과 방해를 견디고 살아남는 모습을 본다. 그는 항상 인내하였고 견실했으며 경건의 빛나는 모델이 되엇다. 그는 요한복음 4장과 시편 51편에 대한 상당한 분량의 저술을 제외하고는 달리 남긴 글이 없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6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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