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
사도신경 강해
아더 핑크(A. W. Pink)
서 론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더불어 모든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자구적으로 일치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도 신경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암송되며 사랑받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신경은 인간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여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별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성경 자체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에서 구원의 진리를 추출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성경적인 것이다.
한편 사도신경이 언제부터 고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이 되던 날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앞으로 그들이 전파할 복음의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요강을 만들었는데 이때 사도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말한 내용을 엮은 것이 사도신경이란 것이다. 이는 사도신경에 12번의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도신경의 기원을 사도에게 둠으로써 권위를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710-724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사도적 권위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당시부터 성도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사도들의 바른 신앙이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계속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방대한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정리하여 일관성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단의 그릇된 견해를 분별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바른 신앙을 고백케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성경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역사성을 지닌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인간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성부.성자.성령의 사역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구분하여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는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과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나누어 해설하고자 한다. 실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깊이 음미한다면 큰 신앙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신앙고백의 주체선언-각개인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즉 "내가 믿습니다.(I believe in)"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사도신경의 서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암송자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에 진술된 진리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여 사보 신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교회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성경에 계시된 동일한 진리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들은 교회에 나아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이지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는가?"(고후 6:15). 그러므로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도신경은 먼저, 교회 각 회원의 개인적 신앙의 표현이었기에 그들의 것이다.
이 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신앙 생활은 단지 종교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러한 관습적 종교 행위는 조만간 따분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다. 십대들은 주일 학교가 따분하기 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간다. 성인들도 설교가 자기들의 분명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회에서 멀어진 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내용이 지적된다. 청중은 그 설교 내용을 이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시편 10편에 나오는 악인과 흡사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고 한다. 분명히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없는 자들은 형식상 교인일 뿐이며 실상은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자처럼 교회 안의 잃어버린 자이다.
구원은 복음의 진리를 체득하고, 자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에 깊이 주의한다면,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주의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구원 역시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인간 구원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요약 기술하는 사도신경이 구속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합리성을 지닌다. 여기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나님 존재에 대한 증명과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근거로서 전능하신 분이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때때로 우리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외친 사람의 갈급한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깊이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진정 믿는 자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서, 또는 과학 시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미신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이러한 바른 신앙을 표현한다.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논리적으로 밝혀 내지 못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만이 필요하다(시 42:2).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키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입증해 주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확신한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증거를 무시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믿기를 거부한데 대한 명확한 변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증거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우주의 합리성을 생각해 보자. 거대한 우주가 질서있게 존재한다는 것은 사려깊고 합리적인 창조주가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 준다. 흔히 신학자들은 네 가지 표제로서 우주의 합리성을 논한다
첫째는 우주론(Cosmology)이다. 우주론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우주의 기원과 특성을 연구하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이러한 우주론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우주를 만드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둘째는 목적론(teleology)이다. 목적론이란 현존하는 "자연 속에는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하는 학설이나 신념"이다. 인간의 한계를 갖는 사고로는 자연의 목적은 너무 복잡해서 그 생성과 발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활동이 질서 있게 합목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바 그 배후에는 지혜로운 창조주가 계심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인류학(anthropology)이다. 이것은 인간의 체질이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란 우주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그리스도인은 믿는다. 또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그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 창조주처럼 인간은 지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또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우발적으로나 우연의 일치로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은 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비인격적인 근원에서 진화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임이 분명하다.
넷째는 존재론(ontology)이다. 존재론이란 "존재와 실체에 대한 학문으로서, 존재의 본질이나 그 핵심적 특성 및 관계성을 탐구하는 지식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존재론의 주장에 따르면, 완전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은 완전함의 근원, 즉 완전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완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디서 그 개념을 얻었겠는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완전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 시 139:13).
위에서 살펴본 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지적인 주장보다도 더 나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체험이다.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아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 18).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추상적인 영향력으로 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라고 진술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가? 탕자의 이야기(눅 15:11-32)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그 대답이 주어진다.
탕자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느 집이라고 "탕자 같은 아들"이 없겠는가? 아마 탕자 같은 딸도 있을 것이다.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어떤 부랑자보다도 더 망나니였다. 그는 대단히 반항적이었으며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가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은 영혼이 병든 징후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뉘우리고 그렇게 매정하게 저버렸던 자기의 늙은 부친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영적 방황기 이상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 사상은 오히려 부친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가 아들 기다림을 멈추지 않았던 사실과 또한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꺼이 맞이했던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어느 가정에나 방탕한 아들은 있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사랑이 풍부하며 철저히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이 아들은 문학 비평가들이 전형적인 인물(archetype, 즉 전기나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일컬을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문학가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 가운데 이와 같은 인물은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맞으러 달려가는 아버지와 흡사한 분이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가 하나님, 즉 자기 품으로 돌아오는 죄인들을 환영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장 귀한 진리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바로 자비가 풍부하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고백은 두 가지 의미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며, 죄인을 구속하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신다. 여기서 후자가 보다 중요한 구분이다. 따라서 구속함을 입지 못한 불신자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 즉 그들의 창조주로서 만의 아버지이시다.
둘째 구속적인 의미에서도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성경은 이 진리를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시켜서 말한다. 바울은 "우리는 그의 소생이라"(행 17:28)고 한 어느 시인의 말에 찬동하며, 그것을 인용한다. 에베소서에서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엡 3:14, 15)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탕자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극화시켜서 나타내 준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제 갈 길로 간 그의 자녀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두팔 벌리고 기다리신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기게 된다.
이처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신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벌써 나타난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그는 전혀 새로운 무엇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과 부자 관계 맺기를 기뻐하셨다는 내용이 구약 성경에 나타난다. 그 관계가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관계를 맺으려 하셨다.
그것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대화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성전 건축의 특권을 허락하시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 대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찌라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대상 22:9, 10).
일찍이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기를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다윗이 메시야를 내다보며 쓴 시에서,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다윗이나 다른 그 누구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참으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구약에는 많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도나이(Adonai)나 여호와(Jehovah)로 불렀고,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홀로 그러한 관계를 바라셨지만 패역한 이스라엘은 그것을 거절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굳은 마음에 호소하였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그 후에, 하나님은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 하고 물러갔도다"(사 1:4)라고 슬퍼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하셨다. 이 말이 주님의 탕자 비유의 근거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삼아 사랑으로 양육한 옛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 아버지시라...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사 63:16 참고, 사 64:8).
예레미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와 같았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를 대단히 슬프게 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인하여 슬퍼하셨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렘 3:19).
그러나 그 백성은 이 말씀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됨에 응했는가? 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되시기를 원하시지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나아가기 전에는 그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실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자녀가 된 후에야 여러분도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사도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세상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에 대해 '전능자'(Almighty)라는 단어를 덧 붙여 놓았다. 전능자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신약 성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고후 9:8).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없게" 하신다(유 1:24). 그는 "[우리를] 능히 든든히 세우시는" 분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시다(엡 3:20).
간략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는"(히 7:25) 분, 또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엡 3:20)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못하실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는 일은 비길데 없이 논리적인 일이다. 무력한 하나님을 상상해 보라. 누가 그런 시시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겠는가?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가? 물론이다. 그 사실은 '아버지'라는 이름에 암시되어 있다. 전능자라는 말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을 뜻하며, 아버지라는 말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시려 하신다는 의미를 배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진정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진리를 증명해 보이셨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 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그리고나서 바울은 웅변적으로 질문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정말 멋진 질문이 아닌가? 바울은 스스로 그 질문에 대답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이처럼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녀를 위함같이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사실을 분명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이 전능자의 손을 움직인다. 전능자의 능력은 냉정하고 빈틈없지만,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거룩하신 아버지, 즉 자상하신 창조주의 마음에 의해 이것이 조정된다. 예를 들면,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 다"(시 121:2)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다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라고 했다. 또한 밤에 여호와의 전을 지키던 자들이 부른 놀랄 만한 노래 말들을 살펴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 134:3).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표현일 것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자는 피곤치 아니하시
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이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8-31).
땅끝까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그의 백성을 자녀와 같이 대하시며 극진히 돌보고 계신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성경의 증거를 무시하고 세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묻고 대답하는 여러 사상들이 있다. 다신교(Polytheism)는 창조의 주체로서 여러 신들을 말하며, 유물론(Materialism)은 세상이 우연히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신교(Deism)는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창조활동을 하신 것은 인정하지만 곧 세상을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범신론(Pantheism)은 하나님을 그가 지으신 세상에 가두어 버리고, 그 세상과 하나님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재적(세상 속에 계심)이시지만 또한 초월적인 분으로(세상을 떠나 계시며 그것을 다스리신다)계속 피조 세계와 관련을 맺고 계신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땅 위에서 가장 마음씨 좋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세상에 있는 가장 사랑 많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비교하면 사랑이라 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요한은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낸 것을 우리가 보았고..." (요일 4:14). 하나님께서는 사업 여행이나 휴가차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시고,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선교하러 보내셨다.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이 세상 어디에 사랑이 있으랴.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아버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제3장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구원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뒤따르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생활하시다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대표로서 죽음을 당하셨다. 성경은 이와 같은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 되었는 바 사도신경 역시 이를 반영하여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상대적으로 길게 나와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앞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을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Lord)되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의 사도신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내용의 심오함에 비해 놀랄 만큼이나 간결한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내용을 80개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성부에 대해 9단어, 성령에 대하여 3단어, 성자에 대해서는 68단어이다. 어느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계시의 중심이며...기독교의 초점(Focus)과 충만(Fullness)이며...다른 모든 사실과 진리에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진정한 사실(Fact)이며 진리 (Truth)"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7가지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위대한 진리를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수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우리의 위대한 제사장으로서 그의 중보 사역은 승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사도신경은 이러한 내재된 의미를 해설하지 않고 그저 사실들만 기술할 뿐이다.
사도신경의 사실 진술에 나타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과 또한 그리스도와 성부 및 성도와의 관계의 표현인 "그 외아들 우리 주..."에 대해 살펴보자. 둘째는 성육신, 즉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대해서, 셋째는 그의 고난과 죽음, 즉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에 대해서 살펴보자.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이 3일 동안 보내심을 받은 장소에 대해서, 다섯째는 부활에 대한 선포,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에 대해서, 여섯째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지위의 회복, 즉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일곱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다시 오심, 즉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한편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첫째, 고난과 영광이 병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내어지는 고난 가운데 처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또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셨으며, 때가 되면 자기를 거부한 제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영광된 모습을 취하실 것이다.
둘째,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으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은 부각시킨다는 사실이다. 성육신은 그리스도가 본래 누구인가를, 즉 하나님의 죄없으신 아들이심을 말해준다. 이 사실에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사신 삶의 성격과 죽음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거룩하신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른 인간과 같이 죄에 대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대속(찬립)의 필요성, 즉 당신과 나를 위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런 필요성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다같이 유일신교이며 예수님을 하나의 선지자로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신성과 구주되심을 부인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이상이신 분이다.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증거하는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무죄하시다. 그리스도는 원수에게 자신의 죄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너희 중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그의 제자들은 원수들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했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 후에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참고, 사 53:9)라고 기록했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고후 5:21)라고 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이 지닌 유일성을 입증하는 도덕적 기적(moral miracle)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무죄성을 지닌 존재는 자신에 대하여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라 주장한 그리스도는 바로 무죄한 하나님이셨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못한 거짓말장이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주장이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선고할 법적 근거가 되었다. 그들이 사형을 요구 하면서,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데려가서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 참고;요 5:17,18; 요 10:30-33)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결국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에 죽었으나 죽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소멸치 못했음은 부활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셋째, 초인적인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그는 물 위를 걸을 수도, 바람을 다스릴 수도,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를 비판하던 어떤 자들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을 목격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믿게 되었다(요 11:44).
넷째,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예배를 받아들이셨다. 만약 그가 단지 인간이었다면 그에게 예배한 자들에 대한 그의 승인은 죄악이었을 것이다(요 9:38).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인간인 동시에 초인간적인 분으로 묘사한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인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이란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말한다. 서신서에서는 인사와 축도시에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가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엡 1:2) 은혜와 평강이 그의 독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했다. 그 다음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그리스도는 예수의 직함이다. "구세주" (Savior)라는 뜻을 가진 "예수"란 이름은 그가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를 가르쳐 주며,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도"란 직함은 그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말해준다. 즉 그리스도란 말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란 말에서 보여지듯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아들에게 있어서 그 이름은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 천사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사도신경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 그 이름은 역사적 사건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터무니 없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분이심을 보여 준다. 둘째,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의 선교 사역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 예수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여호수아'란 이름에서 연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Messiah)에 해당되는 헬라어이며 그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예식상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직임에 취임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언젠가는 선지자, 제사장 및 왕의 직임을 겸할 어떤 이가 오리라는 소망이 싹텄다. 그것이 곧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 불리워진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 소망이 실현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급히 찾아가서 "우리다 메시야를 만났다"(요 1:41)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자기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고백이었다. 이제야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바로 인식되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날에 동의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이 절대 과장일 수 없다.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한 옛 모든 예언의 완전한 성취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이시며(신 18:15;행 7:37), 아론보다 큰 제사장이시며, 영원한 보좌에 앉으신 왕이시다.
이상이 바로 우리가 사도신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신앙 고백을 할 때에 내포되어 있는 주요 내용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어느 바리새인과의 대화 중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마 22:42)라고 질문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답변해야 할 그 대답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저항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는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천명한다. 즉 예수의 질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 것이고 이에 대한 사도신경의 대답은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첫번째 조항은 이 부분에 나오는 성자에 대한 조항의 예비적인 성격을 띠는데, 그 까닭은 아버지와 아들과는 필연적 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그 아들이 있어야 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예수께서는 자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3). 이 말을 생각하면서 사도 요한이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도 요한은 어느 대적자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자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고 대답하셨던 것을 기억했을 수도 있다.
한편 하나님과 예수님의 부자관계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첫째, 그 관계는 영원한 것이며, 둘째 유일한 관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남으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부자관계는 영원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고, 땅 위에 있는 아들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고 말씀하셨다. 시 2:7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등의 구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행 13:33 참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라고 기도하기를 배웠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아버지되심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도인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으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은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 그가 바로 "독생자"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3:16).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고 하신 명령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시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닌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함께 "우리" 아버지라 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일 수 없는 측면에서 그의 아버지 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미에서 성도로 부름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 특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을 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독특한 분이시다. 이런 독특함은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사도신경은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하나님의] 외아들" 즉 독생자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어 우리와 그의 관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직함에 의해 나타난다. 예수님의 친구들이 그를 "주"자 불렀고, 그는 그 명칭을 받아들이셨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그 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선생과 주"라 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도신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으로 단언한다.
그러면 이 칭호는 무엇을 뜻하는가? 적어도 두 가지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이시며, 둘째, 그는 주권자이시다. 불신자는 이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고 했다. 같은 문장에서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다.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로다"(사 45:23). 또한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장엄한 문장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처럼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분명히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를 선한 사람으로 믿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이시거나 아니면 아무 젓도 아니다. 훌륭한 도덕 선생은 존경을 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구하실 수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로 그 신앙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주권(sovereig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개념은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주권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통치(reign)라는 단어는 "왕권(royal authority), 지배권(dominion), 세력(sway)"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왕이나 군주로서 통치한다"는 의미이다.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 의 접두어는 "위의"(above)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super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이 단어에서 supreme(최고)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supreme(최고)와 reign(통치)를 합치면 sovereign(주권)이 된다. 따라서 엄정한 의미에서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를 왕이나 군주에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통치자도 진정한 지도자(supreme)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영 제국이 주권을 지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유일하고 진정한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완전한 의미에 서 통치자요, 지도자이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절대적 주권을 선언하셨다. 그 위대한 주권의 선언을 근거로 하여 그는 제자들을 땅 끝까지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고, 또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위임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우주적인 주권을 선언하셨을 때, 사도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주권자로 인식했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반복해서 이 진리를 강조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을 예를 들어보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고전 15:25). 또 다른 곳에서는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빌 3:21) 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절들은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 현재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하여 사망의 권세하에 있는 인간이 그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고, 때가 차면 그 권위를 완전하게 행사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주(Lord)로서만 아니라 또한 사도 신경의 표현대로 "우리 주"(Our Lord)로 믿는다. 왜 우리(our)라는 소유격 대명사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믿는 사람과 그러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자세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그를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약 2:1)라고 부르는데 익숙해 있었다. 베드로는 그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벧전 1:3)라고 불렀으며,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벧전 5:11)라고 했다. 요한은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한 놀라운 광경을 기록하였다.
만약 도마가 이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두 구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태도를 분명하게 요약해서 말한다.
첫째 그는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입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도마가 믿었던 그 내용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과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어야 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러한 구절들은 예수님을 주로 단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지 못하는 신앙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과도 위배된다.
"우리 주(Our Lord)"라는 말의 소유격 대명사가 복수임도 유의해 보자. 그것은 믿음으로 인한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 보여 준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내가 믿고 또한 여러분이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 함으로, 그는 사도 공동체의 친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사도 신경으로 개인적인 신앙("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을 고백하고, 또한 공동적 신앙("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도 고백한다.
이보다 더 위대한 신앙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여러분이 진실하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참된 일원이 되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 있는 모든 신자와 더불어, 여러분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제4장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본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땅에 오셔서 어떻게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완성하실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원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탄생을 통해 이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이땅에 다시 오셔서 죄인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를 구원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 구속 사역에 대한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성경의 중심 내용인 바 사도신경은 비교적 깊고 자세하게 이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로 제기하는 것이 동정녀 탄생이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 어느 누구도 죤 피어슨(John Pearson) 주교가 <사도신경 강해> (Exposition of the Creed)라는 제목으로1867년에 출판한 책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의 잉태 사실에 대하여 그가 쓴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가 있다.
1.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셨다.
2. 그리스도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없으며, 단지 요셉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을 뿐이었다.
3. 우리는 잉태의 과정, 즉 처녀가 성령에 의해 잉태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4.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누구가 아닌, 그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실제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되심을 안다.
5. 그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셨다.
6.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 무죄성을 믿기 위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믿어야 한다. 피어슨 주교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방법은 이렇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여자의 몸에 잉태되었지만, 인간의 방법으로나 육체적 결
합으로나 일반적인 인간의 수태 방법으로 잉태되지 않았으
며, 오히려 성령의 독자적이며 능력있고 불가시적이고 직
접적인 사역에 의해 잉태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
하여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처녀가 잉태를 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그에게서 잉태되신 분은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이
었다.
동정녀 탄생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지니시고 행하신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것과 같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교리가 논리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방법으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수 있음을 왜 의심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을 임신케 하시며, 남자의 도움 없이도 처녀를 잉태케 하실 수 있는 실로 전능 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성경의 증거이며, 둘째로는 그의 무죄성이다. 원죄를 지닌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성은 흠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의 생애가 그것을 입증했다. 이것은 혈통적으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 사실 이외의 어떤 다른 말로서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나, 우리와는 달리 처녀에게서 나셨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기사는 그리스도의 실제 탄생이 기적적이었음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가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태어났다고 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또한 그 기사는 단지 그리스도의 잉태만이 초자연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다른 두 사람의 성경 인물도-이삭의 어머니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초자연적으로 잉태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탄생만이 갖는 고유한 의미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은 항상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상대되는 구절과 결합해서 생각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사도들의 가르침 중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신적이거나 맹신적인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지 못하면서도 동정녀 탄생은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탄생으로보다는 부활에 의해 입증된다. 그래서 여러 사도들은 부활 사실을 중점적으로 증거했던 것이다(롬 1:4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실 때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기로 나시지 않고 성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의 몸에는 두 가지의 인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두 인격을 지니신 것이 아니었다. 한 인격에 두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신학자들은 한 인격 속에 두 본성의 연합을 "위격의 연합"(the hypostatic union)이라 부른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 중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상이 우리가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할 때마다 인정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그의 탄생에서 바로 고난으로 건너 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신앙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귀감이며 사단의 세력과의 투쟁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강조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나셨다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원 사역의 핵심임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꾸짖으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 26).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기사에 삼분의 일을 할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술하는데에 거의 반을 할애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통이나 고난 주간 이전에 겪은 어떤 고통도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생애 중에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셨다. 그 중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버리실 것이라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단에게 고난받았으며 그를 죽이려 하던 악한 자들에게서도 고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이런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 그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었다.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 중의 상당 부분은 단순한 인간의 경험일 것이며, 그런 것은 그리스도의 본래의 거룩하심을 더 강화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백성을 구원하시도록 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박해 당하시던 당시에,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언급에 주목해 보자. 왜 빌라도라는 인물이 언급되는가? 피어슨 주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주장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시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과 확실한 사망의 외적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에 대한 한 사람의 증인이었으나 그는 그리스도를 핍박자들에게 넘겨주었고 죽음을 인정했다. 셋째, 예언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빌라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된 사도신경의 기사에 대한 피어슨 주교의 보충 설명을 살펴보자.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사람들의 죄를
위해 고통을 받게 하시니, 이 때는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가
즉위한지 15년이 지난 때요,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던 때라,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이 무죄하나고 선언한 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성
경의 예언에 따라 그를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형
벌에 내어 주었더라.
피어슨은 이러한 해석은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갖는 세 가지 요점을 잘 지적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날짜를 말해 줄 뿐 아니라 그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일어났었고, 또 세속 세계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세푸스(Josephus)나 타키투스(Tacitus)와 같은 역사가들은 빌라도가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이 그에게 고난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을 인정한다.
빌라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간과 되어서는 안된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빌라도는 거듭 말했다(요 19:4, 6). 예수님이 법률적으로 무죄하였다면 왜 사형을 선고 받았는가? 특히 죄인들을 위하여 메시야가 고난 받으리라는 구약의 예언들에 비추어서 그것을 생각해 보라.
둘째,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고난당하게 한 장본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채찍질하도록 하였고(요 19:1-3), 그를 사형집행인에게 넘겨주었다(요 19:16). 그리하여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속적인 힘이었던 로마 정부의 대행자가 영광의 주를 박해했던 것이다.
시편 2편을 포함한 성경의 여러 구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웃으신다고 같은 시편이 말하고 있다(시 2:4).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격노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노 속에서 빌라도[와 그를 비롯한 세상의 수 많은 통치자]가 저버린 메시야에 대한 그를 보내신 목적을 선언하신다고 시편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찌어다 그 아
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
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빌라도는 이 경고와 권유를 무시함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노예나 흉악범을 죽이던 로마의 처형법이다. 그것이 너무 수치스런 형벌이기에 예수님을 일개 선지자로 간구하는 모슬렘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믿기를 거절한다. 그 대신 단지 "예수는 그리스도와 흡사한 인물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십자가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탈무드는 그리스도인을 "나무에 달린 자를 예배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한다.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잔인한 것". "최후의 것". 또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는 이 제도가 너무나 잔인하며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폐지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선언가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상상만하여도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성경대로"(고전 15:3) 죽으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죽음 사실 뿐 아니라 그 죽음의 방식까지도 구약 성경에 의해서, 또 주님 자신에 의해서 예언되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를 정죄하고 이방인(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주어 조롱당하게하고 채찍에 맞게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리라고 말했다. 그 전에,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 역시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분명히 예언한 것이다(마 16:21, 24).
시 22:16도 이미 그의 손과 발이 못 박히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18절에서 시편 기자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사건이 없었다면 이 구절들은 엉뚱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시편 기록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그 구절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직접적인 기사 이외에도 구약은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모형(type) 혹은 예표라고 불리운다.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의 기사를 살펴보다. 그들이 제사 장소에 도달할 때까지 이삭은 자신이 죽는데 사용될 나뭇짐을 지고 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친히 못박히실 십자가를 지고 가심을 예시해 준다(창 22:6).
그리스도의 죽음은 출애굽 기사에서도 암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에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고 제사드려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졌라. 나중에 요한은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사실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요 19:36).
또 다른 모형은 놋뱀 사건에서도 보여진다. 불뱀이 나타나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되자,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도록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놋뱀을 보고 낫게 되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사건을 이렇게 언급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에 대한 이 언급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요 3:14 참고, 민 21:49).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굴한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의 형벌은 그 희생자들에 대한 로마인의 경멸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최고의 고통과 최대의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시려 선택했던 죽음의 방법-십자가의 죽음-이었다(빌 2:8).
신 21:23은 나무에 달린 모든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를 생각하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저주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 저주야말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있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셨음이라"(갈 3:13). 그러므로 십자가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신 27:26;갈 3:10, 13). 둘째, 그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골 2:14)이다. 셋째, 그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비결을 보여주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에서 얻을 수 있는 이 세 가지의 핵심적인 신학적 교훈 외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은 최소한 다른 두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준다.
첫째,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즉 "내가 목마르다"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견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가 당한 것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당하며 죽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나 그리스도는 이를 하나의 부족함도 없이 잘 감당하셨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평가해 주는 영구불변의 표준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어떤 마음을 품었는가?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8).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이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자는 높이 들리워야 했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5). 그 결과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단순한 말 속에 내포된 영생의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라고 했다.
그리스도 죽음의 영향력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언어 생활에도 대단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토론할 때에 우리는 결정적인(crucial) 문제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라틴어 crux(십자가)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중심이듯이, 토론의 중심되는 문제를 "결정적"(crucial)인 문제라고 일컫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Cross)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유명한 그림은 십자가의 중심점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는 팔을 벌리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어린 예수가 달려가는 것을 그려 놓았다. 그 달려가는 모습에 의해서 십자가의 그림자가 생긴다. 흘만 헌트(Holman Hunt)가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은 아버지의 목공소에서 일하는 소년 예수를 보여 준다. 그가 팔을 뻗을 때에 그 몸이 십자가의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는 앞으로 자기가 죽을 줄을 완전히 알고서 그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들을 연구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즉 온전한 순종의 생애에 있어서 절정의 행위로 간주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정들에게 검을 빼어들고 대항하자 예수님은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요 18:11 참고;마 26:39;요 12:27, 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하셨으므로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진해서 죽으신 분이시다. 땅의 기초도 놓이기 전에 준비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는 꾸물거리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바울은 장엄한 어조로 이렇게 썼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참고, 요 10:17,18; 요 17:1;요 19:30;눅 24: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종의 행위였지만 그것은 주인에 의해 강요된 것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노예의 순종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죽기 위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스스로 받아들인 분의 자발적 순종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다각도로 살펴보자.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이 시간(time)과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경은 적어도 세 구절에서 그 대답을 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벧전 1:20)라고 했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히 9:26) 시간 속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죽으심은 모든 시간 가운데 최고의 사건이었다. 끝으로 그의 죽음은 영원까지, 즉 시간이 더 이상 존재치 않을 때까지 기억될 것이다. 언젠가는 시간이 끝이 나고 밤과 낮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영원히 기억되며(계 22:3) 어린 양 그리스도는 영원히 경배받으실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주(universe)와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광대한 우주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미한 지구라는 조그마한 항성에서 일어난 보잘 것 없는 사건이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로 우주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 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 20)고 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 11)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는 그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진리는 여러 서신에서와 요한계시록에 거듭 강조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미래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만한 때에 그를 믿기를 거부한 자들은 장차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성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가 죽으시지 않았다면, 인류에게 천국은 결코 주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죽으시고 또 그 죽음으로 미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자(계 20:11-15;계 21:1-8계 19:30;계 22:3).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성부와 사단의 역할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재판관의 오판이나 무고한 자에 대한 살인처럼 그것을 엄청난 실수로 여기시지 않으시는가?
원칙적으로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전부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 중의 일부는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자기 생각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으로 엄청난 실수이며 재판관의 오판이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행 3:17)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같은 설교 중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리셨던 계획의 성취였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미래 예언하신 일들을 이루셨던 것이다. 사건들이 아무리 혼란해 보여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그 후에 인간을 꼭두각시로 조종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즉 하나님은 악한 목적으로 시험하시거나 못된 일을 하도록 강요함으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할 능력을 주시거나 그것을 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주셔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신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에게 선한 마음을 불어 넣으셨다(출 12:31-3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국을 향해 애굽을 떠나자, 하나님은 바로에게 왕권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잔인한 마음을 허락하셨다(출 14:1-9). 이처럼 각 사람이 개인적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나 그의 장인 안나스같은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들은 사악한 무리들이었으며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그들의 결정은 그들의 사각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들의 양 어깨에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행 2:23).
분명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실수나 오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취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포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충분한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진리는 여러 구절에서 나타나지만 사도 바울의 주장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간구하노
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
신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
19-21).
이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 및 그의 대속적 죽음을 밝히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안에" 그가 계시다는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도-아버지와 동등하시나 그와 구분되신 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죄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사악한 생각이 없었고, 그 입에는 거짓된 말이 없었으며, 언제 한번 그릇된 행동을 한 �
아더 핑크(A. W. Pink)
서 론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더불어 모든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자구적으로 일치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도 신경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암송되며 사랑받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신경은 인간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여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별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성경 자체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에서 구원의 진리를 추출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성경적인 것이다.
한편 사도신경이 언제부터 고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이 되던 날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앞으로 그들이 전파할 복음의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요강을 만들었는데 이때 사도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말한 내용을 엮은 것이 사도신경이란 것이다. 이는 사도신경에 12번의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도신경의 기원을 사도에게 둠으로써 권위를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710-724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사도적 권위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당시부터 성도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사도들의 바른 신앙이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계속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방대한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정리하여 일관성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단의 그릇된 견해를 분별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바른 신앙을 고백케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성경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역사성을 지닌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인간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성부.성자.성령의 사역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구분하여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는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과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나누어 해설하고자 한다. 실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깊이 음미한다면 큰 신앙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신앙고백의 주체선언-각개인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즉 "내가 믿습니다.(I believe in)"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사도신경의 서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암송자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에 진술된 진리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여 사보 신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교회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성경에 계시된 동일한 진리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들은 교회에 나아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이지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는가?"(고후 6:15). 그러므로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도신경은 먼저, 교회 각 회원의 개인적 신앙의 표현이었기에 그들의 것이다.
이 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신앙 생활은 단지 종교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러한 관습적 종교 행위는 조만간 따분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다. 십대들은 주일 학교가 따분하기 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간다. 성인들도 설교가 자기들의 분명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회에서 멀어진 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내용이 지적된다. 청중은 그 설교 내용을 이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시편 10편에 나오는 악인과 흡사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고 한다. 분명히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없는 자들은 형식상 교인일 뿐이며 실상은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자처럼 교회 안의 잃어버린 자이다.
구원은 복음의 진리를 체득하고, 자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에 깊이 주의한다면,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주의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구원 역시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인간 구원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요약 기술하는 사도신경이 구속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합리성을 지닌다. 여기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나님 존재에 대한 증명과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근거로서 전능하신 분이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때때로 우리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외친 사람의 갈급한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깊이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진정 믿는 자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서, 또는 과학 시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미신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이러한 바른 신앙을 표현한다.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논리적으로 밝혀 내지 못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만이 필요하다(시 42:2).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키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입증해 주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확신한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증거를 무시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믿기를 거부한데 대한 명확한 변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증거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우주의 합리성을 생각해 보자. 거대한 우주가 질서있게 존재한다는 것은 사려깊고 합리적인 창조주가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 준다. 흔히 신학자들은 네 가지 표제로서 우주의 합리성을 논한다
첫째는 우주론(Cosmology)이다. 우주론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우주의 기원과 특성을 연구하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이러한 우주론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우주를 만드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둘째는 목적론(teleology)이다. 목적론이란 현존하는 "자연 속에는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하는 학설이나 신념"이다. 인간의 한계를 갖는 사고로는 자연의 목적은 너무 복잡해서 그 생성과 발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활동이 질서 있게 합목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바 그 배후에는 지혜로운 창조주가 계심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인류학(anthropology)이다. 이것은 인간의 체질이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란 우주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그리스도인은 믿는다. 또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그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 창조주처럼 인간은 지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또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우발적으로나 우연의 일치로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은 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비인격적인 근원에서 진화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임이 분명하다.
넷째는 존재론(ontology)이다. 존재론이란 "존재와 실체에 대한 학문으로서, 존재의 본질이나 그 핵심적 특성 및 관계성을 탐구하는 지식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존재론의 주장에 따르면, 완전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은 완전함의 근원, 즉 완전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완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디서 그 개념을 얻었겠는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완전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 시 139:13).
위에서 살펴본 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지적인 주장보다도 더 나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체험이다.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아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 18).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추상적인 영향력으로 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라고 진술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가? 탕자의 이야기(눅 15:11-32)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그 대답이 주어진다.
탕자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느 집이라고 "탕자 같은 아들"이 없겠는가? 아마 탕자 같은 딸도 있을 것이다.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어떤 부랑자보다도 더 망나니였다. 그는 대단히 반항적이었으며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가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은 영혼이 병든 징후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뉘우리고 그렇게 매정하게 저버렸던 자기의 늙은 부친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영적 방황기 이상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 사상은 오히려 부친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가 아들 기다림을 멈추지 않았던 사실과 또한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꺼이 맞이했던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어느 가정에나 방탕한 아들은 있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사랑이 풍부하며 철저히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이 아들은 문학 비평가들이 전형적인 인물(archetype, 즉 전기나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일컬을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문학가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 가운데 이와 같은 인물은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맞으러 달려가는 아버지와 흡사한 분이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가 하나님, 즉 자기 품으로 돌아오는 죄인들을 환영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장 귀한 진리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바로 자비가 풍부하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고백은 두 가지 의미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며, 죄인을 구속하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신다. 여기서 후자가 보다 중요한 구분이다. 따라서 구속함을 입지 못한 불신자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 즉 그들의 창조주로서 만의 아버지이시다.
둘째 구속적인 의미에서도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성경은 이 진리를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시켜서 말한다. 바울은 "우리는 그의 소생이라"(행 17:28)고 한 어느 시인의 말에 찬동하며, 그것을 인용한다. 에베소서에서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엡 3:14, 15)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탕자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극화시켜서 나타내 준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제 갈 길로 간 그의 자녀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두팔 벌리고 기다리신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기게 된다.
이처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신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벌써 나타난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그는 전혀 새로운 무엇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과 부자 관계 맺기를 기뻐하셨다는 내용이 구약 성경에 나타난다. 그 관계가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관계를 맺으려 하셨다.
그것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대화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성전 건축의 특권을 허락하시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 대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찌라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대상 22:9, 10).
일찍이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기를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다윗이 메시야를 내다보며 쓴 시에서,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다윗이나 다른 그 누구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참으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구약에는 많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도나이(Adonai)나 여호와(Jehovah)로 불렀고,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홀로 그러한 관계를 바라셨지만 패역한 이스라엘은 그것을 거절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굳은 마음에 호소하였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그 후에, 하나님은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 하고 물러갔도다"(사 1:4)라고 슬퍼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하셨다. 이 말이 주님의 탕자 비유의 근거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삼아 사랑으로 양육한 옛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 아버지시라...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사 63:16 참고, 사 64:8).
예레미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와 같았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를 대단히 슬프게 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인하여 슬퍼하셨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렘 3:19).
그러나 그 백성은 이 말씀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됨에 응했는가? 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되시기를 원하시지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나아가기 전에는 그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실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자녀가 된 후에야 여러분도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사도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세상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에 대해 '전능자'(Almighty)라는 단어를 덧 붙여 놓았다. 전능자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신약 성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고후 9:8).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없게" 하신다(유 1:24). 그는 "[우리를] 능히 든든히 세우시는" 분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시다(엡 3:20).
간략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는"(히 7:25) 분, 또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엡 3:20)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못하실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는 일은 비길데 없이 논리적인 일이다. 무력한 하나님을 상상해 보라. 누가 그런 시시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겠는가?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가? 물론이다. 그 사실은 '아버지'라는 이름에 암시되어 있다. 전능자라는 말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을 뜻하며, 아버지라는 말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시려 하신다는 의미를 배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진정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진리를 증명해 보이셨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 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그리고나서 바울은 웅변적으로 질문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정말 멋진 질문이 아닌가? 바울은 스스로 그 질문에 대답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이처럼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녀를 위함같이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사실을 분명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이 전능자의 손을 움직인다. 전능자의 능력은 냉정하고 빈틈없지만,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거룩하신 아버지, 즉 자상하신 창조주의 마음에 의해 이것이 조정된다. 예를 들면,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 다"(시 121:2)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다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라고 했다. 또한 밤에 여호와의 전을 지키던 자들이 부른 놀랄 만한 노래 말들을 살펴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 134:3).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표현일 것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자는 피곤치 아니하시
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이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8-31).
땅끝까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그의 백성을 자녀와 같이 대하시며 극진히 돌보고 계신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성경의 증거를 무시하고 세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묻고 대답하는 여러 사상들이 있다. 다신교(Polytheism)는 창조의 주체로서 여러 신들을 말하며, 유물론(Materialism)은 세상이 우연히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신교(Deism)는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창조활동을 하신 것은 인정하지만 곧 세상을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범신론(Pantheism)은 하나님을 그가 지으신 세상에 가두어 버리고, 그 세상과 하나님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재적(세상 속에 계심)이시지만 또한 초월적인 분으로(세상을 떠나 계시며 그것을 다스리신다)계속 피조 세계와 관련을 맺고 계신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땅 위에서 가장 마음씨 좋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세상에 있는 가장 사랑 많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비교하면 사랑이라 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요한은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낸 것을 우리가 보았고..." (요일 4:14). 하나님께서는 사업 여행이나 휴가차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시고,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선교하러 보내셨다.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이 세상 어디에 사랑이 있으랴.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아버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제3장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구원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뒤따르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생활하시다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대표로서 죽음을 당하셨다. 성경은 이와 같은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 되었는 바 사도신경 역시 이를 반영하여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상대적으로 길게 나와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앞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을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Lord)되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의 사도신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내용의 심오함에 비해 놀랄 만큼이나 간결한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내용을 80개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성부에 대해 9단어, 성령에 대하여 3단어, 성자에 대해서는 68단어이다. 어느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계시의 중심이며...기독교의 초점(Focus)과 충만(Fullness)이며...다른 모든 사실과 진리에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진정한 사실(Fact)이며 진리 (Truth)"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7가지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위대한 진리를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수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우리의 위대한 제사장으로서 그의 중보 사역은 승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사도신경은 이러한 내재된 의미를 해설하지 않고 그저 사실들만 기술할 뿐이다.
사도신경의 사실 진술에 나타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과 또한 그리스도와 성부 및 성도와의 관계의 표현인 "그 외아들 우리 주..."에 대해 살펴보자. 둘째는 성육신, 즉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대해서, 셋째는 그의 고난과 죽음, 즉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에 대해서 살펴보자.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이 3일 동안 보내심을 받은 장소에 대해서, 다섯째는 부활에 대한 선포,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에 대해서, 여섯째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지위의 회복, 즉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일곱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다시 오심, 즉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한편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첫째, 고난과 영광이 병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내어지는 고난 가운데 처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또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셨으며, 때가 되면 자기를 거부한 제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영광된 모습을 취하실 것이다.
둘째,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으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은 부각시킨다는 사실이다. 성육신은 그리스도가 본래 누구인가를, 즉 하나님의 죄없으신 아들이심을 말해준다. 이 사실에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사신 삶의 성격과 죽음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거룩하신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른 인간과 같이 죄에 대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대속(찬립)의 필요성, 즉 당신과 나를 위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런 필요성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다같이 유일신교이며 예수님을 하나의 선지자로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신성과 구주되심을 부인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이상이신 분이다.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증거하는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무죄하시다. 그리스도는 원수에게 자신의 죄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너희 중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그의 제자들은 원수들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했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 후에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참고, 사 53:9)라고 기록했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고후 5:21)라고 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이 지닌 유일성을 입증하는 도덕적 기적(moral miracle)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무죄성을 지닌 존재는 자신에 대하여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라 주장한 그리스도는 바로 무죄한 하나님이셨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못한 거짓말장이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주장이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선고할 법적 근거가 되었다. 그들이 사형을 요구 하면서,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데려가서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 참고;요 5:17,18; 요 10:30-33)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결국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에 죽었으나 죽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소멸치 못했음은 부활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셋째, 초인적인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그는 물 위를 걸을 수도, 바람을 다스릴 수도,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를 비판하던 어떤 자들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을 목격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믿게 되었다(요 11:44).
넷째,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예배를 받아들이셨다. 만약 그가 단지 인간이었다면 그에게 예배한 자들에 대한 그의 승인은 죄악이었을 것이다(요 9:38).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인간인 동시에 초인간적인 분으로 묘사한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인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이란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말한다. 서신서에서는 인사와 축도시에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가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엡 1:2) 은혜와 평강이 그의 독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했다. 그 다음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그리스도는 예수의 직함이다. "구세주" (Savior)라는 뜻을 가진 "예수"란 이름은 그가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를 가르쳐 주며,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도"란 직함은 그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말해준다. 즉 그리스도란 말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란 말에서 보여지듯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아들에게 있어서 그 이름은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 천사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사도신경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 그 이름은 역사적 사건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터무니 없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분이심을 보여 준다. 둘째,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의 선교 사역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 예수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여호수아'란 이름에서 연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Messiah)에 해당되는 헬라어이며 그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예식상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직임에 취임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언젠가는 선지자, 제사장 및 왕의 직임을 겸할 어떤 이가 오리라는 소망이 싹텄다. 그것이 곧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 불리워진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 소망이 실현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급히 찾아가서 "우리다 메시야를 만났다"(요 1:41)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자기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고백이었다. 이제야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바로 인식되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날에 동의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이 절대 과장일 수 없다.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한 옛 모든 예언의 완전한 성취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이시며(신 18:15;행 7:37), 아론보다 큰 제사장이시며, 영원한 보좌에 앉으신 왕이시다.
이상이 바로 우리가 사도신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신앙 고백을 할 때에 내포되어 있는 주요 내용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어느 바리새인과의 대화 중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마 22:42)라고 질문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답변해야 할 그 대답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저항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는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천명한다. 즉 예수의 질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 것이고 이에 대한 사도신경의 대답은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첫번째 조항은 이 부분에 나오는 성자에 대한 조항의 예비적인 성격을 띠는데, 그 까닭은 아버지와 아들과는 필연적 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그 아들이 있어야 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예수께서는 자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3). 이 말을 생각하면서 사도 요한이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도 요한은 어느 대적자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자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고 대답하셨던 것을 기억했을 수도 있다.
한편 하나님과 예수님의 부자관계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첫째, 그 관계는 영원한 것이며, 둘째 유일한 관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남으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부자관계는 영원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고, 땅 위에 있는 아들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고 말씀하셨다. 시 2:7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등의 구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행 13:33 참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라고 기도하기를 배웠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아버지되심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도인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으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은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 그가 바로 "독생자"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3:16).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고 하신 명령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시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닌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함께 "우리" 아버지라 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일 수 없는 측면에서 그의 아버지 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미에서 성도로 부름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 특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을 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독특한 분이시다. 이런 독특함은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사도신경은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하나님의] 외아들" 즉 독생자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어 우리와 그의 관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직함에 의해 나타난다. 예수님의 친구들이 그를 "주"자 불렀고, 그는 그 명칭을 받아들이셨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그 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선생과 주"라 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도신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으로 단언한다.
그러면 이 칭호는 무엇을 뜻하는가? 적어도 두 가지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이시며, 둘째, 그는 주권자이시다. 불신자는 이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고 했다. 같은 문장에서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다.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로다"(사 45:23). 또한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장엄한 문장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처럼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분명히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를 선한 사람으로 믿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이시거나 아니면 아무 젓도 아니다. 훌륭한 도덕 선생은 존경을 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구하실 수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로 그 신앙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주권(sovereig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개념은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주권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통치(reign)라는 단어는 "왕권(royal authority), 지배권(dominion), 세력(sway)"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왕이나 군주로서 통치한다"는 의미이다.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 의 접두어는 "위의"(above)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super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이 단어에서 supreme(최고)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supreme(최고)와 reign(통치)를 합치면 sovereign(주권)이 된다. 따라서 엄정한 의미에서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를 왕이나 군주에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통치자도 진정한 지도자(supreme)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영 제국이 주권을 지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유일하고 진정한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완전한 의미에 서 통치자요, 지도자이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절대적 주권을 선언하셨다. 그 위대한 주권의 선언을 근거로 하여 그는 제자들을 땅 끝까지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고, 또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위임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우주적인 주권을 선언하셨을 때, 사도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주권자로 인식했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반복해서 이 진리를 강조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을 예를 들어보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고전 15:25). 또 다른 곳에서는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빌 3:21) 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절들은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 현재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하여 사망의 권세하에 있는 인간이 그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고, 때가 차면 그 권위를 완전하게 행사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주(Lord)로서만 아니라 또한 사도 신경의 표현대로 "우리 주"(Our Lord)로 믿는다. 왜 우리(our)라는 소유격 대명사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믿는 사람과 그러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자세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그를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약 2:1)라고 부르는데 익숙해 있었다. 베드로는 그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벧전 1:3)라고 불렀으며,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벧전 5:11)라고 했다. 요한은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한 놀라운 광경을 기록하였다.
만약 도마가 이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두 구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태도를 분명하게 요약해서 말한다.
첫째 그는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입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도마가 믿었던 그 내용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과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어야 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러한 구절들은 예수님을 주로 단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지 못하는 신앙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과도 위배된다.
"우리 주(Our Lord)"라는 말의 소유격 대명사가 복수임도 유의해 보자. 그것은 믿음으로 인한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 보여 준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내가 믿고 또한 여러분이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 함으로, 그는 사도 공동체의 친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사도 신경으로 개인적인 신앙("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을 고백하고, 또한 공동적 신앙("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도 고백한다.
이보다 더 위대한 신앙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여러분이 진실하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참된 일원이 되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 있는 모든 신자와 더불어, 여러분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제4장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본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땅에 오셔서 어떻게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완성하실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원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탄생을 통해 이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이땅에 다시 오셔서 죄인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를 구원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 구속 사역에 대한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성경의 중심 내용인 바 사도신경은 비교적 깊고 자세하게 이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로 제기하는 것이 동정녀 탄생이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 어느 누구도 죤 피어슨(John Pearson) 주교가 <사도신경 강해> (Exposition of the Creed)라는 제목으로1867년에 출판한 책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의 잉태 사실에 대하여 그가 쓴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가 있다.
1.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셨다.
2. 그리스도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없으며, 단지 요셉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을 뿐이었다.
3. 우리는 잉태의 과정, 즉 처녀가 성령에 의해 잉태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4.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누구가 아닌, 그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실제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되심을 안다.
5. 그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셨다.
6.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 무죄성을 믿기 위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믿어야 한다. 피어슨 주교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방법은 이렇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여자의 몸에 잉태되었지만, 인간의 방법으로나 육체적 결
합으로나 일반적인 인간의 수태 방법으로 잉태되지 않았으
며, 오히려 성령의 독자적이며 능력있고 불가시적이고 직
접적인 사역에 의해 잉태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
하여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처녀가 잉태를 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그에게서 잉태되신 분은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이
었다.
동정녀 탄생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지니시고 행하신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것과 같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교리가 논리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방법으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수 있음을 왜 의심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을 임신케 하시며, 남자의 도움 없이도 처녀를 잉태케 하실 수 있는 실로 전능 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성경의 증거이며, 둘째로는 그의 무죄성이다. 원죄를 지닌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성은 흠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의 생애가 그것을 입증했다. 이것은 혈통적으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 사실 이외의 어떤 다른 말로서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나, 우리와는 달리 처녀에게서 나셨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기사는 그리스도의 실제 탄생이 기적적이었음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가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태어났다고 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또한 그 기사는 단지 그리스도의 잉태만이 초자연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다른 두 사람의 성경 인물도-이삭의 어머니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초자연적으로 잉태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탄생만이 갖는 고유한 의미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은 항상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상대되는 구절과 결합해서 생각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사도들의 가르침 중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신적이거나 맹신적인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지 못하면서도 동정녀 탄생은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탄생으로보다는 부활에 의해 입증된다. 그래서 여러 사도들은 부활 사실을 중점적으로 증거했던 것이다(롬 1:4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실 때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기로 나시지 않고 성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의 몸에는 두 가지의 인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두 인격을 지니신 것이 아니었다. 한 인격에 두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신학자들은 한 인격 속에 두 본성의 연합을 "위격의 연합"(the hypostatic union)이라 부른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 중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상이 우리가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할 때마다 인정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그의 탄생에서 바로 고난으로 건너 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신앙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귀감이며 사단의 세력과의 투쟁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강조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나셨다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원 사역의 핵심임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꾸짖으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 26).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기사에 삼분의 일을 할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술하는데에 거의 반을 할애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통이나 고난 주간 이전에 겪은 어떤 고통도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생애 중에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셨다. 그 중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버리실 것이라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단에게 고난받았으며 그를 죽이려 하던 악한 자들에게서도 고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이런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 그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었다.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 중의 상당 부분은 단순한 인간의 경험일 것이며, 그런 것은 그리스도의 본래의 거룩하심을 더 강화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백성을 구원하시도록 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박해 당하시던 당시에,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언급에 주목해 보자. 왜 빌라도라는 인물이 언급되는가? 피어슨 주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주장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시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과 확실한 사망의 외적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에 대한 한 사람의 증인이었으나 그는 그리스도를 핍박자들에게 넘겨주었고 죽음을 인정했다. 셋째, 예언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빌라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된 사도신경의 기사에 대한 피어슨 주교의 보충 설명을 살펴보자.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사람들의 죄를
위해 고통을 받게 하시니, 이 때는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가
즉위한지 15년이 지난 때요,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던 때라,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이 무죄하나고 선언한 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성
경의 예언에 따라 그를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형
벌에 내어 주었더라.
피어슨은 이러한 해석은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갖는 세 가지 요점을 잘 지적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날짜를 말해 줄 뿐 아니라 그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일어났었고, 또 세속 세계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세푸스(Josephus)나 타키투스(Tacitus)와 같은 역사가들은 빌라도가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이 그에게 고난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을 인정한다.
빌라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간과 되어서는 안된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빌라도는 거듭 말했다(요 19:4, 6). 예수님이 법률적으로 무죄하였다면 왜 사형을 선고 받았는가? 특히 죄인들을 위하여 메시야가 고난 받으리라는 구약의 예언들에 비추어서 그것을 생각해 보라.
둘째,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고난당하게 한 장본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채찍질하도록 하였고(요 19:1-3), 그를 사형집행인에게 넘겨주었다(요 19:16). 그리하여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속적인 힘이었던 로마 정부의 대행자가 영광의 주를 박해했던 것이다.
시편 2편을 포함한 성경의 여러 구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웃으신다고 같은 시편이 말하고 있다(시 2:4).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격노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노 속에서 빌라도[와 그를 비롯한 세상의 수 많은 통치자]가 저버린 메시야에 대한 그를 보내신 목적을 선언하신다고 시편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찌어다 그 아
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
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빌라도는 이 경고와 권유를 무시함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노예나 흉악범을 죽이던 로마의 처형법이다. 그것이 너무 수치스런 형벌이기에 예수님을 일개 선지자로 간구하는 모슬렘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믿기를 거절한다. 그 대신 단지 "예수는 그리스도와 흡사한 인물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십자가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탈무드는 그리스도인을 "나무에 달린 자를 예배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한다.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잔인한 것". "최후의 것". 또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는 이 제도가 너무나 잔인하며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폐지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선언가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상상만하여도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성경대로"(고전 15:3) 죽으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죽음 사실 뿐 아니라 그 죽음의 방식까지도 구약 성경에 의해서, 또 주님 자신에 의해서 예언되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를 정죄하고 이방인(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주어 조롱당하게하고 채찍에 맞게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리라고 말했다. 그 전에,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 역시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분명히 예언한 것이다(마 16:21, 24).
시 22:16도 이미 그의 손과 발이 못 박히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18절에서 시편 기자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사건이 없었다면 이 구절들은 엉뚱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시편 기록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그 구절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직접적인 기사 이외에도 구약은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모형(type) 혹은 예표라고 불리운다.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의 기사를 살펴보다. 그들이 제사 장소에 도달할 때까지 이삭은 자신이 죽는데 사용될 나뭇짐을 지고 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친히 못박히실 십자가를 지고 가심을 예시해 준다(창 22:6).
그리스도의 죽음은 출애굽 기사에서도 암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에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고 제사드려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졌라. 나중에 요한은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사실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요 19:36).
또 다른 모형은 놋뱀 사건에서도 보여진다. 불뱀이 나타나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되자,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도록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놋뱀을 보고 낫게 되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사건을 이렇게 언급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에 대한 이 언급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요 3:14 참고, 민 21:49).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굴한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의 형벌은 그 희생자들에 대한 로마인의 경멸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최고의 고통과 최대의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시려 선택했던 죽음의 방법-십자가의 죽음-이었다(빌 2:8).
신 21:23은 나무에 달린 모든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를 생각하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저주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 저주야말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있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셨음이라"(갈 3:13). 그러므로 십자가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신 27:26;갈 3:10, 13). 둘째, 그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골 2:14)이다. 셋째, 그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비결을 보여주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에서 얻을 수 있는 이 세 가지의 핵심적인 신학적 교훈 외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은 최소한 다른 두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준다.
첫째,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즉 "내가 목마르다"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견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가 당한 것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당하며 죽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나 그리스도는 이를 하나의 부족함도 없이 잘 감당하셨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평가해 주는 영구불변의 표준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어떤 마음을 품었는가?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8).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이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자는 높이 들리워야 했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5). 그 결과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단순한 말 속에 내포된 영생의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라고 했다.
그리스도 죽음의 영향력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언어 생활에도 대단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토론할 때에 우리는 결정적인(crucial) 문제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라틴어 crux(십자가)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중심이듯이, 토론의 중심되는 문제를 "결정적"(crucial)인 문제라고 일컫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Cross)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유명한 그림은 십자가의 중심점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는 팔을 벌리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어린 예수가 달려가는 것을 그려 놓았다. 그 달려가는 모습에 의해서 십자가의 그림자가 생긴다. 흘만 헌트(Holman Hunt)가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은 아버지의 목공소에서 일하는 소년 예수를 보여 준다. 그가 팔을 뻗을 때에 그 몸이 십자가의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는 앞으로 자기가 죽을 줄을 완전히 알고서 그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들을 연구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즉 온전한 순종의 생애에 있어서 절정의 행위로 간주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정들에게 검을 빼어들고 대항하자 예수님은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요 18:11 참고;마 26:39;요 12:27, 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하셨으므로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진해서 죽으신 분이시다. 땅의 기초도 놓이기 전에 준비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는 꾸물거리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바울은 장엄한 어조로 이렇게 썼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참고, 요 10:17,18; 요 17:1;요 19:30;눅 24: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종의 행위였지만 그것은 주인에 의해 강요된 것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노예의 순종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죽기 위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스스로 받아들인 분의 자발적 순종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다각도로 살펴보자.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이 시간(time)과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경은 적어도 세 구절에서 그 대답을 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벧전 1:20)라고 했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히 9:26) 시간 속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죽으심은 모든 시간 가운데 최고의 사건이었다. 끝으로 그의 죽음은 영원까지, 즉 시간이 더 이상 존재치 않을 때까지 기억될 것이다. 언젠가는 시간이 끝이 나고 밤과 낮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영원히 기억되며(계 22:3) 어린 양 그리스도는 영원히 경배받으실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주(universe)와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광대한 우주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미한 지구라는 조그마한 항성에서 일어난 보잘 것 없는 사건이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로 우주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 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 20)고 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 11)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는 그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진리는 여러 서신에서와 요한계시록에 거듭 강조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미래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만한 때에 그를 믿기를 거부한 자들은 장차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성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가 죽으시지 않았다면, 인류에게 천국은 결코 주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죽으시고 또 그 죽음으로 미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자(계 20:11-15;계 21:1-8계 19:30;계 22:3).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성부와 사단의 역할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재판관의 오판이나 무고한 자에 대한 살인처럼 그것을 엄청난 실수로 여기시지 않으시는가?
원칙적으로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전부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 중의 일부는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자기 생각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으로 엄청난 실수이며 재판관의 오판이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행 3:17)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같은 설교 중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리셨던 계획의 성취였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미래 예언하신 일들을 이루셨던 것이다. 사건들이 아무리 혼란해 보여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그 후에 인간을 꼭두각시로 조종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즉 하나님은 악한 목적으로 시험하시거나 못된 일을 하도록 강요함으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할 능력을 주시거나 그것을 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주셔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신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에게 선한 마음을 불어 넣으셨다(출 12:31-3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국을 향해 애굽을 떠나자, 하나님은 바로에게 왕권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잔인한 마음을 허락하셨다(출 14:1-9). 이처럼 각 사람이 개인적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나 그의 장인 안나스같은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들은 사악한 무리들이었으며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그들의 결정은 그들의 사각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들의 양 어깨에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행 2:23).
분명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실수나 오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취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포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충분한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진리는 여러 구절에서 나타나지만 사도 바울의 주장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간구하노
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
신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
19-21).
이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 및 그의 대속적 죽음을 밝히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안에" 그가 계시다는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도-아버지와 동등하시나 그와 구분되신 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죄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사악한 생각이 없었고, 그 입에는 거짓된 말이 없었으며, 언제 한번 그릇된 행동을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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