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믿음의 선진들

인간의 본래 상태와 타락의 가능성-아더 핑크

인간의 본래 상태와 타락의 가능성-아더 핑크

1.인간의 거룩한 본래 상태
본래 인간이 어떠한 상태였는가?
우리의 첫 조상들이 처하였던 지위에 대하여,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타락한 인간들이 
여러 가지 분분한 의견과 추측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조사하여 보는 대신에
믿음의 오직 무흠한 법칙이요, 신적 영감의 소산인 성경이 말하는 것만을
그 자료로 삼고자 한다.
성경을 통해서만,
인간이 창조주의 손에 의하여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어떠하였던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존재하게 하실 때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의향이 무엇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
이 간단한 진술속에는 주목할만한 지극히 중요한 두가지 요점이 있다.
곧 복수대명사 ‘우리’를 계속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그 말은 신적 격위 간의 도모(圖謀)를 암시하여 주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 시점에서 ‘엿새’동안의 일에 대한 신적 격위 들 간의 (성삼위 하나님을 말함)
회합의 개념을 전달하여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시점’ 이라고 말한 것은
그 엿새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에서는 그와 유사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적 회합(도모)은 창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가
이제 막 이르렀다는 인상을 던져준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들 중에서 제 1의 걸작품으로 존재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을 우주세계에서 가장 영화로운 존재로 만들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자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속에
그러한 요점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형상(形象)이라는 말의 처음 의미를 설명하여 주는 것은
창세기 1:26에서 사용된 복수대명사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영과 혼과 몸’(살전 5:23)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전체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영’과 ‘혼’이 같은 의미로 씌여져 있다.
반면에 어떤 구절, 즉 히브리서 4:12에서는 구분되어 씌여지고 있다.
여기 창세기 1:26의 하나님의 간단한 선언 가운데 복수대명사가 3번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삼위(三位)로 하나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역시 한 총체성 안에 삼중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확증하여 준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의 진술 속에 
사람의 성분에 대한 이 사실을 암시하여 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
여기 나오는 세 가지의 동사들은 각각 언어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동사 ‘살다’는 인간의 동물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둘째 동사 ‘기동하다’는 인간의 정서적인 성질을 언급하는데, 곧 혼에 대한 것이다.
(철학에서 ‘두려움’,‘사랑’,‘미움’ 같은 정감을 나타나는 헬라어가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셋째 동사 ‘있다’는 가장 진수를 이루고 있는 것, 곧 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곧 인간의 이지나 의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이 말씀은 앞절에서 언급한 신적인 의도와 도모가 성취되어 실현된 것을 가리킨다.
대명사가 복수(우리)에서 단수(자기)로 바뀐 채로 진술이 반복되는 것은 ‘형상’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로 함축된다 하겠다.
그것을 더욱 보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본래적인 성질의 탁월성을 말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높은 피조물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차이와
상충되지 않게 설명되어야 한다.
그 말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여한 이 영광이 아무리 놀랍다 하더라도,
아담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 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비교한다고 해서 
유한한 존재들 중에서 가장 걸작품인 인간의 어떤 면도 경멸당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된 인간이든지, 중생(重生)한 인간이든지, 아니면 영화롭게 된 인간이든지
하나님을 아무리 닮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과 무한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이 원래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될 당시의 본성이 이렇게 탁월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특유한 영광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골 1:15)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사이의 하나됨과 동등함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어떠한 유사성에도 해당되지 아니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하였는데,
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자세하게 시험하여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성질을 언급하는 것이다.
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존재의 영적인 성격‘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그 말은 모든 다른 짐승들을 능가하는 인간 본성이 가진 모든 탁월함을 함축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회복에서 그것은 더욱더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고
진술하였다.
우리들이 아는 퓨리탄들은 다 하나같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 ‘하나님의 형상’을 
도덕적인 정직,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키려는 도덕적인 순결로 여겼다.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하나의 피조물로 지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룩함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중생한 사람들이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골 3:10)라는 진술은,
인간 본래의 원형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함축하고 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졌다.
그 ‘하나님의 형상’은 지식(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4:24이 알려주는 바와 같이 ‘의와 참된 거룩’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는 ‘무죄한 것’ 이상
즉, 죄가 없다든지 손상되지 아니하였다는 정도보다 더 높은 상태였다.
무죄상태라 함은 소극적인 것인 것에 불과하다.
전도서 7:29에는 인간이 적극적인 거룩을 입은 존재로서 창조되었음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전 7:29)
인간은 본래 정당치 못한 성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법을 준행하게 되어 있다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정직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응하는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말이다.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 1675-1732)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원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가 창조 시에 아담에게 주어져 있었다.”
같은 히브리어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시 25:8)라는 말씀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상당히 자세히 다루어 오고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로마 카톨릭 사람들이나 소시니안들은 
인간이 영적이고 (단순하게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고) 거룩한 (단순히 무죄한 것이 아닌)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부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 자신들의 윤리를 더 좋아하는 고등칼빈주의자(hyper Calvinist)들도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하나의 실수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실수를 불러 오는 법이다.
중생치 못한 사람들이 영적 행동을 수행할 당위적인 의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아담도 영적인 행동들을 수행하여야 할 당위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어진다.
아담이 거룩하고 영적인 상태에서 타락하였다면,
궁극적인 성도의 견인 교리도 포기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이 되고,
본래의 행위언약에 비하여 은혜언약이 우월하다는 것을 착안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이 말씀은 아담이 지음받은 일에 대한 부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첫째로 인간의 몸이 어떤 재료로 형성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정보는 그러한 재료를 가지고 그처럼 놀라운 몸을 지으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하여 주고 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비천한 근본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둘째로 생기를 갖게 하는 원리가 아담에게 부여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인데,
소위 이지적(理智的)인 정신이다.
그것은 타락으로도 박탈되지 아니한 것이다.(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7)]
  이성과 이해력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는 ‘생기’는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는 말씀으로부터 명백하여 진다.
셋째로, 그런 일의 결과로 아담에게 일어난 일의 결과를 생각하여 보자.
그의 몸은 이제 생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생명의 작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흙으로 지은 사람의 몸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영들의 아버지’(전 12:9)로부터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땅과 하늘이 그 안에서 연합된 것이다.”
 
 
 
2. 거룩한 아담이 가졌던 타락의 가능성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그 속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의 모든 표증들을 
다 누리게끔 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그는 타락할 수 있었다.
그 점은 그렇게 많은 주의 사람들을 지독히 곤란하게 하는 요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열심을 다해서,
어떻게 부패의 요소가 하나도 없는 거룩한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는가를
설명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아담은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실족할 개연성(蓋然性)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우리 영혼을 살려두시는”(시 66:9)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은 하나님께서 지탱하여 주시는 동안에만 유지되는 것이다.
아담의 영적인 생명도 그러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지탱해주셔야만 서 있을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하나의 피조물로서 유한하기 때문에
대적하는 자를 떨쳐버릴 수 있는 난공불락의 능력을 스스로 지니고 있지 아니하였다.
또한 전능함을 부여 받은 것도 아니다.
만일 그가 전능한 존재라면,
기만을 당하거나 
외면상으로 좋아 보이는 것 때문에 악을 저지르는 잘못을 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처음 조건은 지극히 높은 탁월함을 지니고 있었다.
본성의 어떤 부분에도 악한 성향이 없었고, 
도덕법을 어길만한 최소한의 조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피조물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그는 타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 변화된 가능성 속에 타락할 요소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변화는 피조물의 법칙이고, 근본적인 피조물의 특징이기도 하다.
창조주와 그런 면에서도 구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변하지 아니하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약 1:17)
그러므로, 그는 악에게 시험도 받지 않으시며 죄에 떨어질 수 없으신 것이다.(약 1:13)
이 진술은 분명하게, 피조물은-부패한 피조물뿐 아니라, 타락하지 아니한 피조물도-
시험받을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불변성과 무흠성(범죄할 가능성이 없는)은 창조주로 하여금
피조물과 전혀 본질적으로 차이나게 하는 특성들이다.
천사들도 그러한 것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만이 자신의 힘으로 그러한 일을 행하신다.
반면에 피조물은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는 다른 어떤 주어진 힘에 의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은 그 점을 이렇게 잘 지적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과 하나님 자신의 행복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룩하게 밖에는 행동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위하여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실수어린 행동을 할 수 없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방식들과 모든 사역에는 오직 거룩함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즉각 행동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자기 행동의 합법적인 기준도 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행동의 합법적인 목적이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의 모든 기능들을 다 사용한다 할지라도 비틀거릴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아담이 타락할 개연성은 그의 자유의지에 있다.
그는 이성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존재이다.
의지의 자유는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속한 하나의 풍요로움이다.
우리가 이지와 이해를 분리시킬 수 없듯이 의지로부터 자유를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의 영역 내에서 있는 관계에서 특별히 그러하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의 모든 기능들이 타락 전에 완전한 상태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자기들 총명의 지시에 합당하게 보이고 선해 보이는 것을 
선택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악한 것은 피하고, 거부할 능력을 또한 내포하였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의지의 지시에 상반되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나 억압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전혀 없었다.
또한 그러한 자유는 
의지가 선택한 것을 추구하며 행동할 능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만일 의지의 자유에 그러한 능력이 없다면,
바라는 선을 성취하지도 못할 것이며, 싫어하는 악을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것이라면, 이름뿐인 자유의지일 것이다.
행동의 자유는 억지로나 강제적으로 행하는 것과 반대로 되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는 행동하는 것의 자기 성향과 자기 결정권이다.
그것도 외적으로나 내적인 방면, 모두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만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들인 아담과 하와는 그러한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자기를 완전하게 지킬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불가결의 의무아래 있었다.
만약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을 시에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처지에 있었다.
그것이 분명하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완전을 지킬 능력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자기들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을 선택할 의지의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사람의 최초의 상태와 지금 현재의 상태를 볼 때 그 점은 분명하다.
지금은 타락한 후이므로,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로 기울이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죄의 종’으로 매여 있다.(요 8: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죄에 대하여 노예이며, 전적으로 죄의 주관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이 거룩하고 
자기에게 요구된 모든 순종을 드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받은 아담의 경우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아담의 의지가 자유롭기 때문에 
자기의 기능들을 바로 사용하는 한,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시험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악을 행하라는 외부에서 오는 시험에 대하여 타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의지의 자유 속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밖에서 오는 즉각적인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나갈 권한을
첫 조상들에게 부여하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방조한 분도 아니시고,
필연적으로 타락할 어떤 본성도 주시지 아니하셨다.”

아더 핑크의 ‘인간의 전적 타락’(청교도 신앙사 역간) 중에서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