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청교도개관
영국청교도개관(출처: 365일 청교도와 함께하는 말씀 묵상 365일 부흥과개혁사)
간략한 역사
영국의 청교도주의는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초기에 시작된 개혁 운동이었다. 가톨릭 신자인 메리 여왕 치하 영국에서 추방되었던 개신교 망명자들은 정치적·문화적 그리고 영적 개혁의 분위기 가운데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 개신교인들은 정치와 교회 전례의 보다 많은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에 '청교도'라는 경멸적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완고한 사람이 아니었고, 중도적인 개혁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종교 정책은 1559년의 종교통일령과 수장령(Acts of Uniformity and Supremacy) 및 「기도집」 그리고 1563년의 39개 신조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개신교의 풍토에 만족했으며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고자 노력했다. 변화를 위한 투쟁을 너무 심하게 하는 자들은 박해를 받고 삶을 빼앗겼다. 이를 들어, 토머스 카트라이트는 장로교 정치체제를 선호하고 주교제의 폐지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공적으로 정죄되었다.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영국 제임스 1세로 왕위를 이은 1603년이 되고 나서야 청교도들은 국가적 개혁을 재개할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제임스 왕의 개혁안은 대부분의 이상주의적인 청교도들이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제임스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관용적이었으며 1604년 햄프턴 궁 회담에서 청교도들의 논쟁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결국 개혁의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 회담에서 주교들은 청교도를 '분리주의 학자'라 묘사했으며, 제임스왕은 대체로 이 평가를 수촐했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청교도 중 한 사람이 제임스 왕에게 발언 기회를 얻어 단순하고도 웅변적인 요구를 했다 "폐하, 성경을 새로 번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존 레이놀즈의 이 제안은 어떤 면에서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표준 성경인 '주교 성경'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제임스는 이 청원에 동의했다. 하지만 난외주, 즉 청교도들이 반세기 동안 사용해 온 제네바 성경의 방대하고 해석적인 주석들은 첨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작업의 결과 1611년에 발행된 것이 흠정역, 즉 킹제임스 성경이다.
1625년에 제임스 왕이 죽자 왕위는 제임스 왕의 25세 된 아들 찰스에게 돌아갔다. 이 젊은 군주는 재정적 부담으로 가득 찬 왕국을 상속받았다. 과거에는 군주제를 존중했던 국회가, 왕이 귀족들의 소망을 무시하자, 왕을 위해 기금 모으기를 거부했다. 귀족들은 점점 찰스의 국정 운영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찰스왕이 프랑스 왕 헨리 4세의 딸인 가톨릭 신자 헨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청교도들과 국회는 격분했다. 청교도들과 국회는 새로운 왕비를 개신교권의 안녕보다는 왕비 자신의 가톨릭 동지들의 복지를 우선시하는 성가신 존재로 여겼다.
1636년 10월, 찰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성공회 기도집의 사용을 강제하려 함으로써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일 년 후, 세 명의 청교도-프린, 버턴, 배스윅-가 영국 국교회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월리엄 로드 대주교의 지휘 아래 신체절단을 당했다. 이에 새로운 기도집에 저항하는 폭동이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즈 대성당에서 일어났고,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교회는 성공회의 침투에 대항하는 문서인 스코틀랜드 국가 언약(Scottish National Covenant) 초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찰스는 이 문서를 반역의 상징으로 간주했고, 다음 해 5월에는 스코틀랜드에 군대를 보냈다. 찰스는 불안한 정국 때문에 국회를 소집했다. 군대를 유지할 재정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국회가 지원을 거부했지만, 결국 국회는 로드 대주교를 대역죄로 탄핵하는 양보안을 1640년에 만들었다.
찰스와 국회, 스코틀랜드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가는 것처럼 보일 그때, 아일랜드가 폭동을 일으켰다. 찰스는 다시 국회에 도움을 청했지만 국회는 요청을 받아들이는 대신 찰스의 모든 정치적·종교적 폭정을 열거한 '진정서(Grand remonstrance)'를 발행했다 네 달 후, 국회는 군대를 일으켰고 다음 해(1642년) 8월 모든 충신은 자신을 도우라는 찰스의 소집과 함께 영국 내전(Engligh Civil War)이 발발했다.
전쟁 내내 장기 의회(회기가 20년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가 올리버 크롬웰의 주도로 이어졌다. 1643년 의회는 영국 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일단의 신학자들을 소집했다. 다음 10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회의라고 알려진 이 모임은, 웨스트민스터성당에서 모여, 대소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공중예배지침의 세 가지 주요 문서를 초안했다. 이 회의는 주로 장로교도로 구성되었지만 에라스투스파, 감독파, 독립교회파도 의견을 낼 수 있었다. 이들이 내놓은 최종 문서들은 영국 청교도 신학을 종합한 것이었다.
마침내 올리버 크롬웰은 찰스의 군대를 격파했고, 왕정주의자들의 위협을 종결짓는 도구가 되었다. 크롬웰은 찰스가 영국에 대적한 죄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군대의 신념을 지지했다. 당연히 찰스는 자신을 고소한 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찰스는 대역죄를 선고받고, 1649년 처형되었다. 찰스가 남긴 마지막 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썩을 왕관에서 썩지 않을 왕관으로 나아간다. 그곳에는 어떤 소란도, 세상의 어떤 소란도 있을 수 없다." 이는 영국 역사에서 백성이 직접 군주를 처형한 최초의 사건이다.
한편 크롬웰은 영국 전체의 호국경(Lord Protector)로 선출되었다. 최고 권력이란 개념을 싫어한 크롬웰은 주의회와 함께, 주의회를 통해 일하려 했고, 정기적으로 국회를 열었다. 크롬웰은 로마 가톨릭을 억압했지만 대중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약속했다. 국가 교회가 존재했지만, 참석은 자유였다. 바로 이 관용의 시기에 수평파(Levelers), 디거파(Diggers), 5왕국파(Fith Monarchy Men), 퀘이커(Quakers) 등 급진적 종교 집단들이 생겨났다.
1658년 크롬웰의 건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면서 공화국의 종말도 가까워 오는 것 같았다. 크롬웰은 1658년 9월 3일 사망했고,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혔다. 크롬웰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리처드가 일 년 못 되는 기간에 호국경직을 수행했다. 1659년 5월 장기 의회의 복원인 잔여 의회(Rump Parliament)가 퇴위를 요구하자, 리처드는 채권자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한동안 존 클락(John Clarke)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1680년 영국으로 돌아와 은둔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리처드 크롬웰이 떠난 후, 국회는 찰스 2세를 유배지에서 들아오도록 공식 요청했다. 찰스 2세는 비국교도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약속하며 돌아왔다. 찰스가 자신의 생일인 1660년 5월 20일 런던에 도착하자 군중은 박수치며 열광했다. 어머니의 가톨릭 신앙을 선호했던 찰스는 가톨릭파를 위한 관용을 원했지만, 여전히 권력의 대부분을 점유한 새 국회는 성공회를 국가 종교로 확고히 하고, 비국교도들을 박해하는 일련의 법안인 클래런던 법전(Clarendon Code)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 중 가장 유명한 통일령(Act of Uniformity)은 1662년 성 바돌로매 축일에 시행되었다. 그 결과, 2천 명 이상의 비국교도 성직자들(대부분은 청교도)이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교회 개혁 운동으로서의 청교도주의는 끝이 났다. 문화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으로서의 청교도는 18세기까지 잘 유지되다가 계몽주의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정치 문화적 풍토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청교도의 삶과 관습
영국 교회에서 청교도는 단순한 정치 집단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중요한 문화적·영적 세력이었다. 16·17세기 청교도들의 삶과 관습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청교도들은 검소한 사람들이었다. 종종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과 성경의 사건을 묘사한 스테인드 글래스로 꾸민 보다 우아한 성공회 교회와 대조적으로 청교도들은 꾸밈없는 교회에서 예배하고자 노력했다. 청교도들이 흔히 반대했던 성공회 예배 의식은 성직자의 예복(특히 예배를 집전하기 위해 입는 소매 넓은 흰 가운인 중백의) 착용, 세례 시 십자가 성호를 긋는 것, 성찬을 받으려고 무릎을 꿇는 것, 예수의 이름 앞에 절하는 것, 결혼식에서 혼인 반지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교회의 종이었다. 청교도들은 철저한 안식일 준수를 고수해서, 주일에는 불필요한 노동을 멈출 것을 요구했다.
둘째, 청교도들은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현대의 성직과 세속적인 일의 구분은 전혀 청교도의 세계관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에게는 모든 삶이 신성했고, 특히 작업장이 그랬다. 예를 들어, 존 다드와 로버트 클리버는 "위대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은 정직한 장사를 멸시치 않으시고 오히려 복으로 관을 씌우신다."하고 기록했다.
셋째, 청교도들은 가족적인 사람들이었다. 가정은 아버지가 목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작은 교회' 라고 강조되었다. 설교자들은 청교도 남성들에게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권면했고,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존경하도록 권면했다. 리처드 백스터는 「기독교인의 지침서」(Christian Directory)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한결같은 맘으로 당신을 사랑해 주는 신실한 친구, 마음을 열고 당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은혜다."
넷째, 청교도들은 말씀의 사람들이었다. 1550년대 초에 성경을 설교하는 것은 청교도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설교를 하나님이 각자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주된 수단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청교도의 설교는 성공회 성직자들과 같은 철학적인 강론을 피하고,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청교도들의 결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는 청교도들을 온전히 소개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 청교도들은 편협하고 무서운 사람들이기도 했다. 종종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억압했다. 그 중 마녀 사냥과 같은 관습은 지금까지도 청교도들의 과거에서 오점이다. 그러나 모든 청교도가 가혹한 방식을 묵인한 것은 아니었다. 새뮤얼 월라드 목사는 가혹한 방식들을 공식적으로 싫어했다. 로저 월리엄스는 심한 박해가 있었는데도, 마녀 사냥 같은 가혹한 방식들에 반대했다. 마녀 사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새뮤얼 시월 같은 판사들도 후에 그 일을 회개했다.
현대 역사가들-신앙적인 이들뿐 아니라 세속 역사가들도-의 신중한 연구와 교정에도 청교도는 여전히 가혹함과 완고함, 미신, 세상의 미에 대한 무지, 각종 비정상 심리를 표상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청교도들이 엄격한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심오하게 의식했다. 청교도들이 경멸한 것은 세상적인 생각, 마치 시간과 영원이 인간의 영혼에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를 시온으로 가는 순례자 혹은 여행자로 모사하는 고전적 그림은 청교도들의 일면일 뿐이다. 청교도는 내생에 대한 열망을 이생의 유익과 려은 사람들이었다. 각자는 최고의 남편, 최고의 아내, 최고의 아들, 최고의 딸, 최고의 일꾼이 되려고 노력했다. 요컨대, 청교도들은 두 세계에서 최고의 시민이 되고자 노력했다.
간략한 역사
영국의 청교도주의는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초기에 시작된 개혁 운동이었다. 가톨릭 신자인 메리 여왕 치하 영국에서 추방되었던 개신교 망명자들은 정치적·문화적 그리고 영적 개혁의 분위기 가운데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 개신교인들은 정치와 교회 전례의 보다 많은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에 '청교도'라는 경멸적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완고한 사람이 아니었고, 중도적인 개혁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종교 정책은 1559년의 종교통일령과 수장령(Acts of Uniformity and Supremacy) 및 「기도집」 그리고 1563년의 39개 신조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개신교의 풍토에 만족했으며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고자 노력했다. 변화를 위한 투쟁을 너무 심하게 하는 자들은 박해를 받고 삶을 빼앗겼다. 이를 들어, 토머스 카트라이트는 장로교 정치체제를 선호하고 주교제의 폐지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공적으로 정죄되었다.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영국 제임스 1세로 왕위를 이은 1603년이 되고 나서야 청교도들은 국가적 개혁을 재개할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제임스 왕의 개혁안은 대부분의 이상주의적인 청교도들이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제임스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관용적이었으며 1604년 햄프턴 궁 회담에서 청교도들의 논쟁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결국 개혁의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 회담에서 주교들은 청교도를 '분리주의 학자'라 묘사했으며, 제임스왕은 대체로 이 평가를 수촐했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청교도 중 한 사람이 제임스 왕에게 발언 기회를 얻어 단순하고도 웅변적인 요구를 했다 "폐하, 성경을 새로 번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존 레이놀즈의 이 제안은 어떤 면에서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표준 성경인 '주교 성경'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제임스는 이 청원에 동의했다. 하지만 난외주, 즉 청교도들이 반세기 동안 사용해 온 제네바 성경의 방대하고 해석적인 주석들은 첨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작업의 결과 1611년에 발행된 것이 흠정역, 즉 킹제임스 성경이다.
1625년에 제임스 왕이 죽자 왕위는 제임스 왕의 25세 된 아들 찰스에게 돌아갔다. 이 젊은 군주는 재정적 부담으로 가득 찬 왕국을 상속받았다. 과거에는 군주제를 존중했던 국회가, 왕이 귀족들의 소망을 무시하자, 왕을 위해 기금 모으기를 거부했다. 귀족들은 점점 찰스의 국정 운영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찰스왕이 프랑스 왕 헨리 4세의 딸인 가톨릭 신자 헨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청교도들과 국회는 격분했다. 청교도들과 국회는 새로운 왕비를 개신교권의 안녕보다는 왕비 자신의 가톨릭 동지들의 복지를 우선시하는 성가신 존재로 여겼다.
1636년 10월, 찰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성공회 기도집의 사용을 강제하려 함으로써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일 년 후, 세 명의 청교도-프린, 버턴, 배스윅-가 영국 국교회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월리엄 로드 대주교의 지휘 아래 신체절단을 당했다. 이에 새로운 기도집에 저항하는 폭동이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즈 대성당에서 일어났고,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교회는 성공회의 침투에 대항하는 문서인 스코틀랜드 국가 언약(Scottish National Covenant) 초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찰스는 이 문서를 반역의 상징으로 간주했고, 다음 해 5월에는 스코틀랜드에 군대를 보냈다. 찰스는 불안한 정국 때문에 국회를 소집했다. 군대를 유지할 재정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국회가 지원을 거부했지만, 결국 국회는 로드 대주교를 대역죄로 탄핵하는 양보안을 1640년에 만들었다.
찰스와 국회, 스코틀랜드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가는 것처럼 보일 그때, 아일랜드가 폭동을 일으켰다. 찰스는 다시 국회에 도움을 청했지만 국회는 요청을 받아들이는 대신 찰스의 모든 정치적·종교적 폭정을 열거한 '진정서(Grand remonstrance)'를 발행했다 네 달 후, 국회는 군대를 일으켰고 다음 해(1642년) 8월 모든 충신은 자신을 도우라는 찰스의 소집과 함께 영국 내전(Engligh Civil War)이 발발했다.
전쟁 내내 장기 의회(회기가 20년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가 올리버 크롬웰의 주도로 이어졌다. 1643년 의회는 영국 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일단의 신학자들을 소집했다. 다음 10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회의라고 알려진 이 모임은, 웨스트민스터성당에서 모여, 대소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공중예배지침의 세 가지 주요 문서를 초안했다. 이 회의는 주로 장로교도로 구성되었지만 에라스투스파, 감독파, 독립교회파도 의견을 낼 수 있었다. 이들이 내놓은 최종 문서들은 영국 청교도 신학을 종합한 것이었다.
마침내 올리버 크롬웰은 찰스의 군대를 격파했고, 왕정주의자들의 위협을 종결짓는 도구가 되었다. 크롬웰은 찰스가 영국에 대적한 죄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군대의 신념을 지지했다. 당연히 찰스는 자신을 고소한 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찰스는 대역죄를 선고받고, 1649년 처형되었다. 찰스가 남긴 마지막 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썩을 왕관에서 썩지 않을 왕관으로 나아간다. 그곳에는 어떤 소란도, 세상의 어떤 소란도 있을 수 없다." 이는 영국 역사에서 백성이 직접 군주를 처형한 최초의 사건이다.
한편 크롬웰은 영국 전체의 호국경(Lord Protector)로 선출되었다. 최고 권력이란 개념을 싫어한 크롬웰은 주의회와 함께, 주의회를 통해 일하려 했고, 정기적으로 국회를 열었다. 크롬웰은 로마 가톨릭을 억압했지만 대중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약속했다. 국가 교회가 존재했지만, 참석은 자유였다. 바로 이 관용의 시기에 수평파(Levelers), 디거파(Diggers), 5왕국파(Fith Monarchy Men), 퀘이커(Quakers) 등 급진적 종교 집단들이 생겨났다.
1658년 크롬웰의 건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면서 공화국의 종말도 가까워 오는 것 같았다. 크롬웰은 1658년 9월 3일 사망했고,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혔다. 크롬웰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리처드가 일 년 못 되는 기간에 호국경직을 수행했다. 1659년 5월 장기 의회의 복원인 잔여 의회(Rump Parliament)가 퇴위를 요구하자, 리처드는 채권자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한동안 존 클락(John Clarke)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1680년 영국으로 돌아와 은둔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리처드 크롬웰이 떠난 후, 국회는 찰스 2세를 유배지에서 들아오도록 공식 요청했다. 찰스 2세는 비국교도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약속하며 돌아왔다. 찰스가 자신의 생일인 1660년 5월 20일 런던에 도착하자 군중은 박수치며 열광했다. 어머니의 가톨릭 신앙을 선호했던 찰스는 가톨릭파를 위한 관용을 원했지만, 여전히 권력의 대부분을 점유한 새 국회는 성공회를 국가 종교로 확고히 하고, 비국교도들을 박해하는 일련의 법안인 클래런던 법전(Clarendon Code)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 중 가장 유명한 통일령(Act of Uniformity)은 1662년 성 바돌로매 축일에 시행되었다. 그 결과, 2천 명 이상의 비국교도 성직자들(대부분은 청교도)이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교회 개혁 운동으로서의 청교도주의는 끝이 났다. 문화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으로서의 청교도는 18세기까지 잘 유지되다가 계몽주의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정치 문화적 풍토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청교도의 삶과 관습
영국 교회에서 청교도는 단순한 정치 집단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중요한 문화적·영적 세력이었다. 16·17세기 청교도들의 삶과 관습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청교도들은 검소한 사람들이었다. 종종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과 성경의 사건을 묘사한 스테인드 글래스로 꾸민 보다 우아한 성공회 교회와 대조적으로 청교도들은 꾸밈없는 교회에서 예배하고자 노력했다. 청교도들이 흔히 반대했던 성공회 예배 의식은 성직자의 예복(특히 예배를 집전하기 위해 입는 소매 넓은 흰 가운인 중백의) 착용, 세례 시 십자가 성호를 긋는 것, 성찬을 받으려고 무릎을 꿇는 것, 예수의 이름 앞에 절하는 것, 결혼식에서 혼인 반지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교회의 종이었다. 청교도들은 철저한 안식일 준수를 고수해서, 주일에는 불필요한 노동을 멈출 것을 요구했다.
둘째, 청교도들은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현대의 성직과 세속적인 일의 구분은 전혀 청교도의 세계관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에게는 모든 삶이 신성했고, 특히 작업장이 그랬다. 예를 들어, 존 다드와 로버트 클리버는 "위대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은 정직한 장사를 멸시치 않으시고 오히려 복으로 관을 씌우신다."하고 기록했다.
셋째, 청교도들은 가족적인 사람들이었다. 가정은 아버지가 목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작은 교회' 라고 강조되었다. 설교자들은 청교도 남성들에게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권면했고,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존경하도록 권면했다. 리처드 백스터는 「기독교인의 지침서」(Christian Directory)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한결같은 맘으로 당신을 사랑해 주는 신실한 친구, 마음을 열고 당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은혜다."
넷째, 청교도들은 말씀의 사람들이었다. 1550년대 초에 성경을 설교하는 것은 청교도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설교를 하나님이 각자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주된 수단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청교도의 설교는 성공회 성직자들과 같은 철학적인 강론을 피하고,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청교도들의 결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는 청교도들을 온전히 소개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 청교도들은 편협하고 무서운 사람들이기도 했다. 종종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억압했다. 그 중 마녀 사냥과 같은 관습은 지금까지도 청교도들의 과거에서 오점이다. 그러나 모든 청교도가 가혹한 방식을 묵인한 것은 아니었다. 새뮤얼 월라드 목사는 가혹한 방식들을 공식적으로 싫어했다. 로저 월리엄스는 심한 박해가 있었는데도, 마녀 사냥 같은 가혹한 방식들에 반대했다. 마녀 사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새뮤얼 시월 같은 판사들도 후에 그 일을 회개했다.
현대 역사가들-신앙적인 이들뿐 아니라 세속 역사가들도-의 신중한 연구와 교정에도 청교도는 여전히 가혹함과 완고함, 미신, 세상의 미에 대한 무지, 각종 비정상 심리를 표상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청교도들이 엄격한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심오하게 의식했다. 청교도들이 경멸한 것은 세상적인 생각, 마치 시간과 영원이 인간의 영혼에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를 시온으로 가는 순례자 혹은 여행자로 모사하는 고전적 그림은 청교도들의 일면일 뿐이다. 청교도는 내생에 대한 열망을 이생의 유익과 려은 사람들이었다. 각자는 최고의 남편, 최고의 아내, 최고의 아들, 최고의 딸, 최고의 일꾼이 되려고 노력했다. 요컨대, 청교도들은 두 세계에서 최고의 시민이 되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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