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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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인간

이 글을 전개하기 전에 내가 신학적 인간(Theological Man)이라고 하는 말의 함축적 의미를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어원학적으로 인간을 분류하는 구분에서 신학적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형태적이고 기능적인 범주에서 차별화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붙인 다분히 의도적인 명칭으로서의 ‘신학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을 하나님에로 향한 삶의 목적을 삼고자 하는 자의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간으로서의 ‘신학적 인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학적 인간에 대한 기술을 하려면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이 신학(Theology)이란 무엇인가? 라는 명제적 선언이다. 신학을 쉽고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GOD)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인문학적 사유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신학은 학문으로서 성립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16세기 이전까지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권좌에 있었다. 그 후 서서히 인문학적 사유가 확장되고 급기야 18세기 들어 Immanuel Kant 에 의해 인식의 기능적 부분에 기인한 비판으로그에 따르면 “하나님과 초감각적인 것 일반에 대한 그 어떤 이론적 지식을 얻는 것도 불가능하다” 라고 한 것에서 이미 인문학자들의 신학에 대한 포화는 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문학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신학이 학문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는 반대의 특별한 이유 첫째는 신학이 관찰할 수도 없고 또 경험적인 실험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이론적 지식의 범주 너머에 있는 것을 대상으로 연구에 몰두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신학이 신학의 확실성의 근거를 학문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권위인 인간의 이성에서 찾지 않고 권위있는 계시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견해에 대한 인문학자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호응은 지배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대중화를 위해 지지기반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 일반인들의 태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신학자들의 반론 역시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학문은 그저 체계화된 지식으로서 인간의 통상적 지식의 토대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이 지식은 그 대상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얻는다. 그 지식은 관찰에 의해서도, 성찰에 의해서도, 또 계시에 의해서도 얻지만, 반듯이 참된 지식이어야 한다. 경험적인 실험은 자연과학의 경우에, 이성적 실험은 정신과학의 경우에, 그리고 성경적 실험은 신학의 경우에 적용할 수 있으며, 또 반듯이 그리되어야 한다. 신학의 자료는 계시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얻은 지식을 조직화하고 성경의 유추에 의하여 엄밀하게 시험하는 것이 신학자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먼저 신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명제를 우선 살펴보고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신학의 정의는 신학자들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같은 공론을 함유한다. 나는 내가 신학을 공부할 때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Louis Berkhof 교수의 책으로 조직신학을 배웠기에 그분의 말을 인용하려고 한다.

“기독교신학의 전제는 매우 분명한 형태의 전제에 속한다. 그 전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중요한 것이나 어떤 사상이나 혹은 관념, 어떤 능력이나 목적적인 경향이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만물의 모든부분에 내재하시며 자존적이며 자의식적이며 인격적인 존재가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을 이름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그렇다면 신앙으로서의 신학을 갖는 성도는 당연히 신학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당위를 자신에게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적 인간(Theological Man)을 철학적 인간(Philosophical Man)에 대한 대칭관계에서 살펴본다면 유물론적 가치를 배타하는 무형론적 의식에 닻을 내리고 있는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신 인식론이 될 것이다. 그 대상은 세상의 유형적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닌 초월적 세계에 의한 창조의 하나님에 관한 초상에 관계한다. 철학적 인간은 범신론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인문학적 세상을 사유의 장소로 점유하기를 좋아하며 이성과 논리로 가치체계를 구축하고 물질계를 정복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고자 애쓰는 자이다.

그러나 신학적 인간은 계시신론의 절대초월적 하나님의 세계를 사유의 장소로 내정하기를 즐겨하며 믿음과 은혜에 의지하여 영원에 대한 갈망을 위해 겸허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복종하기를 원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신학적 인간에 속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단상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전능하신 절대자의 자리로 자신을 이끌어 내는 내재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이성이나 논리의 실증이나 관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성질의 것으로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가하면 신학적 인간은 사유의 개념과 관점이 다른 무엇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과 자신의 소통관계가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 있음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룩하신 그분의 목적에서 찾아 자신의 삶에 반영하고자 하는 갈망을 품는 자인 것이다. 이는 곧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이 청지기적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집의 종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일반은총 안에서(성도는 특별은총 안에 있지만) 세상을 살피며 신앙의 덕목을 쌓는 자여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은 목사들이나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도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에 해당하는 자이며 이 같은 신앙고백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아울러 신학적 인간은 신앙의 목적적 방향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아는 자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어도 그것이 자신의 필요충족을 위한 수단화로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생존세계에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오직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으로 만족하는 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분별하기 위한 범주 안에서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는 모든 신앙적 행위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부합할 수 있도록 몸부림치는 자인 것이다. 이런 믿음의 의식을 갖기에 기독교신앙을 가졌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쯤으로 치부하려는 잘못된 신앙관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는왜곡된 복음에서 탈피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필요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 잘못된 신앙행태를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그러므로 신학적 인간의 중요한 요소는 믿음의 창구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예지와 이성를 가지고 학문적 연구에 의하여 신앙의 성찰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과정을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참여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The Reighteousness of God)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생각의 모든 범주가 신학의 광범위한 영역에 머물러야 하며 인간의 이성으로 믿음의 세계에 불신앙적인 행위도발이 야기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계시은사적 역사의 긍휼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흔히 신학은 성도와는 상관없는 목사들에게나 필요한 항목쯤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교회공동체의 안일한 의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신학을 알아야 하고 신학에 관심을 두고 신학을 배워야 한다. 이는 물론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몫이며 목사들은 이것을 사명으로서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신학적 인간의 존재 가치는 교회와 세상에 가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선포되도록 상호 연관적 선상 위에서 의미추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신학적 인간의 역활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력으로 세상에 선포하도록 교회의 중추적 기능을 다할 수 있는 사상적 근간을 마련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이 신학의 옷을 입어야 하는 당위성이 제기 되는 것이다. 신자가 자신이 믿는 믿음의 근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신학인 것이다. 가령 성경을 논리적이고 조직적으로 구성한 것을 형태적 의미에서 생각할 때 그것이 바로 신학의 작업화이며, 믿음의 논지를 아는 것은 곧 신학을 알아야 함이다. 그래야 막무가내식의 ‘믿습니다’ 믿음을 배격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에서 성도로서의 제 역활과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서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핵심사항을 붙들 수 있어야 하며 함축하고 요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를 조직화해 놓은 작업이 다름 아닌신학인 것이다. 무엇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경적 사건을 통해 역사(history)에 나타내신 내재적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관계 요인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만들어 내야 하는 것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계시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분별할 능력을 교회에 의해 세상에서 이루게 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의 모습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방종으로 인하여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가 갈수록 소원해질 때, 성도는 자신의 신앙이 관념화되어 자기 울타리 속에 갇혀있을 것이 아니라, 신학으로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조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을 신학적 인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뿐만 아니라그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하고 계신다. 그것이 신학을 들어 역사(Oeuvers)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역사의 현장으로 신학의 당위성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91:14-1·5)

그러므로 신학적 인간은 또한 역사적(historical)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역사를 사는 존재이듯 신학적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포괄적 사상에서 역사를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 앞에서의 존재론적 의미를 신학적 인간상으로 정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Cicero 는 역사를 가르켜 "역사는 참된 시대의 증인이며 진리의 빛이다" 라고 정의했다. 이 같은 사관에서 보면 역사는 현재적 실체이며 학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역사는 사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사람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고 차별화되어 있기에 현대의 역사학자들에게서도 관점의 일치를 찾기가 쉽지만은 않는 것이다.

현대의 역사학자로 유명한 영국의 E.H Carr 는 역사의 정의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들이 처해있는 시대에서 우리들의 위치를 반영하게 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 광범위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역사란 인지표현에 의한 실재를 구성하는 것으로 역사라는 창구를 통해 형상화시킴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적 실재에 접근하는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Roy Swanstrom 이란 기독교 역사학자는 기독교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두 가지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첫째는 역사란 과거의 비교적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건들과 운동들을 취급한다. 이를 고고학적 증거의 사실들을 통해 잠정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사건들까지도 포함한다. 이를 가르켜 강의실 안의 역사라고 한다.

둘째는 역사에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질문인 인간 역사의 전 과정이 정작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문제점이다. 이 질문을 끝까지 분석해 들어가면 그것은 역사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신념, 혹은 신적 계시에 접근해 있음으로 기독교적 신앙에 의한 답변이 발견될 수밖에 없다. 이를 일러 기독교적 역사라고 한다. 역사는 인간의 삶의 흔적이지만,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에서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피조물 즉, 신학적 인간으로서 역사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왜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하게 와 닿아야 하는가? 역사(history)는 하나님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시작에서 그 연원을 찾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Oeuvers of God) 의 시작일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의 시작이고 그 흔적이며 그 앞에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 앞에서 자기 자신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물음은 역사의 기원에 대한 물음과 만물의 주권자에 대한 초상으로 그것은 신학적 물음에 기인해야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절대 권능과 창조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자는 위대한 인생고백을 하게 될 것임으로 역사 앞에서 신학을 말하는 자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던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편46:1-3)


그러므로 신학적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신앙적 명제는 생존세계에 자신을 남겨두신 하나님의 뜻을 말씀가운데 부지런히 살피는 일이다. 차제에 신앙을 이론화내지 관념화시키는 양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표현하기보다, 자신의 행동양식으로 신앙이 삶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갖지 못하게 하는 모순을 통해 인간의 오만을 부추키지는 않았는가 하는 자기반성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신앙이 세상적 가치관과 함께 갈 때 발생하는 것으로 신앙이 신학으로 자리매김되지 못한 원인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신학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신학으로 철저한 성경적 해석에 의한 원리를 보수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현대주의의 사상적 부산물인 이성주의나, 합리주의, 또는 철학적 편린으로 말미암아 신앙조차 왜곡되어 인간의 지적 교만을 양산하고 소위 물량적 세속주의에 침식당하여 신앙이 신앙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종식시켜야 할 당위성으로의 신학적 인간선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강단에서 선포되는 Message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의Kerygma 인지, 아니면 인간의 허접한 말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왜, 목사들이 거룩한 강단을 인간의 허접한 말로, 이단의 사상으로 더럽히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왜, 성도들은 그것을 분별치 못하여 자기 영혼을 죽이고 있는 소리에 침묵하고 있는가? 이는 성도들이 ‘신학적 인간’이기를 포기한 연유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


또한 신학적 인간은 무엇보다 오늘 이 시대의 사상적 조류를 감안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범신론적 사상은 잠시 밀쳐놓더라도 기독교 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현대신학, 자유주의신학, 왜곡된 복음주의신학 등등의 병든 신학의 홍수 속에서 영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대책방안이 더욱 모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심각한 인식이나 상황판단이 한국교회에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이고, 생각을 배제할 수가 없다. 신학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구체적인 역사적 작업을 거쳐 하나님의 작정된 섭리로 세계 안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체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형상화시키는 작업이 사회 속에서 희생과 헌신적 형태로 자리 잡을 때, 신학은 비로소 그리스도와 연합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나라의 의를 구체적으로 성취해 나가게 될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에 의한 이론이나 논리로 사변화 시키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적 행위가 그분의 섭리 안에서 불변하심을 신학은 규정지어야 하는 것이며 이에 성도는 신학적 인간으로서 이를 수성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적 인간의 자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내재하시는 주님의 인도와 섭리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과 정신과 영혼을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 주님의 주권적 권한에 맡기는 순종을 통한 관계설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희생의 대속 제물로 죽으신 죽음이 인간이 본성상 죄인이었음을 일깨우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사함에 의한 구원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작성가운데 예정하신 주권적 행위를 통해 인간은 죄에서 자유함과 평안과 기쁨과 안식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본질이고 진수이며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임을 아는 믿음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5-26)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세상적으로 향한 관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방편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구체화하려는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적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며 구원의 생명의 가치를 은혜의 역사로 수납하려는 거룩에로의 전환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아의 폐쇄적인 성향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깨닫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신학적 인간으로서 자기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옷을 신학으로 입어야 하는 자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자기 정체성을 삶의 현장에서 구원의 확신을 통한 미래지향적으로 표현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의 구속 사역을 생존세계에서 효율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신앙이 될 때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소명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신앙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기에 신앙의 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곳은 자기 부인과 죽음의 선언자리인 동시에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는 구원의 자리인 것이다.

신학적 인간이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계시( Revalation )로 세상 속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의( The Reighteousness of God )를 인간의 삶을 통한 세상참여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헌신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성찰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감( illumination )에 의지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Image를 지녔고,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내주( Inhabitation )하셔서 성도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하나님의 백성 된 자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렇다면 신학을 굳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도는 신학을 기피하는 자가 아니라 신학을 좋아하는 자여야 하고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는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성도들이 신학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지고한 존재론적 의의를 되찾을 수 있는 갈망인 것이다. 신학은 창조에서 출발하여 타락과 구원의 역사의 점진적 과정을 하나님께 두는 방향설정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본질을 신의 내재성에 두는 것이며, 신앙을 통한 관계형성의 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신학의 옷을 입을 때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없는데, 그것은 개혁주의신학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역사이다. 성부 하나님에 의한 작정가운데 예정하신 위대한 구원계획을, 성자 예수님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까지 낮아지신 비하의 순종으로 성부의 계획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을, 성령께서 보존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내주하심의 역사가 성도들의 삶의 내재적 요인임을 어느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세상적 삶의 과정은 성령의 은혜와 감화의 역사적 능력 안에서 유지, 보수되는 것임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신앙의 사건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성도로서의 선 자리, 그곳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 잡은 곳이며 그곳은 신인합일의Communication 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교만이 교회에서 선포된 Kerygma를 비웃듯 세상적 가치관인 Pragmatism을 앞세워 물질적 욕망을 소리치고 변증적 유물론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삶의 질을 내세우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음을 왜곡하는 허탄한 사상에 포로가 되어 마치 그것이 진정한 신앙적 삶의 대안이라도 되는 듯 허망한 의식에 사로잡혔던 자신을 살피고 기독교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구원의 확실성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신학의 옷을 입은 신앙의 자태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기백성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의 역사 ( Oeuvers of Spirit )를 통한 신앙의 identity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게 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신학적 인간은 자신이 이 시대에 무엇을 상실하고 있는지, 무엇으로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으로 자신안의 존재성을 회복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인간의 흔적은 때로 위대한 모습을 세상에 그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수치스러운 그림을 숱하게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의 주제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겸허하게 그분의 말씀을 청종하였던 것이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시119"73)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묵상으로 삼는 자는 지혜로울 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삶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신학적 지평을 사색으로 확장하는 자인 것이다. 결국 성도가 사는 것은 세상 속에서 신학의 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생에서 신학의 유용성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택한 백성, 즉 택함받은 백성으로서의 개연성 때문인 것이다.

신학적 인간에게서 그 흔적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것에 의해서 비롯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므로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의 현장 역시도 육신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외침이 들려지지 않으면 인간의 심성은 심령으로 변화되지 않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능력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 빚어내는 고고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의 자태 속에 감추어진 신학이라는 옷이 풍겨내는 향취이며, 곧 삶의 Praxis 이다. 오늘 우리가 초라하고 메말라 있는 모습은 분명 삶의 현장 앞에서 신학의 옷을 걸쳤든지, 아니면 신학의 옷을 벗었든지, 불문하고 신앙의 자태, 곧 삶의 Praxis를 외면하고 겉치레적인 신앙에 안주하려는 도피성 때문인 것이다.


세상은 변함없이 존재하며 여전히 성도의 곁에서 상황주의로 인한 고민으로 빠지게 할 때도 있으며, 자신의 실상에 대한 자괴감으로 아프게 할 때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오랜 시간 신학의 우산아래 두시고 그 권능의 손길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며 섭리하셨다. 그러므로 삶이라는 역사적 현장에서 자신의 내재적 요인으로 말미암은 Paradigm 을 적극적으로 가져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사는가? 하나님의 초월하시고 내재하시는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찬양하고 지식을 우상화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물론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18세기 문예부흥이후 줄곧 우리 주변을 감싸왔던 사상적배경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기에 인간의 존재론적 의의자체를 이 땅에 한정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부정의의 행위는 결국 인간의 행동양식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을 도발시켜 왔던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제 결론을 맺어야 하겠다. 신학은 이론이면서 이론이 아니다. 신앙은 관념이면서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인격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Incarnation) 이다. 감추인 듯 들어내신 하나님의 자기 현현이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역사의 현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건으로 만나고, 그의 대속적 희생(Sacrifice)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구원
(Salvation) 의 영원한 소망인 영생(Etermal Life)을 얻었다.
따라서 성도는 죄인인 자신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동정녀의 몸에 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무한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절대권능의 하나님을 자신의 신앙 안에 담아 신학이라는 창구를 통해 세상을 초월하시고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그의 뜻과 섭리 안에서 만나는 자이다. 이 만남을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표상을 갖게 되며 하나님의 광활한 세계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미시적 관점을 믿음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삶이 갖는 아름다움의 표현인 것이다. 말씀을 사랑하고 그 앞에 복종하는 자신 안에서 신학적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형벌가운데 놓였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있도록 성령의 쏟아부으시는 은혜를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양자삼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사랑해야 하며 삶의 신앙으로 즐거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예배와 삶을 통해 성도가 신학적 인간으로 옮겨가는 마땅한 귀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신학적 인간인 성도는 영적인 삶 (Spieitual Life)를 자신 안에 소유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곳에 항상 Praise와 Prayer가 함께하므로 역사의 주인이시며 만물의 주제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겸허함을 가지고 삶으로서의 신앙을 신학적 지평으로 열어가고자 하는 갈망을 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인간인 성도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오직 그분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Hallelujah...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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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의견 1

  • 관리자 · 2011-05-21 22:03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날에 신학은 너무나도 세상성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래할 영성시대에 대한 신학적 대비는 너무나도 요원해 보입니다. 오히려 pragmatism으로 더 목소리를 높이며 거기에 편승하고 있으니 선조들의 신앙은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때라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들리지도 않으며 생각을 할 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은혜로 시작하고 찬송으로 영광돌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직도 부족함이 많기에 더 기도하며 달려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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