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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청교도 자료

‘경건’과 ‘영성’의 대립을 넘어서

‘경건’과 ‘영성’의 대립을 넘어서
손성은(삼일교회 담임목사, 고신)
자료출처 http://www.samil.org/zbxe/?document_srl=9572&mid=bible5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된 영성의 기초가 되고 분별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영성’이라는 말을 싫어했습니다. 대신 ‘경건’이라는 말을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용되었던 ‘영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개혁의 대상이었던 그 당시 타락한 로마천주교회의 정신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노력과 열심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수덕신학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덕을 쌓아감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수덕의 방편이기도 하였습니다. 믿음도 인간의 공로로서의 덕의 일종이 되는 셈입니다. 물론 덕을 쌓는다는 것 자체는 나쁜 것도 비성경적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덕을 쌓는다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의 일부를 이뤄간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셈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서는 이런 오해가 종종 있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예수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예수를 믿는 것에 구약의 율법, 특별히 할례를 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 유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부류의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전도를 해야만 참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식의 강조도,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천주교회의 수덕신학과 그 사고스타일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인기를 끌 수 있습니다. 요즘도 인기를 끌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또한 종교개혁 당시 유행하고 있던 사조들 중의 하나가 바로 신비주의적 신앙형태였습니다.
 
타락한 교권에 실망해서 조직적인 교회생활과는 전혀 관계없이 직접 하나님에게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신앙형태가 바로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과의 직접적인 합일을 통해서 자신과 자아 자체를 몰입시키고자 하였던 신비주의의 신앙형태는, 현대문명의 삭막함 속에서 갈증을 느낀 사람들이 자신들의 갈증을 채워줄 그 무언가를 갈급한 심정으로 찾고자 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영성’이란 단어를 좋아하면서 그것을 추구하였고, 요즘도 그런 셈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영성’개념의 인간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경향을 경고하고 대신 ‘경건’이라는 단어를 선호하였습니다. 그 후예들, 특별히 청교도들은 더욱 ‘경건’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였습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전인적인 헌신과 봉사의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경건’이란 용어가 언제나 올바르게 사용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경건’의 능력과 실재는 없으면서 그 모양을 취하려는 경향은 성경 속에서도 경고하고 있고, 경건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서는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특별히 위선적인 삶의 모습을 많이 낳기도 했습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같은 소설이 바로 칼빈주의신학이 유행했던 스코틀란드의 사람인 로버트 스티븐슨에 의해서 쓰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완벽한 신학체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인간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그 가치를 내재화시킨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그 가치의 형식만을 흉내 내는 사람들도 많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경건’이 일종의 ‘경건주의’가 되어버림으로 인해서 그런 문제점들은 더욱 심화되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종교개혁자들이 싫어하였던 ‘영성’이란 말이나 그 당시의 개념에도 문제가 있고, 그들이 좋아하였던 ‘경건’이라는 말이나 그 이후의 타락한 의미에도 문제가 있는 셈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최선의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에서는 이런 ‘경건’ 혹은 ‘영성’이라는 개념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번 칼럼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신령한 사람’의 그 ‘신령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영성의 핵심은 인간의 어떤 내재적 속성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된다는 그 신령성에 있다고 봅니다.
 
만일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이 좀 더 집중하였다고 하면, 영성이라는 개념을 그렇게까지 혐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는가 아닌가? 신약적인 말로 하자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된 영성의 기초가 되고 분별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신령성, 그 영성을 소유하시고 또한 그것을 풍성히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 comment ---- written by 정태홍 목사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시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영성이라는 개념은 이미 종교다원주의가 말하는 영성이요
뉴에이지가 말하는 영성이라는 개념으로 자리는 잡아 있다.
이미 정상 궤도를 벗어난 것들에 대해서 다시 수용해서 사용해야할 이유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더욱 나는 "경건"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해야 된다고 확신한다.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겁을 상실했다.
그리고 감히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는 탐심에 사로잡혀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심판과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고 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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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의견 1

  • 개혁언약 · 2011-05-15 22:10
    손성은 목사의 글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제목부터 경건과 영성이 대립한다고 보는 관점이 그렇습니다. 관리자님의 지적대로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외치는 영성이 이미 성경을 벗어난지 오래되었고, 그 영성이라는 것이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입니다. 앞으로 그런 잘못된 방향으로 더욱 활발해질텐데, 굳이 종교개혁자들까지 언급하는 것이 모양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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