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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능력대결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능력대결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 하민기  2011-02-07 14:30:09   조회: 288   
능력대결이란 무엇인가?
http://www.kscoramdeo.com/bbs/list.html?table=bbs_1&idxno=1957


도대체 영적전쟁(Spiritual Warfare) 혹은 능력대결(Power Encounter)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귀신(鬼神) 혹은 악마(惡魔)에 대한 언급을 할 때마다 다양한 상상들을 하게된다. 어떤 사람들은 선교 현장 혹은 목회 현장에서 듣거나 겪었던 이상한 종교적인 행습(行習)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가 보았던 괴기(怪奇) 혹은 공포 영화의 장면들을 연상하게된다. 1973년에 유행했던 영화였던 엑소시스트(The exorcist)를 본 사람들은 귀신이 13살의 소녀의 몸을 뒤틀리게 하고 음산한 목소리를 내고, 2명의 사제에 의해 축사(逐邪)가 행해졌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류(類)의 현상은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995년 3월에 미국에 거주하는 5명의 한국 여인들이 LA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기소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그녀를 때려서 살해한 혐의 때문이었다. 1995년 여름 주말에 어떤 사람이 청소년기의 두 아들과 함께 뉴멕시코의 에스탄시아(Estancia)에 낚시를 하려 갔는데 두 아들이 귀신들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길가에 두 아들을 내려놓고는 두 아들 중 하나의 목을 잘랐고, 그 사이에 다른 아들은 도망쳤던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을 담당한 검사에게 그는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그 아들을 구타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아들들이 악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귀신 혹은 마녀(魔女), 무당(巫堂)에 대한 이야기는 300년 전에 있었던 돌이킬 수 없는 마녀 사냥의 이야기를 상기케 한다. 이러한 사건이 과거에만 일어났던 일인가? 그렇지 않다. LA 타임즈는 1994년도에만 남아공화국에서 적어도 100명 이상의 무당들이 화형을 당했거나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무당들이 강제로 그들의 고향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의 집이 불태워 졌으며 상당수는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보도하고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전쟁이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전쟁을 특별한 형태의 사역 - 예컨데, 축사(逐邪), 치유사역(deliverance ministry), 혹은 특별한 형태의 중보사역 - 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사역이 영적전쟁의 한 면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영적전쟁은 이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사역이다.

1. 영적전쟁의 기초적인 이해 - 갈등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공생애 시초부터, 예수님께서는 상반되는 왕국사이의 갈등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부터 이러한 갈등은 표출되기 시작했다(막1:21-28). 예수께서 가르침을 마치신 즉시 악한 영이 한 사람 안에서 나타나서 예수에게 도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나타난 전제들을 비웃지 않으시고 그가 인식하신 문제들의 본질을 직접적이고 단호하게 취급하셨다. 여기에 한 사람을 통하여 말하는 악한 영의 실체가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권위로 예수께서는 악한 영에게 그 사람으로부터 떠날 것을 명령하셨다. 이러한 악한 영을 쫓아내시는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의 주된 부분임을 언급하면서 마가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막1:39)고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적인 주제였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통치는 예수님의 인격과 선교사역 안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축사(逐邪)행위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하는 표징(表徵)이었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누가는 ”손을“이라고 표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눅11:20)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갈등 관계에 있는 적대 세력의 실체를 지적하고 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요일5:19)고 말한다. 예수님은 사탄을 “이 세상 임금”(요12:31, 14:30, 16:11)이라고 하셨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말했을 때 사탄의 주장에는 다소간의 근거가 있는 듯 보인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주권적인 왕이시지만, 이러한 본문들은 사탄과 그의 앞잡이들이 이 세상과 능력 구조에 대한 상당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탄의 통치는 어떠한 영역에 국한된 것일 뿐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탄을 “이 시대의 신”(the god of this age: 개역 성경은 “이 세상 신”)(고후4:4)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두 시대로 나누어진다. 악한 현시대와 장차 올 시대가 그것이다. 사탄은 이 시대의 왕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새 시대를 도래케 하신 왕이시며 의(義)의 통치자이시다.

(1) 악한 현시대의 종말( The end of the present evil age)
모든 신자들과 함께,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다. 재림은 우리 주님께서 악을 심판하시고 소멸하시고 악한 현시대의 종말을 가져오실 때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들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니라”(계21:4)고 말씀하시는 때이다. 우리는 장차 올 시대의 실현을 고대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완성의 때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 슬픔, 눈물과 고통이 존재하는 때를 살고 있다.

(2) 장차 올 시대(The age to come)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와 새 시대에 관한 그의 약속에 근거해 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안정되고 영원한 나라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새 시대는 예수님의 초림(初臨) 시에 이 세상에 도래하기 시작했다. 복음은 우리가 장차 완성된 나라의 축복을 현재 향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생은 미래에 이루어 질 열망일 뿐 아니라 현재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래와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① 우리 삶 속에 성령의 능력의 현존
②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긴밀한 교제
③ 죄의 굴레로부터 자유케 되는 능력
④ 악한 영들을 다스리는 권위

(3) 두 시대 사이의 갈등
우리는 악한 현시대와 장차 올 시대가 겹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악한 왕국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계는 평화롭게 지내는 공존이 아니라, 갈등이 있는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초자연적으로 사탄의 왕국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왕국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골1:13). 신자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다(빌3:20).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의 충성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며, 종말론적인 실체는 우리가 장차 올 나라에 동참자이며, 새로운 창조의 일부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며,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자녀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의 존재는 악한 현시대의 무대 위에서 공연되어질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은 이 시대의 산물(産物)이며 우리의 가장 큰 대적인 죽음을 겪어야만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죄의 영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게 된다. 폭력, 쓰라림, 가난, 범죄, 테러, 이중성과 배신, 상처 등과 같은 것들을 겪는다. 신자들도 때로는 불신자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듯이 보인다.

(4) 갈등과 긴장의 시기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이 시기가 갈등의 시기임을 안다. 성경을 이점을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갈등과 전쟁에 대한 묘사는 신약 전체에 걸쳐 발견되어진다.(눅11:21,22, 마10:34, 눅4:18, 막5:9,15, 골2:15, 엡4:8, 골1:29, 2:1, 딤전4:10, 엡6:12, 히12:4, 벧전2:11, 유3, 빌1:30, 딤전4:7, 빌2:25, 몬2, 딤후2:3,4, 엡6:12-17, 딤전1:18, 6:12, 고후10:4, 딤전1:18, 고후10:4, 롬 6:13,13:12, 고후6:7, 계12:7, 19:19, 20:8)
우리가 겪는 갈등은 죄를 이 세상에 확산케 하려는 파괴적인 시도에 대항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도덕적인 악을 범케 하려는 경향에 대항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이라고 말한다(벧전2:11). 이러한 싸움은 싸움의 일면일 뿐이다.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고 말하고 있다.

(5) 상대가 되지 않는 전쟁
우리는 갈등 가운데 있다. 이러한 갈등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두 왕국이 전쟁에 참전하고 있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동일한 힘의 균형을 이룬 상대가 되는 전쟁이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야훼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주권적인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 분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가 모든 것을 그의 손바닥 안에 두셨으며, 그가 원하시는 데로 다스리신다. 영적인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전쟁의 마지막 결과를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승리하는 편에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사탄과 그의 연합군들은 집요하게 세상 속에 모든 형태의 악을 퍼뜨리면서 그들이 삼킬 자를 추적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속여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교회 공동체에 도덕적인 악을 유포하므로 교회를 파괴케 하려고 시도한다.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전투는 2천 년 전에 결정지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고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그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엡 1:21). 신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원수들에 대해 승리를 획득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원수를 이긴다(계12:11).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 Sabine Baring-Gould는 1865년에 이러한 교회의 영적인 갈등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승리를 소망하는 아름다운 노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이여! 전장(戰場)을 향해 진군해 나갑시다.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아갔듯이
승리의 깃발에 사탄의 군사들이 도망치리니
그리스도의 군병들이여! 승리를 향해 나아갑시다.
지옥의 기초가 찬양의 소리에 진동하리니
형제들이여! 목소리를 높여 크게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2. 영적전쟁에 대한 6가지 일반적 반론

어떤 사람들은 영적 전쟁을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을 묘사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영적 전쟁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론은 다음과 같다.

(1) 영적 전쟁은 원시적이고 과학 이전 시대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영적전쟁에 관한 이러한 현대주의적인 관점은 서구 교육 체계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는 것을 용(龍), 요정(妖精), 도깨비와 유령과 같은 것과 같은 류(類의) 것으로 조롱한다. 이 문제는 현대적인 과학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속기 쉽고 검증되지 않은 원시적이고 과학 이전 시대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가의 선택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은 과학적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과학에 있어서 만연되어 있는 자연주의적인 전제들을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과학적인 검증의 결과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악한 영의 존재를 믿는 것은 검증의 대상이 아니다.

(2) 귀신과 악한 영은 성경의 현저한 주제가 아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진술로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성경이 악한 초자연적인 실체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증거를 말하고 있다. 사탄과 악한 세력 간의 갈등은 성경 신학의 주된 주제이다. 이러한 주제는 최근에 에드몬튼 침례교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Sydney H.T. Page의 Powers of Evil: A Biblical Survey of Satan and Demons란 책에서 잘 다루어지고 있다. Page는 독자들에게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귀신과 관련된 본문들을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성경에서 귀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횟수에 상관없이, 문제의 핵심은 귀신과 악한 영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원수로서 논의되고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3) 악한 영의 실체에 대한 경험은 선교지, 특히 비 서구세계에서만 일어난다.
여러 교파의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이 귀신은 아직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이나 이교적인 행습(行習)이 만연(漫然)된 곳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탄이 복음화 된 서구 혹은 한국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정확하지 않고 위험한 발상이다.
첫째로, 사탄의 활동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되고, 복음의 영향이 감지되는 지역에서는 멈추었다는 개념은 성경적인 지지를 찾기 어렵다. 실제로 성경은 신자들에게 악한 영의 지속적인 공격에 대해 경성(警省)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둘째로, 서구 사회는 점차적으로 기독교에서 멀어져 가고, 다양한 이교(異敎), 비기독교적 종교와 다양한 이단적인 신앙과 행습들이 지난 2세기 동안 만연해 가고 있다.
셋째로, 최근 몇 년 간 직접적이고 명백한 형태의 사탄의 활동이 상당히 증가일로(增加一路)에 있다.

(4) 사탄의 활동의 2세기 이후 중단했다.
어떤 신자들은 귀신의 활동은 예수님의 사역 기간 동안 특별히 현저한 현상이었지만, 1세기 이후에는 점차적으로 약화되어 사도시대 이후에는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교회사는 다른 증거를 제시한다. 귀신들림과 축사(逐邪) 뿐 아니라 이방 종교에 나타난 귀신의 속이는 사역에 대한 기록이 속사도와 교부들의 저작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교부들은 귀신의 해악적(害惡的)인 행위를 드러내기보다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시고 보존케 하시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5) ‘전쟁’이란 용어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묘사가 아니다.
우리가 속한 나라가 평화를 갈구하고 전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과 같은 주제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버드의 신학자인 Harvey Cox는 그의 최근의 연설에서 영적 전쟁과 같은 개념을 싫어한다고 표현했다. 그는 “나는 군대적인 비유와 전투적인 상상에 호의를 가지지 않는다”고 빈정거렸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전쟁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무장한 군인들의 충돌이나 혹은 사람들 가운데 적대감을 야기 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형용사인 ‘영적’(spiritual)이란 용어를 상당히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이 생물학적인 면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체에 관한 독특한 영적인 차원이 있다. 매일 매일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보이지 않는 인격적인 힘이 있다. 이러한 영들은 모두가 긍정적이고 유익한 것이 아니다. 이들 중 악한 영들이 많이 있고 악한 영들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려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악한 영의 실체를 인식하고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한다. 따라서 영적 전쟁에 관한 성경적인 비유는 이러한 영적인 세력과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악한 영들이 물리적인 영역과 도덕적인 영역에 활동하고 있다. 성경은 이러한 영들이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지게 하는 존재들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자유의 복음은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로서 사탄의 올무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해방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6) 영적 전쟁을 강조하는 것은 억측에 근거한 균형 잡히지 않고, 경험 중심의 신학으로 이끈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전쟁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그 이유는 영적 전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다소 극단적이거나 상상 혹은 억측(臆測)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논의한데로, 또 계속 개진해 갈 예정이지만 영적 전쟁이라는 주제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것이다. 우리가 영적 전쟁이란 주제를 재차 강조하는 것은 성경의 강조로 돌아가는 것이지 결코 경험에 근거한 신학을 발전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신학은 사람들이 흑암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의 경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어야 한다.

3. 영적전쟁을 한 가지 형태의 사역으로 제한하는 것의 위험

영적전쟁을 신자들이 겪는 일반적인 갈등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특별한 형태의 사역으로 이해하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전쟁을 논하는 것은 축사(逐邪), 치유사역(deliverance ministry), 원수에 대항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 혹은 특별한 형태의 권위 있는 기도와 같은 것들로 연상하게 된다. 확실히 이러한 모든 면들은 영적 전쟁의 일면일 수 있지만 어떤 한 가지 형태의 사역이 영적전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망라할 수 없다.
영적전쟁의 고전적인 본문인 엡6:10-20에서 바울은 사탄이 신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의 공격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신자들이 “마귀의 궤계(詭計: methodeiai)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11절)고 촉구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사탄과 그와 연합한 영들이 다양한 접근법을 통하여 불경건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마귀적인 활동을 다른 본문에서 표현하기를 “우리가 사탄의 궤계 혹은 책략(noemata)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다”(고후2:11)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영적전쟁을 폭 넒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적전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일반적인 갈등을 특징짓는 방식중 하나이다.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고 싶든지 아니든 간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나아갈 때, 우리 모두는 초자연적인 반대에 직면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파멸과 넘어지기만을 바라는 대적을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흑암의 권세 가운데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케 하는 복음을 전파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는 대적을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전쟁은 포괄적인 것이다. 영적전쟁은 우리 삶의 모든 면-가족, 인간관계, 교회생활, 이웃, 공동체, 직장 등-을 망라한다. 우리 삶에 있어서 악한 마귀가 그의 악한 영향을 행사하지 않으려는 영역은 없다. 이와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으로 통치하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모든 신자들이 겪는 갈등의 핵심이다. 능력대결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왕국과 어떠한 능력의 원천에 우리가 복종할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마귀만이 우리가 대항해 싸워야만 하는 유일한 악의 형태이며, 따라서 우리가 죄로 인해 넘어질 때마다 비난받아야 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또 다른 대적인 죄와 육신과 세상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세 대적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셨고 도움을 주시고 계신다. 우리의 삶을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그분에게 복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결코 “마귀가 이렇게 했다”는 신드롬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겠다.
영적 전투 혹은 갈등과 같은 은유(隱喩)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적인 노력을 행사하는 문제만이 아님을 상기시켜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초인간적인 능력, 충성, 관계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 떠나서는 이상한 것들이 우리를 대적한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현존하시는 능력을 의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3:16)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강건케 하시는 능력이 없이는 사탄은 다시금 우리를 향한 그의 통치를 주장하게 된다.

4. 균형을 유지함: 우리의 3가지 대적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을 ‘마귀의 장난’, 혹은 ‘귀신의 역할’로 돌리므로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귀신을 악을 대항하는 우리들의 갈등의 한 요소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결코 극단론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들을 죄로 이끌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3가지 형태의 악한 영향력이 있음을 가르친다. 이러한 3가지 대적은 세상, 육신, 마귀이다. 성경의 어떤 구절은 이러한 악한 영향력 중 하나가 다른 두 가지 보다 더 많이 논의되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은 이러한 3가지 영향력들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균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문은 에베소서 2:1-3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1) 이 세상] 풍속을 쫓고
[(2) 마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3)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아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본문은 예수그리스도와의 연합된 관계를 맺기 전 신자들의 존재의 본질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사람은 죽음의 상태 즉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과 떠나 있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과 마귀와 육신의 굴레에 메여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범주의 관련성은 야고보서(야3:15)와 요한서신(요일2:15-17, 3:7-10)에서도 나타난다. 해방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영생의 선물을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가능케 된다(엡2:4-10). 이러한 3가지
능력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지만, 이제 이 영향력들은 더 이상 강제적이거나 불가항력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인해 신자들은 단호히 “아니요” 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3가지 영향력 가운데 균형을 취하는 것이 열쇠이다. 모든 악의 표현을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성향으로 돌리는 것은, 문화의 영향으로 그 모든 악의 원인을 귀신의 장난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귀신이 성경에 언급되어있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하지만, 귀신의 영향의 본질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쉽게 사회로부터 오는 불경건한 부담감이나 악을 행하려는 그들의 성향을 파악하고는, 악한 영이 유혹과 죄를 행하도록 했다고 입술로만 말하지 실지로는 믿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
이와는 달리, 어떤 오순절주의자, 은사주의자 혹은 제3의 물결주의 신자들은 실제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을 악한 영의 사역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만일 더러운 영이 이 문제 혹은 저 문제를 발생한 원인으로 구명(糾明)된다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의 위험은 다른 두 영향력과 능력의 원천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데 있다.
성경은 이 모든 3가지 영향력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악을 생각하고 행하는 내적인 성향(육신)과 불경건한 사회의 표준을 강요하는 외적인 압박(세상)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대적하는 초자연적이며 능력 있는 존재들(마귀) 만큼이나 중요하게 보아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3가지 영향력들은 그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요소들은 다른 두 가지와 마찬가지로 상호 연관성을 자기고 있음을 고려해야만 한다.

육신은 악을 행하려는 내적인 성향 혹은 경향이다. 육신은 우리의 피조성의 일부로서 타락으로 오염되어졌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는 내적 성향이다. 육신은 악한 현시대와 지속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멸망할 것이지만 지금 현재 우리는 이것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무엇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우리를 괴롭히는 육신의 영향을 깨뜨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내적인 성향은 계속 우리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을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만 대항할 수 있다(갈5:15-17을 보라).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불건전한 사회 환경이다. 이것은 불경건한 문화의 영향, 동료들의 압박, 가치관, 전통, 습속, 철학과 태도들이다. 세상은 실제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와 성경적인 가치관에 반대되는 그 시대에 만연된 세계관의 전제들 혹은 시대사조(思潮)들을 포함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문화는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아플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성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 생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등에 지침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따라서 어디서 이러한 불건전한 영향력이 그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지 분별하고, 그것들을 말소(抹消)하고, 경건한 태도와 가치들을 채택하도록 노력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계속되어질 때, 그는 그와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문화를 변혁하는 주체로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마귀는 지적이고, 능력 있고 영적인, 철저하게 악한 존재로서, 개개인의 삶 뿐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악을 영속화하는데 직접적으로 개입해 있는 존재이다. 마귀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내적으로 타락한 자아의 화신 혹은 조직화된 사회적인 악의 상징적 대표(예를 들어, 나치주의)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마귀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며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불순종의 아들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지 않은 불신자들을 지칭한다. 마귀 혹은 사탄은 불신자들의 삶 속에 능력 있게 역사하고 있는데, 악을 조장할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메시지에 반응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 존재이다. 바울은 동시에 사탄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다른 하늘의 악한 영들을 그의 악한 목적을 수행하는데 지원하도록 부리고 있는 우두머리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으로 치닫는 내적인 성향인 육신과 악한 세계관과 문화와 계속적으로 싸워야 할 뿐 아니라, 인격적인 실체로서 악을 조장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마귀와 싸워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3 가지 영향력들은 개별적으로 역사하지 않고 연합적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3가지 영향력을 명백하게 구분하므로 우리 자신의 개인인의 갈등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이해하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이 3가지 영역은 상호간에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조화와 균형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 3가지 영향력 중 어느 하나가 현저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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