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안과 렉시오 디비나 1
개혁정론에서
강영안 교수에 관한 대담을 실었다.
대담 내용은 안재경 목사와의 대담이다.
자료출처 http://reformedjr.com/board05_03/10043성경이 나를 읽어내고, 나의 삶으로 성경을 읽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강영안 교수 인터뷰)개혁정론성경이 나를 읽어내고, 나의 삶으로 성경을 읽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개혁정론이 강영안 교수(미국 칼빈신학교)와의 대담을 진행했다. 미국에서 교수 중인 강 교수가 겨울을 맞아 우리들교회(김양재 목사)와 교회를 위한 신학 포럼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이에 강영안 교수와 대담했는데, 2019년 12월 9일 편집장 안재경 목사가 진행했다. 그 대담내용을 풀어서 전한다.인터뷰 날짜: 2019년 12월 9일인터뷰이: 강영안 교수(미국 칼빈신학대학원 교수)인터뷰어: 안재경 목사(개혁정론 편집장)안재경 목사(이하 안): 교수님, 이번 겨울에 딱 일주일간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오늘(12/9)은 ‘제6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서울)’에서 〈헤르만 바빙크의 기독교 세계관과 철학〉을 강의하셨는데요. 12월 3일 입국하셔서 바로 다음날 12월 4일 분당에 소재한 <우리들교회>(김양재 목사 시무)에서 주최한 〈말씀 묵상과 공동체〉라는 포럼에서 <읽는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셨습니다. 그 포럼을 좀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강영안 교수(이하 강): ‘제2회 THINK포럼’이었습니다. THINK포럼은 김양재 목사의 목회 방침을 약자화한 것인데요. Telling(고백[내 죄를 고백하고 말씀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간증]), Holifying(거룩[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목적으로 둔 성도의 삶의 방식]), Interpreting(큐티[구속사적 말씀 묵상으로 삶을 해석하는 과정]), Nursing(돌봄[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를 돌보는 것]), Keeping(적용[말씀에 따라 십자가 지는 적용으로 가정과 이웃을 살리는 것])의 앞 글자를 따서 THINK라고 부르더군요. .안: <우리들교회>가 걸어온 걸음이 독특한데요. 교계 내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보자는 말도 하고요.강: <우리들교회>가 설립된 지 채 20년이 안 된 것 같은데요. 대형 교회로 성장했더군요. <우리들교회>의 특징이 오직 예배하고 말씀 묵상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인데요. 이 포럼을 열게 된 동기가 지금까지 교회가 주력해온 교회 프로그램, 그리고 양육 내용을 신학적으로 점검해보고 정립해보자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작년에는 <우리들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과 죄 고백을 교회 역사 전통을 통해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졌더군요. 서양 전통에도 공개적인 죄 고백 전통들이 있었으니까요.안: 맞습니다. 제가 쓴 신학석사 논문 주제가 바로 죄 고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교회에서 처음에는 죄 고백이 공개적이었습니다. 이후에는 그것이 사적인 고백으로 바뀝니다.강: 고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통, 종교개혁 이후의 죄 고백 전통을 배경으로 <우리들교회>의 죄 고백을 작년에 다루고 올해는 성경 읽기가 주제였습니다.안: 성경 읽기를 가지고 포럼을 연다는 것이 신선한데요.강: 내가 먼저 발표하고 다음에 총신대학원 박용규 교수가 〈한국 교회 대부흥운동 발흥과 확산에서 성경 말씀의 역할〉을 발표했고, 합신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를 지내셨던 송인규 교수가 〈큐티 나눔의 다이내믹스〉를 발표했어요. 송 교수의 논문이 80쪽의 엄청 긴 분량인데, 그날은 30분 내에 발표해야 해서 쉐어링, 즉 성경을 나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집중해서 이야기했어요. 나는 ‘읽는다는 것이 뭐냐?’, ‘어떻게 읽느냐?’, ‘우리가 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를 나누었어요. 읽기의 현상학, 읽기의 해석학, 읽기의 윤리학, 이 세 부분으로 나눠가지고 설명했는데요. 성경이든지 신문이든지 소설책이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무엇을 읽는다고 할 때 읽는 행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강의였습니다.안: 여러 읽기 중에 성경 읽기를 구체적으로 다루셨을 텐데요.강: 내 원고 분량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200자 원고지 350매 분량이었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오랜 읽기 전통에서 기독교의 성경 읽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유대교나 이슬람, 불교나 유교가 다같이 경전 읽기를 소중하게 생각한 전통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전통보다 기독교는 성경 읽기를 강조해 온 전통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 읽기가 강조되어 있지요.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공동독서’(communal reading)였습니다.안: 예, 맞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 1:3)고 말씀하면서 시작하고 있으니까요. 이 읽기는 예배 중에 읽기이니까요.강: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함께 성경을 읽고, 회개하고, 그 다음에 함께 잔치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초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한 사람이 서신을 읽으면 회중은 그것을 같이 듣습니다. 읽고 들은 후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독서’가 교회 전통에 있어 왔지요. 중세 수도원 전통이 형성되면서 읽기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수도원 전통을 일컬어서 흔히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고 하지요. ‘거룩한 독서’, ‘영적 읽기’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해서 씁니다. 개신교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도원 전통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읽기 방식입니다.안: 동양의 읽기 전통은 어떠했습니까?강: 동양에서도 오랜 읽기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좀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문헌이 우리에게는 ‘주자’(朱子), 곧 ‘주(朱) 선생님’으로 익숙한 주희(朱熹, 1130-1200)의 글입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통적인 것을 먼저 말해두어야겠네요. 서양의 수도원 전통이든, 동양의 유교 전통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지고 무슨 정보를 얻고, 얻은 정보를 자기뿐만 아니라 타인과 공유하는 방식의 읽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읽기의 중요한 목적은 사람을 빚어내는 데 있습니다. 사람을 형성시키고 사람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읽기였습니다. 주희는 읽기와 관련해서 공부하는 방식을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대비합니다. 하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입니다. 물론 <논어>에서 공(孔) 선생님, 곧 공자(孔子)가 한 말을 빌려온 것이지요. ‘위할 위(爲), 사람 인(人)’이지요. 이 때 사람은 타인이죠, 타인. <논어>에서 ‘인’자가 나올 경우 대부분 타인을 뜻합니다. ‘위인지학’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란, 과거 시험을 친다든지, 아니면 자기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이에요. 내가 얼마나 아는가를 남한테 과시한다거나 하는 공부 방식이지요.그런 공부와 전혀 다른 것이 뭐냐 하면 ‘위기지학’(爲己之學)입니다. ‘위할 위(爲)’자에다가 ‘자기 기(己)’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이지요. 자기 자신을 세우는 공부, 즉 자기 자신을 사람으로 제대로 빚어가는 공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유학이 뭐냐’라고 물으면요. ‘위인지학’이 아니라 ‘위기지학’이라고 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험을 친다든지, 많은 정보를 모아 남에게 전달하는 목적의 공부가 아니라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공부, 그런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원래 유교의 공부 이념입니다. 유학 전통에서 ‘성인’은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목소리를 듣고, 하늘의 목소리를 따라서 삶을 실천하고 행하는 사람, 그게 성인이에요. 성인은 하늘과 합한 사람입니다. ‘천인합일’된 사람이 되는 것이 유학의 학문 이념이고 공부 이념이에요.안: 흔히들 유학에서는 경서를 달달 외우는 것을 중요시한다고 알고 있는데요.강: 그렇기는 합니다. ‘논어를 읽는다, 맹자를 읽는다, 대학을 읽는다’라고 하지요. 외우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사서삼경>을 읽는 목적은 성인의 말을 읽고 배워, 성인을 닮아가기 위한 것이지요. ‘이미타치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 곧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이미타치오 상티’(Imitatio Sancti), 즉 성인을 닮는 것이지요. 읽기가 경전 읽기를 넘어 성인을 모방하는 읽기 방식이었어요. 주희가 <논어>에 붙인 주를 보면 첫 구절에 곧장 “학지위언, 효야(學之爲言, 效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학(學)은 굳이 말하자면 본받는다는 뜻이다.”라고 말이지요. ‘배운다’는 것은 유교 전통에서 보면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누구’를 본받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 때 ‘누구’는 곧 성인입니다. 성인 반열에 들지는 않지만 본받음의 대상은 선생이나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서양의 수도원 전통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기 위한 것이 수도원의 삶이었고 성경 읽기의 목적이었습니다.안: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읽는 것 정도가 아니라 성인들의 삶을 닮아가기 위해 경전을 읽는다는 것이 동양 전통인데 우리는 공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강: 그렇죠.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죠. 어떤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기 위한 것이죠.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입니다.우선, 성경의 권위를 말씀하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숨결로 쓰였다는 것이고요. 그 다음으로 성경의 유익 네 가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우선, 모든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하죠. 다음으로 우리의 잘못된 삶을 책망하고요. 다음으로, 우리를 바른 삶으로 인도하고, 마지막으로 의로운 삶을 살도록 교육하는 데 유익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네 번째가 중요한데요. 하나님의 사람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씀하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케 되어서 선한 일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책이라고 말씀하죠.안: 성경이 여러 가지 정보가 담긴 책 정도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죠.강: 그래요. 법전처럼 지켜야 할 것, 지키지 않아야 할 것 등의 규칙을 전달하는 책이 성경이 아니라는 것이죠. 역사나 과학이나 철학 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이죠.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는 책입니다. 유학자들도 경전을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경전을 무슨 정보를 얻는 것처럼 받아 적는다든지, 외운다든지, 지식을 축적하는 관점에서 보고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볼 수 없습니다. 교훈과 가르침, 책망받아야 할 것, 바르게 고칠 것들을 고쳐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빚어져 이 땅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서 주어진 책이 성경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경을 성경으로 제대로 읽으려면 어떻게 읽어야 할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강영안 교수가 "렉시오 디비나"를 말한 것은 근래 일이 아니다.
논어, 맹자, 대학을 읽어 '성인을 닮는 것'을
성경을 읽어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말할 수 있을까?
유학에서 글을 읽는 것은 자기 수양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는 것은 인간의 죄와 비참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강영안 교수는 '렉시오 디비나'를
‘기고 2세’(Guigo II)가 쓴 〈수도사의 계단〉(Scala Claustralium)이라는 글을 통해 말했다.
렉시오 디비나, 곧 ‘영적 읽기’ 또는 ‘거룩한 독서’는 네 단계를 밟습니다.첫 번째로 렉시오Lcetio, 곧 읽기입니다.그 당시에는 띄어쓰기가 없었으니까 띄어서 읽는 방식부터 시작해서 읽는 거예요.두 번째로, 메디타치오Meditatio, 곧 묵상입니다.세 번째가 오라치오Oratio, 곧 읽고 묵상한 성경구절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죠. 기도한 다음에마지막으로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 관상,곧 기도한 내용과 일체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겨냥하지요.자료출처 http://reformedjr.com/board05_03/10043
기고가 말하는 마지막 단계는 관상단계로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단계다.
그러면, '렉시오 디비나'의 그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
가톨릭 전통에서, 수도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하는 영성수련법. 그 기원은 불분명하나 오리게네스(185-254)가 "신적 독서에 충실하라" 고 권면한 것을 시작으로 본다. 이후 12세기에 들어 카르투시오회 소속의 수사였던 귀고 2세(Guigo II)가 렉시오 디비나의 실제를 정립하였다.이 방법은 성경을 지성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인격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텍스트를 분석하지 않고 내면화하여 최종적으로는 절대자와의 합일감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개신교에서도 "말씀묵상" 이라고 부르는 활동이 있지만 대응이 가능할 뿐 온전히 같다고 보기에는 좀 다르다.구체적인 단계는 다음과 같다.독서(lectio): 성경 본문을 관찰하고 읽는 단계.묵상(meditatio): 본문을 묵상하는 단계.기도(oratio): 묵상을 바탕으로 기도하는 단계. 대부분의 경우 여기서 끝난다.관상(contemplatio): 절대자와의 합일감을 경험하는 단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무아의 경지라고 한다.자료출처 https://namu.wiki/w/렉시오%20디비나
이 관상이라는 단계는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말하며,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단계이다.
"무아지경"이 이르는 것이 렉시오 디비나의 최종 목적이다.
기고에게,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로 볼 수 있는 영적 존재다.
(출처: 강치원, '중세와 종교개혁의 영성: Lecto Divina에 대한 귀고 2세와 루터의 해석을 중심으로,' 신학지평 18(2005): 196-197.)
그 영적인 존재란 무엇인가?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귀고 2세)7. 관상의 효과"이리하여 사람은 거의 완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http://blog.daum.net/desertgo/7468799
우리가 기도 이상으로 관상의 단계에 들어가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로 보고,
거의 완전히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관상의 단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는 단계로 가야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는 이미 영적인 존재다.
강영안 교수는, "성경은 인문학이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관상기도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귀고 2세는 하나님을 누가복음 15장 11-17절에 나오는 아버지로 묘사하면서,
'서둘러 다가오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했다.
의로운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이 하는 기도의 말뿐만 아니라 그 의미까지도 파악하실 수 있으신 주님은 그 갈망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기도 중에 개입하시며,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달려 오십니다.박노권,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영성훈련, 심리적 치유와의 관계분석, 136, 부록1, '귀고 2세의 관상생활에 관한 편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그들의 말뿐만 아니라 기도의 의미까지 알고 계시는 주님은갈망하는 영혼이 모은 것을 다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기도 중에 개입하시며,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다가오십니다.자료출처 수도승의 사다리 p. 203
기독교인의 기도가 이런 기도인가?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관상의 단계에 이르러,
하나님을 직접 보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거의 완전한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지금의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다.
#강영안 교수는 렉시오 디비나로 목회자와 성도들을 혼미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안재경 목사는 개혁주의 정체성과 전혀 맞지 않는 이런 글을
"개혁정론"에 게재하는 것이 개혁주의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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