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
키르케고르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
나는 묻는다.우리가 신약 성서에 따라서 우리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면서,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관통하는 기준으로 삼아행동하는 것을 지속할 때, 그것은 무슨 뜻인가?신약성서의 생각은 삶에 대해서 뒤떨어진 것인가?게다가 이 사건들의 상태가 드러내는 거대한 불균형을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다.그들은 그것에 이러한 전환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인간 종족은 기독교에서 벗어나고 있다.쇠렌 키르케고르 , 《일기》[10] (1852년 6월 19일)
알렉산더 드루(Dru, Alexander). 《키르케고르의 일기》(The Journals of Søren Kierkegaard),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1938.
https://ko.wikipedia.org/wiki/쇠렌_키르케고르
20세기에 이루어진 키르케고르에 대한 유명한 철학적 비판에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것이 포함된다.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철학자들과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불가지론자 철학자들은, 대부분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견해를 지지했지만, 그의 종교적인 견해는 거부했다.(출처: 장 폴 사르트르(Sartre, Jean-Paul), “실존주의는 인본주의다”. 《World Publishing Company》. April 14에 확인함; 허버트 드레퓌스(Dreyfus, Hubert), 《세계 내 존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관한 주석》(Being-in-the-World: A Commentary on Heidegger's Being and Time), Division I. MIT 출판부, 1998. ISBN 0-262-54056-8.)아도르노가 키르케고르의 철학에 가한 비판은, 원래 키르케고르의 의도보다는 덜 신실한 것이었다. 최소한 아도르노의 비평 중 하나인 그의 책인 《키르케고르: 미학의 구조》는 “키르케고르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무책임한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는 키르케고르의 익명 저서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했고, 그런 이해에 근거하여 키르케고르의 전체 철학을 구성하는 바람에, 키르케고르의 철학을 논리적인 일관성이 부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이해 방식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그 가 쓴 작품의 주인공인 오셀로를 혼동하거나, 도스토옙스키와 그가 쓴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를 같은 사람으로 여기는 착각과 같은 것이다.[메롤드 웨스트팔(Westphal, Merold), 《키르케고르의 비과학적 추신으로 결론내리기 읽기》(A Reading of Kierkegaard's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푸르듀 대학 출판부, 1996, ISBN 1-55753-090-4.] 또 다른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아도르노는 오늘날 우리가 가진, 키르케고르의 모음집에 대한 신뢰할 만한 해석이나 번역과는 거리가 멀었다.”[마르시아 모르간(Morgan, Marcia), “아도르노의 키르케고르 수용(Adorno’s Reception of Kierkegaard): 1929–1933”. 《포츠담 대학》. 2006년 6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4월 23일에 확인함.]레비나스가 키르케고르에게 가한 비판의 주요한 내용은, 그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단계들에 집중하였다. 특히 《공포와 전율》에 대해서 그러했다. 레비나스는 신앙의 도약을 비판했는데, 그가 보기에 이러한 윤리적인 매달리기와 신앙으로의 도약은 폭력의 일종이라는 것이다."키르케고르의 폭력은, 실존이 믿음의 영역인 종교적인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 윤리적인 단계를 포기할 때 시작된다. 그러나 믿음은 더 이상 외부적인 정당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 조차, 그것은 의사소통과 고립이 결합되었고, 따라서 거기에서 폭력과 고난이 유래하였다. 그것은 윤리적인 현상을 격하시켜 이차적인 지위를 주는 것의 유래가 되었고, 존재의 윤리적인 기초를 멸시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니체를 불러들이고, 니체를 거치면서 도덕관념이 없는 현대철학으로 완성되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 실존과 윤리(Existence and Ethics), (1963)[46]레비나스는 기독교인의 신앙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처음 언급한 신과, 천사를 보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한 그 신을 믿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정말 종교적인 단계에 있었다면, 그는 아들을 죽이려는 자신을 멈추게 한 천사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고, 계속하여 이삭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초월적인 윤리학”은 마치 살인자들을 그들의 범죄로부터 용서해 주기 위해 생긴 구멍처럼 보이고, 따라서 그것은 수용되기 어렵다.[ 클레어 엘리스 카츠(Katz, Claire Elise), “신의 소리와 타자의 얼굴(The Voice of God and the Face of the Other)”. 《펜 주립 대학》. 2007년 11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April 23에 확인함.]키르케고르의 종교적 관점에 대해,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에 반대하는 논쟁을 제기한다. 만약에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그것은 감각이 있는 존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감각에 관한 용어의 의미로부터 뒤따르는 것이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신이 “Pour soi” 즉 혼자 힘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의식(감각)이며 또한 “en-soi” 즉 본질적으로 하나의 존재로서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은, 말에서 모순된다고 언급했다.사르트르는 아브라함이 불안[48사르트르는 그것을 ‘고뇌’라고 불렀다.]을 견뎌야 했다는, 키르케고르의 분석에 동의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신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도록 말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강의록인 《실존주의는 인본주의이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함을 통해서, 그의 양심이 진정으로 병들게 해야만 한다. 그 말이 부인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포함하는 거짓말을 실천하면서 말이다. 그런 지나친 변장을 통해, 그의 고뇌는 그 자체를 드러낸다.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의 고뇌”라고 불렀던 고뇌이다. 당신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명령에 그는 순종했다. 만약에 정말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라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아브라함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닥친 사람이면 누구나, 첫째, “말하는 사람이 정말 천사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고, 둘째, “내가 정말 아브라함인가?”라는 의문도 지닐 것이다. 그런 의문을 해소할 증거가 어디 있는가? 망상으로 고통 받는 어떤 미친 여성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온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요구 사항을 말한다. 그러면 의사는 그녀에게 묻는다. “그러나 당신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녀는 대답한다. “그는 그것이 신이라고 해요.” 그러면 정말 그녀가 말하는 그것이 신인지를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만약 한 천사가 나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이 천사임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이며, 만약에 내가 소리를 듣는다면, 그 소리가 천국에서 들리는 것으로 지옥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증명할 것이며, 또는 그 소리가 나의 잠재의식이나 병적인 상태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고 누가 증명하겠는가? 누가 그것들이 나에 대한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장폴 사르트르 , 실존주의는 인본주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43]키르케고르의 시각에서, 아브라함의 확신은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그 목소리는 실제로 다른 이들이 그 존재를 증명하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이다.(“문제는 아브라함이 이해받기를 원하자마자 다가온다.”) 키르케고르에게, 모든 외부의 “증거”나 정의는 단지 주체의 바깥에 있는 것일 따름이었다.[“D. 앤서니 스톰의 추신에 대한 주석”. 《D. 앤서니 스톰》. 2007년 5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April 23에 확인함.] 예를 들어, 영혼의 불멸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증거는, 인간이 지닌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에 근거한다.
위키백과 사전에서. https://ko.wikipedia.org/wiki/쇠렌_키르케고르
RBD Counseling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칼 융의 심리학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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