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돈 교수가 말하는 사탄의 종들이 준비한 효과적인 도구는 누구인가?
나는 참으로 궁금하다.
박영돈 교수가 말하는 사탄의 종들이 준비한 효과적인 도구는 누구인가?
박영돈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영돈10월 10일 오전 11:25 ·광기의 시대는 인간 안에 가득히 쌓인 거짓과 추악함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때이다. 그래서 인간의 형상이 흉하게 일그러져 괴물스럽게 변형되는 때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고통의 시기를 맞이한 것 같다. 이 일에 촉매 역할을 하는 이들이 목사의 탈을 쓴 거짓의 사람들이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이때를 위해 자신의 종들을 오래 준비시켰다가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한다. 사탄이 그들의 입에서 품어져 나오는 독사의 독, 진리로 위장된 거짓말을 통해 미혹의 영을 풀어놓는다. 그래서 순진하지만 분별력이 없는 이들을 선동하여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며 주님의 교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 이런 악의 세력과 그 하수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이다. 그것이 이 땅의 살롬을 위한 간구이다.
자료출처 https://www.facebook.com/danielydpark
박영돈 교수가 말하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종들이란 누구인가?
자신과 뜻이 다르다고 해서, 사탄의 종들이라고 말하며,
"악의 세력과 하수인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신학자의 자세인가?
나는 박영돈 교수에게 진지하게 질문한다.
'박영돈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탄의 종들이 준비한 효과적인 도구는 누구입니까?'
과연 박영돈 교수는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든 신학자라면 뜻이 다른 모습을 보고,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저 세상에 이상국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 영혼들을 구원하는 복음 사역에 마음을 다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주로 섬기는 성도들이 견해가 다름으로 인해 오는 현실을 보면서,
어느 누구보다 더 가슴 아파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신학자의 참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찌 신학자만의 몫이겠는가?
주의 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 하는 모든 자라면
서로의 의견이 차이가 난다 할지라도
대화를 통해 풀어가며 서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박영돈 교수는 더 나아가서 저주까지 말했다.
박영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영돈10월 15일 오후 5:46나는 요즘 누군가를 저주하고 싶다. 크리스천이 저주해도 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시편에는 저주 시와 문구가 많다. 저주 구절이 약 백 개나 된다. 대표적인 저주 시 중에 하나가 시편 58편이다. 거기서 다윗이 이 사회의 악인들을 저주한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는다.” 다윗이 이렇게 지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은 것은 그가 다른 이보다 더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선과 악에 대해 예민하고 거기에 심각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이는 그만큼 악과 거짓을 미워한다. 미워할 줄 모르는 이는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악과 죄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는 거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악과 죄를 우리도 미워해야 한다. 오늘날 교인들의 문제는 분노하지 않는 것,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회와 교회에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불의와 거짓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불의를 보면서도 분노할 줄 모른다. 미움과 분노가 없으면 거기에 진정한 사랑도 없다. 미워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악을 행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사랑하기에 악을 미워하는 거다. 그 악한 자를 처단해주기를 기도하는 것은 그 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샬롬이 임할 주의 교회와 이 땅을 사랑하는 것이다.시편 기자가 악한 자들을 저주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을 공의로 다스리신다는 것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저주의 기도를 해야 할 특별한 상황이 있다. 이 사회에 거짓과 불의가 창궐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짓밟힐 때 거짓과 악을 조장하고 확산시키는 사악한 무리, 사탄의 앞잡이 노릇하는 이들을 저주하며 징벌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정의와 샬롬이 임하기를 구하는 것,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이다.
자료출처 https://www.facebook.com/danielydpark
자신과 다르게 말한다고 해서,
악한 자라고 말하며 저주하는 것이 신학자의 자세인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자세인가?
거짓과 악을 조장하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오늘 17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박영돈2019년 10월 17일개인적인 원수를 저주하는 시편의 기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에 근거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저주를 퍼부음으로 원수에게 앙갚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였다. 저주 기도는 자신이 원수 갚고 싶은 복수심을 기도로 승화시킨 것이다. 하나님이 그 누구에게도 직접 원수 갚거나 저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섣불리 다른 이에게 저주를 내뱉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원수에 대한 저주를 쏟아 놓는 것을 허락하셨다. 저주를 하나님과 나 자신 사이에서 해결하게 하셨다. 이렇게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정적으로 정직해지며 하나님과 정서적으로 깊이 연합하게 된다.
자료출처 https://www.facebook.com/danielydpark
박영돈 교수는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원수에 대한 저주를 쏟아 놓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저주를 정당화했다.
자신과 다른 표현을 한다고 해서 저주를 쏟아 부으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박영돈 교수의 글에서 놀라운 것은
자신과 다른 견해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원수"라고 말한 사실이다.
우리가 과연 누구를 저주하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원수"라고 몰아가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징벌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존재란 말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잠 26:2)Like a fluttering sparrow or a darting swallow,an undeserved curse does not come to rest.(Pr 26:2, NIV)Like a sparrow in [its] flitting, like a swallow in [its] flying, So a curse without cause does not alight.(잠 26:2, NASB)
정당한 이유와 근거 없는 저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매튜 헨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흥분은 사람으로 하여금 "까닭 없는 저주"를 남발하게 한다.사람을 오인하거나 사실을 오해하고, 좋은 것을 나쁘다 하거나 악한 것을 선하다고,선을 행한 사람들을 나쁜 일을 행한 악인이라고 억측하여 저주를 한다.미련한 자에게 벼슬을 주어 부라.그러면 그는 옳든 그르든 자기가 싫어하는 모든 자에게 벽력같이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악인이 세도가 당당할 때는 저주나 욕설을 퍼부음으로써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벌벌 떨게 하는 것을 자기들의 특권인양 착각한다.그러나 이런 저주는 가장 무력한 악의 표현이며 자기들의 악함 뿐만 아니라 미련함도 나타내는 것이다.이유 없이 저주 받은 자는 맹렬한 성이 난 자에게 저주를 받았든지엄숙한 파문에 의해 저주를 받았든지 간에, 자기 머리 위를 날아가는 새가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하듯 아무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골리앗이 다윗에게 한 저주도 이와 같이 무력하였다(삼상 17:43).그런 악담은 참새나 제비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제 둥지로 돌아올 때까지는 그 새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이와 같이 저주도 마침내 그 악담을 발설한 자의 머리 위로 돌아올 것이다.자료출처: 메튜 헨리,잠언, 소창길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84), 627.
"까닭 없는 저주"를 남발하는 사람은 "흥분하는 사람"이다.
메튜 헨리는 사람을 오인하고 오해하고 억측하여 저주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저주는 참새나 제비처럼 날아가 버린다.
무엇보다 메튜 헨리는 그런 저주는 "그 악담을 발설한 자의 머리 위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메튜 헨리의 말에 주의해서 우리 자신의 언행과 삶을 삼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서로 논쟁하며 신학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서로에게 유익한 일이다.
때로 우리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서 논쟁이 심해질 수도 있다.
그러할지라도 상대편의 사람을 사탄의 종이라고 말하거나,
상대방을 저주하면서, 그 저주를 성경으로 정당화 하는 것은 지지 받지 못할 일이다.
신학자는 일반 목회자와 성도들 보다 더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다.
신학자가 앞서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저주하고 사탄의 종이라고 하면
과연 그런 신학자가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뜻을 밝히 증거 하면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복하며 나아가자'고 권면하는
참다운 신학자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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