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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꾀르의 해석학을 기독교가 수용할 수 있을까요?

폴 리꾀르의 해석학을 기독교가 수용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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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기독교 사상
리쾨르의 사상과 기독교
 
양명수(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2002년 여름(5호)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1913년 태어난 프랑스 철학자로서, 프랑스에서 드물게 개신교 정신을 바탕으로 사상을 형성한 사람이다.  그는 해석학자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고, 20세기 말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박사논문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을 출판한 이후 〈악의 상징〉, 〈해석의 갈등〉을 써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60년대 당시 유행하던 구조주의와 다른 길을 통해 근대성을 극복하는 학자임을 널리 알렸다. 이 두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이 되어 있다. 그는 근대적 주체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근대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결국 언어에 관심을 가진다. 그에게서 말은 상징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된다.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라고 버려졌던 신화나 상징에 주목하면서 그의 해석학이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살아 있는 은유〉를 쓰고, 1980년대에는 3권에 걸쳐서 〈시간과 이야기〉를 발표한다. 은유 이론이나 이야기 이론은 철학이나 신학 뿐 아니라, 문학과 역사학이나 상담학 등 많은 학문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한편 그는 개신교 정신의 영향으로 정의에 관심을 두어서 정치 철학에 관한 책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출판했으며, 〈정의론〉을 두 권으로 펴내기도 했다. 사실 그의 상징 철학이나 해석학 자체가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포로가 되기도 한 그는 근대적 주체의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인간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실천력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인문학적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해석학은 그런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서 실천을 위한 설득력을 형성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리쾨르의 해석학을 정의의 형이상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가들의 사상이 모두 그렇듯이 그의 철학은 정치학이나 법학 같은 사회과학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 인간 주체의 문제
 
폴 리쾨르의 인간관에는 창세기 신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인간이 고통의 책임자로 등장한다. 사람이 마음을 잘못 먹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고, 그런 인간의 악에서 고통이라는 악이 비롯되었다. 이것을 리쾨르는 창조론에 있어서 우주론이 인간론으로 바뀌는 것으로 본다. 악의 문제에서 인간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악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통과 고난을 운명적으로 끼고 살도록 세상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창조 원리에 폭력과 악은 없었다. 원래는 보기에 좋은 아름다운 세상인데 사람이 마음을 잘못 먹어서 세상이 어지럽게 되었고, 치열한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고통스런 세상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사람이 자유로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기대한 책임,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희망을 가진 책임이 있지만, 그 책임은 악을 도모했기 때문에 져야할 책임은 아니다. 그리하여 '좋으신 하나님'의 관념은 유지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 때문에 악의 가능성은 우주 원리에 처음부터 내재해 있지만, 악의 필연성이 우주의 원리는 아니다. 악의 가능성은 자유를 위해 필연적이요, 따라서 악의 가능성은 인생의 영광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에서 생긴 것이요, 악을 행할 수도 있는데 선을 행할 때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사람의 마음이 부패하여 악의 가능성이 악의 필연성이 되었다.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사람이 죄짓지 않고 살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한다. 리쾨르가 헤겔보다 칸트를 더 좋아하는 것도 칸트가 인간의 근본악을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악의 문제에서 책임자로 등장하면서 주체로 등장한다. 그 점이 기독교 인간관의 핵심이요, 신학은 그 점 때문에 인간학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리쾨르는 그런 기독교 사상에 서 있다.
리쾨르는 철학이란 결국 주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학문이라고 본다. 세상이 사람과 관계되지 않은 채 그냥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보려는 노력은 옛부터 여러 가지 철학 양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리쾨르는 인간의 주체성을 확립한 근대의 주체 철학을 중요하게 본다. 칸트는 선악의 실체를 거부하고, 그것을 주체의 의지 문제로 본다. 중세의 실체 개념이 근대에 주체 개념으로 바뀌면서 선악의 문제도 인간 주체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것은 리쾨르가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전환이다. 칸트는 기독교처럼 선을 하나님이라는 실체로 보는 생각도 거부하고, 악을 실체로 보는 이원론적인 종교도 거부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선악의 문제에서 진정한 인간학을 세운다. 선과 악은 모두 인간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정언명령이 주어져 있는데, 그대로 하면 선이 발생하고 거기에 어긋난 마음을 먹으면 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더 이상 이미 존재하는 무슨 세력이나 실체가 아니라 그때 그때 인간의 마음먹기에 따라 발생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가치의 주인으로서 세상의 주인이 된다. 권위의 근거가 사람 밖으로부터 사람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사람은 바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양심대로 살면 된다. 가치의 주인으로서 사람은 명실공히 주체가 되고 정치적으로는 주권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물리치고 국민 주권을 확립한다.
 
기독교에서는 선이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라는 실체가 선이요, 악은 실체가 아니라 선의 부재일 뿐이다. 선의 결핍은 그늘을 만들고 그 그늘은 하나님에게 등을 돌린 인간 때문에 생긴다. 다시 말해서 악은 처음부터 무슨 세력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맘과 의지에서 나온다. 악이란 악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볼 때 선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악은 인간에게서 나온다. 아름답고 선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요, 내가 선한 일을 했어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악은 인간이 한 짓이다. 악은 내 책임이다. 인간사를 통해 겪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의지대로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나쁜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이 그 사람의 책임은 아닐지라도 결국 인간 공동체의 책임이다. 여기서 선한 하나님의 무능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기독교는 악의 문제에서 인간에게 책임을 집중시킨다.
 
그런가 하면, 선과 악을 모두 실체로 보는 세계관을 가진 종교는 고통과 악은 운명이 된다. 악은 처음부터 우주를 운행하는 원리요 세력이기 때문에 악이 없는 세상을 꿈꿀 수는 없다. 그런 종교에서는 체념이 가져다 주는 평화를 즐기는 대신 인간의 주체성이나 역사의식은 약화된다. 세상의 악을 없애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울 까닭이 없고, 웬만큼 살면 된다. 악이란 어차피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기독교에서는 선이 하나님이라는 실체이고 악은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다. 이원론 종교에서는 선과 악이 모두 신적인 힘을 지닌 실체다. 근대 주체 철학에서는 선악이 모두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다.
 
리쾨르에게는 근대 주체철학의 공헌이 중요하다. 사람을 진정한 주체로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철학에는 인간의 한계가 없고, 은총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인간의 선한 품성으로 '목적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지와 무능을 얘기해 가지고는 사람을 주체로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섭리나 운명론을 거부하고 인류 공동체가 이룩해 나가는 진보된 역사의 꿈을 키웠다. 세상은 사람 때문에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처럼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역사가 중요해지는 것은 중요하다. 리쾨르는 이 세상의 개혁을 중시하고 그리하여 정의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상징은 세상을 다시 그리는 것이다. 세상을 새롭게 하는 힘을 상징에서 보려는 것이다. 그것이 은유의 힘이다.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윤리가 없다고 하는데, 그때 윤리란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리킨다. 그처럼 세상의 변화를 중시하면 인간을 긍정해야 한다. 사람에게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 점에서 근대의 공헌이 크다는 것이다. 리쾨르 철학은 전체적으로 근대를 극복하려는 것이지만, 근대를 거쳐서 근대를 넘어서려는 것이다. 그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르다. 리쾨르가 근대의 공헌을 인정하려는 데에는 결국 사람에게 희망을 가져야 새로운 세상을 일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희망을 갖는 방식은 근대적 방식밖에 없을까? 철저하게 인간의 실천이성을 희망의 근거로 삼은 근대는 인간에게 실망하고 나면 방향을 잃는다. 그리하여 리쾨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를 비판하고 의식철학의 철저한 주의주의(主意主義)를 비판한다. 코기토와 달리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리쾨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따라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라고 본다. 의식에 잡히는 자아는 위장된 것이요, 진짜 자아는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다. 그 무의식을 해석함으로써 사람은 자기를 찾는다. 결국 자신만만한 주체는 사라진다. 나를 내가 모르고, 나의 의지를 내가 조절하지 못하는 데 어떻게 주체라고 할 수 있는가. 어찌 보면, 프로이트의 비관론은 죄짓지 않을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제와 통한다.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그렇게 무능한 인간에게 어떻게 희망을 걸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선이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악은 어떤 신적인 세력이 아니요, 사람이 악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만 마음을 돌이키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악의 길로 너무 멀리 나가 있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인간의 죄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리쾨르는 휴머니즘과 다르고 아우구스티누스와 가깝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그렇지 아니하였다. 인간은 악하고, 선에 대해 무지하고 무능하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 창세기 신화에는 인간이 죄지어 타락하기 이전의 모습이 있다. 사람은 지독히 타락해 있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다. 사람은 그 본래성 대로 선을 바라고 있지만, 선이 무언지 모르고 선을 실현하는 데 무능하다. 선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데, 그러나 사람이 본래 바라던 것이므로 낯설지 않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언제나 용서와 함께 할 때만 의미가 있다. 용서의 은총과 함께 기독교인은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안다. 그러므로 리쾨르가 볼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프로이트와 달리 자학적인 도덕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도덕주의에서 해방한다.
 
요약하면, 기독교는 휴머니즘과 다른 방식으로 사람에게 희망을 둘 수 있다. 리쾨르의 사상에는 그러한 기독교 철학이 깊이 배어 있다. 리쾨르는 이 역사에 희망을 두기 위해 근대 휴머니즘의 공헌을 받아들인다. 사람이 희망이다. 그러나 그는 교만한 인간 주체가 부딪힌 허무주의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희망의 근거를 사람에게서 찾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은총을 말하고 종교현상학을 끌어온다. 리쾨르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희망을 둔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그의 철학은 기독교적인 인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2. 역사관과 해석학적 순환
 
그의 인간관은 역사관에도 반영된다. 그는 헤겔의 철학을 끌고 들어와 정신분석을 해석한다. 정신분석에 따르면 현재의 의미는 과거에 있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따르면 현재의 의미는 미래에 드러난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고고학을 얘기했고, 헤겔은 의식의 목적론을 얘기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리쾨르가 볼 때 헤겔은 현재적 현재를 강조하는 '코기토'를 수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리쾨르는 헤겔의 역사내재주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리쾨르는 헤겔의 목적론에 대항해서 종말론을 말한다. 헤겔의 목적론은 역사의 완성을 역사 내에서 찾고 마침내 절대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시각에서 볼 때,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못하며, 오직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 마침내 이루어질 선의 승리나 역사의 완성은 사람의 과업이 아니라 하늘의 은총이다. 리쾨르의 역사관은 그런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악의 문제에 대한 이해에서 역시 헤겔은 근대 주체 철학에 선 사람이요, 리쾨르는 반성철학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의식철학을 극복할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에 기댄다. 모든 것은 사람이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다. 그래서 리쾨르는 절대지가 아니라 믿음의 지성 또는 희망의 지성을 말한다. 지성이 중요하지만. 끝까지 다 파악하는 지성이 아니라 끝이 열려 있는 지성이다. 사람의 죄를 깊이 생각할수록 은총의 문제가 제기되고, 헤겔 식의 역사 완성은 없다. 사실 헤겔에게는 악의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 절대정신의 자기전개 과정인 역사에서 악은 변증법적 발전을 위한 계기요, 그런 점에서 악은 악이 아니라 부정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개인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사상이다. 사실 헤겔에게는 개인이란 우연에 불과하다. 거대한 정신의 역사가 필연이요, 개인은 우연이다. 개인이 저지르는 악, 또는 악 때문에 고통을 받는 개인은 정신의 흐름에 묻혀 그리 중요치 않다. 거기에 비하면, 칸트는 인간의 근본악을 인정하면서 완성을 희망 사항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그 희망에서 생기는 믿음을 말한다. 말하자면 그가 말하는 '이성종교'는 끝이 열려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 점에서 리쾨르는 칸트를 좋아한다.
 
리쾨르가 말하는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개념에도 기독교의 영향이 깊이 들어 있다. 그는 해석학적 순한을, "믿어야 안다. 그러나 알아야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 인식론에서 따온다. 귀속과 거리의 순환 관계를 말하려는 것이다.
 
먼저 귀속을 보자. 리쾨르에게서 텍스트의 의미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다. 말의 뜻은 삶의 뜻과 연관된다. 말이 말하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진리 문제다. 독자는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삶의 뜻을 찾는다. 텍스트나 독자나 모두 삶의 뜻을 찾는 것인데, 독자는 텍스트가 하는 말을 해석하면서, 텍스트가 찾던 삶의 의미를 나름대로 찾는다. 그런데 리쾨르에게는 삶의 의미는 이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귀속의 문제다. 사람은 이미 있는 의미의 세계에 귀속되어 있다. 그 점에서 의미의 생산자인 근대 주체와 다르고 하이데거에 가깝다. 하이데거에게서는 존재가 언어로 등장하면서 인간과 관계하는데, 언어의 핵심은 존재 쪽에 있어서, 인간은 말을 하는 것보다 존재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근대 이후에는 말을 하는 것이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서 말이란 우리가 '하는 것'이기 보다는 '듣는 것'이다. 리쾨르가 하이데거를 수용한 것은 인간학을 넘어 삶의 깊이를 다시 찾으려는 노력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가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은 근대 주체를 수정하는 점에서 리쾨르에게 매우 유익했다. 사람은 존재에 귀속되어 있고, 그 존재의 소리를 들었던 방식 곧 전통에 속해 있다. 사실, 기독교에 의하면 태초에 '말'이 있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언어성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언어성과 유사하다. 사람이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말을 거신다. 언어로 나오는 하나님 때문에 사람의 말문이 트이고, 사람은 할 말을 한다. 할 말을 하는 것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뜻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사람은 거기에 귀속되어 있다. 말문을 열어주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사람은 말하며 자기 세계를 이룩해 나간다. 리쾨르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와 같은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방법론의 중요성을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귀속만큼이나 거리 두기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진정한 해석의 순환을 이룬다. 그것은 일단 근대의 주체철학의 공헌을 수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방법론 없이 존재론에 기울면, 인간의 주체성이 약화되고 사람에게 희망을 두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면 역사의식이 약해지고 전체주의적인 정치체제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하이데거가 나치정권에 협조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물론 방법론만 발달하면 진리를 사람이 손에 쥐게 된다. 진리를 부리게 된다. 진리에의 개방은 촌스러운 일이 되고 주체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와 같은 교만한 근대적 주체를 수정하려고 리쾨르는 하이데거 철학을 중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방법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학을 배제한 존재론이 아니라 인간학을 수용한 존재론을 세우려고 한다. 그것은 아마 개신교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카톨릭 신학에 비해 개신교 신학이 인간학에 더 가깝다. 개신교는 인간의 체험을 중시하고 그래서 주관주의의 위험과 함께 인간의 주체성을 얘기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세속화를 얘기할 수 있는 신학이 이미 종교 개혁자들에게 보인다. 세속화란 교회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일터도 성스러운 곳으로 보려는 태도다. 그와 같은 공간과 시간의 균질화가 종교에서 인간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처럼 인간이 중시될 때 참된 해석학적 순환을 말할 수 있다.
 
맺는 말 
리쾨르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 체계를 이룩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거룩함의 문제가 중요했고, 그것으로 주체철학을 수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근대(近代)로 들어 사실이 아니라고 배척 당했던 상징이나 신화를 다시 끌어들인다. 거룩함의 세계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풍요로운 세계다. 뜻이 넘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세계다. 모든 것을 사람 뜻대로 꾸려 나가려고 한 근대를 수정하는 것이 그의 상징철학의 의도다. 그러나 그는 근대의 과학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은 비신화론화를 중요하게 본다. 비신화론화을 거치지 않으면 종교는 얼마든지 사람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근대적 이성의 공헌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리쾨르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되 어디까지나 인간의 주체성을 살리려고 한다. 또는, 인간의 주체성은 은총 안에서의 주체성이다. 근대 들어 상당히 진척된 인간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데서 생기는 희망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서 생기는 희망을 중시하려는 것이 그에게 들어 있는 기독교의 영향이다. 거기서 그는 우상파괴의 정신을 보고, 지금의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힘을 본다. 리쾨르에게서 기독교 정신이란 근대와 다른 방식으로 사람에게 희망을 두는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의 원천이다.     
 (자료출처 http://www.saegilchurch.or.kr/quaterly/sg02su/02sutheology.html)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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