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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사의 생각

"현실적 사안에 대한 신학적 사고와 반성"에 대하여

코람데오 닷컴에 아래의 사설이 실렸습니다.
도대체 어디가서 배우라는 것일까요? 

아래 기사 자료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기독연구원 느헤이먀 신학교'를 언급하며 그곳에 간 학생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도 들린다. 가르치기는 제대로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졸업하고 나가서 딴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관절 어떻게 가르쳤으면 딴 것에 쉽게 홀리는 학생들이 되었는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최근에 문을 연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신학교가 있다. 거기에 SFC 출신 간사들이 한 해에 두 명이나 입학을 했다. 전업 교수들이 거의 없는 신학교에, 그리고 교단 교회가 없기에 안정된 교회 봉사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그곳에 왜 학생들이 찾아갈까?

(자료출처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9567)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 무엇을 배울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모임도 가지네요~ 


Nehemiah 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over a month ago 
Non-profit organization - 1,111 Likes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신학연구과정에서는 본회퍼 읽기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던 정치적 행동주의자요, 급진 신학자로 알려진 본회퍼에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고자 했던 경건한 신앙인 본회퍼,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 됨이란 무엇인지 고민했던 본회퍼를 찾고자 합니다.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오늘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제자직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더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일시 : 매주 금요일 오전 10:30 - 12: 30 장소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재 : 나를 따르라 (디트리히 본회퍼 선집 5권), 대한기독교서회(2010) 수강료 : 무료 진행 : 김동춘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 문의 : 김경모 (010-4059-1589) * 참여 의사가 있는 분은 댓글을 남겨주세요. * 오늘(9/12) 첫모임을 시작하여 '값비싼 은혜'를 다뤘습니다. 다음 주에는 그 다음 장 '제자직으로의 부름'(52-80)을 읽습니다. 

(자료출처 http://www.social-peek.com/Keywords/대한기독교서회/)


이 나라는 점점 더 본회퍼에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일전에 이광호 목사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신학사상은 건전한가?
(이 글은 고려신학대학원 유해무 교수님과 화란의 아뻘도른 신학교에서 연구중인 성희찬 목사님께 보내는 이광호 목사님의 서신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세상은 어울리지 않게 분주한 제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국가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자체 위기 속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의미도 알지 못한채 성탄절을 지킨다고 떠드는 소리들을 쉼없이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 교수님께서 신학대학원에서 '본회퍼'를 강의하고 있음과 그에 대한 성희찬 목사님의 '본회퍼를 변명'하신 글들을 잘 읽었습니다. 저 또한 신학석사 과정을 하며 조직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본회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옛 기억을 더듬어 볼 때 저는 그 때 그의 사상이 상당히 매력적이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본회퍼'의 신학사상이 강의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본회퍼는 그 동안 우리 신학에서 수용할 수 있는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신학대학원에서 '본회퍼'가 다루어질 때 그의 신학사상은 결코 우리의 모범이 되거나 본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으며 마땅히 신학적 비판의 대상으로서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의 사상을 '무조건 욕하자'는 말이 아니라 그의 신학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유 교수님의 생각이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교수님께서 지난 11월 22일자 신학대학원 홈페이지에서 '본회퍼 수강생들'에게 보내신 공개글에서는 상당히 오해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특히, '여러분이 새롭게 이해한 본회퍼가 여러분들의 말씀 이해와 신학 수업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향되게 이해되었던 본회퍼가 아니라 충실한 성경학도요 실존적인 삶의 신학자였던 그를 본받아서 여러분 모두가 진지하고 신실한 말씀의 사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씀하신 대목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성희찬 목사님께서는 '본회퍼를 변명하며'에서 그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하였으며 그것이 곧 그의 삶의 중심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본회퍼는 항상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그렇게 살고자 애썼던 점 자체에 대해서 '아니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기에 감추어져 있는 신학적 함정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바 처럼 본회퍼가, 종교에서 말하는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신학과 신앙의 고백인,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닐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야기 하면 
그는 이단사상을 가졌던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자들은 곧 이단 아니던가요? 우리 교단 가운데 그러한 본회퍼가 가졌던 사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우리와 분리시켜야만 할 것입니다.

본회퍼의 신학을 흔히 세속화 신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위 기독교 복음의 편협함에서 벗어나 세속의 언어로 세속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없는 것처럼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관련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세상 속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살수 있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면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인간을 위한 종교적' 언어일 따름입니다. 본회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성 보다는 인간사회에서의 현상적 선(善)을 최대선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을 주관하는 신으로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의 논리에 따르게 되면 '아담으로 인한 영멸할 죄'와 '죄없는 그리스도로 인한 영생'의 개념은 편협한(?) 기독교의 교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1960년대 이후 서구의 다양한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본회퍼의 그런 사상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할 부분입니다.

본회퍼가 얼마나 인간적인 미덕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참된 신학을 배제한 인본주의적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다시 패망할 위기에 놓여있는 세속국가 독일에 살면서 자기의 신학적 언어를 구사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당시 민족주의적 경향에 빠져있던 독일복음주의 교회의 오류 속에서 용기를 다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용기있는 윤리적 결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인해 자기를 부인하는 그런 자세라기 보다는, 부정직한 사회적 변화에 정의롭게 반응했던 한 신학자의 인본주의적 자세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선배들이 본회퍼를 강하게 비판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인본주의적인 윤리적 자세를 보며 그를 본받자고 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윤리적 입장이라면 이단이나 비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 교수님이나 성 목사님이 본회퍼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본회퍼에 대해 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듣는 분들은 아직 그의 신학사상에 대해 제대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다수일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본회퍼를 이야기 할 때는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본회퍼가 아무리 그리스도 중심의 사고를 했다 하더라도 그 그리스도는 우리의 그리스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해한 그리스도는 죄인의 몸에서 태어난 지극히 선량한 인물이기는 했어도, 하나님께서 동정녀의 몸을 통해 보내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를 했다 하더라도 그의 성경은 역사적 산물로서의 성경이며 우리가 믿는 죄악된 인간세계 밖에서 들어온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실함을 입증한다 해도 그것은 종교적 입장에서의 윤리적 평가이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추어 본 평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한 인물을 막무가내 비판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본회퍼라는 한 인물을 아무렇게나 격하시키고자 함도 아닙니다. 저는 과연 우리가 신앙하는 바 진리가 어떻게 우리 가운데 존재해야 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본을 삼아 배워야할 내용이 어떤 사람들의 사상과 삶인지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평소에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유 교수님과 늘 진리를 추구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성 목사님께 이 글을 쓰면서, 저의 부족한 생각이지만 이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현대처럼 모든 사상이 뒤엉키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본회퍼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향방없이 떠들썩한 이러한 때 그에 휩쓸리지 않고 진지하게 사고해 보고자 하는 그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0. 12. 22 이광호 목사

(자료출처 http://www.siloam-church.org/lecture/sesin/sesin%2067.htm)



교회의 교사들에게 고함
학생들은 교수들의 삶을 통해서 배운다.
승인 2016.04.03  13:44:10

교회는 복음의 말씀을 전해줄 목자들을 길러내는 신학교를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칼빈 이래로, 그 학교에서 봉사하는 이들을 교회의 교사라고 불러왔다. 교회의 교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는 훈련을 목사 후보생들에게 시킨다. 말씀을 읽고 해석하는 훈련이란, 멜랑히톤이 1518년 비텐베르크 대학 취임 연설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원전에서 길러내는 교육을 말한다.

이는 사람들의 생각과 전통에 집착하며 진리의 주변머리에 머문 중세의 스콜라 신학에 대한 반성을 말했다. 결국 개신교 전통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를 읽고 주해하는 전통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교회의 교사들이 성경을 통해서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성경원전을 통해 말씀을 긷는 일과 동시에 복음이 선포되는 자리인 삶이 있다. 교회의 교사는 목사 후보생들로 하여금 시대를 복음의 진리로 읽어내고 적용해 내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목사 후보생들로 하여금 성경을 주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정신과 싸우고 복음의 걸림돌들을 제거하여 참된 교회를 세우는 봉사자로 양육할 책임이 교회의 교사들에게 주어졌다. 목사가 교회를 섬김에 말씀의 봉사자가 되어 성도들이 사는 시대를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는 자들로 교회의 교사들은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교사들에게 이런 역할이 주어졌기에 이들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 고신 교회는 신학교의 문제를 교회의 문제로 늘 다루어 왔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존경을 구체적으로 표시해 왔는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고신 총회 석상에 자문위원이라 하여 원로 목사와 장로들의 자리는 있지만 교회의 교사들의 자리가 배치되어 있는가? 교계 기자석은 배치하면서도 교사들의 자리가 있는가?

이것이 교회의 교사들을 고신 교회가 존중하는 정도의 상징적인 표시이다. 총회는 교회의 교사들에게 자리를 배정해서 참석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 자리를 배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참석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오늘 교회의 교사들은 성경이 역사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지를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온 한국이 숨을 죽이는 시간 동안 교회의 목사들이 어떻게 교회와 사회에게 이 현실을 이해하고 위로할지를 몰라 당황할 때 교회의 교사들은 무엇을 했는가?

한국교회가 추락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런 추락의 원인이 무엇이고, 이를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를 교회의 교사들은 제시하고 있는가? 주일학교가 있는 교회가 50%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교회의 교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슬람이 우리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직접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종교개혁시기에도 이슬람이 비엔나까지 쳐들어 왔기에, 루터와 칼빈 등에 의해서 이슬람 문제가 언급되어졌다.

오늘날 테러가 수시로 터지고 있다. 테러와 폭력의 문제를 어디서 다루어야 하는가? 이것이 단지 윤리의 문제만인가? 한국사회는 양극화로 극도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기업 생태계와 사회적 분위기도, 양극화는 도를 넘었다. 이것이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대형교회와 주변의 미자립교회들, 억대의 연봉과 최저 생활비도 보장받지 못하는 목회자의 사례들, 동성애와 현실 문제들에 대한 극단적인 대치들이 나타나고 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예수님의 복음은 어떻게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오늘 교회의 문제를 다룰 때 성경적 설교와 복음의 선포가 약해진 것에 대해 문제를 삼는다. 기복적이며 번영 신학에 포로가 된 오늘의 강단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최대의 현안이다. 그런데도 신학생들이 설교를 배울 수 있는 가장 귀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교 경건회 강단에서는 어떤 설교들이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때론 총회 산하에서 정치적 이슈가 생기고, 불의한 일들이 폭로되고, 심지어 한 때는 관선이사가 파견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사태가 발생해도 교회의 교사들은 잠잠했다. 지금도 어른들에게 밉보일 말은 지극히 삼간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학생들 입에서 존경할 만한 교수들이 적다는 말들이 쉽게 나오고 있다.

이런 말도 들린다. 가르치기는 제대로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졸업하고 나가서 딴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관절 어떻게 가르쳤으면 딴 것에 쉽게 홀리는 학생들이 되었는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최근에 문을 연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신학교가 있다. 거기에 SFC 출신 간사들이 한 해에 두 명이나 입학을 했다. 전업 교수들이 거의 없는 신학교에, 그리고 교단 교회가 없기에 안정된 교회 봉사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그곳에 왜 학생들이 찾아갈까?

때마다 시마다 역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유의미하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교수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답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학생들은 거기에서 새로운 교회의 희망과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현장을 공감하는 교회의 교사들이 되어야 한다. 학생을 가르치는 책임을 일차적으로 잘 하는 것이 교수의 책임이 맞다.

그러나 학생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물론 말을 통해서 교실을 통해서도 배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사들이 어떻게 현실에 반응하는지를 보고 더 많이 배우게 된다. 교수들의 삶을 통해 복음이 오늘도 역사 속에서 살아있고 숨을 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교회가 공적으로 제시하는 과제에 잘 응답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선생이라면 먼저 찾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교회의 미래가 불투명한 현실에 교회의 내일을 어떻게 담아낼지 담론을 주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신대원을 수도권으로 옮겨야 한다는 토론을 하던 중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서울 종로 5가를 중심으로 수많은 포럼과 학술대회와 세미나가 열린다. 거기에 고신의 교사들이 발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가? 거기에서 발표하고 씨름하는 교수들은 자기 학교에서 불성실하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부류인가? 현장에서 소통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현실을 이해하고 담아내는 작업은 고통스런 작업이다. 그리고 상당기간 멀리하고 있었다면 이를 가까이하는 일이 쉽지 않고 미숙할 수 있다. 그러나 노력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노력하며 교수들이 힘을 모아 공감하며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과 훈련이 있다면 교회의 공감을 얻어가고 신뢰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 사안에 대한 신학적 사고와 반성, 그리고 이를 담아내는 기도의 영성, 그리고 실천하는 윤리는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이는 동시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료출처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9567)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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