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에 대한 오해와 한국교회적 적용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8587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에 대한 오해와 한국교회적 적용김동춘 | SFC 간사 승인 2015.06.12 06:55:36▲ 김동춘목사SFC대표간사미셔널 처치(선교적 교회)의 의미는 레슬리 뉴비긴에서 수많은 질문과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뉴비긴의 미셔널 처치는 한국교회에 잘못 이해되었고 잘못 적용되었다.뉴비긴은 “뼈 속까지 선교사”라고 불리운 선교사였다. 그가 인도에서 35년 선교사역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서 보니 영국의 본 교회는 선교지에 있는 미성숙한 교회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선교가 필요하고, 복음으로 재정립되어야 하는 교회였다. 레슬리는 영국과 유럽에서 선교는 고사하고 교회가 교회 자체의 의미를 잃어버린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래서 영국교회 안에 선교적 교회의 환원과 선교적 DNA를 신학적으로 인식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사명은 이미 사명과 소명을 잃어버린 문화적 교회를 복음적 교회로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 다시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미국 교회들을 중심으로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운동의 원래 명칭은 ‘복음과 문화 네트웍’(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이다. 즉 복음이 오늘날 세속화된 다원주의 문화 안에서 어떻게 그 영향을 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1. 미셔널 처치의 오해 –누구를 대상해야 하는가?(타깃의 문제)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의 주장은 본래 “교회자체가 선교사” 즉, Missionary Church이었다. 그런데 이 주장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강한 도전적 구호가 완화되어 형용사로 대체된 Missional Church 로 변형 되었다. 문제는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를 새로운 의미의 교회형태로 변개시켜 사용하여 Social Mission으로 만들었고 다시 Community Church로 중화시키는 모순을 낳았다.한국교회에서도 선교의 보편화, 사회화가 되면서 정작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갔다. 선교는 지상명령 그대로 “가는 것”과 “모든 민족”에 기본적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해외, 지역을 넘는 개념이다. 물론 영역의 확대, 대상의 확대가 필요하다. 문화선교, 학원선교, 사회선교, 낙도선교, 장애인선교 등 선교를 넓혀야 한다. 하지만 교회가 사회에 다가가 울타리를 허물고 사회 문화선교를 하지만 선교의 핵심은 타문화권 선교이다. 즉 ‘선교’라는 말은 무성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는 작아져 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선교라면,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다~!"(보쉬)는 말이 있다. 선교는 선교이다. 뉴비긴의 정의에 의하면 선교는 타문화권이다. 구체적으로 다른 언어문화를 가진 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선교이다.필자도 예전에 많이 주장했지만 요즘 반성하는 말이 있다. 조금 힘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 농사짓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전문화되어야 하는지 몰라서 한 말이다. 마찬가지로 ‘삶이 곧 예배이다’ ‘노동이 곧 기도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반성한다. 삶과 노동을 강조했지만 사실 예배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예배가 삶이다, 기도가 곧 노동이다 는 말은 잘 안하면서... 예배를 삶처럼 자주 드릴 수는 없을까? 기도를 노동하듯이 할 수 없는가? 사실 기도하는 것이 노동하는 것만큼 어렵다. 예배를 삶처럼 드리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비지니스로 헌신하고자 하는 분들 가운데 간혹 "회사(일터)가 교회" 혹은 "사업 일이 곧 예배"라고 하면서 교회의 공적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본다. 그런 분들 중에는 예배에 빠지는 것에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혹은 꼬박꼬박 지역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조금은 무지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문제이다. 아무리 포스트모던한 사회가 되고 일터와 일상적 삶이 중요하고 심지어 가정이 중요할 지라도 교회는 교회이다. 가정이 어떻게 교회를 병행할 수 있는가? 교회는 교회, 예배는 예배, 기도는 기도이다. 마찬가지로 선교는 선교이다!그런 점에서 미셔널 처치, 선교적 교회라고 했을 때 1차적인 주 관심은 선교에 있다. 그 선교는 주로 타문화권, 특별히 언어가 다른 타문화권에 대해 초점이 가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미 타문화권에 노출되어 있다. 아니 타문화권이 교회의 바운더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외국인근로자, 외국인유학생들이 교회 주변에 있다. 선교지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작년 통계에 의하면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총 인구의 3.5%에 해당하는 170만명이다. 미전도지역의 사람들이 우리 옆에 와 있는 것이다. 열방의 미전도 종족을 입양하던 한국교회 뒷마당에 입양대상인 그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서성거리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이제 선교지이다. 선교적 교회는 전방, 후방이 따로 없다. 해외의 타문화권, 국내의 타문화권을 넘나드는 선교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 바로 안디옥교회처럼...안디옥교회는 선교의 본부이자 최전방이었다. 전, 후방이 따로 없고 피아가 구분 없다. 미셔널 처지(선교적 교회)론이란 더이상 선교는 '선교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교는 초대교회의 상황처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유대와 땅 끝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처음 선교운동이 일어났을 때와 달리 교회가 범세계적으로 존재하는 현 상황 속에서 선교는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교회대로, 파송된 선교사는 선교사대로 동시 다발적으로 선교를 해야 한다.2. 미셔널 처치의 오해 –누가 주체인가?한국 교회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많은 선교비를 -어떤 교회는 교회의 예산 중에 70%를 지출하는 교회도 있다- 지출하면 선교적 교회라고 생각한다. 알고 보면 선교를 지향하는 교회인 것이다. 물론 그것도 엄청 귀한 일이지만 교회에서는 구색을 맞추듯 선교가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된다. 선교헌신예배에 가보면 선교헌금을 위한 헌신예배가 주종을 이룬다. 즉, 선교는 교회의 외적인 활동 중 하나인 것이다. 교회 그 자체 안에 들어오진 않는 것이다. 신학교는 ‘선교사역’을 신철신학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았지 교리의 핵심으로는 가르치지 않는다.분명한 것은 미셔널 처치는 ‘선교를 지향하는 교회’의 수준을 넘어선다. 선교적 교회, 더 나아가서 뉴비긴은 “교회 자체가 선교사(Missionary Church)다.”라고 말했다. 미셔널 처치는 Missionary Church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선교하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 교회’ 미셔너리 처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사라는 말은 집사도 장로도 심지어는 목사도 선교사이다. 신학교도 선교사배출소이다.필자가 중국에서 추방되고 난 후 노회에 자주 참석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님은,“목사님, 선교사가 노회에 왜 자주 오세요?^^”“아, 예. 목사님! 저는 추사(추방된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사역지를 찾고 있습니다.”“아니, 목사님, 선교사가 부름받은 이상 선교지에 뼈를 묻어야지. 한국 땅에 왜 있습니까?”“아니, 목사님! 왜 저만 선교하라고 하십니까? 목사님은 왜 선교사가 되면 안 됩니까? 이제 목사님이 가셔야죠?”------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 분은 저에게 항상 갑이셨다^^)선교의 주체는 교회이고, 교회의 구성원은 곧 선교사이다. 선교는 파송된 선교사가 주체가 아니라 교회 자체가 주체이다. 교회의 주체는 성도라 했을 때, 교회의 구성원들이 곧 선교사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가는 선교사, 보내는 선교사라는 말도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 모든 증인이 선교사(행1:8)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내는 선교사라 할 때에도 나대신 누구를 대신 떠나보내고 최소한의 뒷감당을 하는 소극적인 헌신자가 아니라, 해외 선교지와 나대로의 선교지인 지역사회를 모두 품는 적극적 헌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계를 품고 또한 내가 속한 지역사회의 선교지도 품어야 하는 것이다.요즘 ‘뱀’ ‘밤’이라 해서 비즈니스선교에 새 지평이 열리고 있다. Business As Mission! 그런데 여기에 한 글자가 더 추가되면 좋겠다. Mission이 아니라 Missionary!그래서 Business As Missionary가 되면 좋겠다. 선교의 주체가 분명해 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학생선교사 샘(Student As Missionary), 주부선교사 햄(Housekeeper As Missionary), 담임목사 선교사 팸(Pastor As Missionary)의 인식전환이 일어나면 좋겠다.3. 나오며선교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다. 새로운 돌파가 일어나야 한다. 새포도주를 향해서 낡은 부대를 과감히 뜯어고치는 선택과 집중이 있어야 한다. 어떤 그릇이 중요한가를 따지지 말고 그릇 속에 담겨진 보물인 진주를 전하기 위해 과감한 그릇 교체를 단행해야 한다. 교회라는 그릇이 주님의 복음인 진주를 드러내는데 온통 관심과 집중이 일어나면 좋겠다. 복음을 어떻게 저들에게 전할 것인가? 특히 언어가 다른 타문화권에게 전할 것인가? 선교의 깔때기에 온 마디와 신경이 집중되고 퍼져나가는 교회, 그것이 바로 미셔널 처치이다.
위의 글과 함께 참고 자료로 읽을 기사입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1733최덕성 박사, WCC의 방식과 용어 비판·경계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이대웅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폰트 트윗하기 기사보내기 입력 : 2013.03.03 14:43 “선교-전도 선언서, 세속적이고 강한 독성 지녀”“WCC의 새 선교-전도 선언서(Together toward Life)는 화려하고 매혹적이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와 전도 선언서에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있다. 교회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 영양소-복음의 진리가 없다. 강한 독성을 지닌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상들을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선교-전도 지침을 따라가면 교회가 죽게 된다.”WCC 총회 철회 촉구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최덕성 박사(기독교사상연구원장)가 2일 오전 10시부터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제2연수실에서 개최된 선교신학연구소(소장 이동주 박사) 주최 학술세미나 ‘로잔과 에큐메니즘(Lausanne & Ecumenism)’에서 WCC가 새롭게 발표한 ‘선교-전도 선언서(이하 선언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최덕성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가르쳐 세례를 주고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지, ‘하나님의 선교’가 말하듯 인권과 인간화, 해방투쟁, 신토불이 유형의 생명 충만활동을 하라고 하셨는가”라고 논박했다. ⓒ이대웅 기자최덕성 박사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향해 외쳐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선언서’에 빠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쁜 소식, 예수 구원의 유일성(요 14:6, 행 4:1)’이라는 진리, 생명과 구원에 필수적인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이야기, 영생의 길, 생명 샘, 보혈의 피 소식”이라며 “한국교회는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라는 찬송가 287장을 신앙고백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WCC, ‘하나님의 선교’로 선교 패러다임 바꾸고 주객전도”WCC의 새 선교-전도 선언서는 기존 1982년 선교 선언서가 발표된 뒤 변화된 글로벌 사회의 문화·정치·경제·환경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선교’ 중심에 성령과 생명을 두고, 다양성과 포용성, 역동성과 사회적 관심을 표명한다. 주요 내용으로는 ①창조세계 보전과 생명 ②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글로벌화와 교회와 신학의 주변화 ③포스트모더니즘과 다민족·다문화·다종교 문제 ④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를 포함한 세계 기독인 분포의 변화 ⑤보편주의 기독론에서 보편주의 신중심주의로의 전환 ⑥세속 개념의 하나님 나라 ⑦다양성 안의 통일성 등을 다룬다.특히 선언서는 세계 기독교 인구분포의 중심축이 유럽·북미·대양주에서 제3세계로 이동하는 ‘지형 변화’를 강도 높게 언급하고 새로운 선언서 발표 이유로도 제시하지만, 그 원인은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은 채 엉뚱하게도 ‘이민(immigration)’과 관련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최 박사는 “유럽·북미·대양주 기독인들이 다른 곳으로 이민을 떠난 탓에 교인 수가 급감하고 교회가 퇴락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라고 지적했다.최덕성 박사는 “선언서에 따르면 예수의 성육신은 세상 만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고, ‘선교사 예수’의 사역은 생명을 거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고 변혁하는 활동 모델”이라며 “이는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선교’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선교’와 더불어 선교 패러다임을 바꾸고 주객을 전도시켰으며, 뒤바뀐 일부 내용은 반기독교적이기까지 하다”고 논평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생명’은 지속기간이 제한되는 피조물의 개념이 아닌,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나, 선언서의 ‘생명’은 기독론·구속론적 개념이 아닐 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부족 종교나 한국의 박수무당, 뉴에이지의 구루나 미신적 이데올로기 신봉자들도 환영하고 받아들일 만한 개념”이라고 설명했다.최 박사는 “선언서는 총 112개의 적지 않은 문항들에서 예수가 누구인지, 왜 그가 그리스도인지, 그를 믿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이며 그를 믿으면 무엇을 얻는지에 대한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며 “모든 종교를 통합하려는 거대 에큐메니즘과 폭넓은 에큐메니즘을 거론하는 선언서는 WCC가 꿈꾸고 추구하는 세계 종교통합을 향해 신나게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라고 잘라 말했다.또 선언서가 많은 성경구절을 전거로 인용하여 성경적 기반을 가진 선언문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주장과 근거가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최 박사는 “예컨대 첫 항은 선교를 ‘만물의 생명 충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관심이며 선교”라 정의하면서 요한복음 10장 10절을 제시하지만, 예수의 말씀에 나오는 생명은 자연적인 ‘목숨(bios)’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WCC의 성경 오용과 전거일탈의 오류는 사회구원 지상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로, 성령의 구속사 사역을 세속적 개념의 하나님 나라 활동과 차원으로 제한시킨다”고 밝혔다.“복음주의 용어나 스타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돼”‘선언서’가 복음과 예수 구원의 유일성,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종말론적 기대 등을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선교’ 구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주제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는데, WCC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최덕성 박사는 “WCC의 ‘하나님 나라’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꿈꾸어 온 지상천국이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 취득 조건이 아니라고 본다”며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 통치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가 없는 까닭도 이 때문이고, 여기서 기독교와 WCC, 한국교회와 WCC의 강한 대립과 신학충돌이 드러난다”고 전했다.▲최 박사는 “WCC는 견강부회식 아전인수격 성경 인용을 일삼고, 모든 종교에서 기독교적 요소가 발견된다고 본다”며 “WCC 부산 총회 유치를 통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성도들을 향해 ‘꽃뱀’과도 같은 WCC의 실체를 알려주시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도 있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이들이 말하는 ‘개인적 회심’ 역시 종합하면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는 철저한 자각, 하나님의 나라 곧 이상적 사회 건설과 세상 일에 대한 철저한 태도 변화”이고, ‘제자도’는 이 과제 수행의 실천과 철저성을 뜻한다. 선언서는 결국 개인적 회심, 생명, 제자도의 핵심, 전도를 말하면서도 이를 ‘하나님의 선교’와 그 구도 안에 국한, ‘개종주의는 전도를 실행하는 합법적인 방법이 아님을 인식함이 중요하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최 박사는 “뿐만 아니라 WCC는 선지자적 사명을 앞세우면서도 공산주의 통치자들의 억압과 핍박, 비인도주의 행위에는 침묵해 왔는데, 하나님 나라 곧 정의·평화·인간화 세상이 공산주의 강압통치를 통해서도 이뤄진다고 보기 때문이 아닌가”라며 “WCC는 소련과 중국, 북한의 인권과 신앙의 자유 억압에 침묵하거나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고, 북한 문제를 다뤄줄 것을 요청하는 한국교회의 간청에도 소극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그는 “선언서가 복음주의 스타일로 쓰였다 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바이엘하우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선언서에 사용된 복음주의적 용어나 서술들은 ‘하나님의 선교’ 일변도의 에큐메니칼 신학을 돋보이게 하려는 들러리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전 복음’, ‘통전적 신학’, ‘그리스도의 독특성’, ‘그리스도 안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통, 부활’ 등을 종교다원주의, 만인보편 구원주의, 타종교인에 대한 포용적 의미 안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또 “선언서는 환경론자, 생태학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가들에게 매혹적인 문서가 틀림없고, 기독교의 본질을 사회참여와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투쟁 또는 글로벌 경제위기 타개 등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환영할 것”이라며 “또 만인보편 구원주의, 진리상대주의, 마르크스주의에 길들여진 신학자들, 예수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 ‘다른 복음’을 가진 선교사들도 환영할 것”이라고 비꼬았다.WCC 선교전도위 초대 총무, 레슬리 뉴비긴은 왜 탄식했나최덕성 박사는 WCC의 세계선교전도위원회 초대 총무로 봉사한 레슬리 뉴비긴 주교(Lesslie Newbigin)의 자서전에 드러난 고백으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뉴비긴은 WCC와 IMC(국제선교대회)가 통합되면 평신도들이 복음전도와 선교에 더욱 정진하는 교회생활의 이상적 모델이 되리라 기대했으나, 이는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는 세속화의 격랑 속에 시달리는 유럽교회들에게 기독교 복음과 선교의 본질을 깨닫게 하고 싶었으나, WCC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통전적이지도, 전 복음적이지도 않았다.뉴비긴은 1960년대에 호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 이론이 WCC를 장악하자 크게 낙심했고, 결국 1988년 “교회가 세계 선교를 하지 않을 때 자기 문화의 포로가 된다”며 WCC의 선교 전략을 비판했다. 1990년대 들어 WCC가 종교다원주의를 공식 표방하면서 비기독론 중심의 연합체로 급격히 변질되자 이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본래 의도한 에큐메니즘-교회연합 정신의 중심을 상실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나는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든 인류 문화사 가운데서 유일한 장소 곧 죄와 용서, 속박과 자유, 갈등과 평화, 죽음과 삶 같은 궁극적 신비들을 다루는 결정적인 장소로 바라보고 있다. 나에게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예측할 수 없는 것과 수수께끼 같은 것이 많이 있지만, 내가 아무리 비틀거리며 걷더라도 지난 50년간 거듭 경험했듯 바로 그 십자가로부터 나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고, 그 불빛을 받아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음을 알고 있다.”최 박사는 “IMC를 WCC에 흡수시키는 데 앞장선 뉴비긴의 오판은 인류에게 성경이 말하는 생명 얻을 길을 제시하는 기독교의 선교-전도 기회를 가로막고, 교회 세속화를 가중시키는 변질된 선교운동에 이바지했다”며 “뉴비긴의 실수는 기독교와 WCC 사이에 있는 신학충돌, 신학 패러다임의 차이를 무시한 탓이었는데, 그의 실수와 비탄은 WCC 신학의 독성과 신학충돌에 무감각한 복음주의자들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고 했다.
http://www.imr.co.kr/web_board/read.asp?no=34130&tab_name=%BD%C5%C7%D0%C0%DA%B7%E1&cab_name=%C1%B6%C1%F7%BD%C5%C7%D0%C0%CF%B9%DD&pageno=2&startpage=1&flag=&key_word=&sul_date=&fsize=9레슬리 뉴비긴의 신학에 대한 한 고찰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대학생 때 친구의 권면에 따라 매일 점심 시간 전 30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기독교적 이해를 추구하던 한 젊은이, 몇 년 후 기독교 사역(Christian Ministry)에로 헌신하고, SAM의 지체와 간사로 활동하면서 선교사로 결단한 젊은이,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신학교에서 (영국에 슐라이어마허를 진지하고도 체계적으로 소개한) 죤 오만(John Oman) 밑에서 자유주의적 신학을 공부한 신학생, 그러던 중 로마서 공부를 통해 구속의 중심성과 객관성을 확신하는 이가 된 젊은이, 그리하여 그 열정으로 가지고 1936년 인도의 선교사로 가서 효과적으로 사역하며 남인도 주교(Bishop of South India)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하며 또한 세계 교회협의회(WCC)의 여러 활동들을 감당했던 그 사람이 바로 레슬리 뉴비긴이다.1974년 은퇴 후에는 인도에서 도보 여행으로 영국으로 돌아가(65세) 버밍햄의 셀리 오크 선교사 훈련 대학에서 가르치고, 영국 교회의 여러 문제에 관여한 후 그가 발견한 문제를 지적하는 영국을 포함한 서구 교회에 대한 도전서 The Otherside of 1984: Questions to the Churches를 내었고[2], 프린스톤의 워필드 강좌를 하고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를 낸[3], 그러면서도 늘 검소하고 따뜻한 이웃 환대가로 노년을 보내고, 1998년 1월 30일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따뜻하고 겸손하면서도 용감하게 서구 기독교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었던 인도와 영국 두 세계 모두에 대한 선교사라고 칭할 수 있는 이 영국인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1. 레슬리 뉴비긴의 공헌{종교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의 복음}에서 뉴비긴은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의 문제점과 특히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을(36) 잘 드러내어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레슬리 뉴비긴은 이런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가 지난 300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발전되어 온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잘 드러내어 주고 있다(2장, 3장, 4장, 13장). 지난 300여년 동안 서구 사상은 결국 사실의 세계(world of facts)와 가치의 세계(world of values)를 철저히 나누는 새로운 이원론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옳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 사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뉴비긴은 잘 보여 준 것이다. 더구나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 전통적 기독교 비판은 결국 인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 전통이라는 또 다른 신앙(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뉴비긴은 잘 보여 주었다. 그래서 뉴비긴은 기독교의 합리적 전통과 인본주의의 합리적 전통을 대조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뉴비긴은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기독교나 기독교의 유일성이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옥스포드 대학교의 경제학자였던 데니스 먼비(Dennis Munby)가 1960년대 초반에 쓴 {세속 사회의 개념}(The Idea of a Secular Society)과 이에 근거해 나온 저작들에 전제된 "세속 사회"라는 개념이 신화(myth)라는 것을 잘 지적하여 내고 있다(제17장).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강조와 그것의 사실성, 그리고 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증언에서 우리가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뉴비긴의 강조는 모든 것을 다 상대적인 것으로만 취급해 버리는 이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매우 중요한 공헌이 아닐 수 없다.그 한 부분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으로 이 세상에 임하여 역사 가운데서 진행하여 가고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으로 극치에 이를 하나님 나라[=하늘 나라, 天國]와 교회, 그리고 선교의 의미를 잘 연결하여 쉽고도 바르게 설명하는 일을 뉴비긴은 잘 해 내었다(제9, 10장). 이와 연관해서 그가 선교는 인간의 의무감에서 나타나는 인간적 행동이나 우리 자신의 사업이 아니라, "기쁨의 폭발로 시작"하고(191),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192f.), "새로운 실재의 현존, 곧 능력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현존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195), 그리고 그것은 "진리를 나누는 것"이고(205), 이런 선교의 중심에는 "단순하게 그[하나님]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열망과 그 분을 우리의 삶으로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요(208), "감사와 찬양이 있고"(205),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 "행동으로 표출되는 송영"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귀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209).마지막으로 뉴비긴이 복음 해석자로서의 회중을 강조하며 예수님께서 만드신 믿음의 공동체는 찬양 공동체요, 진리의 공동체이고, 이웃의 관심사에 깊이 있게 관여하는 공동체, 성도들이 모두 이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준비되고 지탱되는 공동체, 서로 첵임지는 공동체, 희망의 공동체라고 잘 제시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높이 사게 된다(제18장). 이런 그의 책을 우리 말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유익이라고 할 수 있다.2. 레슬리 뉴비긴의 논의에서 아쉬운 점그런데 뉴비긴은 기독교 신앙의 정당한 변호를 하려고 하면서 "성경에 뿌리를 둔 기독교 신앙은 우선 이야기, 즉 자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옳게 지적하면서(32f.), (오늘날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대개 그리하려 하듯이) 이를 명제적인 진술과 좀 대립시키면서 논의한다.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인상은 기독교적 이야기에서 명제를 도출해 내는 모든 시도를 다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영원한 형이싱학적 진리의 체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는 것이다(32). 그러나 우리는 바로 정확히 그런 시도를 하였던 헤겔 같은 이가 되지 않으려고 하면서 기독교 이야기로 부터 얼마든지 명제적 진리들을 이끌어 내고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전통적 신학은 계속해서 그런 작업을 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기독교 이야기 가운데서 바르게 기독교적 명제를 이끌어 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지, 그런 명제적 진술을 하는 것이 모두 다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책 자체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명제를 도출해 내고 그것에 근거해서 신학적 토론을 하고 있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이제부터 신학적 논의는 전혀 명제화와는 상관없는 일종의 기사 신학(narrative theology), 이야기 신학(story theology)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기사(narrative)와 명제를 대립시키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은 시도로 보인다. 이는 뉴비긴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런 성향을 지닌 모든 이들의 공통된 문제이다.둘째로, 뉴비긴이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전통들 가운데서 "어느 전통이 믿을만한 것인가를 미리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될만한 외부 기준도 없다. 만일 내가 기독교 전통 안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전념한다면, 그것은 내가 책임져야할 결단이 된다"(128f.)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아쉬움이 크다. 물론 뉴비긴은 폴라니(Michael Polanyi)의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의 논의를 따르면서 우리의 이런 결단과 헌신은 "보편적 의도"를 가짐으로 단순한 주관성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며(129, 207), 또한 "다른 어떤 전통보다도 모든 경험에 대해 더 비중 있는 일관성과 인지성을 줄 수 있는 합리적 전통임을 오늘날의 삶의 현장에서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129). 그는 또 다른 곳에서도 그는 "두 가지 전통의 활력과 온전성을 비교하는" 것이 남아 있다고 하며, "그러나 궁극적 결론은 홀로 재판장이 되시는 분이 ...... 판결을 내리는 종말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111)라고 말한다(125 참조). 결국 이것은 뉴비긴이 일종의 "종말론적 검증"(eschatological verification)을 생각하면서, 그 때까지는 모든 전통들의 대조 가운데서는 "다른 어떤 전통보다도 모든 경험에 대해 더 비중 있는 일관성과 인지성을 줄 수 있는 합리적 전통"으로 드러나는 것, "어떤 전통이 활력과 온전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일종의 기준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 자신도 모르게 전제하면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묻게 한다.그는 물론 뒤에서 우리의 결단은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결단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로 앞의 진술을 보완한다(129). 만일에 그가 진정 이 후자의 보완하는 말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보여 주신 계시가 있고, 그 계시에 충실한 반응만이 믿을만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것을 "외적 기준"을 제시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자주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계시"라고도 말하지만(277), 그것을 그런 외적 기준으로 제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그는 세속적 인본주의, 국가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교 등을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강하게 논의하는 제10장에서의 논의(특히 200, 201)의 요점을 잊은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는 계시를 말하는 기독교 전통도 다른 합리적 전통과 나란히 선다고 말하면서 알라스데어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와 함께 강조하기를 "이런 경쟁적 주장들의 유효성에 대해 판결을 내릴만한 중립적인 재판석은 없다"(109)고 말하는 것이다.셋째로, 그가 때때로 복음 전도(선언적 기능)와 정의와 평화를 위하는 행동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것(봉사적 기능)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과 그에 대한 그의 조화의 시도는 좀 애매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교회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도 무시해 버리는 선교 개념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221). 그러면서 이런 것이 " 그 개념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잘못 사용한 경우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비판하는 이들과 여전히 그런 극단적 오용을 주장하는 이들을 앞에 놓고 그것이 "현재 기독 공동체를 철저히 분열시키는 선교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개념"이라고 말한다는 것이(221, 222) 과연 정당한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뉴비긴의 논의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결국 그가 말하는 100년 전까지도 스코틀랜드에서 학교에서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을 영원히 기뻐하는 것이다"고 배우고, 그것이 별들의 운행만큼이나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36)이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다원주의자들에 의해서 더 이상 사실이 아닌 개인적 의견으로 여겨진 것에 대항해서, 뉴비긴의 논의의 결과로, 아니면 적어도 그의 논의 안에서는 이것이 다시 자명한 사실로 회복되었는가에 대해 물을 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그렇다라고 말하기에는 무엇인가 모호한 점이 그의 논의 속에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뉴비긴이 제시하는 기독교가 19세기 말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믿고 신봉하던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에 대해 뉴비긴 자신이 과연 적극적으로 그렇다고 말하려는 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특히, 그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분은 어떤 사람은 영광을 받게 하고,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만드시지 않았다"(138, 141)라고 단언할 때 이런 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물론 선택은, 뉴비긴이 잘 강조하는 바와 같이, "특권적 신분으로서의 선택"이 아니다(139).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고난과 비난과 굴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국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140, 141)고 시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비긴이 바르트와 같이 "예수님은 나중에야 세상에 나오신 분이 아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 분을 위하여 우리와 모든 만물이 존재한다. 그 분이 인간의 본질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실 때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의 선택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준다"(142)고 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함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논의가 "보편 구원론적 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물론 그는 "우리가 로마서에서 공부한 말씀은 보편 구원론적 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145). 그러나 그는 또한 가장 엄격한 자기 훈련의 요구가 고전 9:27 같은 말씀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복음의 전체적 성격이 긴장을 유지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145). 그는 이로부터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합리적 보편 구원론을 거부하며(145, 146), 또한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못 받을 것인가를 따지는 일에 휘말리는 것과 같은 쓸데없는 논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도록" 한다고 말한다(145). 그러나 그는 왜 "우리는 누가 어디에 해당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은 분명히 어떤 구별을 말하고 있다"고 단언하지 못하는가? 바로 이런 곳에서 뉴비긴의 기독교와 정통 기독교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이다.3. 한국에서의 종교 다원주의 논쟁에서 유의할 점무엇보다 먼저 한국 사회는 서구 사회나 또 어떤 점에서는 인도 사회와도 달리, 기독교가 어느 정도 이 땅에 선포된 상황 가운데서는 이미 우리가 종교적으로 다원적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뉴비긴도 말하고, 다른 많은 이들도 말하듯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한 세계도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곳이었다"(254). 그 초대 교회의 상황과 한국에서는 이런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상황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헌신하도록 하는 기연이 되었다.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사회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결단에 근거한 신앙의 선택을 의미했던 것이고, 때로는 그 결단에는 큰 희생이 동반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한국 상황에서는 종교 다원적 상황은 서구에서 최근에 겪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에로의 변이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서구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 책에서 레슬리 뉴비긴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에 직면해서 지난 몇 세기 동안의 정신사적 작업에 근거해서 이데올로기적인 종교 다원주의나 내포주의를 제시하고 그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결론인양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입장은 상당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뉴비긴을 포함한 여러 비평가들이 잘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 종교 다원적 현상과 (2) 종교 다원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종교 다원적 현상은 불가피한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이런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핍박을 받지 않으면서 또 강제 받지 않으면서 참되게 신앙하고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이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이런 비판에 직면해서 서구의 종교 다원주의자들이나 내포주의자들은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나아 갈 길은 무엇인가고 물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를 유일한 진리요 바른 신앙으로 선택했던 한국 등의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의 기여할 바가 있다고 여겨진다. 유교나 불교나 도교의 도리를 다 살펴보고, 그들이 제시하고 삶의 길을 정진하며 그 안에서 힉(John Hick) 등이 동료 종교인들에게서 발견하는 성인적(聖人的) 삶의 길을 열심히 걷다가도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의 계시에 부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의 자신들의 노력과 구원에의 열망이 참된 것이 아니며, 그것이 진정한 해방(liberation)과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선언하며 다른 이들도 이 유일한 구원의 길에로 초청하는 일을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이것이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서 복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일 것이다.둘째로,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에 반대하는 배타주의(exclusivism)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 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그 다양한 배타주의적 입장 중에서 어떤 태도가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가장 충실한 것인지를 물으면서,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 비판에서는 다양한 배타주의가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어떤 사상을 우리 자신의 사상으로 가져야 하는 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에 반발하는 배타주의에는 크게 나누어서 (1) 바르트주의적 배타주의와 (2) 정통적 알미니안적 배타주의, 그리고 (3) 정통적 개혁주의적 배타주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바르트주의적 배타주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면서,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선택된 사람이고 인간 예수만이 버려진 인간이고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부정되고 다시 긍정된다고 하므로, (1) 실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는 만인 구원론적 정향의 결론에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2)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긍정되나 그 구원에서 자기 스스로를 배제할 사람이 있고 그들은 어린양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는 입장에로 나아간다. 때로 뉴비긴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가 내가 그 분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146).그리고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대개 최종적 구원은 하나님의 대권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전혀 말할 수 없다는 말을 강조하여 말한다(인간 편에서의 불가지론). 뉴비긴의 비슷한 강조를 보라: "그러나 궁극적 결론은 홀로 재판장이 되시는 분이 ...... 판결을 내리는 종말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111, cf. 125, 286, 287, 290, 296); "이런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어떤 제한을 두거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의 영역 밖에 있다고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리고자 하는 어떤 유혹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146). 이 때 뉴비긴은 끝까지 예수를 주와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분들까지도 포함시켜서 생각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뉴비긴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며, 그것이 중심적 질문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단언"하면서 논의하고 있다(285f.). 그는 바르트와 크래머에게 동의하면서 "정말로 신중한 신학자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구원의 가능성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287). 그래서 뉴비긴은 자신의 입장을 규정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유일한 진리임을 긍정한다는 의미에서는 배타주의적이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의미에서는 배타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295).이에 비하면, 정통적 알미니안적 배타주의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위해 죽으셨으나[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타락한 인간 중에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 구속을 믿은 이들은 구원함을 받고, 가기 스스로 이를 저버린 이들은 구원함으로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제한 구원, limited salvation). 이를 정통적 알미니안적 배타주의라고 언급한 이유는 복음주의 입장에서 내포주의를 주장하는 클락 피녹 등은 자신들의 내포주의가 알미니안적 해석에 충실한 것이라고 지나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이에 비해서 정통적 개혁주의적 배타주의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궁극적으로 구원 받을 이를 위해 구속을 이루셨으므로(제한 구속, 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는 결코 무(無)로 돌아 갈 수 없고 반드시 효과를 내고야 만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반드시 유효한 결과를 내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튼튼하고 믿을 만한 구속을 이루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배타주의나 특정주의 입장을 주장한다고 해서 다 같은 사상이라고 하기 어렵고, 이런 크게 다른 배타주의적 입장 가운데서 과연 어떤 것이 성경에 일치하는 것인지를 잘 살펴서, 우리는 성경에 일치하는 일관성 있는 사상을 견지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이 문제를 다루는 우리들에게 최종적으로 부과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하고, 우리는 어디까지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나가려고 하는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묻는 이들에 반해서,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를 외치거나 논의한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해석하는 우리의 해석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각자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를 외치거나 논의하면서도 결국은 기독교의 온전한 진리성에 충실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나만을 위한 진리, 우리 집단만을 위한 진리, 마지막까지는 그 진리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이다. 그 진리는 물론 나의 삶 가운데서 주체적으로 살아져야 하는 주체적 진리이기도 하지만 말이다.이 글에 대한 주(註)------------------------------------------1 편집부의 요청에 따라 이 글은 Leslie Newbigin, The Gospel in a World of Religious Pluralism (London: SPCK, 1989), 허성식 역,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서울: IVP, 1998)에 대한 서평 중심의 논의로 쓰여진 것이다. 탁월한 번역에 감사를 드리고, 때때로 나타나는 번역과 음역의 문제는 본문 가운데서 논의하는 중에 시사될 것이다.2 The Otherside of 1984: Questions to the Churches (Geneva: WCC, 1983), 이는 서정운 총장의 번역으로 {서구 기독교의 위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7)로 소개되었다.3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 (London: SPCK and Grand Rapids: Eerdmans, 1986).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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