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눈뜨는 영성"-박영돈 교수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눈뜨는 영성"-박영돈 교수
박영돈 교수는 과연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인가요?
오늘 자료 검색을 하다가 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제 눈이 의심스럽습니다. 다음 글을 읽어 보십시오.
이 글의 필자 "박영돈"으로 나오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박영돈 교수가 맞는가요???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눈뜨는 영성"
http://www.duranno.com/sl/detail.asp?CTS_ID=7834
자료출처 https://m.cafe.daum.net/pyd5585/FkTW/3956?q=일상%20속에서%20하나님의&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눈뜨는 영성왜 주일날 교회에 그렇게 많이 모이는 기독교인들을 주중에 세상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든가?이런 냉소적인 말을 들을 때 왜 우리들이 이런 비판을 듣게 되는지를 자문해 본다.그것은 아마도 기독교 신앙이 교회의 울타리 안에만 갇힌 채 세상에서는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영성의 문제에서 기인되었을 것이다.영적인 삶을 일상의 평범한 영역과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 교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 된 역 할을 감당하므로 실추된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세속의 한복판에서 영적에너지를 발산하는 일상의 영성을 계발하는 것이 시급하다.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요즘 “흩어지는 교회”가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교인들을 자꾸 교회로 끌어 모으려고만 하지 말고 세상 속에 흩어져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일리 있는 지적이다. 교회를 예배와 교제를 위해 모이는 공동체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흩어져서 행하는 모든 사역을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교회는 주일에는 모이는 교회로 존재하는 한편, 주중에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서의 역할은 비교적 잘 해왔다.최근 이러한 전통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성경말씀대로 모이기를 더욱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그와 함께 이제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에 좀 더 역점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먼저 모이는 교회를 통해 교인들이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으면 세상 속에서 흩어지는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주일 예배를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의 지속적인 효력이 주중의 삶으로까지 파급된다.이렇게 볼 때 주일예배의 중요성이 한층 더 고조될 수밖에 없다.칼 바르트(Karl Barth)의 말처럼, 예배는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중대하고도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주일 예배에 승리해야 한 주간의 삶에 승리 한다”는 말은 목사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공허한 구호만은 아니다.진리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주일예배와 교회에서의 교제와 섬김의 활동들이 교인들의 한 주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모이는 교회를 통해 영적인 은혜를 공급받지 못할 때 세상으로 향하는 교인들의 발걸음은 심히 무거울 수밖에 없다.교인들이 예배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면 어떻게 혼잡한 세속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토저(A. W. Tozer)가 지적했듯이, 현대교회는 “잃어버린 보석”을 되찾듯이, 참된 예배의 회복을 갈구해야한다.삼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 압도되어 경이로운 감탄과 놀램, 그리고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드려지는 영적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하나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영적임재를 말씀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내신다.예배 중에 말씀하시는 인격으로 임재하신다.그러므로 설교는 듣는 심령을 사로잡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신비로운 재창조의 역사를 동반하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전파되어야 한다.이렇게 성령의 권능이 함께하는 말씀이 비록 짧은 설교시간이지만 그 가운데 죽은 자를 살려낸다.죄와 흑암의 권세를 깨트려 암울한 현실을 변혁시키며 그 곳에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게 한다.영적 생동감을 잃어버린 형식적 예배, 참을성을 시험하며 인내 연습을 시키는 것 같은 진부하고 맥이 없는 설교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인 예배를 가장 따분한 종교행사로 전락시킨다.이같이 생명력이 시들어 버린 예배는 세상 속에서 무력한 삶을 낳고 그러한 주중의 삶은 더욱 형식적으로 굳어져가는 예배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한다.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길은 먼저 성령충만한 주일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다.성령의 모으심과 보내심성령은 교회를 세상에서 불러내심과 동시에 세상에 다시 내보내신다.교회를 세상과 분리하심과 동시에 세상과 함께하게 하신다.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불러 모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세상과 구별된 성결한 무리가 되게 하시고 세상에 다시 파송하신다.성령충만은 모이는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은혜이다.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성결의 능력이다.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회봉사 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야 세상에서 빛 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성령의 은혜를 예배, 전도와 같은 종교적 활동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성령을 종교의 울타리 안에 유폐시키는 것이며,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오순절 성령강림은 교회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는 선교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능력 부여의 사건이다(행1:8).칼 헨리(Carl Henry)의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세계선교를 위해 성령의 능력을 받은 종말론적 공동체를 세상 속으로 출범시킨 사건”이다.성령의 은사는 교회 자체의 유익과 발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선교사역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따라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는 자신의 안녕과 영광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존재한다.이렇게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존재목적과 본질적인 사명은 선교이며, 그러기에 교회론은 근본적으로 선교론적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한다.안타깝게도 그 동안 선교는 교회론에서 그다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대부분의 교의학 책에서 선교는 무시되거나 교회의 보편성과 관련해서 잠시 언급될 뿐이었다.그 결과 전통적 교의학의 논리적인 틀 속에 선교론이 들어갈 자리를 찾지 못하고 독립된 신약 분야처럼 발전되어 왔다.다행히 교회론을 선교론적 맥락에서 재조명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일찍이 칼 바르트(Karl Barth)가 교회론의 선교론적 지평을 새롭게 제시한데 이어, 몰트만(J. Moltmann)과 판넨베르그(W. Pannenberg)를 비롯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선교를 주요한 신학적 주제로 다루고 있다.보수신학자들도 이에 못지않게 교회의 선교사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회론을 선교론적 방향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레오나드 스위트(Leonard Sweet)는 개신교는 지난 500년간 계속되어온 ‘개혁 패러다임’에서 이제는 ‘선교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하였다.그러나 교회는 개혁적인 동시에 선교적이어야 한다.교회가 현대 문화를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그 부패한 요소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새로워지고 성결해져야 한다.이런 회개와 개혁이 그칠 때 교회는 속화되어 더 이상 세상 속에서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수행하지 못한다.잊혀진 선교지선교는 해외의 미전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성경은 선교를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낸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다”고 하셨다(요17:18).해외에서 일하는 선교사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다.각자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작은 등불을 밝히는 선교사명이 그들에게 주어졌다.그래서 바울 사도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의 빛”된 사명을 강조한다.“너희가 이제는 주 안에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라고 권면한다(빌2:15).바울에게 있어서 선교란 단순히 복음을 전파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사역은 주로 복음전파와 연관되어 있다.그러나 바울서신은 성령의 사역을 아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다.성령의 사역은 복음전파를 위한 능력부여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과 관련해서 이해한다.성령은 신자를 새롭게 하여 빛의 열매를 맺게 하고(갈3:22),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며(고전12-14), 세상 속에서 빛 된 사명을 감당케 한다.사도행전에서 자주 언급된 성령충만은 거의 대부분 복음전파와 밀접하게 관련된 반면에 바울의 서신서에서는 성령충만이 교회론의 맥락에서 공동체적 성화와 연관되어 있다(엡5:18).이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할 때 교회의 선교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이것이 “선교의 사이클(Cycle of mission)”을 형성한다.먼저 다이내믹한 복음 전도로 인해 복음이 편만하게 확산되고, 이어서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새로운 삶과 사역의 기틀이 잡혀가며, 그와 함께 새로운 지역과 세대를 위한 선교적 관심이 수반된다.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활기찬 복음전파 활동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부흥케 하는데 주력해 왔다.이제 선교 2세기에 접어들어 한국교회는 교세 확장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빛 된 선교사역을 통해 이 사회 속에 하나님 나라를 누룩과 같이 확산시키는 중대한 역사적 책무를 수행해야 할 때이다.더 이상 교회 부흥과 교인 숫자 늘리기에 급급하여 교인 끌어 모으기 식의 전도에 몰두해서는 안 될 것이다.교회가 빛 된 사역에 소홀했기에 세상의 신임을 잃어 버렸고 그 결과 이제 전도가 힘들어지고 있다.한국교회의 거대한 수적 위력이 이 사회가 극단적인 세속주의로 치닫고 있는 것을 제어하는데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하다.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운 종교적인 열심이 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영적 에너지로 환원되어 이 세상에 방출되지 못하고 있다.세속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무기력한 “성스러움”에 교인들이 익숙해져있다.한국교회의 해외선교에 대한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이는 매우 고무적이며 이 일에 더욱 힘써야할 것이다.그러나 문제는 국내 선교지는 거의 영적 불모지와 같은 상태로 방치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이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세속의 한 복판에서 영적 파급력을 발휘하는 온전한 영성을 계발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기위해 교회의 설교와 교육은 선교지향적으로 바뀌어야한다.교인들을 교회생활과 종교적인 활동에만 익숙한 이들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이들이 되게 양육해야 한다.구두를 수선하는 일도 거룩한 소명이라고 한 종교개혁자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 속에 성스러운 부르심이 있다는 것과 일상의 삶이 선교적 의미를 띄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한다.일상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기독교 신앙을 일상의 세속적 일들과 잘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영성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이다.참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윌라드(Dallas Willard)가 말했듯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하나님으로 충만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이는 일상 속의 평범한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신비에 눈뜸을 의미한다.프로스트(Michael Frost)가 그의 책 ⌜일상, 하나님의 신비⌟에서 잘 묘사한 대로, 기독교 신앙은 “비종교적인 속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피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법, 평범한 것을 취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영적인 신자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그는 예배와 기도 속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산다.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기 위해서 꼭 세속의 한복판에서 물러나 종교적 영역으로 도피해야할 필요가 없다.육적인 사람은 예배와 기도와 같은 영적인 행위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잘 느끼지 못하나 영적인 사람은 세속의 비천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한다.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는 소란스러운 수도원의 식당에서 잡다한 일들을 하는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평강과 임재를 누렸다고 한다.래리 크리스텐슨 (Larry Christenson)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을 체험하며, “성삼위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실재를 끊임없이 상기하면 당신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그러나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하는 강한 의구심이 생긴다.대부분 우리들의 경험은 이와 상이하기 때문이다.우리의 생각을 집중하여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일은 우리의 빡빡한 일정과 성취 지향적 성향 때문에 항상 뒷전으로 밀려난다.어쩌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때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기가 쉽지 않다.워치만 니(Watchman Nee)가 그의 유명한 저서 The Release of the Spirit 에서 이 문제를 잘 지적하였다.“한 형제가 주님을 믿은 후 브라더 로렌스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 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그 책을 읽은 후 그는 브라더 로렌스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이와 매시간 기도하기로 약속했다. . . 그들은 계속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그런 식으로 그들의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나아가려 했다.그들은 일할 동안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빠져나온 것 같아 다시 하나님께 신속히 돌이켜야 했다. . .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그들은 자주 기도하며, 주일에도 하루 종일 그리고 토요일에는 반나절을 기도로 보낸다.그렇게 2-3년을 계속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계속됐다.주께 피해 들어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나, 나가면 그들은 그 임재를 상실한다.물론 이것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이다.”워치만 니는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겉 사람이 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즉 겉 사람이 깨져 그 속의 영이 풀리면 환경이나 하는 일에 제약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게 된다고 했다.기도할 때뿐만이 아니라 마루 닦는 작업과 같은 허드레 일을 하는 동안도 임재의식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의 책은 ‘겉 사람이 깨어진다’는 말과 같은 모호한 표현들로 인해 많은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지만, 성령충만한 상태를 그런 식으로 묘사하려고 했다는 의도를 감안해서 읽으면 어느 정도 유용가치가 있다고 본다.성령충만이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속에 사는 것을 의미한다.하나님은 현존(Presence)하실 뿐 아니라 그 임재를 알게 하신다(Revealed).하나님의 임재의식은 인간의 심리에서부터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함께 그 임재에 대한 부요한 의식이 우리 안에 엄습해 온다.그러나 성령을 근심시키면 비록 그의 임재는 계속될지라도 그 임재의식은 죄로 인해 흐려지고 결국 상실된다.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육신의 소욕, 세속의 가치관과 원리를 따라 살기 때문이다.일상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기 위해서는 바울의 말대로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한다(갈5:16).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걷다, 페리파테오)으로 성령안의 삶을 묘사하였다.걷는 것이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성령을 쫒아 행하는 삶도 일상 속에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참된 영성는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가 말했듯이, 어떤 사람의 종교성과 신앙 인격은 그가 특별한 때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보통 때 어떻게 행하느냐에 의해 진단된다.그의 영성은 평범한 일에 임하는 그의 자세에서 드러난다.자연스러운 삶의 흐름 속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부드러움과 자유함이 영성의 질을 말해 준다.그런 온유함과 자연스러움이 인격과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일상의 모든 평범한 것까지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는 증거이다.매일의 평범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그리스도인의 밝은 모습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중대한 선교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칼빈 시어벨드(Calvin Seerveld)는 세상에서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엿 볼 수 있게 해주는 감동적인 일화, 즉 생선장사이였던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아버지는 생선 시장에서 종일 일하시는 전임사역자요 선지자이자 제사장이며 왕이셨다.우리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그것은 우리가 동네에서 생선을 제일 싸게 팔아서도 아니고, 바쁜 금요일 오전에도 계산 착오가 없어서도 아니고, 실수를 저지르지 않아서도 아니다.그것은 아버지와 점원 두 사람이 일하고 있던 이 자그마한 생선가게가 물 좋은 생선을 알맞은 가격에 웃음 띤 얼굴로 판매하는 깨끗하고 정직한 가게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선을 사고 팔 때 느껴지는 웃음과 즐거움과 기쁨의 분위기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해 주기 때문이었다.”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선교사역은 꼭 거창한 종교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들 속에서 은혜로 사는 이들의 밝은 모습들이 이 사회의 도처에 점증되어 확산되어 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잠의 신학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평범한 일들을 하며 보낸다.이 평범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임재를 증거하도록 부름 받았다.그러므로 우리는 평범 속에서 신비를, 거룩함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윌리암 흄(William Hulme)의 말처럼, 우리는 평범한 것으로부터 도피할 것이 아니라 ‘평범을 세례’(baptism of common)해야 할 것이다.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작고 비천한 일들이 성스러운 것, 존귀한 것으로서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그러나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과가 이런 기대와 감각을 무디게 하며, 일상의 일에 별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성속의 이원론을 원리상 배격하는 교회의 가르침마저 은연중에 삶의 영적차원과 초월성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세속을 떠나 종교적 영역으로 도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기독교 신앙을 구체적으로 일상의 평범한 일들과 연결시키지 못하며 그 속에 담긴 영적인 가치와 의미를 밝혀 주지 못한다.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설교의 위기는 현대판 도세티즘(Docetism)에 빠진 것이라고 했다.설교자가 마치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그의 메시지가 청중이 처해있는 실제상황에 전혀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는 이것이 또한 기존 신학의 문제라고 지적한다.신학과 삶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신학이 삶의 정황과 유리된 채 학문적 주제로만 논해짐으로써 구체적 현실상황에 적용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그는 베일리(John Baillie)가 주창한 “잠의 신학(Theology of Sleep)”을 상기시키면서, 모든 삶의 비즈니스(All the business of life)를 다루는 삶의 신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생의 삼분의 일 정도를 잠자는 시간으로 보내는데 왜 ‘잠의 신학’에 대한 논의가 없는가는 질문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안겨준다.특별히 우리의 신학이 삶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일상의 영성계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학이 삶의 신학으로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숭고한 상아탑에서 내려와 속세의 진흙탕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신학으로의 성육화가 필요하다.자질구레한 일을 위한 성령충만더불어 성령의 은혜를 성스럽고 종교적인 일과 주로 결부시켜 이해하는 성령론적 이원론에서 탈피해야 한다.성령충만은 선교나 전도와 같은 특별한 임무 수행을 위한 은혜만이 아니다.사도행전에서 성령충만이 주로 복음전파와 관련된 것은 사도행전이 쓰인 특별한 목적 때문이다.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일차적인 관심은 어떻게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넘어서 이방에까지 전파되었는가를 밝히는데 있었다.누가가 자주 성령을 언급한 것은 이렇게 복음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령이 어떻게 제자들과 교회를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복음이 확산되는 중요한 단계마다,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새로운 전환점마다.성령의 주권적인 역사가 개입했음을 밝히기 위해 성령충만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충만(핌프레미)이라는 동사가 주로 아오리스트 헬라 시제로 사용된 것은 과거의 특별한 사건 속에 성령이 주권적으로 역사했음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이런 누가의 의도에 착안하지 않고 성령충만을 복음전파와만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요즈음 통상적으로 성령충만을 특별한 충만과 일반적 충만, 또는 내적 충만과 외적 충만, 성화를 위한 충만과 사역을 위한 충만으로 나누는데 이렇게 구분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필자의 다른 논문에서 지적했듯이(“성령충만의 의미”, 개혁신학과 교회, 고려신학대학원, 2001), 헬라 단어가 쓰인 용례에 따라 성령 충만을 두 종류 또는 세 종류로 나누는 것은 무리가 있다.이런 구분은 성화와 사역을 이원화하여 결국 열매와 단절된 은사 활용, 윤리와 카리스마의 괴리를 부추긴다.특별한 충만에 대한 강조는 일상의 작은 일들 속에서 성령충만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한다.또한 그런 성령충만을 특별한 사역자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평신도들은 자신들에게는 그다지 절박하게 필요한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성령충만을 두 종류로 나누는 것보다 단일한 성령충만이 우리의 삶과 사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견해이다.성령이 우리를 항상 인도하고 충만케 하셔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런 저런 형태로 우리를 돕고 강건케 하신다.우리 삶은 작은 일들의 연속이다.우리 삶 속에 특별하게 큰일들은 별로 많지 않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영적 어려움은 일상의 삶 속에서 쌓이는 스트레스에서 기인된다.우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잡다한 일거리들 속에 파묻혀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공허함과 무료함 속에 쉽게 지치고 피곤해진다.우리는 특별한 사역을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지만 작은 일을 하는 데는 은혜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그러나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과 임재가 필요하다.챔버스의 말처럼, 우리가 가장 비천한 일을 올바르게 행하기 위해서도 우리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요한다.매일의 단조로운 일과 속에서도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느끼며 하늘의 평강과 영감을 받는 초월의 순간을 체험하며, 스트레스가 쌓이는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전능자의 나래 아래서만 가능하다.우리는 작은 일 뿐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때에도 성령충만이 필요하다.우리는 쉴 때에 삶의 자세가 흐트러져 죄에 빠지기 쉽다.다윗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시간이 가장 유혹을 받기 쉬운 때이다.토저는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방법은 자유로운 때에 자신이 주로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체크해 보는 것이라고 했다.월요일 아침의 강단챨스 스윈돌(Charles Swindoll) 목사는 교인들에게 월요일 아침에 세상 속에 세워진 강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목사는 주일 아침에 교회 안에 세워진 강단에 올라가 복음을 전하나 교인들은 월요일 아침에 세상 속에 세워진 강단에서 그들의 삶과 인격으로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이다.이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인가?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냉혹하고 비정한 경쟁사회, 구조적 부조리와 모순이 가득한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자체가 힘든 일이다.이 살벌한 세상의 정글에서 빛 된 선교사역을 수행하는 것은 아프리카 정글에서 선교하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그러기에 교회가 이 사역을 포기하고 거대한 세속의 세력 앞에 굴복하고 있다.그러나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부활의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이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하늘의 생명력이 주어진다.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대한 돌풍과 같이 세상 속에 성령의 새바람을 일으켜 이 시대의 풍향을 바꾸어 놓고, 세상 속에서 불꽃같이 타오르므로 세속을 변혁시키는 신적인 에너지와 빛을 발산한다.성령충만한 이들의 모습에는 죄악의 어두움을 밝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섬광이 번뜩인다.성령충만한 이들의 삶과 인격은 세상을 감화시키는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설교이다.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주일의 강단뿐만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의 강단이 되살아나야 한다.그 강단에 권능이 회복되어야 한다.스펄젼(Spurgeon)목사는 메트로폴리탄 장막교회에 높이 세워진 강단의 계단을 오르면서 성령이 함께하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계속 성령의 도움을 구했다고 한다.이와 같이 월요일 아침에 세상 속에 세워진 강단에 오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박영돈교수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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