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데오닷컴이 위르겐 몰트만을 기사화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람데오닷컴이 위르겐 몰트만을 기사화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의문스럽습니다.
어쩌 코닷이 이런 기사를 다 낼까요???
(자료출처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6586)몰트만, 기독교적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이다.위르겐 몰트만 내한, 서초교회에서 “희망의 하나님과 우리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승인 2013.10.04 07:42:11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 박사(독일 튀빙엔대학교 석좌교수)가 내한하여 강연을 했다. 제목은 “희망의 하나님과 우리의 미래.” 10월 1일(화)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와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가 주관한 국민일보 창간 25주년,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개교 8주년 기념 컨퍼런스 “참된 희망 우리의 미래”가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소재 서초교회에서 열렸다. 이 컨퍼런스에서는 몰트만 교수 외에도 은준관 목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자, 명예총장)가 “세상에 희망을 여는 공동체”, 임영수 목사(모새골 공동체 담임 목사)가 “모새골의 미래와 희망”,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가 “교회, 한국사회의 희망이 되어라”, 서우경 교수(서우경코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코칭아카데미 책임교수)가 “성도여, 희망을 코칭하라”, 최윤식 교수(미래학자, 한국뉴욕주립대 교수)가 “10년 후, 한국교회 희망을 찾으라”, 김두현 소장(21C 목회연구소 소장)이 “목회자, 희망을 제시하라"라는 제목으로 각각 강연하였다.희망의 하나님과 우리의 미래몰트만 박사 강연의 대략은 이렇다.▲ “기독교적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부활의 현존 안에서 미래에 그 단단한 닻을 내리고 있다.” 강의하는 몰트만 박사초월적 신은 이미 많은 종교에 알려져 있지만 희망의 하나님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전해 준 성경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온전하고 완전한, 확실한 희망이다. 앞으로 향하는 것이자 오고 있는 것에 대한 기대 속에 사는 삶인 것이다. 즉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사는 것”이며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자신을 펼치는 것”이다.하지만 기독교의 종말론은 아마겟돈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묵시론적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종말은 오히려 “참 생명의 시작, 하나님 나라의 시작, 모든 피조물이 그 영원한 모습으로서 새롭게 창조되는 시작”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희망이 원천이자 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부활의 빛 안에서 미래 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희망”도 존재한다.이러한 기독교적 희망은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가난한 자와 병자와 아이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역사를 기억한다. “기독교적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부활의 현존 안에서 미래에 그 단단한 닻을 내리고 있다.” 이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회장은 “개인 생애의 미래와 민족의 미래와 세계사의 미래와 자연사의 미래” 안에 넓은 지평을 열어 준다.이 희망은 현재의 고난과 실망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고난의 상황 속에서 “십자가의 그늘이 우리에게 드리울” 때, 이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계를 견디기 시작한다. 그리고 희망을 가진 생명은 “선으로 악을 이겨”낸다(롬 12:20). 우리는 우리 백성들의 “사회적, 정치적 생활에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관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이기주의, 타자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정신을 깨우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에 참여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를 완전하게 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인 각자는 늘 “새로운 것을 시작한 상태”에 있다. 이 한 걸음 안에 완성이 있다.죄의 원천은 교만 뿐만 아니라 “타성에 젖은 심장, 슬픔 어린 자각, 용기 잃은 의지”에도 있다. 이는 “유혹에 빠진 무기력함”이다. 우리는 현실에 회의하지만 그 회의하는 현실 속에 희망이 있다. 즉, 희망의 이유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공상이나 탐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여기에서 오늘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에 있다.이와 같은 내용들을 강연하고 난 몰트만 박사는 “숨쉬는 한 희망한다.” 라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지었다.
▲ 컨퍼런스가 진행되고 있다.희망의 신학, 오해하지 말아야몰트만 박사는 한국의 개혁신학 진영에서는 계시관, 구원관의 차이로 인해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희망의 신학”이 교회와 사회 현실에 유의미한 음성을 낼 만한 여지는 많다. 복음을 믿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감내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은 신앙의 중요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매우 밝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매우 변혁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강연에서도 드러났듯이 현실 속에서 가지는 희망은 매우 급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희망은 단순한 “긍정신학” 내지는 “번영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몰트만 박사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와 평화를 선언한다는 점에서 “공공신학" 내지는 “정치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일각에서는 몰트만 박사가 내한하여 보이는 행보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있다. 자신의 신학적 용어인 “희망"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을 수용하든지 말든지 간에, 그가 말하는 “희망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코닷에 위르겐 몰트만의 위험성을 말해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자료출처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6586)몰트만은 희망을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앙적인 기대”라고 말했습니다.(Juergen Moltmann, Theology of Hope, (New York: Harper & Row, 1967), 16.) 이런 면에서 몰트만의 신학은 표면적으로는 신선해 보이나, 희망의 신학의 인식론적 전제가 특별계시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Moltmann, 희망의 신학, 138.) 몰트만의 희망은 공산주의 철학자 블로흐의 사상에 근거하여, 세상 사람들이 말하(2013-10-04 16:03:02)는 인간소외와 경제적 착취가 없는 평화의 공동체 건설하는 것이 그의 희망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몰트만은 성경을 하나님의 희망찬 종말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Moltmann, 희망의 신학, 15.) 즉, 로고스의 차원으로 이해하기보다, 실재적인 역사 속에서의 언어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 예수님도 인간 실존에 역사하실 때 존재가 증명된다고 말합니다. 조심해야 할 신학자입니다.(2013-10-04 1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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